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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앙겔라 치글러 박사의 휴일

ㅇㅇ(114.201) 2017.08.03 00:36:45
조회 3017 추천 55 댓글 12
														


“박사님! 박사님! 일어나세요!”

쾅쾅쾅.
휴일 아침부터 문을 두드려대는 소리에 앙겔라는 머리를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래도 현관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계속 되었다. 쾅쾅쾅, 박사님! 연달아 들리는 소리에 신음을 흘리고서 눈을 가늘게 떠,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아침 8시 7분. 새벽 5시가 넘어서 겨우 잠든 그녀에게는 꼭두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박사님! 저보고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면서요! 37살 미모의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문 좀 열어주세요!”

앙겔라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머리가 쾅쾅 울리는 것 같았다. 뭐든 좋으니까 그저 잠에 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럴 수 있는 확률이 한없이 0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앙겔라는 일단 시도했다.

“박사님! 오버워치 병원 외과 과장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의학계의 기린아! 예쁘고 멋지고 잘생긴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깬 거 다 아니까 문 좀 열어줘요!”

결국 앙겔라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있다가는 소음공해로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겠다 싶어,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이웃집에 민폐였다.
네, 열어요. 현관으로 향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용케도 알아듣고 소음이 그쳤다. 이번엔 반드시 화를 내야지. 참고 참고 넘어가주니까 이제는 당연한 듯이 휴일 아침에까지 집에 쳐들어오려고 하다니. 앙겔라는 문을 열며 엄격한 소리로 말했다.

“하나 양, 제가 이렇게 기별도 없이 찾아오는 건 실례라고 몇 번을…….”
“박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말을 뚝 잘라먹고 아이가 열린 현관문 사이로 뛰어 들어와 앙겔라에게 안겼다. 이제는 5살 꼬마아이가 아닌데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만 19살 성인 여자애의 어택에 앙겔라는 휘청였다. 안 그래도 잠을 못 자서 기운 없는 몸에 아이의 활기찬 포옹은 타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앙겔라가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는 사이 아이는 앙겔라의 허리춤을 꽉 안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박사님, 살 빠졌어요? 3일 전보다 안는 감촉이 좀 별로인데.”

실은 살이 약간 빠지긴 했다. 논문을 쓰느라 밤을 며칠 샜더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본인도 어젯밤 샤워를 한 후 체중계에 올라가서야 알아챈 사실을 옷 위로 한 번 안아보고 알아채다니. 앙겔라는 그 사실에 순순히 감탄했다.

“1kg정도 빠지긴 했는데……”
“또 밤 샌 거죠! 저보고는 맨날 밤새지 말라고 해놓고선, 박사님이야말로 밤 좀 새지 마세요. 이제는 체력 걱정해야 할 나이인데…….”

걱정을 하는 건지 약을 올리는 건지 모르겠다. 앙겔라는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

“제 건강은 제가 알아서 챙겨요. 그보다 하나 양, 이렇게 아침 일찍 기별도 없이 찾아오면 실례라고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요?”
“저 연락했는데. 핸드폰 봐보세요. 문자 보냈단 말이에요.”

앙겔라는 침실로 들어가 침대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박사님?저 곧 도착요 ≥_≤』 10분 전에 보낸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뒤따라 침실로 들어온 아이가 그것 좀 보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양, 이건 연락이 아니라 통보잖아요.”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서 차에서 충전해서 보낸 문자예요. 전 박사님이 깨어 계실 줄 알았어요.”

앙겔라의 말 한마디에 시무룩해져서 대답하는 아이를 보니 더 이상 야단을 칠 수가 없었다. 사실 아이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지 마라'고 가르친 건 다름 아닌 앙겔라였다. 비록 14년 전에 가르친 말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한 말이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앙겔라는 대답하는 대신 휘청이며 침대에 무너지듯 앉았다. 아이가 침대 옆에 서서 재잘거렸다.

“박사님, 박사님, 아침 안 드실 거예요? 저 박사님이랑 아침 먹으려고 공항에서 바로 온 건데, 이렇게 주무실 거예요?”
“전 이틀 밤을 샜단 말이에요……. 좀 자게 놔둬요.”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눕히고 반쯤 이불에 파묻혀 웅얼거리는 앙겔라의 말을 들은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너무 무뚝뚝하게 말했나, 하는 생각을 한 순간 침대 매트리스 한 쪽이 푹 꺼졌다.

“피곤하시겠다. 제가 재워드릴게요.”
“혼자 잘 수 있어요.”
“저 어릴 때도 박사님이 재워주셨잖아요. 이젠 제가 재워드릴 차례에요.”
“애를 재울 때랑 어른을 재울 때랑 같을 수가 있나요?”
“누가 애 재우듯 재워드린대요?”

아이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낮아지더니, 쇄골을 어루만지는 뜨거운 손길이 느껴졌다. 앙겔라는 흠칫 놀라 몸을 빼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런 행동을 했냐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아니면 그냥 재워드릴까요? 어떤 게 좋으세요?”

아이에게는 그냥 내버려둔다는 선택지가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실랑이를 벌여봤자 도움될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과거의 무수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앙겔라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냥 재워줘요.”
“잘 생각하셨어요.”

아이가 흡족하게 웃고는 앙겔라의 몸 위로 얇은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 옆자리에 누워, 앙겔라의 머리를 제 팔 위에 얹고 다른 팔로 앙겔라를 끌어안고는 어린 아이에게나 하듯이 등을 도닥이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애들한테나 통하는 짓이니까 그냥 수면제 좀 달라고 하려고 했던 앙겔라는, 침대의 안락함과 아이의 따뜻한 온기에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후 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하늘 높이 뜬 태양의 햇볕이 창을 넘어 침실에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몇 번 눈을 깜박이는 동안,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재워준다더니 어느새 자기도 잠에 빠져든 모양인지, 아이는 기다란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어릴 적의 모습이 거의 남지 않은 아이지만, 자고 있을 때만큼은 14년 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아침엔 분명 화를 내려고 했는데, 순한 얼굴을 보자 그럴 마음이 사르르 풀어 녹아 없어졌다. 아무래도 아이의 버릇이 나빠진 건 길을 잘못 들인 제 탓인 것 같다고 속으로 자책했다.

밤을 새면서 먹었던 것이 커피뿐이라, 앙겔라는 허기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이도 아침 식사를 같이 하려고 찾아왔다고 했었다. 깨어나면 배가 고플 테니 식사 준비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이의 팔이 제 허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결에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건히 느껴졌다. 앙겔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물 좀 마시러 갈게요.”

아이가 잠결에도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스르륵 팔을 풀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앙겔라는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를 확인한 후, 간단히 오므라이스를 만들기로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14년 전, 작은 인연으로 인해 잠시 제 곁에 머물다 떠나갔던 아이는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앙겔라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앙겔라의 일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다른 사람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온 앙겔라는 아이에게 속절없이 휘둘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덧 아이가 집에 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몇 번이나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이는 순순히 밀려나는 법이 없었다.

오므라이스를 완성해서 식탁 위에 올려놓으니 음식 냄새를 맡은 건지 아이가 눈을 부비며 비틀비틀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로 용케도 앙겔라가 서 있는 곳으로 오더니 답삭 안긴다. 이렇게 보니 며칠 밤을 샌 것은 앙겔라가 아니라 아이 같았다. 제 체온보다 조금 높은 온기가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이 불편해져서 아이를 떼어내려는데 아이가 물었다.

“박사님… 잘 잤어요?”
“네, 잘 잤어요. 하나 양은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요?”
“아뇨… 깰 거예요. 잠깐만요.”

아이가 앙겔라의 품 안에서 웅얼웅얼 거리더니 한번 꼭 껴안고는 품을 벗어났다. 확실히 잠이 가신 것 같았다. 젊어서 그런지 전환이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앙겔라는 식탁에 앉았다.

아이는 식사하는 동안 미국에서 열렸던 게임대회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앙겔라는 게임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아이가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아이는 그런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 식사 시간 내내 제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사를 끝낸 뒤, 아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앙겔라는 거실을 치웠다. 이틀 밤을 새며 논문을 써댄 탓에 거실이 어지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논문 쓸 때 참고했던 서적과 참고자료를 정리하는데, 아이가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박사님, 이거 뭐예요?”
“아, 그거. 집주인이 보낸 거예요.”
“와, 7천만 원이나 올려 달래요? 이거 순 사기꾼 아냐?”
“요새 부동산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앙겔라가 남 일 이야기 하듯 말하는 동안 아이는 자못 제 일인냥 심각한 눈으로 우편물을 읽었다. 논문 준비로 저 우편물을 깜박하고 있었다. 서울의 아파트값은 너무 비쌌다. 근교의 아파트일 뿐인데도 1년 만에 7천만 원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는 횡포나 다름없었다. 통장 잔고가 어떻게 되더라? 적금 만기가 얼마나 남았지? 머릿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박사님, 걱정 말아요. 내가 이럴 줄 알고 다 계획 짜놨어요.”
“계획? 무슨 계획요?”
“박사님 노후대책이요.”
“…웬 노후대책이에요? 그리고 저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 먹은 건 아닌데요.”

요 근래 나이 이야기만 거론되면 울컥하는 것 같다. 앙겔라는 아이의 말에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울컥하는 제 자신을 탓했다. 나이가 들수록 속이 좁아지는 것 같아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방금은 말실수예요. 인생 설계요, 인생 설계.”
“…왜 제 인생 설계를 하나 양이 대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네요.”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세요, 박사님. 박사님 전세계약 끝나면 우리 같이 살아요. 박사님 연구하기 좋게 병원 근처로 집 알아보고 있는 중이거든요. 15층 이상의 아파트 중에서 뷰가 좋은 곳으로 찾고 있어요.”

서울 한복판에서 15층 이상의 아파트란다.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아파트 가격에 앙겔라가 놀라는데 아이가 말을 이었다.

“박사님은 몸만 오면 돼요. 아, 하지만 가구는 같이 고르게요. 박사님 취향도 반영해야 하니까. 벽지랑 마루도 박사님이 고르실래요? 제가 그쪽 센스는 좀 많이 부족해서.”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이야기 아닌데요? 처음 이 아파트 놀러 왔을 때 계약 언제까지냐고 제가 물었잖아요. 그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듣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이 집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앙겔라의 인생 설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은 앙겔라에게 아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박사님, 인생의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아요. 영앤리치핸썸, 박사님에게 필요한 건 그 진리라고요!”
“영앤리치핸썸…….”
“그리고 그게 바로 저죠!”
“어리고, 부자고, 예쁘다고요?”
“그렇죠.”

뭐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다. 앙겔라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종종 아이를 상대하는 것이 철야로 수술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앙겔라의 인생에 아이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려고 할 때가 특히 그랬다. 어쩐지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앙겔라는 눈앞의 아이를 살폈다. …확실히, 하고 있는 말은 다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앙겔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면 이대로 끌려가버릴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아이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박사님, 고민할 것 없어요. 연하랑 사귀면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요새 들어 아이는 마치 세뇌를 시키려는 듯이 앙겔라에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을까. 어차피 대꾸하지 않아도 열심히 종알종알 거릴 것이 뻔해서 앙겔라는 장단이나 맞추자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한번 뭐가 좋다는 건지 들어나 보죠.”
“일단 노후 대책이 되잖아요.”
“…그건 '확률적인' 노후 대책이죠. 아니, 그것보다 보통 사랑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요? 갑자기 웬 세속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최소한 첫마디는 '제가 박사님을 사랑하니까요' 같은 앙겔라 입으로는 내뱉기 민망한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물질적인 이야기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박사님이 집 문제로 고민 하시길래……. 그리고 확률적이 아니에요. 절대적인 거죠. 전 죽어도 박사님밖에 없거든요. 어때요, 낭만적이지 않아요?”
“제 나이의 절반 정도밖에 못 산 사람에게서 듣는 한, 낭만적일 수가 없는 말 같네요.”
“전 제 인생의 약 75%를 박사님 생각만 하며 살았는데…….”
“…그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죠.”
“칫. 그럼 다음으로, 어린 애인이랑 같이 있으면 젊어지는 느낌――이 아니라, 알았어요 박사님, 지금 말이 헛나온 거예요. 박사님은 충분히 젊어요! 아, 아무튼 활기를 느낄 수 있잖아요!”

오전에 잠을 보충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앙겔라에게 아이가 손까지 내저어 보이며 말을 무마했다. 또 속 좁게 나이 이야기에 발끈하고 말았어. 앙겔라는 다시금 아이의 페이스에 자꾸 휘말리는 제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또요?”
“기분이 안 좋을 땐 애교로 풀어줄 수도 있고, 또 본인 취향대로 키울 수도 있잖아요!”
“마지막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릴 적 잠깐 동안이었지만 하나 양을 맡은 적 있는 저로서는, 하나 양이 제 취향대로 컸다고는 도저히 말 할 수가 없어요.”
“괜찮아요, 박사님이 제 취향이니깐요! 완전 100% 적중 하트!”

애교스럽게 두 손으로 하트모양까지 발사하는 아이에게 앙겔라는 헛웃음밖에 지어줄 수 없었다. 하기사 그 어린 나이에도 앙겔라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아이였다. '결혼해줘요!'하면서 쫓아다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앙겔라는 14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이런 식으로 그 기억이 현실화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앞으로 남은 시간이 훨씬 많잖아요. 지금부터 취향대로 키우면 되죠. 어때요 박사님, 어린 애인 하나 키울 생각 없어요?”
“없어요.”
“너무해! 제가 이렇게 열심히 자기PR하는 건 박사님한테 뿐이라고요!”
“하나 양이 조금만 눈을 돌려도 그런 헛수고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죠, 박사님. 저한테는 박사님뿐인데 제가 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요?”

또다시 끝없는 되돌이표에 빠질 것 같아서 앙겔라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이런 대화에 시간을 뺏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번 휴일에는 다음 주에 있을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사러 나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앙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아이가 뒤를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갑자기 옷은 왜 갈아입으시게요, 박사님? 아, 저 이 옷 좋아요. 검은색 투피스! 이거 입으면 박사님 엄청 예뻐 보이거든요! 원래도 예쁘지만, 여기 볼레로랑 맞춰 입으면 완전 여신 강림인데!”

낯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아이 때문에 앙겔라의 얼굴만 달아올랐다. 베이직한 셔츠에 슬랙스를 챙기려는데 아이가 기어코 투피스를 쥐어준다. 앙겔라는 등 뒤를 꾹꾹 밀어대는 아이 때문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이가 드라이기를 세팅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앙겔라가 하겠다고 해도 기어코 자기가 하겠다고 우겨대는 바람에 앙겔라는 아이에게 머리를 맡기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서비스는 좋은데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뭔가… 강제로 봉양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찝찝해지려는 기분을 애써 떨치는 동안 아이는 깔끔한 솜씨로 앙겔라의 머리를 말리고 예쁘게 묶기까지 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하나 양.”
“뭘요. 박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매일매일 머리 말려드릴 수 있는데.”
“사양할게요.”
“지금 받아들이시면 두피 마사지까지 서비스로 끼워드릴 수 있어요.”
“사양할게요.”
“에이…….”

입을 삐쭉이는 아이를 뒤로하고 차키를 챙기려는데 아이가 얼른 앙겔라를 따라와 말리며 말했다.

“박사님, 저 차 가져왔어요. 제가 태워다드릴게요. 그런데 어디 가시게요?”
“백화점에 잠깐…….”
“드디어 저랑 가구 보러 가기로 마음먹으신 거예요?”
“아뇨, 다음 주에 있을 세미나에 입고 갈 옷 좀 사려고요.”
“아, 아쉽다. 아무튼 가요. 모셔다 드릴게요.”

앙겔라는 차키를 내려놓고 제 차키를 집어드는 아이를 따라 앙겔라는 집을 나섰다.

아이는 어려서는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더니, 3년 전부터는 게임 제작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실력이 좋았던 건지, 1인 제작으로 출시한 게임이 입소문을 타서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돈을 쥐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게임 제작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건 알았지만, 서울 한복판에 아파트를 살 정도로 벌다니……. 앙겔라는 새삼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아이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늘따라 유별나게 안전운전을 했다. 지난번 차에 탔을 때는 한손으로 휙휙 운전해대는 폼이 마치 도시 드라이버 같더니, 웬 일일까. 안전제일주의인 앙겔라로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지만 왜 갑자기 그러는지 몰랐다. 백화점에 도착해 주차를 끝낸 아이에게 앙겔라가 물었다.

“하나 양, 왜 갑자기 안전운전하게 됐어요?”
“박사님이 저번에 조심해서 운전하라면서요.”
“네?”
“전에 드라이브 갔을 때요. 집에 바래다 드렸더니 내리면서 그런 말씀 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운전 스타일에까지 뭐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드라이브 내내 꾹 참다가 마지막에 지나가듯 말했는데 용케도 그걸 기억했다가 운전습관을 고치다니. 한번 들인 운전습관을 고치는 게 힘들다는 걸 아는 앙겔라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이게 뭐라고 조금 감동받고 말았는데, 앙겔라는 그런 스스로가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져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백화점에 발을 들였다.

*

백화점을 빙빙 돌면서 느낀 것은 아이와의 체력 차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는 매장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예쁜 옷을 볼 때마다 앙겔라에게 입혀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앙겔라는 최대한 부드럽게 아이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결국 재촉에 못 이겨 몇 번 시착해봤다. 아이의 눈썰미가 제법이었던지 입은 옷마다 어울려서 속으로 놀라는 사이에 아이는 열심히 카드를 긁어댔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가 돈을 물쓰듯 펑펑 쓰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말렸지만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옷을 대여섯 벌 산 후에야 아이를 말릴 수 있었다. 얼마 돌아다닌 것 같지도 않은데 아이를 말리는 데에만 모든 체력을 다 써버린 것 같았다.
겨우 1시간 정도 쇼핑을 했을 뿐인데 앙겔라는 진이 다 빠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백화점 안 카페로 향했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주문한 커피를 받아온 아이에게 앙겔라가 말했다.

“하나 양, 이런 걸 물어도 되나 싶은데…….”
“뭐든 물어보세요, 박사님. 박사님이 저한테 못 물어보실 건 없어요.”
“그럼 물어볼게요. 자산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죠? 하나 양이 돈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아요.”
“재무설계사한테 상담 받고 여기저기 나눠서 재테크 하는 중이에요. 자세한 건 이따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냥 하나 양이 어려서 돈을 너무 많이 벌어 흥청망청 써버릴까 걱정이 되어 한 말이에요.”

아이가 그 말을 듣고 싱긋 웃더니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는 앙겔라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박사님. 전 인생설계 하느라 허튼 곳에 돈 쓸 생각 없거든요. 박사님 인생까지 제가 다 책임져 드릴게요!”
“제 인생은 제가 충분히 책임질 수 있어요.”
“물론 박사님은 그럴 능력 있으시죠. 하지만 인생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여차할 때를 대비해서 든든한 보험 하나 들지 않으실래요?”
“사양할게요.”
“아, 이것도 안 통하네.”
“통할 리가 있나요…….”

진심으로 애석해하는 아이의 얼굴을 앙겔라는 건너다보았다. 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한테 이렇게 목을 매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와 재회한 지 8개월, 아이는 질리지도 않고 앙겔라에게 한결같이 다가왔다. 아이의 행동을 한때의 기행으로 생각했던 앙겔라는 어느 순간 아이가 100% 진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인정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인 일이지만, 어쨌든 아이가 보이는 진심은 진짜 같았다. 밀어내도 밀어내도 지치지 않고 다가오는 아이가 신기하기도 했다.

“왜요, 박사님?”
“그냥, 하나 양이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해요?”
“왜 저인가 싶어서요.”

아이는 앙겔라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녀를 보았다. 앙겔라는 잠시 망설였다. 해도 되는 말일까? 괜히 이런 걸 물어서 아이한테 여지를 주는 건 아닐까? 하지만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휘둘리고 있다가는 정말로 아이의 인생계획에 동참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나 양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 양은 어리고, 돈도 많고, 예쁜데. 왜 한참이나 나이도 많고 성별도 같은 저한테 목매는지 모르겠어서요.”
“박사님은 아침에 일어날 때 무슨 생각을 해요?”
“네? 갑자기 무슨…….”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박사님이랑 같이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
“맛있는 걸 먹어도, 재밌는 걸 봐도, 대회에서 우승해서 축하를 받을 때도, 항상 박사님이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어릴 때부터 항상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냥 그렇게 커 왔어요. 그게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막연하게 꿈꿔왔던,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의 마음이 박사님이랑 재회하고 나서 명확히 그려졌어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동자는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오래도록 소중하게 품어왔던 소원을 말하듯이. 앙겔라는 이쯤에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알아요. 박사님한테 제가 너무 들이대고 있는 거. 박사님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그냥 마냥 다가가고만 있는 거. 그런데 어떻게 해요. 좋아서, 맨날 보고 싶어서 애가 닳아 죽겠는데. 박사님은 안 그래요? 나 보고 싶은 생각 조금도 없어요?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저는…….”

앙겔라는 입을 달싹였으나 그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거절의 말을 하기엔 아이가 너무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앙겔라도 평일, 휴일 가릴 것 없이 시간만 나면 저를 찾아오는 아이가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앙겔라 자신의 삶에 아이를 더한다 해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아이는 너무 거리낌 없이 다가온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반대로 항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앙겔라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달래주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받아들이기엔 아이의 앞날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이제 막 피어나는 아이를 받아준다는 것은 그 창창한 미래를 제 안에 가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앙겔라는 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거절을 해야 하는데 아이가 상처받을 것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서 그럴 수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앙겔라에게 아이가 말했다.

“박사님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과연 알고 있을까? 의구심 어린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앙겔라에게 아이는 웃어보였다.

“박사님, 나 어른이에요. 박사님이 보기엔 아직 어릴지 몰라도,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라고요.”
“하나 양은 아직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해보지 못해서 그러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다보면 지금 감정이 한 때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어렵게 꺼낸 말에 아이의 눈동자가 슬프게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앙겔라는 속이 쓰렸다. 대체 왜 평화로운 휴일에 제 속을 긁고 아이의 심장을 시리게 하면서 이러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어른이 해야 하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었다. 아이는 그런 앙겔라의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하듯이 한참이나 빤히 눈을 맞추고 있다 입을 열었다.

“왜 꼭 다른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고 생각하세요? 내 운명은 박사님인데. 굳이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어요?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요.”
“하나 양…….”
“내 눈에는 이렇게 명쾌하고 간단한 게, 왜 박사님 눈에는 안 보일까?”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는 마지막 말은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물음이었다. 앙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곤한 몸에 마음까지 피로해지자 더 몸이 쳐지는 것 같았다. 휴일에 기력을 회복하려 했던 제 일정이 완벽히 물건너갔음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침울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앙겔라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훌륭한 의학박사였지만, 진심과 진심이 오가는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서툴기 짝이 없었다. 평생을 남들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기에 더 그러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이는 개구진 표정으로 씩 웃으며 눅눅한 분위기를 날려버렸다.

“제 걱정은 제가 할 테니 박사님은 이제 그만 영앤리치핸썸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세요.”
“또 그건가요…….”
“아, 이거 진짜 먹히는 건데. 길 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옳다고 하는 말이란 말이에요.”

앙겔라는 조용히 아이의 말을 듣다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

“연상이 취향일 수도 있잖아요.”
“어, 그럼 안 되는데! 박사님, 나이 많으면 꼰대짓만 해대서…가 아니라, 그래요, 아, 연상미! 그게 있긴 한데, 박사님이 이미 연상미를 갖추고 있어서 더 필요하진 않잖아요.”

아이가 허둥지둥 말을 바꾸며 무마했지만 앙겔라는 이미 들은 후였다. 눈초리가 절로 가늘어졌다.

“제가 꼰대 같나요?”
“어유, 아니죠! 박사님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남들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박사님이 절대 그럴 리가 없죠. 그냥 일반론을 이야기 한 거였어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그럴지도 모르죠.”
“박사님이 하는 거라면 그래도 좋을 것 같아요. 박사님 말이라면 저 완전 말 잘 듣는데. 진짜 말 잘 듣는 연하 애인 두실 생각 없으세요?”
“사양할게요.”
“아, 지금 받아 가시면 집도 드리고 차도 드릴 수 있는데.”
“나중에는 안 주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때도 드릴 거지만, 이왕이면 싱싱할 때 가져가는 게 좋잖아요.”

이제는 자기 자신을 마치 청과물에서 파는 과일에 비유하는 아이를 보며 앙겔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 말로는 못 당하겠다. 사실은 아까의 무거운 대화로 더 이상 맞받아칠 기운도 없었다. 앙겔라는 그만 저녁식사나 하러 가자며 일어섰다. 아이가 앙겔라에게서 짐을 뺏어들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짐도 잘 들어주고 말도 잘 듣는데, 진짜 혹하지 않아요?”
“그런 말만 안 했어도 조금은 혹했겠네요.”
“다음엔 참고하도록 할게요.”

진지하게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이러다가 진짜 제 취향에 맞출까봐 앙겔라는 식은땀이 다 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어서 밥이나 사주고 보내버려야지. 앙겔라는 서둘러 백화점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

식사는 무난했다. 아이는 앙겔라에게 어디 세미나를 가느냐고 물었고, 앙겔라는 대답을 해주며 어떤 세미나인지 설명했다. 아이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귀여워보이기도 했다.
아이는 여기서도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앙겔라가 단호하게 결제했다. 어린 아이에게서 옷 선물에 식사 대접까지 받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이는 입술을 삐쭉이며 어차피 제 돈이 앙겔라의 돈이라며 쫑알거렸지만, 앙겔라는 열심히 무시했다. 오늘은 이미 휘둘릴 대로 휘둘린 후였다. 더 이상 휘둘릴 수는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뭐가 많았던 하루 같은데, 막상 한 일은 백화점에서 옷을 사고 밥을 먹은 것밖에 없었다. 앙겔라는 아이의 출현으로 인해 자신의 휴일이 순식간에 증발했다는 걸 깨닫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현관문까지 쫄래쫄래 따라오던 아이가 제 눈치를 봤다.

“박사님, 저 오늘 자고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조용히 잠만 잘게요.”
“잠만 안 자면 뭘 하게요?”
“박사님 얼굴 감상?”
“…그냥 돌아가요.”
“대신 얌전하게 잘게요. 네? 박사님~.”

아이가 칭얼거리며 졸랐다. 불리할 때만 꼭 어린아이 행세다. 앙겔라는 어이가 없었지만 한순간 오늘 커피숍에서 아이가 보였던 시무룩한 눈동자가 떠올라서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아이가 희희낙락하며 집안에 발을 들이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결국 여지를 주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생각에 한숨도 나왔다.

“옷은 제가 걸어놓을게요.”
“그래줘요, 그럼.”

앙겔라는 피곤에 찌들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씻으러 갔다. 씻고 나오니 아이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둔 뒤였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히 지쳐서 침대로 가서 곧바로 누웠다. 그러나 몸이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잠이 오지 않았다. 앙겔라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약통을 집었다.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병원에서 수면제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새 논문 준비로 계속 철야를 했더니 생체리듬이 틀어져 고생하던 중이었단 사실도 뒤늦게 떠올랐다. 앙겔라가 한숨을 쉬는 사이에 아이도 씻고 나왔다.

“어? 아직 안 주무셨네요?”
“네…….”
“그거 뭐예요? 사일레노? 이거 수면제 아니에요?”

앙겔라가 멍하니 쥐고 있는 통을 발견한 아이가 의아한 듯 목소리를 내더니 약통의 정체를 밝혀냈다. 앙겔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수면유도제였지만, 어쨌든 아이에게는 그게 그거일 터였다. 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앙겔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박사님, 잠 계속 못 주무셨던 거예요?”
“그냥, 논문 때문에 잠깐 그러는 거예요.”
“아, 피곤하셨겠다. 이리 누워요. 제가 재워드릴게요.”

또 그놈의 애 재우듯 재우려는 모양이었다. 앙겔라는 됐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피로로 점철된 몸은 어느새 아이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에 눕혀지고 있었다. 그저 잠들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그래서 그냥 이번에도 상황에 휩쓸리기로 했다. 아이가 제 삶에 점점 발을 들여놓는데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을 그제야 인정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아이가 하는 대로 눈을 감고 팔을 벴다. 규칙적으로 등을 도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앙겔라는 아침에 그랬듯 점점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이가 이미 제 삶에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고. 최소한 휴일 하루 종일 휩쓸리고도 불평이 나오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계획했던 휴일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아이와 보낸 휴일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앙겔라는 점차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끝.



원래 발랄하고 가벼운 분위기로 가려고 했는데 타이핑하면서 듣던 노래가 엄청 우울한 노래라 분위기가 이상해져버림…
나중에 고칠 수 있으면 고칠게…내일부터 바빠져서 글 잘 못 올릴 것 같아 마지막으로 올리고 감. 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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