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일반] 리뷰) 이지란의 시, 조영규의 이름, 정도전의 기록, 이방원의 정치(2)

나무(112.154) 2016.01.24 10:00:01
조회 1780 추천 54 댓글 21

아이고, 리뷰 2편을 일주일이나 지나서 올릴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또 아이고, 일주일이나 지나서 올리려니...... 리뷰 방향이 싹 바뀌었네. (응?)

지난주에 쓰려던 내용과 지금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ㅠㅠ


하하, 아이고 참...... 변명을 하자면,

주말에 바빠서 리뷰를 쓰다 말았는데, 그사이 덜컥 월요일이 와서 육룡 31, 32회를 보게 되었다지.

그랬더니 쓰던 리뷰가 완전히 삭은(;;) 리뷰가 되더라고. 뭔가 흐름도 안 맞고.

그래서 과감히 버리고 새로 쓰고 말았어.


으흑, 그래도 아까우니 버린 리뷰를 간단히 복습(?)하자면,

도화전에서 소원을 말할 때 태평성대에는 책을 쓰겠다는 삼봉의 말에 이방원의 표정이 참 묘해 보였거든.

전혀 생각지 못한 답변이라는 듯, 이름 대신 왜 책이냐는 듯, 태평성대가 어찌 온다고 한가한 소리냐는 듯.

나중에 무휼에게도 이렇게 말하잖아.


“(태평성대는) 안 와. 그래서 정치는 영원히 필요한 거야.”


그래서 태평성대가 오면 모든 권력을 다 내려놓고 책을 쓰겠다는 정도전의 꿈과,

태평성대는 절대 오지 않으니 자기 손으로 그걸 만들어 보겠다는 이방원의 꿈을,

정도전의 책(<삼봉집>)과 이방원의 정치(<태종실록>)를 통해 살펴볼 생각이었어.


그래서 제목도 이렇게 잡았더랬지.


3)정도전의 기록 - 태평성대가 온다면, 마음껏 책을 쓰겠소.

4)이방원의 정치 - 태평성대는 오지 않으니, 정치를 하겠소!


그런데 31, 32회를 보고 나니 굳이 저런 비교가 큰 의미가 없겠더라고.

드라마가 진행된 만큼 리뷰도 함께 진행이 되어야 맥락에도 맞고. 

갤질은 타이밍이라더니, 리뷰도 타이밍...... ㅠㅠ


그래서 새로 제목을 잡았어.


3) 정도전의 정치 - 빼앗은 자에게서 빼앗긴 자에게로

4) 이방원의 정치 - 나와 벌레와 셰익스피어


하하. 리뷰 늦어서 미안하고, 늘 그렇듯 너무너무 긴 리뷰이고,

2편인 듯, 2편 아닌, 2편 같은 리뷰지만, 

그래도 끝까지 읽어 준다면, 내 사랑을 받으시오. (훗! >.<;;;)







3) 정도전의 정치 - 빼앗은 자에게서 빼앗긴 자에게로


솔직히 30, 31, 그리고 32회 중반까지의 정도전은...... 한숨이 좀 나왔어.

조선의 거의 모든 체제를 설계한 이 대단한 지략가요 사상가가 어찌나 맹하게 나오던지.


뻔히 드러나는 이방원의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포은에게 말한 오칙(五則, 다섯 가지 규칙)도 정작 중요한 것은 제대로 짚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아닌 포은이 재상이 돼야 한다며 무릎까지 꿇고(왜?!) 하는 속말이 이해가 안 됐어.


“저는 이미 너무 많은 모략과 술수를 부렸습니다. 

유자(儒者)로서...... 흠이 너무 많습니다.”


하아, 우리 삼봉, 그런 인물 아닙니다. ㅠㅠ

자신이 꿈꾸고 자신이 설계한 나라에 정작 자신은 흠이 너무 많아서 앞장설 수가 없다니.

그동안 “내 안에도 벌레가 자라기 시작했구나” 하며 끝없이 벌레(쉬운 길)와 정도(바른 길) 사이에서 갈등하고,

해법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성계를 독려하던 삼봉은 다 어디로 가고 모략가에 협잡꾼이라 안 된다니.

(심지어 이방원에게는 “고귀한 사심”을 가졌다고 은근히 비웃음까지 당했는데!)


정말이지 이토록 순진한 정도전과 이토록 음흉한 정몽주라니, 내 정말 처음 봤어.

삼봉의 나라가 너무나 완벽해 설득은 불가능하다면서 싸늘하게 돌아서는 정몽주는 차라리 신선했어.

하지만 포은의 위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마냥 기뻐하는 소녀감성 삼봉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됐.... (;;)


게다가 오칙! 으아, 솔직히 이 오칙에 대해 할 말이 무진장 많은데 리뷰가 길어지니 생략!

......은 아니고(하하), 드라마에서 무명이 오칙에 관심이 많다고 나오니 분명 다음에 얘기할 날이 있을 듯.

그때 몰아서 이야기할게. (이 오칙 때문에 삼봉 비난글이 많던데, 내가 다 해명할 거지비! 불끈!)


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지만 32회 후반부의 삼봉은 좋았어. (>.<)

그 이상한 성화봉송(;;)과 악당 끝판왕 같은 웃음은 좀 오글거렸지만,

토지대장을 태우는 장면에서 왠지 울컥,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확실히 느껴졌으니까. (이래야 삼봉답지!)


그 결정을 위해 삼봉이 젊은 삼룡에게 차례차례 의견을 듣는 것도 좋았어.

땅새와, 분이, 그리고 이방원에게 차례차례.


“어떤 결정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결정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게 끝이 아니게 해 주세요. 외면하지 않으실 거고, 백성들을 잊지 않으실 거고, 그러면 뭐라도 하시겠지요.”

“모르......겠습니다.”


검객 땅새에게서 자기 결정에 대한 우직한 확신과 믿음을, 

백성 분이에게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야겠다는 추진력과 의지를,

그리고...... 폭두 이방원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방법과 방향을.

(모르겠다는 방원의 말에서 거꾸로 폭두 시절에 “일단 저지르고 본” 방원의 좌충우돌이 떠올랐을 테니까.)


그것이 개경 시내에서 토지대장을 훨훨 태우는 대담한 방화로 이어진 거지.

그리고 이 방화는, 드라마에서는 불법인 것처럼 그려졌지만 사실은 합법적인 절차였어.

2년에 걸친 양전 작업으로 새 전적이 마무리되자 “공사의 구 전적”은 시가에서 불태우기로 하니까.


그래서 개혁을 밀었던 이성계들과는 달리 개혁을 반대했던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지.

공양왕 2년 <동국통감>의 기록을 살펴볼까?



9월, 공사(公私)의 전적(田籍, 토지대장)을 저잣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이 여러 날 동안 타면서 꺼지지 않았다. 

왕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해 말하기를, 

“조종께서 물려주신 사전(私田)법이 과인 대에 갑자기 개혁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



저 갑자기 개혁된 토지법이 바로 ‘과전법’이야.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에게 나눠주는 ‘정전법’보다는 한 단계 낮은 토지제도지만,

적어도 귀족이 침탈한 땅을 백성에게 돌려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토지 개혁이었지.


이 과전법의 실행으로 고려 왕실과 보수파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단숨에 무너지고 말아.

결국 과전법이 실행된 다음해인 1392년 7월, 고려는...... 멸망하지.

그리고 과전법은 새로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질서가 되는 거고.


하하. 그러니까 저 저잣거리에서 탄 것은 그냥 단순한 토지대장이 아니야.

묵은 고려의 토지제도가 탄 것이고, 묵은 고려 귀족들의 기득권이 탄 것이고,

너무 묵어서 썩어 버린 고려 왕조의 온갖 폐해가 함께 타 버린 것이지.


그래서 삼봉의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어.


“정치가 무엇이요? 

정치란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단순한 것이오. 정치란...... 나눔이요, 분배요! 

결국 누구에게 걷어서 누구에게 주느냐. 누구에게서 빼앗아 누구를 채워 주는가 하는.

밀직부사, 나 정도전, 지금부터 정치를 하겠소!”


그래, 그것이 삼봉의 정치야.

지극히 공평한 나눔과 분배. 빼앗은 자에게 걷어서 빼앗긴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

그래서 백성들을 웃게 하는 것. 백성들의 밥을 챙겨 주는 것.


임금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고, 

백성은 밥을 하늘처럼 여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동시에...... 임금의 하늘이다. (<조선경국전>에서)


그리고 삼봉이 바라는 저 평등한 이상 정치는,

필연적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 이방원과 갈라서는 비극을 부르지.






4) 이방원의 정치 - 나와 벌레와 셰익스피어


도화전에서 소원을 말할 때 이방원이 소년처럼 쑥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하지.


“세상 사람들 웃게 하는 거, 그리고 너희들 꿈 다 지키는 거.”

“어떻게요?”

“정치. 꿈을 지키고 세상 사람들 웃게 하는 정치.”


그래, 그것이 이방원의 꿈이야. 이방원의 진심이고, 평생의 소원이야.

다만 한 가지, 저 말에는 딱 한 단어가 생략되어 있어.

바로 ‘나’. 다름 아닌 나. 내가.


“(내가) 사람들 웃게 하는 거. (내가) 너희들 꿈 지키는 거.”


저기서 ‘내가’가 빠진 세상은 방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아무리 태평성대라도 자기가 빠진 세상이라니,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평화라니.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무력한 세상을 이방원은 절대 견딜 수 없지.


그래서 삼봉은 태평성대가 오면 얼마든지 한가롭게 책을 쓸 수 있지만,

(삼봉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거든. 

그들, 곧 백성들이 행복하다면 굳이 자신이 그 행복을 만들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보니까.)

하지만 방원은 절대 그럴 수 없지. (그래서 태평성대에 책을 쓰겠다는 삼봉을 그리 묘한 눈빛으로 본 걸지도.)


문제는 방원에게 멋진 정치를 할 만한 능력과 자질이 넘친다는 거야.

이미 삼봉도 충분히 인정했고. 그런데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한 바로 그 스승이,

왕족이라는 족쇄에 꽁꽁 묶어 두겠다니, 아마 방원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겠지.


그래서일까, 절망하는 방원의 모습에서 불현듯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이 떠올랐어.

뛰어난 용맹에, 지닌 재주와 능력은 차고 넘치지만, 운명에 의해 평생 2인자로 낙인찍힌 자들.

그래서 끝없이 정상을 탐내다가 결국 그 거대한 욕망에 삼켜져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반(反)영웅들.

이를테면 <맥베드>의 맥베드나, <리어왕>의 에드몬드나, <리처드 3세>의 글로스터 같은.


<리어왕>의 에드몬드는 탁월한 능력과 재주를 지녔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모든 권력에서 제외되지.

그 울분을 이렇게 토로해.



“자연이여, 그대만이 나의 여신이다. 

나는 이제껏 그대들이 만든 길을 따라 여기에 왔다.

그런데 왜! 세상 관습에 희생이 되고, 하찮은 세상의 소리에 구속 받아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내 것을 강탈하는 까다로운 국법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내 육체는 균형 잡혀 있고 당당하며, 마음은 신사처럼 우아하고 고상하다.

그런데 왜! 서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인가. 어째서 천하고, 또 천하다 하는가!”



저 대사에서 서자를 ‘왕족’으로 바꾸면 아마 이방원의 울분과 비슷할 듯.

누구보다 뛰어나고 당당한데 단지 서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박탈당한 에드몬드와,

단지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정치 활동을 빼앗겨야 하는, 꿈을 잃은 이방원이.


그리고 이럴 때,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모든 것을 박탈당할 때,

사람의 마음속을 파고들고 살살 부추겨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벌레가 있지.

바로, 욕망이라는 벌레.


“맥베드여, 장차 국왕이 되실 이여, 만세!”


춥고 거친 황무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녀들에게서 저 예언을 듣는 순간,

고결하고 용맹한 장군 맥베드의 가슴속에도 욕망이 싹트지.

아니, 평생 2인자에 머무르며 숨겨져 있던 단 하나의 욕망, 최고의 자리(왕위)를 향한 

뜨거운 욕구와 야심이 드디어 독이빨을 드러내고 맥베드를 거침없이 물어뜯는 거야.


“왕위를 건 장대한 연극의 서막이다!”


결국 그 욕망에 굴복한 맥베드는 피를 토하듯 외치고,

끝이 예정되어 있는 처절한 비극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하지만 그 비극조차 사실은 자신이 선택한 거야. 마치 방원이 그러했듯.


“야, 너 똑바로 안 해?

벌레에게 나를 토해내라고 해야지, 나한테 벌레를 토해내라고 하면 어떡해.”


그래서 언젠가 방원이 분이에게 했던 말은 (마치 마녀의 예언처럼) 그대로 사실이 되지. 

벌레와 싸우다 벌레에게 먹힌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벌레(욕망)를 선택하고 먹은 것.

그러니 벌레가 방원을 토하는 것이 아니라 방원이 벌레를 토하는 게 맞는 거야.

(물론 저때는 자신이 벌레에게 먹힐지언정 자신이 벌레를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그리고 벌레에게 ‘먹힌’ 게 아니라 벌레를 ‘먹은’ 순간, 

이제 모든 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 버려. ......어쩌겠어. 

그것이 이방원인데. 자신이 빠진 ‘남들만의 태평성대’를 결코 견딜 수 없는 게.


<리처드 3세>의 왕족 글로스터는 절름발이에 꼽추야.

아무리 그 안에 엄청난 자질과 언변과 지략을 가졌다 해도 비틀리고 못생긴 육체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지.

그래서 모두가 바라는 태평성대가 왔어도, 오히려 글로스터의 마음속에는 음습한 절망감만 가득해.



“음울한 겨울이 가고 찬란한 여름이 왔다.

이제 우리의 이마에는 화환이 장식되고, 상처투성이 갑옷은 벽에 걸린 기념품이 되겠지.

나약한 피리 소리 들리는 태평성대. 그런데 나는...... 살아가는 낙이 없다.

절름발이에, 등에는 굵어진 척추 뼈에 산을 하나 얹어 놓았으니 태평성대가 무슨 소용이랴.

기껏 햇빛에 비친 내 그림자나 보며 그 흉측한 모습을 장단 삼아 노래라도 불러 볼까?”



그러나 그렇게 자조하며 주저앉기에는 글로스터의 들끓는 야망이 절대 그를 놓아주지 않지.

이방원이 고귀하지만 무력한 왕족이 되어 평생을 재미없게 사는 것을 절대 견딜 수 없듯이.

그럴 때 선택은 단 하나야.



“내가 이 평화로운 날들을 즐기지 못할 바에야...... 

나는 기꺼이 악당이 되겠다!

그래서 오늘날 이 헛된 쾌락을 얼마든지 증오해 주겠다.”

“내 머리 위에 왕관이 놓이기까지! 이 세상은 지옥인 것이다!”



결국 글로스터는 저 지옥 같은 욕망에 활활 타올라 무시무시한 피의 질주를 시작해.

그래서 마침내 꼽추 글로스터 공작에서 고귀한 왕 ‘리처드 3세’가 될 때까지.

그러기 위해서 글로스터는, 아니, 리처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피의 제물로 바쳐 버리지.


이방원도 마찬가지.

삼봉이 꿈꾸는 나라에 자신의 자리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순간,

무시무시하게 번뇌하고, 절망하고, 절절하게 앓고 난 뒤에 마침내 방원은 결심하지. 

그 어떤 제물을 바치더라도 자신의 자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 내 자리가 없다고? 아니, 여긴 온통 내 자리야.”


그러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 결별해야 할 모든 것들의 가장 큰 상징이 바로 분이지.

그래서 분이를 불러내 아이처럼 실컷 눈싸움을 하고, 마지막인 양 햇살처럼 밝게 웃어도 보고,

할 수 있는 모든 치기를 다 부려 본 뒤에, 마침내 이방원은 선언하지.


“분아, 이제..... 놀이는 끝났다.”


그러니 더는 내 이름 부르지 마! 더는 내게 반말 하지 마!

네가 그러면 힘들 것 같다고, 약해질 것 같다고 속으로만 절규하면서 이를 악물지.

그러다 문득 분이의 한마디에 무너져 내려.


“생생지락(生生之樂).

백성들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즐거움 느낄 수 있게, 그런 좋은 정치 해 주세요.”


공손한 존댓말로 웃으면서(사실은 울면서) 하는 분이의 그 한마디에 펑펑 울음을 터뜨리지.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시는 찬란했던 그 소년 시절, 그 순수함, 그 열정, 그 눈부신 첫사랑의 희열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펑펑 우는 이방원이 진심으로 안쓰러웠어. 

그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알고 있으니까. 맥베드는 이렇게 탄식하지.



“내 삶은 이제 퇴락해 메마른 잎새와도 같다.

노년의 벗이 될 명예, 사랑, 순종, 친구들...... 

그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뿌리 깊은 저주만이 남았구나.”



셰익스피어의 반영웅들, 곧 맥베드나, 에드몬드나, 글로스터와는 달리

역사에서 이방원은 왕위에 올라도 죽지 않고 자신의 꿈대로 태평성대를 차곡차곡 이뤄 나가. 

그렇다고 그 뿌리 깊은 저주가...... 방원을 비켜갔을까?


왕이 되기 위해서 방원이 바쳤을 무수히 많은 것들, 그것들은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피를 나눈 형제와, 사랑하는 연인과, 뜻을 나누었던 친구들과,

그리고 꿈을 함께하고자 했던 스승과......


“나는 저 사내가, 저 사내가...... 여전히 좋다, 빌어먹을.”


저 한 줄의 대사에 삼봉을 향한 방원의 온갖 애증이 다 들어 있지.


저 사내가, (이제는 스승이 아니라 적이기에 저 ‘사내’라고 비하해 부르는 저 사내가,)

여전히 좋다. (여전히 생생하게 보여 주는 저 꿈과 현실의 뜨거운 광시곡이 미칠 듯이 좋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내 꿈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당신은 여전히 쳐부숴야 할 적이다. 빌어먹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맥베드가 왕을 죽이고자 결심하는 순간 ‘블러드(Blood) 맥베드’가 되었듯이,

이방원 또한 자기 꿈을 위해 스승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는 순간, ‘킬(Kill)방원’이 되지.

설혹 그 끝에 짧은 촛불처럼 빌어먹을 허무와 분노만이 남게 될지라도.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 동안 무대에서 흥이 나 덩실거리지만 얼마 안 가서 잊혀지는 처량한 배우일 뿐.

바보들이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움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결국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아!”



그러니 꺼져라, 짧은 내 사랑아.

미치도록 아름다운 내 청춘아.

여전히 빌어먹게도 좋은 저 사내, 내 스승님아. 꺼져라, 꺼져!!!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주인공들의 결말을 지극히 냉정하게 그려.

연민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듯, 당연히 세상은 바른 질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듯.

하지만 죽을 때까지 결코 꺾이지 않고, 무릎 꿇지 않은 채,


“이 세계의 질서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으면 좋겠다.

경종을 울려라! 바람아, 불어라! 파멸아, 오너라! 

내 결코 기다리고만 있지 않겠다!”


불꽃처럼 외치는 저 반영웅들에게 어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었겠어.


그러므로 육룡의 반영웅 이방원 또한 마찬가지.

그가 앞으로 걸어갈 찐득찐득한 피의 길을 옳다고, 바른 질서라고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이루려 했던 꿈만은 진실로 소중했음을 기억해 줘야 할 것 같아.


“생생지락(生生之樂).

백성들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그런 좋은 정치 해 주세요.”


아마도 이방원의 정치는 그런 것.

돌이킬 수 없는 피의 길을 갔지만 적어도 그 끝에 생생지락,

자신이 버린 연인과 벗과 스승이 꿈꾸었던 태평성대가 뜨거운 낙인처럼 남아 있는 것. 

그리하여 그 낙인을 평생 짊어지고 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방원의 정치겠지.


그리고 그것이 바로......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太宗) 이방원이야.




















PS.


1.

아이고, 어쩌다 보니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튀어나왔는데, 괜찮은겨?

덕분에 리뷰가 무진장 길어졌네. ㅠㅠ


그나저나 리뷰 쓰느라 오랜만에 셰익스피어 희곡집을 꺼내 다시 읽는데, 우와, 대사가~.

정말 읽으면서 황홀해지는 이 유려하고, 장중하고, 깊이 있고, 섹시한(응?) 대사를 어찌할꼬.

가령 하륜이 방원에게 몸을 사리라며 해 주는 이런 대사 말이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은인자중하고 계시게. 

힘을 키울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일세.

지금은 무조건 깍듯하고 공손하게 죽어 있으라고.”


이걸 셰익스피어 버전으로 바꿔 보면 이렇게 될 거야.


“세상을 속이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세요. 

당신의 눈동자와 손과 혀에 부드러운 반가움을 담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순결한 꽃처럼 보이게 하되, 그 꽃 아래 숨은 뱀이 되는 겁니다.”


으흑, 순결한 꽃처럼 보이되 그 아래 숨은 뱀이 되라니.

언제 한번 육룡 인물과 셰익스피어 비교 특집이라도 쓰고 싶다는. (꺼져!)

(참고로 저 대사는 맥베드보다도 더 용감한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드’의 대사야. ^^)



2.

늘 그렇지만 이 길~~~디긴 리뷰를 끝까지 읽어 주는 그대들, 참으로 고맙소.

남겨 주는 댓글도 모두 소중하게 잘 보고 있어.

모두 행복한 밤 되기를~. ^^




출처: 육룡이 나르샤 갤러리 [원본 보기]

추천 비추천

54

고정닉 0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말머리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2861 설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갑 절대 안 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20 - -
246728 일반 [A갤] [ㅇㅎ] 청순 스미레 그라비아 [424] ㅇ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88012 312
246727 엔터 [브갤] 용감한 형제가 5년전부터 하던일 [484] o.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53294 1155
246726 엔터 [히갤] 브리라슨이 호감이고 크리스햄스워스는 개새끼인 이유 [357] ㅇㅇ(121.173) 21.04.13 113880 876
246724 일반 [연갤] [ㅇㅎ] 간지럼에 가장 약한 그라비아 아이돌 [183] ㅇㅇ(118.130) 21.04.13 155262 211
246723 일반 [파갤] 한국여자들이 근육을 싫어하는것에 대한 기저 [902] ㅇㅇ(210.217) 21.04.13 160446 790
246722 시사 [야갤] 오세훈 업적 2. jpg [808] ㅇㅇㅇ(220.71) 21.04.13 178323 3672
246721 게임 [중갤] 몇몇 게임회사 이름의 유래 [220] 글레이시아뷰지똥꼬야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32637 360
246720 일반 [주갤] 마신거 [93] 정인오락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81462 61
246719 시사 [야갤] 깜짝... 갈데까지 가버린 서울시 시민단체 근황 .jpg [786] 블핑지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53691 2369
246718 엔터 [야갤] 김딱딱 논란 어이없는 점 (feat. 페미민국) [772] ㅇㅇ(203.229) 21.04.13 154361 2953
246717 일반 [겨갤] [ㅇㅎ] ㄹㅇ 역대급 [144] dd(118.235) 21.04.13 148990 184
246716 일반 [자갤] M235i산 게이다..1개월탄 후기 써봄(3줄요약 있음) [166] 깡촌빌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73289 174
246715 일반 [중갤] 3살 체스 신동... 인생 최대 난관....jpg [410]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30371 865
246714 일반 [중갤] 17금) 의외로 겜잘알인 누나... jpg [330] 케넨천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90757 590
246713 일반 [여갤] (전) 세러데이.. 초희.. ㄹ황.. [84] ㅇㅇ(223.62) 21.04.13 100059 155
246712 시사 [주갤] 해운대 9.5억 뛴 신고가에 부산이 화들짝…매수자는 중국인 [208] ㅇㅇ(119.204) 21.04.13 79551 654
246711 스포츠 [해갤] 해버지 현역시절 슈팅스페셜.gif [233] 곰보왕박지성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71964 295
246710 일반 [일갤] [ㅇㅎ] 타츠야 마키호 그라비아 발매 [37] ㅇㅇ(223.38) 21.04.13 79626 75
246709 시사 [야갤] 진중권...레전드 ㄹㅇ...JPG [984] 아츄아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27190 1599
246707 FUN [중갤] 여초 사이트에서 말하는 포지션별 롤하는 남자.jpg [562]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37621 612
246706 일반 [중갤] 여왕벌 소신발언 레전드.jpg [317]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30685 1281
246705 일반 [야갤] 야붕이 pc방 사장님이랑 싸웠다 .jpg [1492] 블핑지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88982 3075
246704 시사 [싱갤] 안싱글벙글 핵융합 기술 [370] 건전여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70801 543
246703 일반 [싱갤] 싱글벙글 휠체어 전도.gif [153] ㅇㅇ(39.7) 21.04.13 73746 359
246702 일반 [싱갤] 싱글벙글 한남 고등학교 [128] 에이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93006 390
246701 일반 [싱갤] 싱글벙글 리얼돌카페 [179] ㅇㅇ(59.20) 21.04.13 102714 282
246700 FUN [싱갤] 싱글벙글 람보르기니.gif [182] ㅇㅇ(39.7) 21.04.13 83151 261
246699 일반 [코갤] 슈카월드 라이브... 2030세대의 분노.jpg [399] ㅇㅇ(223.62) 21.04.13 81044 709
246698 일반 [야갤] 삭재업)여경 기동대 폭로 신작.blind [1243] ㅇㅇ(175.125) 21.04.13 115572 2253
246697 일반 [싱갤] 꼴릿꼴릿 가능촌 [109] 으규으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26538 694
246696 일반 [야갤] 경희대.. 에타근황ㄹㅇ....jpg [443] ㅇㅇ(58.140) 21.04.13 129019 2153
246695 시사 [야갤] 30000vs1...잡히면 따먹힌다...추격전...JPG [959] ㅇㅇ(220.116) 21.04.13 168183 1000
246694 일반 [주갤] 행동하는 주붕이 정의구현 하고 왔다 [91] 버번위스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46825 462
246693 일반 [새갤] 하태경 페북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147] ㅇㅇ(121.171) 21.04.13 53497 448
246692 일반 [토갤] 플레이스토어 110만원 해킹당한거 후기.jpg [155] K보스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66051 285
246691 스포츠 [해갤] 진짜 개미친새끼...gif [115] KB(112.148) 21.04.13 71990 218
246690 일반 [야갤] 운빨..만렙..1조..잭팟..동남아..누나..JPG [848] 튤립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21296 1131
246688 일반 [야갤] 공무원갤 논란....jpg [337] ㅇㅇ(210.178) 21.04.13 71685 272
246686 일반 [L갤] 네이트판 캡쳐 [98] ㅇㅇ(118.32) 21.04.13 59234 222
246685 일반 [육갤] 군대와 이 세계의 공통점 [137] ㅇㅇ(223.62) 21.04.13 75073 645
246684 일반 [식갤] 무화과 나무 잎으로 차 만들었습니다. [104] 식둥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39566 191
246683 일반 [기갤] 유노윤호랑 서예지 방송에서도 티냈었네ㅋㅋ [115] ㅇㅇ(211.36) 21.04.13 75576 139
246681 일반 [과빵] 시작하는 빵린이를 위하여(1. 무엇을 사야하나) [50] ㅇㅇ(223.38) 21.04.13 41554 86
246680 일반 [카연] (스압) 단편 비주류 사람 [272] 잇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45320 467
246679 일반 [야갤] 깜짝.. 윾승사자.. 또 떳다....JPG [341] 사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123408 1506
246678 일반 [한화] [ㅇㅎ]큰 가슴 [72] 거유(175.223) 21.04.13 97827 262
246677 스포츠 [한화] 코구부장 안경현 저격.jpg [52] oksus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4.13 39316 102
246676 일반 [야갤] 조련누나..자해 후.. 김정현 태도 변화...gif [149] ㅇㅇ(39.123) 21.04.13 75800 297
246675 FUN [유갤] 저번 주말...차박 성지들 근황...jpg [133] ㅇㅇ(1.230) 21.04.13 130220 175
246674 일반 [야갤] 여성만 혜택주는 서울시에 항의전화 함 [508] ㅇㅇ(211.33) 21.04.13 53465 1236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