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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

카파 2005.10.28 11:32:59
조회 4900 추천 1 댓글 11

  1945년 4월29일 자정을 갓 넘겼을 무렵, 베를린에 있는 총통의 지하 벙커에서는 조촐한 결혼식이 거행됐다. 신랑은 56세의 독일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 신부는 33세의 에바 브라운이었다.      주례는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가 불려 온 발터 바그너라는 공무원 출신의 국민척탄병(민병대) 병사가 보았다. 국민계몽선전장관 요하힘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나치당 총통대리 마르틴 보르만 등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히틀러 부부의 결혼 신고서   약식으로 거행된 이날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는 제3제국의 혼례준칙에 따라 『완전한 아리안 민족의 후예이며, 결혼을 가로막는 유전성 질환은 없다』고 선서했다. 이어 두 사람은 결혼신고서를 작성했다. 에바 브라운은 결혼 신고서를 쓰면서 姓을 「브라운(Braun)」이라고 적으려다가, 실수를 깨닫고 두 줄을 그어 B자를 지워 버리고 「히틀러(Hitler), 舊姓(구성) 브라운」이라고 적었다. 이날이 오기를 13년 동안 기다려 왔던 그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결혼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남아 있던 측근들에게 결혼피로연을 베풀었다(주례 바그너는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다가 소련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어 히틀러는 두 개의 유언장을 口述(구술)했다. 하나는 독일 국민과 군대에게 보내는 「정치적 유언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유언장」이었다. 「개인적 유언장」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투쟁하는 동안, 나는 결혼생활을 책임질 수 없다고 믿고 있었지만, 生의 마지막을 앞둔 지금, 나는 한 여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참된 우정을 지켜 왔고, 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포위된 이 도시로 찾아왔다. 그녀는 소원대로 내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녀가 결혼을 축하하자 에바는 『이제는 나를 히틀러 부인이라고 불러도 돼』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오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情婦(정부)와 함께 빨치산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屍身(시신)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은 이미 자결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굳혀 주었다.      4월30일 오후 히틀러와 에바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총성이 들렸다. 측근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매캐한 화약 냄새와 청산가리 냄새가 났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에바는 청산가리로 자결했던 것이다. 이때가 오후 3시30분께였다. 친위대원들이 그들의 시신을 벙커 밖으로 끌어내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붙였다. 소련군은 총통의 지하 벙커에서 500m 떨어진 지점까지 육박해 오고 있었다.      건강하고 겸손하고 수줍은 매력의 금발 아가씨      아돌프 히틀러, 실패한 화가 지망생이자 예비역 하사에 불과했던 그는 밑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단시일 안에 유럽대륙의 覇者(패자)가 되었다는 점에서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희대의 독재자라는 점에서나 확실히 「특출한」 인물이었다. 반면에 그의 반려자였던 에바 브라운은 정말 「평범한」 여자였다. 동생 그레텔과 함께한 에바(좌측)   에바 브라운은 1912년 2월7일 독일 뮌헨에서 세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내심 아들을 바라고 있던 아버지는 아쉬운 심정을 출생신고서에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에바 안나 파울라 브라운은 그가 이 세상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삼가 고합니다>      에바의 집안은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가정이었다. 그의 부모는 보수적이고 군국주의적 사고 방식의 소유자였다. 先代(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덕분에 이들은 자가용 승용차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에바는 공부 잘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소녀였다. 다른 10代 소녀들처럼 에바는 통속연애소설(한국이나 일본에서 10代 소녀들 사이에 유행했던 「하이틴 로맨스」류)과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장래 영화배우나 댄서를 꿈꾸었다.   1929년 9월, 17세의 에바는 뮌헨의 막스포어슈타트 쉘링街 50번지에 있는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관에 견습사진사 겸 점원으로 취직했다. 하인리히 호프만은 나중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그의 전속 사진사가 된 사람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히틀러 관련 사진들 대부분은 호프만이 찍은 것이었다. 에바의 운명은 여기서 결정됐다. 하인리히 호프만 밑에서 일할 당시의 젊은 에바   1929년 10월, 호프만은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단 어떤 신사분」(에바의 표현)을 가게로 데리고 왔다. 「볼프」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그 사나이는 바로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였다. 에바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아돌프 히틀러에게 금방 매료되었다. 늘 스타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10代 소녀 에바로서는 히틀러와 같은 정계의 거물과 친분을 가진다는 것이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이 시절의 에바에 대해 히틀러의 공보담당관이었던 에른스트 한프스탱글은 이렇게 슬회하고 있다.      『그녀는 상냥한 인상에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건강하고 겸손하고 수줍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1932년 초, 에바는 히틀러의 집에서 히틀러와 관계를 가졌다. 히틀러의 情婦가 된 것이다. 히틀러의 가정부가 이를 목격했다. 권력의 정상을 향해 질주하고 있던 히틀러에게 에바는 그야말로 「가볍게 즐기는 상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에바는 달랐다. 아직도 10代 소녀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던 그녀에게 히틀러는 둘도 없는 戀人(연인)이었다.      정치활동에 여념이 없는 히틀러를 기다리다가 지친 에바는 1932년 11월1일,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 총알은 동맥 바로 옆에 박혔다. 피가 쏟아졌다. 의사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에바 자신이었다. 에바가 전화를 건 상대 의사는 사진관 주인이자 히틀러의 측근인 호프만의 친척이었다. 에바는 그가 달려오면 자신의 자살 시도가 히틀러에게 즉각적으로 전해질 것으로 계산했다. 이 계산은 적중했다. 히틀러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山莊(산장)의 퍼스트 레이디      1933년 1월30일, 히틀러는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이듬해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거하자 히틀러는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통합한 총통이 되었다.   히틀러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에바는 여전히 「그늘 속의 여인」이었다.      이 사실에 절망한 에바는 1935년 5월29일,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언니 일제(Ilse)가 그녀를 발견해 의사를 불렀다. 이때 일제가 발견한 에바의 일기를 보면, 23세의 에바는 여전히 10代 수준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에바는 「나는 독일을 포함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의 戀人」이라고 적고 있었다고 한다.      보수적이었던 에바의 아버지는 귀하게 키운 딸자식이 한 남자의 情婦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호프만을 통해 히틀러에게 「자식을 집으로 돌려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히틀러에게 보내려 하기도 했다.      나중에 가서 에바의 아버지를 비롯해 그녀의 가족들은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동생 그레틀은 후일 친위대 장교 헤르만 페겔라인과 결혼했다. 에바의 집안에서 나치즘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에바의 언니 일제뿐이었다. 히틀러를 비난하는 일제에게 에바는 『총통이 언니를 강제수용소에 처박아도 나는 꺼내 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바리안 알프스, 베르그호프에서 식사를 하는 히틀러 커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에바는 점차 자신의 위상을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그녀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텔레비전과 자동차 등을 선물했다. 해외 방문 시에나 크고 작은 행사 시에는 비서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동행시켰다. 1938년 5월, 히틀러는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에바를 자신의 첫 번째 유산 수혜자로 지명해, 자신의 死後(사후)에 에바에게 매달 1000마르크를 지급하도록 했다. 이제 그녀는 히틀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에바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 제3제국의 선전기관들이 히틀러를 「조국 독일과 결혼한 불세출의 애국자」로 그렸기 때문에 그녀는 뒷전에 숨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가 제3제국 시절 공식 사진에 등장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1936년 가르미쉬 파텐키르헨 동계 올림픽 때, 히틀러의 뒷자리에 여동생 그레틀과 함께 앉아 있는 사진이 「실수로」 보도됐던 것이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에바는 알프스 산록의 오버찰스베르크에 있는 히틀러의 산장에서 보냈다. 여기서 그녀는 글자 그대로 「퍼스트 레이디」였다. 당시 산장에서 근무했던 요리사 테레제 링크는 그녀를 「사랑스럽고 고상한 아가씨」로 기억했다. 베르그호프 산장에서의 즐거운 한 때. 중앙 에바 브라운, 좌측에서 두번째 히틀러의 비서 보어만, 오른쪽 끝은 히틀러의 전속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 그림을 감상중인 히틀러 & 에바 커플      에바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다수의 독일인들처럼 그녀도 유대인 박해 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나치 정권의 惡行(악행)들은 히틀러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하는 부하들의 잘못으로 여겼다. 에바는 히틀러에게 청탁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 한번 히틀러에게 청탁을 넣었는데, 히틀러의 모친을 치료하고, 그녀의 임종을 지켰던 유대인 의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녀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 의사를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대신 해외로 추방했다.      에바가 히틀러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도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1943년 파마 금지령과 화장품 생산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였다. 에바에게는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측면도 있었다. 그는 여성들의 흡연을 금지한 나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담배를 피웠고, 보디빌딩과 기계체조, 사진촬영을 즐겼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은 독일에서는 최초의 컬러 사진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에바 브라운은 역사를 실망시켰다』      에바가 오버찰스베르크에서 행복을 만끽하고 있던 6년간, 유럽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종말이 다가왔다. 1945년 3월 말, 에바는 자신의 메르세데스 벤츠 승용차 편으로 오버찰스베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는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死地(사지)로 들어온 에바를 반갑게 맞이했다.      히틀러 최후의 몇 주 동안, 헤르만 괴링(나치 독일의 제2인자·공군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나치 친위대 사령관) 등 히틀러의 측근들이 잇달아 히틀러를 배신했다. 에바의 弟夫(제부)인 페겔라인 친위대 소장은 총통의 지하 벙커에서 탈주를 시도하다가 처형됐다. 에바는 사랑하는 동생의 남편이 죽는 것을 냉담하게 방관했다.      에바에게 가슴 아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히틀러가 측근들의 배신으로 인해 받게 될 마음의 상처였다. 그녀는 지하 벙커에 함께 머물고 있던 여류 비행사 한나 라이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불쌍한 아돌프….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했어. 독일이 저 사람을 잃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 1만 명이 죽는 것이 더 나을 거야』   그것이 에바 브라운의 한계였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자결한 후, 1945년 5월1일 함부르크 방송은 『히틀러와 그의 부인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히틀러의 부인」을 언급하면서 아나운서는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던가.      나치 정권 시절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기 때문일까. 전쟁이 끝난 후, 에바 브라운의 사생활에 대해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에바 브라운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진행되자, 「에바 브라운은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아가씨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역사학자 휴 드레버 로퍼는 이렇게 말했다.      『에바 브라운은 역사를 실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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