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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남편, 아빠 그리고 아크다르-42

ㄱㅁㅅs(183.98) 2015.01.18 23:42:13
조회 491 추천 16 댓글 2

너무 양이 많아 개인통합링크를 만들었습니다.

개인통합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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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안에 반드시 주슬라이와 세니트로와의 무역을 재개하겠다는 각오와 함께 베트슈타인이 추운 아렌델을 떠난 후, 군비를 줄여야 한다는 몇 년째 계속되어온 쉴리의 말을 이번에도 건성으로 듣고 급히 회의를 끝낸 뒤 성으로 돌아왔다.

 

"의원은 뭐라던가?"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카이에게 묻자 저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차, 오늘 카이는 내가 회의하는 동안 계속 나와 있었지

 

계속 같이 있었지만 그걸 잊을 정도로 마음은 급했다. 마차에서 내리고 추운 바람을 뚫고 마음은 뛰었지만 또 그놈의 빌어먹을 체면 때문에 그저 급히 걷는 정도로 발을 움직였다.

 

"안나는 어떤가?"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던 왕립 의사 크리스에게 물었다. 이 사람도 엘사의 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 이번에 안나 공주님께서는 합병증을 앓고 계십니다. 독감, 천식..."

 

"위독한 건 아니겠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의사의 중요한 말인데도 그걸 끊고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예, 생명이 위독한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뭐?" 흰머리의 남자의 말을 또 끊었다.

 

"다만 이번에 처음 걸리시는 병이니 많이 고통스러울 것..."

 

"언제쯤 낫지?" 또다시 말을 끊었다.

 

"곧 나을 것입니다."

 

"곧 언제? 정확한 날짜를 말해!" 어쩌다 보니 죄 없는 의사에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안나 공주님께 달렸지요. 바로 내일 나으실 수도 있고 이번 겨울 내내 앓으실 수도, 물론제가끝까지책임지고병을고쳐드리겠습니다!"

 

4번째로 말을 끊으려 하자 크리스가 살짝 목소리를 높이고 말을 서둘렀다. 충분히 왕에게 무례한 태도와 목소리였지만 이둔과 결혼하기 전부터 아렌델 왕가의 병수발을 담당한 그는 지금 내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와의 급한 대화가 끝나고 바로 안나의 방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러다가 중간에 큰 딸 엘사가 복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니?" 안나의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서서 물었다.

 

"저..."

 

나를 향해 고개는 올렸지만 시선은 날 똑바로 보지 못한 채 큰딸이 말하다가 주저했다.

 

"왜?"

'급한데...'

 

"저..." 딸아이가 계속 주저했다. 마음은 답답한데.

 

'안되겠다'

"나중에 정리되면 다시 말하렴, 저녁은 평소처럼 시종들이 가져다 줄거야."

 

하고는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작은 딸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내와 환자가 있었다.

 

"압... 쿨럭! 쿨럭!... 히잉..."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안나의 목소리는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쿨럭! 쿨럭! 끄으... 으하아앙!"

 

기침을 수도 없이 하더니, 결국은 안나가 고통을 못 이기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어, 안나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어? 울지 마."

 

"엄마, 아빠, 나 아파요. 으하앙"

 

"어 그래, 지금 우리 안나가 아픈거 알아. 응? 그니까 울지 마."

 

침대에 누운 안나의 오른쪽에 의자 위에 앉아 안나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아주면서 이둔이 달랬다.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아아아앙!"

 

울고 있는 딸과 애써 달래주는 아내를 이둔 옆에 다른 의자에 앉아 보는 내 심정은 슬프다기보단 짜증이 났다. 내가 제일 짜증 날 때가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때인데

 

지금이 딱 그때야, 빌어먹을! 짜증 나, 짜증 나!

 

나와 이둔 옆에서 계속 울다가 눈물범벅으로 자기 얼굴과 베개를 흠뻑 적신 안나는 지쳐서 기절하듯이 자버렸다. 정작 잘 때는 어찌나 편안한 표정으로 쌔근거리던지 이마 위의 물에 적신 수건만 아니었으면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그냥 잘 자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 회의 간 동안 계속 이랬어?" 나를 향해 등지고 여전히 안나의 오른손을 잡아주는 아내에게 물었다.

 

"...어"

 

음?

 

이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나 싶어서 얼굴을 확인할까 했지만 이러나저러나 이둔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애 저녁은 먹었어?"

 

"수프 몇 숟가락 먹더니 입맛 없다고 치워 달래."

 

... 그렇게 기운 넘치던 안나가 이렇게 아팠던 적이 없었다. 가끔 철없게 뛰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팔뼈가 뒤틀려도 그 순간에만 울었지, 붕대를 묶을 때만 해도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그에 비해 지금 안나의 표정은... 지금 당장은 잠들어서 평온하지만, 그리고 지금도 안나의 분명하던 빨간색 입술은 시든 식물처럼 쭈글한 보랏빛을 띄며, 아까까지만 해도 계속 울었다. 역시 병은 무시무시하다. 그렇게 밝던 애의 웃음을 앗아가다니.

 

"당신은 저녁 먹었어?" 아내에게 물었다.

 

"어, 당신은?" 아내의 목소리의 떠림이 조금 가셨다.

 

"나도, 너무 슬퍼하지 마, 그렇게 큰 병..."

 

"그치만 애가 이렇게 아파하잖아, 그럼 큰 병이지."

 

이둔이 내 말을 끊은 적은 별로 없는데...

 

이둔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림은 사라졌고 낮고 분명했다. 그만큼 어두웠고. 한동안 잠시 그러고 있었다. 이둔은 계속 안나의 오른손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그리고 분명히 이둔이 훌쩍거리는 소리도 중간중간에 이둔의 어깨너머로 들려왔다. 그러다가 내가 침묵을 깼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내가 물었다. 난 '눈 연습'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자야 했다.

 

"모르겠어... 당신은 엘사랑 나가지?"

 

"응"

 

"난 여기서 계속 돌볼 수도 있고... 침대로 돌아갈 수도 있고..."

 

벌써부터 이둔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너무 무리하진 마."

 

안나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양손을 왼손으로 잡는다기보다는 갖다 대고 말했다.

 

"괜히 당신까지 아파져."

 

"응..." 짧으면서도 긴 대답이 돌아왔다.

 

"난 가서 잘게."

 

"어..."

 

아무래도 이둔은 눈앞에 딸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대답하기 귀찮아 보였다.

 

의자에서 뒤돌아 안나의 방을 보는 순간 실내의 한 개의 방치고는 굉장히 넓은 풍경에 눈을 뺏겼다.

 

그러고 보니 안나의 방 안을 힐긋 본 적은 꽤 있는데 직접 안에 들어온 건 정말 오랜만이네...

 

안나의 방은 아무리 넓게 사는 왕족이라도 한 사람에게는 너무 넓은 방이었다. 왜냐하면... 이 방은 한때는 안나 혼자 쓰던 방이 아니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면 엘사의 방처럼 정면에 삼각형 창문이 흔치 않은 방문자를 환영했다. 지금 안나가 누워있는 안나의 침대는 문을 열었을 때 오른쪽 벽 중앙에 붙어있었고, 침대의 가까운 오른쪽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안나가 갖고 놀던, 혹은 갖고 노는 장난감들은 벽난로와 삼각형 창문이 속한 벽이 만나 생기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

 

장난감 중에 엘사 인형과 안나 인형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니 머리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전부 왼쪽으로 쏠린 것처럼 시선도 안나의 침대가 있는 오른쪽 벽의 반대편인 왼쪽 벽으로 옮겨갔다. 한때는 엘사의 침대가 있던 벽의 중앙은 안나가 공부하는 책상과 그 위에 여러 가지 종이와 물건들이 있었다. 그 양 옆의 벽 윗부분은 모든 방마다 있는 누가 그렸는지도 모르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오른쪽 그림 밑에는 책상위에 등불 말고도 책상을 비출 수 있는 벽걸이 등불이 걸려있었다. 동생처럼 방의 구석에 놓여 있던 엘사의 장난감이 있던 아담한 자리는 안나가 입을 십수 개의 형형색색 옷들을 담아두는 옷장이 벽에 기대는 자리가 되

 

"왜 계속 서 있어?"

 

그제야 알았다. 내가 아주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을.

 

"그..."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목소리가 떨려서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안나의 방이 이렇게 넓게 느껴질 줄은 몰랐네."

 

이번에는 이둔이 아예 대답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여 말없이 발을 떼며 눈을 움직였다.

 

"또각, 또각, 사박"

 

내 구두가 나무 바닥을 밟다가 방 중앙에 깔린 양탄자를 밟자 소리가 바뀌었다. 고개를 내려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가로 길이는 성인 남자 키보다 조금 컸고, 세로 길이는 가로 길이의 세 배쯤 되는 이 양탄자 위에서 사고 전의 엘사와 안나는 뒹굴거리며 서로 인형 놀이를 하곤 했다.

 

"양탄자가 꽤 더럽네"

 

이둔이 대답하든 말든 그냥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나도 이제 이둔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시종들에게 시켜서 청소하든가 새로운 걸 사야겠어."

 

말하면서 고개를 바닥에서 문쪽으로 다시 올렸다. 나가는 입장에서 보는 문의 왼쪽에는 책꽂이와 그 안을 반쯤 채운 책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가려다가 갑자기 안나의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이 궁금해 문이 아닌 책상으로 발을 돌렸다. 책상 위는 어질러져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게 배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등불, 잉크통, 깃펜, 뭔가 쓰여 있는 양피지와 텅 빈 양피지, 펼쳐져 있는 좀 짧은 소설, 그리고

 

오... 그림이네? 아주 가끔씩 내 그림을 그려주긴 했다만 별로 나 같진 않았지, 그래도 기특하네, 계속 그리고, 난 그림 몇 번 그리다 지겨워서 그만뒀는데

 

여러 색깔의 물감이 담겨 있는 팔레트가 거대한 종이들을 가리고 있었다. 가린 부분을 보기 위해 팔레트를 치웠다가 너무 놀라서 오른손으로 치우던 팔레트를 그대로 밀어 책상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일단 생각보다 너무 잘 그렸다. 그려진 사람들이 누군지 딱 알 수 있을 정도로 안나는 잘 그려냈다. 그리고 그려진 사람들이 같이 나란히 서 있는 안나와 엘사의 옆모습이라는 것에 놀랐다. 사고 전의 자매였다. 눈사람을 사이에 두고 둘 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왠지 나도 흐뭇했다.

 

그림들을 두 손으로 든 다음에 방금 본 그림을 책상 위에 놓고 다음 그림을 보았다. 아마도 방금 본 그림보다 먼저 그려진 그림 같았다.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림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화가 자신과 그 언니였다. 다만, 이번에는 첫 번째 그림에 비해 둘 다 키가 부쩍 컸고, 이번에는 그림 속의 둘은 그저 같이 나란히 서서 지금 그림을 보는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안나만 웃고 있었고, 엘사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 속의 엘사는 입이 그려지지 않았다. 흐뭇함이 사라졌다.

 

세 번째는 풍경은 잘 그렸는데 사람은 잘 못 그렸다. 이번엔 문턱에서 바라본 이 방의 풍경이었다. 한 가지... 엘사의 침대는 없었지만 엘사가 안나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침대에 앉은 안나와 얘기하고 있었고 둘 다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안나가 엘사의 방에 들어간 적도 없고 엘사가 안나의 방에 들어간 적도 없어.

 

손이 떨려오려 했다.

 

네 번째는 가장 그림 수준이 낮았다. 그래도 두 여자아이가 같이... 접시 위에 놓인 무언가를 손으로 집어먹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초콜릿이겠지.

 

다섯 번째 종이는 아까 본 그림보다도 그림이 더 수준이 낮았다. 다만, 내용은 가장 처음에 본 그림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그림 실력 때문에 두 사람은 웃고 있지 않았고... 그림 실력 때문이야, 그림 실력 때문이라고!

 

다섯 번째 종이도 책상 위에 놓으니 남은 그림은 두 개 밖에 없었다. 여섯 번째 종이는 추론을 해야 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후다닥 뛰는, 백금발을 가진 엘사였다. 왜 더 이상 웃는 그림이 없는 거야!

 

마지막, 사람은 없었다. 그저 시뻘건 벽을 양옆으로 둔 하얀 나무로 지어진 문이었다.

 

엘사의 방문이었다. 안나가 몇 년째 열지 못한.

 

난 마지막 종이는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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