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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투장소가 산악지대인데 삼엽수가 촘촘하고 빽빽하게 가득차고 우거진 숲이었음.
이런 숲에서 기관총으로 제대로 전과가 내기 힘듬.
거기다 이런 곳에서 무조건 탄환이 많이 소비될 수 밖에 없는데 독립군은 보급도 못 하고 후퇴하던 상황이었다. 그전투가 끝나고 어디가 끝인지가 알 수 없음. 그러니 '알 수 없는' 전투 끝을 예상하면서 탄환을 아껴야했음.
독립군 사살 힘든 건 일본군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신 거긴 보급이 가능하니, '알 수 없는 끝'같은 압박감이 훨씬 덜 했음. 거기다 여긴 산포병연대가 사단 직할부대에 있었고 산포도 8문이나 증원됐지. 전투장소 생각하면 일본쪽이 압도적 유리했다.
물론 독립군은 보이지않는 장소에서 후퇴하고 있었으니 그 산포로 공격하는 게 힘들긴할텐데, 문제는 어랑촌전투였다. 여기서 김좌진 부대 측이 일본군 선제공격 한 뒤 매복하면서 일본군 기다리고 있었음. 문제는 거기에 산포 사정거리였고, 매복하며 기다리던 김좌진 측 부대를 포로 공격했지. 김좌진 부대 측은 총을 쏟아부으며 일본군 접근 막으면서 버티었는데, 당연히 산포를 못 피하니 일방적으로 맞을 수 밖에 없었음.
다만 일본군의 접근은 김좌진부대가 치열하게 잘 막음. 청산리대첩이 과장된 이유에는 실제로 보병들은 치열하게 잘 막은 이유도 있을 듯 하다. 정황을 보면 보병에게 받은 피해보다는 산포로 받은 피해가 대부분으로 추정된다. 이범석 회고에 보이는 긴박감과 치열함은 왜곡이 아닐 것으로 보임.
김좌진 부대가 겨우 살아난 건 홍범도 부대 측 활약덕분인데, 홍범두 부대측이 움직이다가 어랑촌 전투를 탐지하고 산포병연대쪽으로 이동해서 습격함. 일본군 내부문서에도 이 공격이 큰 압박이라 적고 있다. 이걸로 포병의 공격이 둔해지고, 일본군의 공격이 분산됐지. 그래서 틈이 벌어졌고 김좌진 부대가 후퇴가 가능했음.(참고로 이 산포병연대쪽을 공격한 게 홍범도라고 밝혀진건 2년도 안 된다. 진짜 최근정보임.)
훗날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 관련 증언하는데 홍범도 관련으로 거짓증언을 해놓음. 홍범도 한 것도 없고 희생자만 수백명 있었던 걸로 설명했더만... 양심이 없음
참고:
이범석, 우둥불, 1986
신주백, 한국현대사에서 청산리전투에 관한 기억의 流動 : 회고록 · 전기와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2011
신효승, 청산리 전역의 전개 배경과 독립군의 작전, 2016
신효승, 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 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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