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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전투 3.

김유식 2005.07.21 18: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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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감바라는 어디에…   그들은 트럭 그늘에 주저앉아 신과 세계에 대해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진심으로 신과 세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기관총 소대장 드라이어 소위와 그 대원들이었다. 더위와 파리로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들의 의논은 진지하고 적극적이었다.   『누구든 죽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없어요. 죽음을 요구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노릇은 없어.』   드라이어는 우악스런 하사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어. 이건 인간의 본능이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도 죽음을 한탄하고 있었어.』   부하들은 모두 이 소대장이 목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힛차카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미인인 부인과 사랑스런 다섯 자녀를 가진 목사인 드라이어는 부하의 존경을 받는 장교이기도 했다. 부하들로서는 유능한 성직자가 유능한 장교도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도 있었다.   드라이어는 중기관총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오토바이병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어린 병사가 조금 지나친 질문을 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목사님이 장교가 돼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드라이어는 태연히 대답했다.   『허락을 받았지. 날 보라구―.』   『그럼 성서는요?』   질문은 짖꿎었다.   『흠!』   드라이어는 성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이 이상한 토론은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경보가 울렸기 때문이다.   전령이 달려오고 명령이 하달되었다.   『시디 아레이스로 급행하라.』   1941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서 토부룩과 소르므 지구에서는 가끔 이런 소동이 있었다. 영국군이 전진해 오기 때문이었다. 소르므와 시디 오말은 점령되었다. 카프초와 시디 오말 북서쪽에 적 전차대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제 15기갑사단은 발디아 전면에서 롬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증강된 제33공병대대는 시디 아레이스 공격에 투입되었다.   바로 이 작전은 기습공격이 되고 말았다.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시디 아레이스의 적 수비대는 조금밖에 안된다는 것이었는데 대대가 거둔 전과는 거짓말 같은 내용이었다. 장군을 포함한 7백명을 포로로 잡았고, 포 60문, 차량 100량을 노획한 것이었다.   그중 그리스 크레타전에서 이름을 떨친 하제스트 여단장은 포로가 된 것이 수치스러워서 롬멜이 지나가도 맥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롬멜은 뒤돌아보고 말했다.   『예의를 잊으셨군. 영국 장군으로서는 보기드문 일인데.』   하제스트는 고개를 들고 경례를 붙였다. 롬멜은 답례를 한 다음 위로조로 말했다.   『뭘, 의기소침하실 것 없오. 귀관과 귀관의 부대는 용감하게 싸우셨오.』   드라이어 소위는 이 장군 두 사람을 발디아까지 호송했다. 그는 이 임무가 끝난 후 제15기갑사단의 연락장교로 임명되었다.   소대원은 그와의 이별을 몹시 아쉬워했다. 이 목사 소위는 재주도 여러가지 많았다. 그는 사막 한복판에서 영양을 맛있게 구워낼 줄도 알았고 또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정찰도 잘해냈다. 전선에서 부상자를 끌어오라는 명령을 내리는 법이 없는 이 장교는 언제나 몇 번이든지 몸소 달려나간다. 상처에 대한 응급조치도 척척 해냈다. 그리고 전사자 매장 절차는 그가 도맡아했다.   그처럼 죽음과 영원을 보기좋게 연결시켜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실감나게 들었고 또 그와 함께 영생과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신앙을 가진 채 1942년 9월 엘 알라메인 전방의 야전 치료소에서 죽었다. 부하들 앞에서 곧잘 하듯이 소리 높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내가 어찌하여 이런 삽화를 담게 되었는가?   전쟁의 참혹함과 음산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전개된 전쟁은 대량학살이라는 근대전이었다. 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한 조각의 인간성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다. 어느 군대가 그 운명을 광막한 사막에 맡겨놓고, 비정한 명령 속에 생명을 주고 받는 가운데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풍겨주었다는 것은 역시 흐뭇하지 않는가?   1941년 12월 2일, 롬멜은 라스텐부르크에 있는 총통사령부에 전보를 쳤다.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격전에서 적 전차및 장갑차 파괴 814, 비행기 124기를 격추 화기, 탄약, 일반 차량 등의 전리품은 계수가 끝나지 않았음. 포로는 9천을 초과했으며 그중 장군 3명이 포함되었음.」   이 기간동안에 벌어진 끔찍스런 드라마가 이 숫자에 들어나 있다. 하지만 그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롬멜과 오킨렉크는 이집트의 일대 거점 토부룩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롬멜의 수색대는 영국군이 지치지도 않고 신병력으로 증강시키고 있는것을 확인했다. 오킨렉크는 빌 엘 고비 부근에 전 병력을 집결하고 토부룩 주변의 롬멜 포위진을 괴멸시킬 계획이었다.   롬멜의 대항책은 공격이었다. 우선 동부 포위진으로부터 부대를 철수시켰다. 12월 4일 밤 DAK는 엘 두다와 시디 레제그 사이의 폭 3킬로의 회랑지대를 통과하여 서부로 진출했다. 동부에서 올 이탈리아군과 합류해서 공격하기로 했으나 약체부대여서 쓸모가 없었다. DAK만이 5일 정오를 기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엘 고비 서쪽에 있던 용감한 청년 파시스트 사단이 합류해 와서 용약 공격으로 나섰다. 처음 대적한 부대는 근위여단, 이어 어느새 재편성했는지 전멸된 줄 알았던 제7기갑사단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DAK가 빌 엘 고비부근에서 격전중에 있을때 영국군 제70보병사단은 그틈을 타서 토부룩에서 출격, 허술해진 독일의 포위진을 강습해 왔다. 독일군은 두다, 벨하메드를 잇는 중요한 고지를 빼앗겼으나 롬멜은 속수무책이었다.   롬멜은 다시 한번 만회를 시도하여 장병들에게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했다.   적과 싸우지 않으면 패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DAK는 12월 6일 다시 등장했다. 클류벨 장군이 거느리는 제15, 제21기갑사단은 필사적인 형세로 전투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탈리아의 아리에테, 트리에스테 두 사단은 참가해 오지 않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령관은 사단이 피로해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해왔다. 만일 이때 이탈리아군이 합세했더라면 싸움은 이겼을런지도 모른다.   영국군은 DAK의 맹공격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고 독일군은 그들을 포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꼭 이탈리아군이 와야 했었다.   클류벨은 이 좋은 기회를 눈앞에 놓고 롬멜과 이탈리아군 지휘관 감바라에게 연이어 무선으로 연락했다.   『감바라는 어디 있는가?』 하는 전문을 몇 차례나 보냈다.   『감바라는 어디 있는가?』   이때부터 이 말은 아주 유명한 말이 되고 말았다. 하나 감바라는 끝내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독일 장교들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그후 며칠동안 이탈리아 장교들은 그들 앞에 나가지 않는 게 영리할 정도였다.   12월 7일에도 격전이 계속되었고, 롬멜은 우세한 영국군에 의해 무방비한 측면에서 포위당할 번했다. 독일군 전차들은 한대, 한대 모래땅 위에 서 버렸다. 포탄을 맞은 것, 연료가 떨어진 것, 등등…. 이때 아프리카 전선의 용장인 제15기갑사단장 노이만 지르코우 장군도 전사했다. 그는 지휘전차 포탑에 서 있다가 직격탄을 맞고 수 많은 부하들의 눈물 속에 많은 추억만을 남겨놓고 죽었다.   바로 피투성이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롬멜은 이 전투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원래 강한 자는 비켜날 수 있다는 것이 용기의 한 단면으로 통하는 만큼 그에게도 이말은 적용되었다.   몇 주동안의 전투에서 오킨렉크의 승리가 아프리카 독일군의 완패를 가져올 수는 없었다. 롬멜은 사수나 옥쇄를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드디어 후퇴를 결심했다.   12월 15일, 롬멜은 베를린의 최고사령부에 보고를 했다.   『4주간에 걸쳐 소모가 많은 전투를 계속한 결과 부분적으로는 탁월한 전과를 거두었는데도 불구하고 무기와 탄약보급이 완전 두절되어 전력의 감퇴가 격심하여 아군은 가자라 지구를 12월 16일까지 방어할 것임. 엘 메키리 데르나를 경유, 12월 16일 밤부터 철수를 개시하지 않으면 적군의 포위로 섬멸될 위험성이 있음.』   피투성이 전투 8개월로 싸워 쟁취한 키레나이카를 포기한다는 사실은 간단하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전략가라면 모르지만…….   1941년이 저물어 갈 무렵의 이 극적인 나날은 흙먼지가 이는 가도 위에서 밤낮으로 싸운 군사들의 악몽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안 몇 개의 부대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갔다.   『오토바이 대대의 현 병력은?』   제15기갑사단 부관인 클리벨 소령이 물었다.   『장교 5명, 하사관 14명, 사병 58명, 자주포 3문, 트럭 10대, 장갑승용차 5대, 오토바이 6대…… 이상입니다.』   불과 몇 주 전에는 480명이 있었다. 그 모두가 포로, 또는 사막의 묘지에 드러누워 있었다. 사단은 이런 오토바이 대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까지 소르크를 사수하라!』   다시 한 번 사수를 해야 했다. 소르크는 벤가디 서쪽에 있다. 오토바이 부대가 이날 오후 후미부대로 이곳을 지나갈 때 영국군은 바로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내던져진 식량, 탄약, 연료를 이용할 틈도 없었다. 이윽고 저장고는 날아갔다. 굉음과 검은 연기, 또다시 귀중하고 아까운 물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소르크의 상황은 급박해가고 있었다. 다시 새 명령이 내려졌다.   『오토바이 대대는 소르크 남서 산지 사면을 지켜라.』   소르크에는 제36보병연대 제11중대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좋아, 됐어.』   산은 소르크 가까이서 15킬로미터가량 사막으로 날개 펴듯 내밀고 있었다. 지도에는 그 험한 날개 위로 두 가닥의 길이 나 있었다. 어둡기 조금전에 대대 전위는 거기까지 진출했다. 그곳에는 기동력을 잃은 보병 제361연대 제10중대가 산이 바라보이는 평지를 지키고 있었다. 트럭을 다 잃어 기동력이 전무한 부대였다.   그 중대장은,   『산지에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영국군 장갑차, 트럭, 전차들이 있습니다.』 하고 현지상황을 보고했다.   하나 두 번째 길을 정찰했을 때 독일군 자주포가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순간, 저쪽에서 온 영국군 장갑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뜻밖의 사태였다. 이런 경우 먼저 쏘는 차가 이기는 법이다. 독일군 장교는 쏘았다. 그러나 파괴된 장갑차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대규모의 영국군 수색대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   독일군은 후퇴했다.   이윽고 불안한 어둠이 사막의 대지를 감싸고 다시 날이 밝았다. 보초가 급히 달려와서 보고를 한다.   『영국군이 준비중입니다. 엔진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들은 위치를 측정했다. 해가 뜨기 전에 잠시동안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여 영국군을 놀라게 해주고 도망칠 궁리를 했다. 곧 해가 떴다. 뚜렷이 들어나는 산의 모습, 밤은 끝났다. 영국군 장갑차는 서서히 내려왔다. 숨어있던 자주포가 불을 토했다.   포성은 세 번 울렸다. 명중! 다시 세 번. 모두가 보기 좋게 명중했다. 삼면 포위 속은 지옥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지옥 속에서도 이기면 기뻐할 수 있는 것인지. 포격을 받은 영국군은 장갑차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기총소사를 마구 해왔다. 독일군 진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마구 사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화력은 차츰 범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위생병을 부르는 폐부를 에이는 울부짖음이 잦아졌다.   다시 한 번 자주포가 전력을 다해 불을 토했다. 강력한 방위진을 가장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쏘았다. 그 사이에 병사들은 차에 올라타 발동을 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북서를 향해서…….   다음 순간부터 필사적인 후퇴전이 벌어졌다. 자주포가 선두를 달린다. 멈춘다. 쏜다. 그리고 또 다시 달린다. 자주포가 없었다면, 전멸되는 위기였다. 집중되는 영국군의 공격은 무서웠다.   도망을 치는 독일군 앞에 갑자기 천막이 보였다. 아라비아인일까? 그런데 그들은 앞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마치 식민지의 독립운동 같았다. 전방에 보이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비행기였다. 그들은 야전비행장에 있는 이탈리아군 비행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대대 선두는 그들 중앙을 꿰뚫고 들어갔다.   『이 돼지 같은 놈들.』   아랍인들은 깜짝 놀라 손을 들었다. 이들로서는 현지민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다. 비행장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이탈리아 군인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독일군을 영국군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대대 후미부대는 3문의 자주포로 추격해 오는 영국군 장갑차와 싸우고 있었다. 이탈리아군도 용기를 되찾아 남아있는 3문의 고사포와 4대의 전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이탈리아군 2개중대가 합세되어 그들과 함께 한동안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군들은 트럭과 비행기 3대에 분승하여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명령을 충실히 준수한 많은 용사들 중에서 고향에 돌아갈수 있었던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오토바이 대대는 실로 잘 싸우면서 후퇴했다. 그러나 판첸하겐 연대 제11중대는 모두 포로가 되어야만 했다.   (8) 겁화속의 목사   1941년 11월 21일 이후, 소르므를 수비하고 있던 부대는 에네켈스 대위의 제10오아시스 중대였다. 그리고 제12중대의 생존자와 제300특수 오아시스대대 본부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1942년 1월 11일 현재, 이 외로이 고립된 지점에는 아직 70명이 남아 있었다. 가까운 할파야 고개에서는 바하 소령의 부대가 영국군의 해안 통과를 방해하고 있었다. 매일 밤, 적은 소르므 주변의 진지로 돌격작전을 시도해 왔다. 백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10일, 에네켈스는 마지막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한 사람 앞에 빵 20그람, 쌀 한 줌, 건포도 한 숫갈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사기는 제로 이하였다.   『이제 마지막이로군.』   병사들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다음날 아침 영국군의 공격이 있었다. 『마지막이로군』하고 중얼거렸던 병사들은 또다시 총을 쏘았댔다. 화점과 대대본부 중간에는 소대병력이 침입해 왔으나 대대 통신반이 이를 저지했으며 영국군을 포로로 하기까지 했다. 진지는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에네켈스가 소속한 대대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월 12일 아침, 영국군 포병과 박격포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음. 전부터 피해가 많았던 건물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최초의 돌격은 물리쳤으나 곧 제2파장이 밀어닥쳤다. 대대본부호 속에는 신호탄밖에 없었다. 마지막 신호탄을 모두 쏘아댄 다음 에네켈스는 포로로 잡았던 영국 군인에게 백기를 들게 해서 내보냈다.』   에네켈스는 세 화기진지를 향해서 소리쳤다.   『무기를 파괴하고 진지를 인도하기 위해 정렬하라!』   때묻은 누더기에는 이가 버글버글했으며 거의 굶주리다시피했던 56일간의 끊임없는 전투에 지친 이들은 그 자리에 멈칫해버렸다.   『제군!……』   대위는 입을 열었다. 『제군!』……그는 일어서 있었으나 말을 잇지 못하고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아마 전사한 부하들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소르므는 함락되고 말았다.   유명한 할파야 고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옛날부터 쟁탈전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에의 길, 요충 할파야 고개는?   필자는 당시의 전장에 있었던 두 군인으로부터 그때의 처절했던 전투의 상황을 들었다. 영국군으로 하여금 바하 소령에게 〈겁화 속의 목사〉라는 칭호를 받치게 한 이 드라마의 내용을―.   이 이야기를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는다.   『물은 더욱 부족해갔다. 하 소르므가 함락된 다음 영국군은 우리들이 가진 유일한 우물을 점령해버렸다. 입술은 갈라지고 목구멍은 말라버렸다. 무슨 수가 나야 했다. 바하는 돌격반을 시켜 단시간내로 우물을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제2중대의 아이히 호르츠 중위가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돌격반은 한동안 우물을 점령하여 급수차가 물을 채울 때까지 버티었다. 이때 영국군은 불의의 급습을 받았으며, 두 패로 나누워져서 우물에 유박한 독일군은 어둠 속에서 혼란을 벌여 싸우게 되었다. 하사가 한 명 죽고 부상자가 위생병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그런 사태를 알게 되었다. 하나 무난히 물은 구해 왔다. 융그 상등병은 하마터면 죽을 번했다. 자기와 전우들의 예비수통에 물을 채우고 혼자 뒤떨어져 걸어오다가 우군 오토바이에 의해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길바닥에 쓰려져 있었다. 물을 채운 수통을 보물처럼 든 채. 할파야 고개에서는 이해 크리스마스 무렵에 제일 귀한 것이 물이었다. 고향에서 오는 크리스마스 카드는 없었지만 바하 소령은 목사로서 성경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게 끝나자 특별 보오너스가 있었다. 그것은 물이었고… 크리스마스 종소리 대신 바위구멍 주변에 영국군의 25파운드 포가 터졌다. 이 거룩한 밤에….』   롬멜은 크레타 섬으로부터 물과 식량을 공중 수송하려고 했지만 헛수고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영국군의 야간전투기가 나타나 융카스 수송기를 격추한 것이다. 수송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와디 골짜기에서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되면 그들은 토치카에서, 또는 트럭 밑이나 취사장 등의 은익처에서 먼지투성이의 모습으로 귀신처럼 나타났다. 정말 별세계의 생물과도 같았다. 그것들이 차례차례 몸을 뻗치고 큰 심호흡을 했다.   『우리들은 밤에만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때의 정경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급도 밤에야 왔습니다. 두 컵의 물 수프, 알타만 통조림 하나, 소금물 커피 한 잔. 이것이 세 사람이 먹는 하루 식량이었습니다. 죽기에는 너무 많고 살기에는 너무 적고… 싸움을 하다니 그것은 정말 천만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원들은 드러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도 물론 할파야 진지의 이런 상황을 추측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계속 돌격을 시도한 후에는 독일군의 식량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월 초순경의 어느날 저녁무렵, 디 디올지스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 사보나 사단 병력 수백명이 도착했다. 롬멜의 허가를 받고 할파야 고개 서쪽 진지에서 바하 부대까지 전선을 돌파해 온 증원부대였으나 부족한 식량 사정으로서는 오히려 짐이 되기만 했다. 드디어 최후의 순간은 1주일 후에 닥쳐오고야 말았다. 나이가 제일 많은 중대장 포이크트 대위가 군사로서 남아프리카군 진지에 파견되었다. 그는 항복조건을 협의한 다음 바하 소령과 공병대의 슈미트 소위가 나갔다. 영국 측은 신사적이어서 교섭은 순조로왔다. 바하가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천막에서 나오자 슈미트 소위는 제15오토바이 소대에 눈짓을 보냈다. 사병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백기를 차 오른편에서 왼쪽으로 옮겼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것은 바하의 마지막 군사작전이었다. 항복문서에 일단 서명하고 나면 바하는 무기의 파괴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와 장교들은 사전에 묵계를 해둔 것이었다.   바하는 항복교섭에 나가기 전에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보초가 돌아오는 오토바이의 좌측에 백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거든 곧 대대본부로 『백기 좌!』 라고 보고 할 것. 『백기 좌』라는 암호는 진지 안에 있는 모든 화기, 차량, 탄약 등을 파과하라는 신호였다. 명예스런 항복교섭이 실패한 경우에는 백기는 오른 편에 그대로. 그러니까 화기를 계속 쓸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잘되었다. 남아프리카군의 장군은 최소한 88밀리포 정도는 완전한 상태로 입수하고 싶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2년 1월 17일, 할파야 고개에 해가 떠오르고 산등성이의 기복 많은 땅은 빨갛게 그리고 보라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포성은 멎고 말았다. 깡마른 병사들의 모습은 휘청거리며 참호에서 기어나와 집합장소로 걸음을 옮겼갔다. 몇 주만에 병사들은 대낮에 만나게 된 것이다.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굶주림과 갈증이 이들의 얼굴을 완전히 바꾸고 있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늙고 피곤해 보였다. 남아프리카 군인들이 와서 물과 식량을 나누워주고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런 다음 중대장의 보고가 있었다.   『전진 준비 완료!』   바로 그 순간, 할파야 고개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갑작스런 포격이 있었던 것이다. 염호 방면에서 중포가 정렬한다. 부대를 노리고 포격을 가한 것이었다. 게링이 거느리는 제1중대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처음 병사들은 망연히 넋을 잃었으나 곧 습관처럼 산개하여 소리하여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들! 무슨 짓이야!』   바하 소령은 창백한 얼굴로 남아프리카 장교 앞에 서 있었다. 그 장교도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얼마 후 포성은 멎었다. 남아프리카군도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모두가 전전긍긍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2,3분이 지나자 영국군 측 전령이 왔다. 남아프리카 장교가 그의 말을 듣고 바하에게로왔다.   『자유 프랑스군(드골 장군의 부대)이 명령을 위반하고 항복을 위해 집 합한 독일군을 포격했다.』   그는 이렇게 전하고 민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바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은 출발했다. 독일 국방군 발표에 의하면 그들은 마지막 탄환까지 다 쏘았다고 했다. 용감하고 장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탄환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굶주림과 갈증이 그들을 굴복시키고 만 것이다. 하나 바하 목사는 옛 격언을 잘 터득하고 있었다.   「강자를 피하는 것이 용기의 다른 한면의 의의」라는 옛 말을―.   (9) 보급선을 잡아먹는 말타섬   아프리카 전선의 롬멜이 지닌 약점은 보급에 있었다. 국방군 발표에도 언급되지 않은 채, 위험을 무릅쓰고 지중해를 누벼야 하는 상선대의 선장과 선원들이 맞아야 하는 마지막 운명은 대부분이 죽음이었다.   총알을 쏘아대고 전차를 달리게 하고, 또 비행기를 조종하는 군인들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쇠사슬처럼 연이어져 있었다.   그들 없이는 총도 쏠 수 없고 승리는 더욱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후방 근무인들은 길고 긴 거리를 무기, 탄약, 연료, 식량, 즉 보급물자를 전선으로 실어나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제2차대전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흔히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보급수송의 효과적인 수해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북아프리카에서도 역시 그러했다. 그러므로 롬멜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도 소송 선단 소속의 상선, 수송기, 그리고 수송부대의 활동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전에서 독일군이 패한 것은 재해권이 없는 바다가 있고 무한히 펼쳐진 사막을 횡단하는 보급이라는 난문제를 최고 사령부가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칠리아와 트리폴리 사이는 500킬로미터 거리의 지중해가 가로 놓여 있다. 이 바다 밑에는 아프리카 사막에서 죽은 병사의 수만큼 많은 장병들이 잠자고 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많은 물자들이 잠겨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이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영국 함대를 해치워야 했다. 즉 독일과 이탈리아 보급선을 위협하는 해 공군 기지인 말타섬을 전렬에서 제거해 버려야 했다.   아프리카전의 주요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롬멜의 서전의 전격적 승리는 일시 이 문제를 해결한듯이 보였으나 이윽고 사태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25만이나 되는 독일군의 대부분은 나폴리나 트렌트에서 배로 건너갔다. 그리고 사막의 여우들 일부와 후속부대인 튜니시아 부대는 수송기로 현지까지 갔다. 항공편이라고 해도 편안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아뭏든 시간은 단축되었다. 하지만 만재한 수송선 여행은 84시간이나 걸렸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배멀미를 했고 또 긴장으로 피로했다.   (무사히 도착할 것인지? 영국군의 공격을 받지 않을런지?) 하는 걱정이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지 않았다.   경보 사이렌이 울린 다음, 말타섬에서 날아온 영국 뇌격기의 폭음이 하늘을 찢고 고사포 사격이 시작되면 이 뭍의 쥐떼들은 망연히 머리를 쓸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고사포는 그 힘을 다 발휘했으나 그 숱한 하늘의 새 떼들에게 한두발의 포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뢰 명중』이란 비상통보와 함께 현측이 기웃거리고 목숨을 건 경주가 시작될양이면 정말 야단이었다.   실로 위기일발, 물에 뛰어들든지 아니면 보급품 상자와 무기 사이에 끼어 익사를 하든지, 이런 생각들이 병사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의 전투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독일 상선들은 지중해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묘지나 십자가가 없었다. 1941년 1월부터 5월까지 독일 상선 11척, 계 42,000톤이 침몰했다. 4월 16일에는 한 호송선단이 완전히 격멸되었다. 영국 함대의 공격은 한밤중 2시 20분에 시작하여 30분동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아다나」는 불길에 쌓인 채 오후 4시까지 떠있다가 이윽고는 물결 사이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다음날은 「자모스」가 이를 뒤따라 가라앉았다.   그리고 1941년 5월 1일에도 나폴리와 트리폴리 사이에서 세 번이나 폭발이 있었다. 「라릿사」는 기뢰에 걸렸고, 「알크툴스」는 영국군 어뢰로 격침되어 그 몇 시간 후에는 함부르크, 아메리카 기선의 7,386톤짜리 호화선 「레봐크젠」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러한 사건은 끝이 없었다. 독일 상선대의 최고참 선박과 그 승무원들은 결사적으로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알크툴스의 오릿세 선장은 아침 여덟시 브릿지로 나가 코오스를 정하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이탈리아 연락장교와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때 엄청난 진동이 배를 흔들었다. 어뢰였다! 고사포대가 날아갔으나 다행히 배는 즉각 침몰되지 않아 보오트에 옮겨탈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호위함정이 이들을 구출했다. 이렇게 해서 나폴리와 트리폴리를 몇 번이나 왕복한 알크툴스는 사라지고 말았다.   알크툴스는 비교적 운이 좋았었다. 한 번은 여섯 시간이나 영국군 뇌격기의 공격으로 쫓겨 다녔다. 공뢰가 배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자, 배에 탔던 군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사실 나폴리에서 배에 오를 때 선장은 큰 소리를 쳤다.   『야간에 갑판상의 흡연은 금지다! 어떤 불빛도 있을 수 없다. 선단은 완전히 등화관제로 항해한다. 어떤일이 있어도 명령없이 하선해서는 안된다. 바다 속에 뛰어들어도 안된다. 퇴함 명령은 브릿지에서 내린다.』   병사들 중에는 그때까지 바다나 큰 선박을 보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험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하나 막상 올라타보니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잠수함 경보!』   적기가 나타났다. 흰 바지에 카키 샤쓰, 구명복, 철모 등을 걸친 선장은 브릿지에서 서서 사방을 살펴본다. 군인들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오직 그를 지켜볼 뿐, 오른편으로 적기가 나타났다. 5월 1일까지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었다.   트리폴리의 수송 지휘관은 고참인 마이크스너 해군 소령이었다. 그날, 부두에서 그는 침몰된 레바쿠젠 선장과 알크툴스의 모리세 선장을 맞아들 였다. 모리세 선장은 배가 침몰된 다음 헤엄 치기 쉽도록 물 속에서 구두를 벗어버렸기 때문에 며칠동안 맞는 구두가 없어서 트리폴리의 고급 호텔에서 맨발로 다녀야 했다.   그 무렵 트리폴리 항구에는 이탈리아의 1만톤 대형 화물선 「비르마니아」가 탄약을 적재하고 들어와 있었다. 모리세 선장의 부하였던 관리관 훗페는 선적화물의 독일 측 감독관이 되어 있었다.   5월 4일 모리세 선장은 그를 방문하고 한 잔 마신 후, 헤어졌다. 배에서 2,000미터도 떨어지기 전에 대기는 무서운 폭발음으로 흔들렸다. 모리세는 수송본부 건물로 뛰어들었다. 이어 두번째 폭발이…. 항구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비르마니아」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바로 옆에 정박하고 있던 가솔린을 실은 이탈리아 보조 순양함 싯다 디 발리도 폭발했다. 비르마니아가 사라졌을때 부두에는 아라비아인들이 가득 있었다. 독일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독일 측에는 사망자 28명, 부상자 38명, 이탈리아는 사망 42명, 부상자 50명, 가련한 아라비아인들도 150명이나 죽었다.   부두는 맹폭격 후의 광경과 꼭 같았다. 브리타니아호 선내는 폭파되어 날아가서 한꺼번에 3명의 군인을 죽였다.   독일 측 신형 항공기용 소형폭탄이 사고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것이 터지자, 다른 대형 폭탄까지 연쇄적으로 터졌다. 곧 해상 수송 책임자 마이크스너 해군 소령이 원인 규명에 들어갔으나 또 다시 그는 새로운 흉보를 들어야 했다. 같은 짐을 실은 이탈리아 배 2척이 또 입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선 폭발사고로 질려버린 베를린의 괴링 원수는 이 폭탄적하 사항이 원인이 된 줄 알고 지급전보를 보내왔다.   「배를 항구 밖으로 끌고 나가 폭파해라. 절대로 귀중한 인명의 손실은 내지 마라.」   그러나 이 무기들은 롬멜의 운명을 좌우하는 귀중한 폭탄이었다.   마이크스너는 명령을 덮어놓고 실행하는 미련한 장교는 아니었다. 마이크스너는 제1차 대전시 이탈리아 구축함을 격퇴시킨 경험의 소유자였으며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에서 다섯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용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전후에 법률을 배웠으나 1940년 다시 특별 임무를 맡고 대위로 소집되어 영국 본토 상륙작전계획「아시카」작전을 세운 후 트리폴리로 온 터였다.   그는 롬멜의 심복 이상의 사람으로서 슈바벤 출신인 롬멜의 친구였던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경험이 풍부한 독일 선박 메네스의 라이넨 선장을 불렀다.   『어떻겠소, 저 짐을 부릴 수 있을까? 이 일을 좀 맡아줄 수 없겠소?』 라이넨 선장은 대답했다.   『해봅시다.』   마이크스너의 부관인 클류거 중위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10명의 독일인 지원자를 모집했다. 이탈리아 선원을 퇴함시키고 위험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비르마니아 호와 마찬가지로 이 배는 바로 그런 폭탄을 싣고 있었다. 이들은 안전핀의 소재를 확인해 가면서 신중히 상자 하나하나를 옮겼다. 지옥행 폭탄은 귀족부인의 걸음처럼 점잖게 옮겨졌던 것이다.   라이덴과 클류거는 이 작업진행중 언제 터질른지 모르는 폭탄 안전핀을 몇 번이나 만졌는지 모른다. 이 죽음을 극복하고 작업을 완수한 라이덴은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1급 철십자장을 받았다. 물론 클류거도…….   이 사건은 롬멜에게 속한 〈운송업자들〉의 조용한 영웅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 전쟁중 세상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작업, 그들의 공로,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비밀이어야만 했다. 중요한 수송기지니 병참기지의 현항, 나폴리와 트랜트로부터 트리폴리, 토부룩, 벤가디로 향해 가는 선박의 수, 또한 얼마만한 수가 취항하고 있는지, 라는 내용은 적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독일 해군 총사령부의 기밀서류에 기록된 사항 속에서는 놀라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수많은 선박이 영국 함정 또는 브리스틀 브레님 폭격기에 의해 지중해에서 격침되었다는 발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프로이센」에서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1941년 7월 22일 판테렐리아 남방에서 폭탄이 명중되어 격침된 배다. 배는 600명의 군인, 64명의 승무원, 각종 구경의 탄환 6,000톤, 가솔린 1,000톤, 식량 1,000톤, 우편물 3천, 전차, 버스, 트럭, 오토바이 등 차량 320대를 싣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중한 것은 최초로 공군용으로 개발된 1,800킬로 폭탄과 최초의 200밀리포 중대였다. 바로 이것을 송두리채 잃고 만 것이다. 200명의 군인과 선원이 수장되었다. 이 예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사이에서 침몰된 수많은 경우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배에도 무덤이라는 것이 있다면 시칠리아로부터 아프리카까지의 길은 배의 무덤으로 메꾸어 질 것이다.   바로 이런 재화의 본거지는 말타섬이었다. 지중해에 있는 영국 해군 전력, 잠수함, 공군 등의 중요기지인 이 바위섬은 북 아프리카 영국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말타 섬은 아프리카 지역의 독일군의 용기를 꺾어버렸으며 지나친 표현인지 몰라도 롬멜의 패전은 해상에서 결판이 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말타는 초록빛 목장과 밀밭이 물결치는 전원적인 섬이었다. 바위 벼랑밑에는 어부들의 그물이 널려 있고 낡은 옛날 돌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섬은 비교적 인구밀도가 높은 섬으로 농부, 상인, 어부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영국은 1,800년에 이 섬을 손에 넣어 연방 최강의 해 공군기지를 구축했다. 그후 이 섬은 영국의 해 공군 병사들로 들끓게 되었고 영국 함정이 항구의 특색으로 등장했다. 거대한 독크와 선박 수리공장이 이 천연적인 항구에 세워졌다.   이 때문에 지중해를 「우리 내해」라고 호언장담한 무솔리니도 보복을 단단히 받았다. 결국 말타로 해서 지중해는 영국의 바다가 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바다를 건너 군인을 수송하려면 말타를 점령하든가 아니면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 기지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1940년 여름에 독일과 아울러 개전한 다음 가끔 이 기지를 공격하여 견제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극히 가벼운 폭탄 몇 개를 떨어뜨리는 정도의 공격으로…….   독일 지도부도 처음에는 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이 섬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본국이 히틀러의 아시카 상륙작전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거 큰 병력을 말타에 보낸 것이다. 이쯤되자 이탈리아의 말타 공격계획이 있었다고 해도 그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로 들어갔을 것이다.   도대체 점령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사실 이탈리아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공격을 결코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1940년 6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서 말타섬을 공격했다. 하나 그것은 결정타가 될 수 없는 빈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공격이 약 5개월동안 계속되자 말타섬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말타섬에서는 천연바위 동굴을 방공호로 쓰고 있었는데도 사상자가 400명을 넘어섰다. 말타섬 주민들은 투덜대기 시작했고, 폭격 후 정리작업에 협력하는 것조차도 거절할 정도로 분위기가 악화되었다. 3월에 이르자, 섬사람들은 굶주리기 시작했고 식량은 엄격한 통제하에 배급되었다. 독일군의 상륙침공이 예상되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영국 수뇌부는 이집트로부터 이 섬으로 보병을 이동시켰다. 북아프리카 전을 계속하기 위해 독, 이군은 반드시 상륙작전을 할 것 같았고 그나마도 언제 닥쳐올런지 모를 지경이었다. 보병 8개 대대와 1개 연대가 방위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3.7인치, 6인치 구경포 및 몇 문의 18파운드포가 있었으며 기갑병력으로서는 1개연대의 특별지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내용도 경전차 2대, 보병 엄호용 전차 4대밖에 없는 빈약한 지원이었다. 말타섬은 풍전등화격이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로서는 이때야말로 지중해에서 영국을 내몰아버릴 결정적인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레더 해군대장이 세운 계획은 무서운 것이었다. 말타를 점령하여 아프리카 전선에의 대량 안전 보급선을 확보하게 된다면 롬멜은 키레나이카 지구에서의 승리를 이집트 정복으로 확대시킬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는 처칠의 정치적 생명도 끊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무엇을 했던가? 1941년 6월 22일,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것이다. 곡물과 석유를 공급해 주고 아직도 독일을 적대시하지 않고 있던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대소련전쟁을 벌인 결과, 제10군의 일부는 시칠리아로부터 동부전선으로 이동되고 따라서 말타섬에 대한 공격은 약화되었다. 처칠은 요새시설을 강화하게 하고 해 공군은 즉시 롬멜의 보급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했다. 보급이 모자란 롬멜은 토부룩 전면에서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나 애초에 이 말타섬의 점령은 가능했던 것일까? 이 문제는 독일 전기에도 오늘날까지 자주 취급되고 있는 문제지만 필자는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1941년 5월 20일 독일군의 크레타 침공작전의 성공을 본다면 쉽게 인정할 수 있다. 면적으로 봐서 33배, 방비 시설도 완벽했던 크레타 섬을 공중 투하병력으로 점령했다. 이 사실은 세계 역사상 낙하산부대가 섬을 점령한 최초의 예가 되었다. 이것은 보기좋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 옛날 이 크레타에서는 신화 속의 이카르스가 하늘을 날으려고 하다가 바다 속에 추락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1941년 5월 20일 7시 30분에 화물 글라이더로 햇빛이 내려쪼이는 크레타 하늘에서 내려온 공수연대 제1대대장 코흐 소령은 바다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Ju 52수송기의 대공중함대가 공수대원들을 뿌리고 갔다. 몇 천이나 되는 이카르스의 자손들은 어마어마한 장비로 푸른 하늘에 흰 수를 아름답게 놓으면서 땅에 내려섰고 이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끝내 이 섬에 하이켄크로이츠의 기를 꽂았다.   공중에서 돌격 신호를 구식 나팔로 불러대며 내려온 이 하늘의 용사들을 처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용감하고, 무조건 믿을 수 있었던 이 공수병들은 독일 청년들의 꽃이 기도 했다.』   처칠은 이 패전에 놀라 황급히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보를 쳤다.   『미국의 원조가 배로 늘어나지 않으면 대영제국의 싸움도 이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사실 그후 처칠은 독일의 말타섬 상륙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그해 5월 28일 웨벨에게 전문을 보내어 유감스러우나 말타는 이제 잃은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앞으로 이집트와는 연락이 없는 것으로 알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격을 하지 않았다. 소련 작전이 말타 공격을 2차적인 것으로 밀어버렸으며 이러한 결과는 DAK에 결정타를 주게 된 것이다.   1941년 6월부터 10월까지 아프리카로 가던 독일, 이탈리아 수송선 중에서 40척(17만 9천톤)이 침몰했다. 9월에는 출항한 선박의 4할가까이가 없어졌다. 군사와 군수물자의 큰 손실에다 배도 부족하게 되었다. 10월에 이르자 롬멜군에게 보내지는 보급물자는 5만톤으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63%가 격침된 것이며 11월에는 더욱 줄어들어 3만 7천톤으로 축소되었는데 이는 77%가 영국 해군의 밥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의 중대성을 히틀러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야 비로소 총사령부에 경보가 내려지고 동부전선으로부터 구원자로서 켓셀링이 소환되었다.   바로 이 비극적 사태를 가장 실감한 것은 아프리카에 나가 있는 독일군이었다. 비록 전략적인 문제는 모르고 또 몇 만톤의 물자가 물 속으로 수장되었는지는 몰랐지만 보급물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전차나 가솔린 그리고 맥주는 벌써부터 오지 않고 있었으며 아프리카 사막생활에 적지않게 위로를 준 음식들도 차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때때로 하늘의 축복처럼 느껴지는 꿈같은 선물을 받기도 했다.   어찌되었던 말타섬은 독일, 이탈리아의 보급품을 거의 모두 바다로 수장시킨 원흉이었고 마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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