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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에 대하여

나다 2005.09.12 02: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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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상하이사변때 베르그만 MP-28을 쏘는 구일본해군육전대원들 상해사변의 발단 1932년 1월 18일, 상해 거리를 일본 묘법사의 상해 포교주임 아마자끼가 신자 4명과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북을 치고 염불을 외면서 걸어가고 있던 이들이 하오 4시경 마옥산로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옆 골목에서 한 무리의 괴한들이 뛰쳐나왔다. "일본놈이다! 죽여버려!" 이들은 고함소리와 함께 흉기를 들고 아마자끼일행에게 덤벼들었다. 괴한들이 물러가고 난 자리엔 아마자끼와 신도 2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자끼는 이미 칼에 찔려 즉사한 뒤였고 다른 신자 2명도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원래 이 마옥산로에는 항일의용군의 지하조직을 가지고 있는 삼우실업사라는 타올공장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거류민들은 이번 사건의 범인이 이 공장 소속일 거라 단정하고 흥분한 일부 군중들은 삼우실업사에 몰려들어 이 공장에 불을 질러 일부를 태웠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모자는 중국인이 아니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바로 상해주재 일본영사관 무관 다나까소좌였던 것이다. 그는 만주국에 쏠린 열강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번 일을 생각해냈다. 중국인들을 금품으로 매수하여 일본인 승려를 살해함으로써 안 그래도 험악한 중일 양국 사이에 불을 질러 국제적 이목을 끌려 했던 것이다. 승려를 살해한 중국인도 그가 매수한 중국인이었고 삼우실업사에 불을 지른 방화범도 그가 매수한 일당이었다. 게다가 일본인 일당은 삼우실업사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공동조계의 중국인 경찰과 충돌하여 일본인은 순경 2명을 일본도로 죽이고 경찰은 일본인 1명을 사살하는 참사도 벌어졌다. 1월 20일, 무라이총영사는 중국측에 승려살해사건에 대한 엄중항의를 제출했다. 진범이 다나까소좌임을 알 리가 없는 중국측은 곧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범인의 체포와 손해배상등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릇된 판단에 눈이 어두워진 일본 거류민들은 이튿날부터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여 일본 영사관과 일본 해군부대 본부에 몰려갔다. 이때 일본해군 지휘관 사메지마대좌는 군중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만일의 경우 본 부대는 6,000명 일본인 거류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현재의 병력이 부족한 때엔 언제든지 증원을 요청하여 사태에 임할 작정이다." 사메지마의 이 말에 군중들은 일단 해산했으나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 다음이었다. 이 사건을 다룬 중국측의 민국일보는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군이 있음을 꿰뚫어보고 이 사실을 기사화했다. 민국일보는 전부터 일본측의 심기를 거슬리는 기사를 실어왔으므로 해군측은 은근히 중국 당국을 협박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행동으로 나설 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중국 당국은 민국일보에 폐쇄령을 내렸다. 해군 증파 이 무렵 양자강 방면의 일본해군병력은 시오자와소장 지휘의 1개 함대가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급박해지자 본국으로부터 항공모함을 비롯한 각종 전투함이 증파되어 오는가하면 28일에는 수뢰전대와 육전대 병력마저 증파되어 왔다. 황포강 위를 떠다니는 일본군함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고 검은 연기를 토하는 군함의 무리는 중국을 위협하는 무언의 압력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시위는 일본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중국 민중의 반일감정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당시 상해에는 채정해를 군장으로 하는 제 19로군의 약 33,000명의 병력이 있었다. 이 군대는 주로 광동과 광서지방의 남방인으로 편성된 것으로 중국군 간에도 `철군`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부대였다. 게다가 대소 100여회 이상의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1931년 12월 남경, 광동의 양 정부의 타협안이 성립되자 웅식휘가 이끄는 장개석 직계군을 대신하여 남경∼상해간 철로 연선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19로군은 사태가 날로 험악해지자 임전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체 병기를 손질하는 한편 조계의 요소요소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철로 연선이 클리크를 만들어 놓는가 하면 황포강 유역에 포대를 준비하기도 했다. 상해의 공동조계에는 1850년 태평천국의 난 이래 설치되어 있는 상해방비위원회가 있었다. 상해에 있는 각국 주둔군 사령관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만주사변 이후 빈번히 모임을 갖고 상해의 안전을 협의하고 있었다. 원래 일본해군의 방비담당구역은 이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북부 경계도로인 북사천로까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9.18이후 일본측은 자기네 방비담당구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그 지역에 일본인 거류민이 많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그곳 서쪽의 민가를 중국군이 방어선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측의 이 요구에 열국 방비위원회는 그것을 승인해주었다. 일본군의 난폭함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위원회였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중일 양국인 사이에서는 곳곳에서 소규모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1월 하순에는 거의 매일같이 열국 방비위원회가 열렸다. 1월 25일 일본측은 위원회에 머지않아 계엄령을 선포할지도 모른다고 통고했다. 이어 28일에는 열국 주둔부대 지휘관의 선임자인 영국군 플레밍소장에게 "명 29일을 기해 일본 육전대는 모종의 행동을 개시한다"고 통고했다. 과연 이날 하오 4시, 일본해군 육전대는 예정대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주둔군도 각각 각자의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결정된 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정작 주목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일본군은 하오 11시가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각 주둔군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일본군이 행동개시를 위해 일정한 위치에 배치된 것은 이날 하오 11시 30분. 그러니까 어둠을 이용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기 위해 이토록 시간을 늦춘 것이다. 이에 앞서 이날 하오 일본측 함대사령관 시오자와는 뉴욕 타임즈의 에이벤트특파원에게 이런 말을 함으로써 일본군의 속셈을 드러냈다. "나는 오늘 오전 중국측에게 적대시설(방어진)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나의 최후통고이다. 그러나 이 최후통고가 수락되어도 나는 우리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육전대를 진출시킬 것이다." 이어 일본군, 아니 일본해군의 속셈을 드러내는 말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 육군은 만주에 있는 일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상해에는 육군병력이 없다. 그래서 내가 지휘하는 해군은 이 상해에서 그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당시 일본해군은 만주에서 관동군이 승승장구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을 시기의 눈으로 바라보아왔다. 그래서 해군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상해였다. 해군은 중국군의 정예로 알려진 제 19로군을 격파함으로써 제국해군의 위세를 과시하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정예 제 19로군 드디어 28일 밤 12시, 중일 양국군 사이에서 첫 총성이 울렸다. 이른바 제 1차 상해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최초의 사격전은 역시 북사천로 서쪽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1931년의 개정방위계획에 의해 일본측의 담당지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 중국측엔 통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곳은 엄연히 중국 주권지이며 이곳을 침범하는 것은 중국 주권의 침해였고 침입하는 일본군을 맞아 싸우는 것은 중국군의 자위행위였다. 일단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소총과 기관총 소리가 어두운 상해의 밤하늘을 뒤덮었고 총소리 사이사이로 무거운 중포 소리가 메아리쳤다. 전투는 삽시간에 갑북 일대에 퍼져나갔다. 이튿날에는 일본 항공모함 노도로에서 함재기가 날아올라 북정거장 일대를 폭격했으나 제 19로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처음부터 고전을 겪어야 했다. 전투만 벌이면 중국군은 앞을 다투어 패주할 것이라고 자만에 빠져 예상했던 것이 빗나간 것이다.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중국군은 그 병력이 압도적일 뿐 아니라 사기가 왕성하여 철저항전을 구호로 하고 단 일보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해군함정의 시위에도 굴하지 않고 폭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잇따라 중국군 진지 앞에 돌격해 들어가지만 맹렬한 화력 앞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개전 3일만에 증원군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월 1일, 일본해군 군령부는 새로이 2개 육전대를 증파하는 동시에 노무라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 3함대를 편성하여 상해방면의 해군병력을 통합, 지휘토록 했다. 이튿날, 일본군 육상부대는 갑북일대에 걸쳐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오송포대에 대한 수상부대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방어진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송포대의 포화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여기에서 노무라사령관은 해군육전대의 지상전투력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상해사태가 더욱 확대되면 육군의 출병없이는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즉시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호소했다. 육군파병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자 일본 정부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발을 뺄수도 없는 처지였다. 오오스미해군상은 곧 육군측에 우선 1개 사단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여 그 승낙을 받았다. 이리하여 육군 제 9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증원부대의 파견이 일왕의 재가를 얻어 2월 9일 우지나로 출발하게 되었다. 수송선 16척에 분승한 이 증원부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항행을 계속, 15일과 16일에 각각 상해항과 오송부두에 상륙했다. 제 9사단장 우에다는 상륙하자마자 영국공사 램프슨을 통해 중일 양국군 대표의 회담을 요청했다. 동시에 중국군의 자발적 철수를 요구하며 "2월 20일 상오 7시까지 현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의 위압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성명에 물러날 제 19로군이 아니었다. 채정해군장은 즉시 회답을 보냈다. "중국 영토를 침입하고 그 주권을 침해한 일본군이야말로 즉각 현 전선에서 철수해야 한다. 이에 불응함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사태는 일본군측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오철성상해시장도 일본 총영사에게 동일한 내용의 회답문을 보냈고 국민정부도 같은 취지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육군의 고전 이리하여 양국군은 드디어 본격적인 무력행사에 돌입했다. 10일 상오, 우에다사단은 그 주력을 강만진방면으로 돌려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중국병쯤은 단숨에 쳐 없앨 수 있다." "해군이 참패한 오명을 우리 육군이 씻어줘야 한다." 우에다사단의 병사들과 장교들은 이런 호언장담을 하며 강만진에 쇄도했다. 그러나 막상 전투에 돌입하자 이들의 호언장담은 사라지고 일본군의 비명소리만이 전선에 깔렸다. 강만진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는 수많은 클리크가 마련되어 있었다. 콘크리트와 철조망으로 된 이 클리크는 지형지물을 교묘히 이용하여 숨겨져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기관총이 쉴새없이 불을 뿜었다. 공격에는 더없이 불리하고 방어에는 지극히 유리한 지점에 구축되어 있는 이 클리크는 무작정 돌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을 계속 쓰러뜨렸 다.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 19로군의 저항 앞에 출혈만 거듭할 뿐이었다. 격전 이틀만에도 전황은 변하지 않았고 강만진은 여전히 중국군의 손에 있었다. 22일에 이르자 일본군은 그 주력을 강만진의 북방으로 돌려 맹공격을 가했으나 전황을 바꿔놓을 순 없었다. 도리어 23일에는 중국군의 역습을 받아 거의 전선이 붕괴될 뻔하기도 했다. 중국군의 사기는 점점 더 왕성해지고 지금까지의 수세에서 벗어나 일본군에 대한 대공세를 서둘러 준비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22일 하오 3시, 노무라 제 3함대사령관은 본국 정부에 "조속한 시일 내에 대병력을 증파해 주기 바람"이라는 내용의 긴급전보를 쳤다. 일본정부는 이 전보를 받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미 2번이나 증원병력을 파견받고도 추가 병력을 요구하는 상황은 일본군으로서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23일에 열린 정부수뇌회의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심각한 논의가 거듭되었다. 아라끼육군상은 이 기회에 과감한 증원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파견군을 재편성하여 육해군의 지휘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일본정부는 새로이 2개 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고 시라까와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상해 파견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현지에서는 그동안에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중국군의 진지는 여전히 건재했고 일본군의 사상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23일부터 25일까지의 사상자만 해도 470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탄약, 특히 중포탄은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시라까와대장의 상해파견군 사령부가 양자강구에 도착한 것은 2월 29일. 증원부대중 선발대 1개 사단(제 11사단)도 이날 상오 11시 상륙을 끝내고 이미 작전중인 제 9사단과 함께 남북에서 호응하여 묘행진으로부터 강만진 서쪽에 걸친 전 전선에서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전장의 에피소드 - 폭탄 3용사 이 총공격에서 등장한 것이 `폭탄 3용사`의 무용담이다. 이 폭탄 3용사는 당시 일본 방방곡곡에서 노래와 이야기로 널리 선전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군국주의화를 위해 군당국이 만들어 낸 하나의 코미디였다. 군의 발표에 의하면 묘행진의 견고한 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3명의 일본군 결사대가 대나무통에폭약을 넣어 자신의 육체와 함께 중국군 진지에 격돌함으로써 우군의 돌격로를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사꾸에, 기다까와, 에노시다라는 이 3명의 공병들은 이 바람에 신문, 방송에 널리 선전되었고 그들을 찬양하는 `폭탄 3용사의 노래`는 학생들간에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대전이 끝나고 이 폭탄 3용사는 전혀 허구였다는 것이 드러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것은 당시 종군기자였던 한 사람이 3용사의 돌격경위를 낱낱이 폭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종군기자에 의하면 문제의 공병들이 폭살된 것은 그들의 훈련이 부족한 탓으로 폭발시간을 잘못 설정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폭탄을 철조망 앞에 놓고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을 시간을 잘못 계산하여 미리 터트려 자폭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동료공병이 그 종군기자에게 증언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증명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만 소속 상관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의문의 중국군 철수 3월 1일에 이르자 갑자기 전투의 양상에 바뀌었다. 이날 하오부터 중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것이다.처음에는 일본군도 이 철수정보를 입수하고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라까와대장은 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상해주재 영사관 무관에게 그 진상을 문의해 볼 정도였다. 이튿날 각종 정보에 의해 중국군의 총퇴각이 확실해지자 일본육군은 공격을 계속하여 유하진을 점령하고 다시 가성방면으로 추격전을 벌이는가 하면 해군측에선 오송포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이를 점령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아한 것은 대체 왜 우세하던 중국군이 갑자기 철수를 시작했느냐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것도 상해사변의 원인인 승려살해사건을 계획한 다나까소좌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정치·모략군인으로 유명했던 다나까의 주위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다나까의 눈길을 끈 것은 청조 숙친왕의 딸인 가와지마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상해 고급 사회의 유명인사로서 중국군 지휘관들과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군 지휘관들을 만난 가와지마는 중국군 지휘관들에게 일본군의 대병력이 상륙했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 제 11사단이 상륙한 다음날에 제 14사단이 상륙했다는 정보를 흘린 것이다. 그러나 실은 제 14사단은 아직 일본을 출발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가와지마는 중국군에겐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존재로 보였고 그 말을 믿은 중국군은 2일 하오부터 총퇴각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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