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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길들이기 2

ㅇㅇ(223.39) 2017.08.04 14:10:17
조회 1971 추천 45 댓글 9
														

건조한 메르시가 보고싶어 쓴 글 2







요리 학원을 다니는 걸까?

앙겔라는 겹치는 음식이 없이 매주 달라지는 요리의 향연에 드디어 의구심을 품었다. 맛도 맛이었지만 다양한 레퍼토리는 도저히 19살 여자애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아이는 주말 아침부터 앙겔라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한 손에는 게임기를, 다른 한 손에는 냄비를 들고 당당하게 현관 벨을 울려대는 통에 앙겔라는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마치 제 집 드나들 듯 자연스럽게 실내화를 찾아 신고서, 항상 앉는 소파 자리에 앉아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매번 앉는 자리가 똑같아서 이제는 그 자리가 아이의 지정석처럼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어느 날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를 피해 앉는 제 자신을 느끼고서 앙겔라는 이마를 짚었었다.

이것도 길들이기의 한 수법인가? 처음부터 모두 다 생각하고 행동한 걸까? 한 번 의문이 떠오르자 아이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무해한 웃음을 띠며 바지런히 음식을 가져다 나르는 아이가 생각보다 영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가끔씩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정말 슬프게도, 앙겔라의 위는 아이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하나 양은 따로 요리를 배웠나요?”

한참 게임에 집중하던 아이가 앙겔라의 말에 귀를 쫑긋하더니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와, 박사님 지금 그 질문이 저에 대해 처음 물어보는 질문인 거 아세요?”

…괜히 물었다. 앙겔라가 후회하는 사이 아이가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요리하는 게 취미였어요. 부모님이 바쁘셔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이것저것 시도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나중엔 학원도 다니게 되고, 자격증도 따게 되던데요.”
“자격증도 있나요?”
“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제빵 제과까지 땄어요.”

그 많은 걸 겨우 만 19세밖에 안 되는 애가 다 취득했다고? 무슨 요리왕도 아니고……. 놀라움에 할 말을 잃는데 아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모르는 요리더라도 요새는 인터넷에 레시피가 많으니까 보고 따라하면 얼추 맛은 낼 수 있거든요.”
“…말은 고맙네요.”
“근데 정말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박사님은 매번 잘 먹었다고만 하시니까 도통 취향을 모르겠어서.”
“딱히 가리는 게 없어서요.”

그러니까 3분 요리로 삶을 연명했지. 지금 와서는 쳐다도 안 보는 것들이지만, 아무튼 예전에는 그랬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아이의 요리를 먹기 시작한 지 5개월이 넘어간다. 앙겔라는 달력에 시선을 주며 시간의 흐름에 새삼 놀랐다.

2개월 전, 아이를 한 번 내쳤다가 어영부영 다시 받아들인 이후로 아이는 조심스럽게 앙겔라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아이의 정성을 단지 귀찮다는 이유-물론 그것 뿐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이유가 그랬다-로 내던졌던 일은, 아무리 건조한 앙겔라라고 할지라도 죄책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제게 드러내는 호감을 그냥 묵인하기로 했다.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으나 무시와 묵인은 적어도 앙겔라에게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37년간 견고하게 지켜왔던 선을 조금이나마 허물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점심은 뭐 해드릴까요?”
“글쎄요, 하나 양이 하는 거라면 뭐든 맛있을 것 같은데요.”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짜였다. 아이는 앙겔라의 칭찬에 꽃이 피듯 활짝 웃었다. 새삼 꽃처럼 싱그러운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중에서 골라보세요.”
“…그럼 양식이요.”
“음, 오소부코 어떠세요? 트러플 리조또랑 같이 해드릴게요.”
“손이 너무 많이 가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어차피 연습하는 건데요, 뭐.”

또 그놈의 '요리 연습'이다. 앙겔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아이가 하는 것이 진짜 요리 연습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깨닫고 있었다. 아이는 앙겔라에게 대가없는 호의를 베풀며 부담스러워하는 그녀를 위해 저 핑계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앙겔라도 그걸 뻔히 알면서,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튼 편리한 말이긴 했다. 아이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으니까.

“그래요, 그럼.”
“그러면 이따가 올게요.”

아이가 소파에서 폴짝 일어서는 것을 보며 앙겔라는 차키와 지갑을 챙겼다. 현관으로 향하는 아이의 뒤를 따라가자 아이가 의아한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앙겔라는 아이의 맑은 눈빛을 외면하며 말했다.

“마트 갈 거면 같이 가요. 생각해보니 식비도 내지 않고 얻어만 먹었잖아요. 계좌번호 알려주면 그동안의 식비 보내줄게요.”

아이가 그 말에 후다닥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박사님! 1인분이랑 2인분이랑 별 차이 없어요. 저 혼자 있을 때도 그 정도 만들어서 먹는걸요.”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어떻게 주말마다 귀찮게 그럴 수 있죠?”
“귀찮단 생각 안 했는데……. 아무튼 됐어요. 그러지 마세요.”

아이는 몹시도 완강하게 거부의사를 밝혔다. 앙겔라 앞에서는 왠지 한수 접고 들어가곤 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아이의 낯선 모습에 앙겔라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적어도 오늘부턴 내가 사게 해줘요.”
“엥… 진짜 그럴 필요 없는데. 박사님, 저 돈 많아요. 우리 집에도 돈 많고요. 요리는 취미생활이니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하긴, 아이의 부모가 대기업 이사라는 말은 들은 적 있었다. 아이를 귀애하는 삼촌도 학교 이사장일 정도고. 그래도 그건 그거, 이건 이거였다.

“저보고 한참 어린 학생한테 얻어만 먹으란 건가요?”
“대신 박사님은 저랑 같이 식사해주잖아요. 박사님 없으면 저 혼자 밥 먹어야 하는데. 저 혼자 먹는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아이의 말에 앙겔라는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아이는 지나가는 말로 부모님이 집에 계시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는 말은, 처음 3개월간 아이는 혼자 밥을 먹었다는 소리였다. 새삼스레 죄책감이 무게를 더한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먹자고 할 걸. 이제와선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앞으로도 와서 먹어요, 그럼.”
“아싸! 진짜죠, 박사님? 여아일언중천금! 그 말, 저 그 말 철석같이 믿을 거예요!”

아이가 신이 나서 말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 그런 말을 섣불리 해버렸냐는 후회와, 이렇게 좋아하는데 밥 정도 같이 먹는 게 뭐 어떠냐는 생각이 서로 엉켰다. 요새 들어 아이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지는 경우가 잦았다. 앙겔라는 제 심경변화에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마트나 가죠.”
“네-.”

앙겔라의 말에 아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 한 번 아이가 꽃다운 나이임을 실감하는 앙겔라였다.

*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는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으로 붐볐다.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해서 집 앞 슈퍼에도 자주 가지 않는 앙겔라로서는 마트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카트를 밀고 와서 앙겔라의 옆에서 솜씨 좋게 밀며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자 한결 편하게 마트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첫인상과는 딴판으로 배려를 잘 하는 아이었다. …아니, 제게만 이렇게 배려하는 거겠지. 처음, 아이가 양호실에 들락날락하는 걸 알게 된 동료 교사들이 앙겔라를 측은하게 여기던 것으로 보아 아이의 평소 행실이 그리 좋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네?”
“학교에서도 이렇게 굴면 좋을 텐데요.”
“저 박사님 앞에선 되게 착하게 구는 건데…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아뇨, 제 앞에서가 아니라 평소 학교생활을 말하는 거였어요.”

아이는 그 말을 듣자 재미있는 소리를 들은 것 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와! 박사님, 방금 진짜 선생님 같았어요.”
“…임시라도 교사는 교사예요.”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저한테 그런 소리 안 하는 걸요. 다들 안 그러는 척 하면서 눈치나 보고, 제가 뭘 하든 못 본 척 하고.”

아이가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사립학교라 그런지 이사장의 입김이 세서 골치가 아프다고 했던 아나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사장이 그토록 아끼는 조카니, 불똥이 튈까봐 다들 쉬쉬하는 거겠지. 앙겔라는 한숨을 쉬었다.

“전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었는데, 1학년 때부터 그런 식으로 태도에서 차별을 드러내니까 다른 애들하고 사이가 붕 떠버리더라고요. 딱히 특별대우 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담배는 왜 피우게 됐나요?”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학교에서 그렇게 되어버리니까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요. 어른들은 답답할 때마다 담배를 피우면 속이 나아진다고 하니까, 그냥 저도 피워본 거죠. 그건 후회 안 해요.”

앙겔라가 눈썹을 치켜떴다.

“담배 끊었다면서 잘도 그런 소릴 하네요.”
“왜냐면 담배 덕분에 박사님이랑 만났잖아요.”
“…….”
“사실 박사님이 처음 학교 왔을 때도, 그냥 그저 그랬거든요. 어차피 똑같은 사람이겠지 싶었고. 그런데 아니었어요. 박사님은 나를 봐줬잖아요.”
“그건…….”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다. 아이와의 일이 있고 나서도 몇 번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보긴 했지만, 그냥 지나치곤 했다. 사실 아이의 경우가 특별한 것이었다. 학기 초라 새삼 교사로서의 사명감이라도 들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저 한번 뿐이었던 변덕. 그게 아이에게는 그렇게 큰일이었을까. 아이의 사정을 알게 되면 될 수록 자꾸 마음속의 선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앙겔라는 괜히 입술만 깨물다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아이가 가진 환상을 부셔주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란 생각 하에서였다.

“…그건 단순한 변덕이었어요.”
“알아요.”

아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놀라는 사람은 앙겔라였다.

“알고 있다고요?”
“네. 박사님은 딱히 다른 사람한테 관심 갖고 다가가는 타입이 아니잖아요.”
“…알면서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죠?”
“계기는 계기일 뿐이에요, 박사님. 중요한 건 박사님이 제게 말을 걸었다는 거고, 저는 그런 박사님이 좋아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박사님을 보고 있으면 뭔가, 이것저것 막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걸 보고 매력 있다고 하죠?”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해대는 말에 앙겔라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이상했다. 매력 있단 소리도 수없이 들어온 그저 그런 칭찬 중 하나였는데, 이게 뭐라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는지.

“그리고 사실 박사님의 그런 성격이 좋기도 해요. 곁을 잘 내주지 않지만, 한번 마음 열어주면 끝까지 곁에 있게 해줄 것 같거든요.”
“…확률이 몹시 낮은 희망적인 해석이네요.”
“그렇게 낮기만 한 확률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가 씩 웃으며 앙겔라를 올려다봤다. 앙겔라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앙겔라는 아이를 이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내치기엔 조금 늦은 것도 같았다. 게다가 겨우 말 한마디에 태도를 바꾸어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뭔가 어른답지 않다고 느껴졌다. 같이 식재도 사러 온 마당에 그런 태도 변화를 보이는 것도 좀 그렇고. …순간, 뭐든 결국 핑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아이는 심사가 복잡해진 앙겔라를 눈치 채기라도 한 듯, 그 다음부터는 별 말 없이 마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기나 채소 등을 고르기 시작했다. 식재를 유심히 고르는 사이 앙겔라가 잠깐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이 고기가 왜 더 맛있는 부위고 더 질 좋은 것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지나가던 주부들이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을 정도로 알기 쉬운 설명이었다. 앙겔라는 고기나 채소의 신선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가 설명해주는 것이 어쩐지 귀엽게 보여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삭품관을 한 바퀴 돌았을 땐 카트가 제법 채워져 있었다. 스낵 코너를 지나는데 앙겔라의 눈에 익숙한 제품명이 써진 사탕이 들어왔다. 별 생각 없이 그걸 집어 들어 카트에 넣자 아이가 놀란 눈으로 앙겔라를 보았다.

“…? 왜요?”
“아니……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카트를 미는 발걸음이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앙겔라는 의아한 마음으로 아이의 옆을 걷다가 문득 눈치 챘다. …아이가 제 가운에 잔뜩 넣어주곤 하던 사탕이었다. 어쩌다 한 번 먹어보니 맛이 나쁘지 않아서 집어든 건데, 아이에게는 사뭇 다른 의미로 와 닿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불러 세워서 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니 착각하지 말라고 일장연설 하기에도 웃겼다. 앙겔라는 오늘 하루 자꾸만 한숨을 쉰다고 생각하며 길게 숨을 내쉬며 아이를 따라 걸었다.

*

마트에서의 계산은 아이가 했다. 앙겔라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들었을 땐 아이가 이미 카드를 건넨 후였다. 난색을 표하는 앙겔라에게 아이는 다음번엔 앙겔라가 사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다음 약속을 잡았다. 말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정성들인 끝에 아이가 내놓은 오소부코와 트러플 리조또는 정말 맛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아마 아이가 앙겔라의 입맛이 맞게 요리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어쨌든 맛있다는 감상은 변함이 없었다. 잘도 가정집 조리도구로 이런 맛을 낼 수 있구나 싶어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앙겔라는 식사를 끝낸 뒤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가 언젠가부터 가져다 놓은 칫솔로 양치를 하는 아이를 보고, 어느새 이 집에서 저 뒷모습을 보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제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처음에는 교사로서 학생을 특별취급해선 안 된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에 와선 딱히 담당 교과가 있는 것도 아니니 뭐 어때 하는 생각이 강했다. 애초에 교사로서의 의식이 그리 강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뭐.
…순 자기합리화뿐이네. 다시금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박사님, 저녁은 뭐 해드릴까요?”
“방금 점심 먹었는데 무슨 저녁이에요.”
“메뉴는 빨리 생각해놓는 게 편하잖아요.”

앙겔라는 벽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점심을 늦게 먹었으니 저녁은 거르죠.”
“에이, 박사님 그렇게 드시면 살 빠져요. 음, 저녁이 부담이시면 간단하게 야식으로 탄탄면 해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죠.”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아이가 제 집에 밤까지 있을 예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이번 달 들어서 자꾸만 아이가 앙겔라의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았다. …쫓아내야하나? 앙겔라는 고민했지만 딱히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어린왕자의 여우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애써 외면했다.

“전 이제 논문 준비할 건데, 하나 양은 뭐 할래요?”
“음-, 박사님, 혹시 앨범 같은 거 없어요? 저 박사님 사진 구경하고 싶어요.”

앙겔라는 잠시 생각했다. 사진이라. 너무 개인적인 영역에까지 아이를 들이는 게 아닐까? 하지만 겨우 사진 몇 장일 뿐인데 휴일 아침부터 요리하느라 지쳤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냥 거절하기도 뭐했다.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니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괜히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거절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결국 앙겔라는 방으로 들어가 두툼한 앨범 하나를 꺼내 거실로 돌아왔다.

“대학 입학 이후에 찍은 사진들이에요. 더 어릴 때 사진은 본가에 있어서.”
“본가라면, 스위스 말씀이시죠?”
“네.”
“아, 아쉽다. 박사님 어릴 때 엄청 귀여웠을 것 같은데.”

아이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묘하게 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앙겔라는 괜히 바쁜 척 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뭔가 집중해야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논문에 집중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7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앙겔라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커피를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거실에서 아이는 뚫어져라 앨범 속 사진을 보고 있었다. 4시간 가까이 사진만 보고 있던 건가? 의아해서 다가가자 아이가 기척을 알아채고 싱긋 웃었다.

“박사님, 박사님은 정말 동안이네요. 대학 졸업식 때랑 변한 게 없어요!”

아이가 가리키는 사진은 십여 년 전에 찍은 졸업 사진이었다. 앙겔라는 아이가 자리하고 있는 소파 옆자리에 앉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앙겔라조차도 사진 찍은 뒤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머리 이렇게 묶으셨구나. 단발도 예쁜데 지금이 더 멋져보여요.”
“멋지다고요?”
“음, 뭔가 막 커리어우먼 같은 분위기가 나거든요. 단발 쪽은 아직 학생 같은 분위기고요. 어?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거예요? 교장선생님이랑 같이 찍으셨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네요. 외과 과장 자리를 제안 받아 왔는데, 낯선 환경이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걸 아나가 도와줬을 때예요.”
“아, 교장선생님이랑은 원래 아는 사이셨구나.”
“네, 레지던트 때 병원에서 만났죠.”
“학교에는 교장선생님 부탁으로 오신 거예요?”
“그렇죠. 마침 쉴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한국에선 수술이 너무 많아 논문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아이는 앙겔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몹시 집중해서 들었다. 앙겔라는 저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을 보니 추억이라도 떠오르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아이가 제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한 별 거부감 없이 입이 열렸다.

“어, 이건 언제 찍은 사진이에요? 되게 피곤해보이시는데.”
“아… 12시간짜리 심장수술을 끝낸 후에 기념해서 찍은 사진이에요. 피곤해서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는데, 동료가 기념할 만 한 일이니 꼭 찍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12시간이나 수술을 계속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게 돼요?”
“하다 보면 하게 돼요.”

아이는 새삼 존경스럽다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앙겔라를 올려다보았다. 앙겔라는 자꾸 속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다른 의사들도 다 닥치면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도… 박사님, 의대생 되려면 공부 많이 잘해야겠죠?”
“글쎄요, 아무래도 한국에선 특히 그렇겠죠.”
“아, 재수라도 해야 하나.”
“갑자기 그건 왜요? 의사가 되고 싶어졌어요? 하나 양은 요리를 잘 하니 그쪽방면으로 나가면 성공할 것 같은데.”
“요리는 취미생활이에요. 딱히 업으로 삼고 싶진 않아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만들어 줄 수 있으면 그만이거든요.”

앙겔라는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등골이 자꾸 가려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무슨 날인 게 틀림없었다.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의사는 왜 되고 싶은데요?”
“의사가 되면 박사님이랑 말이 더 잘 통할 거 아니에요. 박사님이 무슨 수술을 어떻게 했는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더 잘 알 수 있고. 박사님 이름으로 검색하면 뉴스 기사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자신과 더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 진로까지 고민하고 있는 아이가 새삼스러웠다. 처음 만났을 때 담배를 피우고 있던 모습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조금 찡한 것 같기도 한 게 마치 감동이라도 받은 것 같아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는 그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입을 삐쭉였다.

“진심인데. 그리고 저 공부 잘해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진 전교 10등 안에 항상 들었단 말이에요.”
“그 뒤엔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는 소리로 들리는걸요?”
“학교가 답답하니까 공부도 하기 싫어져서… 그래도 평균보다는 점수 잘 나왔어요. 지금도 그래요.”
“그래가지곤 의대 가기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재수해야죠. 공부하다 어려운 거 있으면 박사님한테 물어도 볼 거예요.”

벌써부터 목적을 정했는지 불타오르는 아이를 보고 앙겔라는 설핏 미소 짓고 말았다. 아이가 생각하는 사고의 중심이 저인 것 같아 조금 가슴이 무겁기도 한데 그게 또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기분이 묘했다.

“제 과외는 많이 비싼데요.”
“괜찮아요, 집에 돈은 많거든요! 아, 저 과외해주시면 평생 요리권도 드릴 수 있는데.”
“…왜 평생이에요? 너무 긴 것 같은데요.”
“왜긴요, 제 목표가 오래도록 박사님이랑 함께 하는 거니까 그렇죠.”
“오래도록…….”
“박사님, 갑자기 먼 산 보는 눈 하지 마세요!”

장래희망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에 앙겔라는 실소를 흘렸다. 아직 애긴 애구나. 저보다 한참이나 나이 많은 여자가 뭐가 좋다고 이러는지. 앙겔라는 10대 특유의 젊은 혈기가 넘치는 아이에게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조언이나 훈계는 삼가기로 했다. 대신 말을 돌렸다.

“불확실한 이야기는 됐고, 아까 말했던 탄탄면이나 해줘요.”
“확률 100%인데… 알았어요, 배고프신 것 같으니까 바로 해드릴게요.”

아이는 아쉽다는 듯이 앨범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앙겔라의 집 부엌에 익숙해진 아이가 능숙하게 요리도구를 꺼내드는 모습을 보며 앙겔라는 앨범을 정리했다. 점점 제 일상 속으로 아이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아이가 있는 휴일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는 아이가 지쳐서 그만 둘 때도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입안이 조금 씁쓰레해졌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묵인하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한번 결정한 뒤니, 앙겔라는 지금까지처럼 일상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은 아이가 해주는 야식을 먹고 참고서적을 더 찾아봐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어느덧 아이가 해주는 요리를 먹는 게 점점 익숙해져가는 어느 휴일 밤이었다.






끝.





연재(?)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1편이 너무 달달분 1도 없는 것 같아 급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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