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맞아, 나 여자 좋아해. 이제 알았으니 어떡할건데?"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정말 내가 말하고 있는 게
맞는지, 타인의 목소리를 빌어 말하는 것만 같다.
낯설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표현. 참 상투적인 표현이라
생각해 자주 쓰지않으려 노력하던 말이지만..

지금 이 표현말고는 나의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내릴 다른
기똥찬 표현을 도저히 찾아 낼 수 없는 것이다.

눈앞이 노랗고, 심장이 철렁하는것만 같고, 토할것만 같다.
이 모든 게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나는 스물 여덟 인생에 처음 깨닫게 되었다.

"왜, 내가 너무 당당하게 인정하니 당황스럽니?
어차피 내가 인정하든 안 하든 넌 이대로 쪼르르 달려갈
생각이었잖아? 네 그 잘-난 여사원들 앞에서 날 안줏거리
마냥 씹어대며, 내가 당신네들을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지겠지!!
하! 여자면 다 좋아하는 줄 알고? 혹시나 그런 소리
하게되면 줘-도 안가진다하더라고 내가 직접 말하더라며
꼭 전해줬음 좋겠네? 응??"

말이 점점 빨라지고,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어느 새
비명을 지르듯 악악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안에 쌓여
있던 뭔가가 폭발한듯, 이렇게 말하면 말할수록 돌이킬
수없다고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외치고 있지만, 입은
수도꼭지가 고장난 듯이 말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나의 반응이 충격이었는듯, 재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빈정거리거나, 실소하며 잔인한 말을 던져낼 줄만
알았던 입이 굳게 닫혀있다.

저 입이 열리면 무슨 소리를 할 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극한의 공포감을 느끼며 나는 스스로 배수진을
쳐서라도 재은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니가 닥쳐올 현실을 감당하길
선택한다면 벌어질 일일거야. 니가 조금이라도 주변에
그런 낌새를 보이면, 난 기꺼이 너와 진흙탕에서
뒹굴거야.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을 지 궁금하지않아?
넌 네 말을 믿을거라고 확신하지? 어디 한번 해봐.
내 말을 믿지않는다 해도,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 "


"...아냐. 내가 하고싶은 일은 그게 아니야."

재은이 악에받친 내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그게 아니라니? 그게 아니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말을 꺼냈을까?

"그게 아니면? 도대체 뭔 -"

순간, 재은의 표정에서 씁쓸함이 살짝 묻어났다,
다시 사라졌다.

"만약.. 네가 정말 그렇다면.. 나도 괜찮은거 아냐?"

...?? 아까부터 뭔소리를 하는...

재은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하며 망설이는
수 초간, 나의 정신은 오직 그녀의 입술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영원같은 몇초가 흐르고, 망설이던 재은이 결심한 듯
진지한 눈을 만들며 말했다.





"다, 비밀로 해줄테니깐, 나랑 한번 만나보면..어때?"

재은이 드디어, 간절하게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