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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물 쓰던 거 1편

다우드독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2.22 02:24:00
조회 1720 추천 8 댓글 2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 B 》 Ep 1 …
Recognition

뒤돌아보면 언제나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볼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이 좋았다. 너의 그 다정한 미소가 좋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것만으론 안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알았다. 이것은, 행복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 B.

“Recognition”

서울, 12월, 겨울 새벽. 벌써 도시는 어울리지도 않게 크리스마스 분위기. 빨간 솜 장식과 금사슬을 두른 육교. 뻔뻔하게도 진짜인냥 시침 뚝 떼고 있는 플라스틱 침엽수. 그래도 플라스틱 침엽수는 조금 좋아한다. 귀여운 별모양 왕관을 쓰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날 밤엔 함박눈마저 그 위에 쌓였다. 육교와 교차하며 시원하게 쭉 뻗은 6차선 도로. 눈이 그래피티를 대신해 아스팔트 도로를 덧칠하고 있다. 그렇지만, 도시의 밤은 하얀색은 아니다. 도시의 밤은 포근한 오렌지 빛. 가로등이 양철 병정들처럼 나란히 서서 비춰주고 있으니까.

「나이팅게일 B, 괜찮아? 나이팅게일 B! 그대로 꽉 잡고 있어! 곧 갈게!」「삐삐, 떨어지면 안돼, 알지?」

나를 부르는 소리. 나를 걱정해주는 소리. 나는 그 소리에 비명으로 화답했다.

「이런 거 이제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니, 그 때 당장 내 눈앞에 보였던 건, 팔레트에서 붓으로 마구 섞어서 반죽한 오렌지빛 물감이었다. 아마도 잠깐 머리 위로 스쳐지나간, 가로로 긴 흰 무언가가 육교였을 것이다. 나는 왼손에 파란 [완드/지팡이]를 꽉 쥐고, 오른손으로는 [그것]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그것]의 위에 바짝 엎드리자, 속도가 만들어내는 바람과 엉망진창으로 휘날리는 머리칼이 내 귓가를 불규칙적으로 두들겼다. [그것]은 나를 떼어 놓으려고, 6차선 도로를 지그재그로 주행중이었다. 고문당하는 내 반고리관이 가엾어서, 키미테 생각이 간절했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자. [그것]은 자동차도 아니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세상에 두 차선은 차지할 법한, 징그러운 크기의 자동차나 말은 없다. 생김새도 그렇다. 네 다리 대신에 바퀴를 얻게 된 사이보그 말이 이런 모양새일까. [그것]은 그렇게 생긴 [요화/妖花]였다. 요화는 이내 지그재그로 달리기를 그만두고 6차선의 중앙선으로 몸을 옮겼다. 내가 퀘스쳔 마크를 머리 위로 띄우기도 전에, 그것은 [윌리/곡예]를 하듯이 앞바퀴 두 개를 들어올렸다. 나는 암벽 등반이라도 하듯이 거의 직각으로 요화의 갈기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좌우를 둘러봐도 여전히 풍경은 형체를 잃고 흐물흐물할 뿐. 갈기 속으로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 들 때 즈음, 왼쪽에서 처음으로 분명한 형상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요화와 같은 속도로 하늘을 저공비행하고 있는 두 소녀다.

두 소녀 모두 길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똑같은 포니테일이 공중에서 길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 정수리에 얹혀진 것은 티아라가 아니라 너스캡. 너스캡에 그려진 [아이콘/문장]엔, 일반적인 너스캡과는 달리 적십자 위에 샛노란 [아이리스/붓꽃]이 피어있었다. 머리에서 목으로 내려가면, 계절에 잘 어울리는 머플러가 펄럭인다. 그 밑으론 또 쇄골부터 둥근 어깨까지 드러내는 원피스 차림. 가슴에는 귀여운 나비모양 리본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 팔에는 길다란 새틴 장갑을 하고, 각각 왼손에는 아이리스 장식이 달린 완드를, 오른팔에는 너스캡과 마찬가지 아이콘이 그려진 완장이. 그 밑으론 활동하기 좋은 짧은 미니스커트와 속바지. 좀, 추워보인다. 우리들의 [유니폼/制服]. 다른 점이라면, 포니테일의 길이와 기조 색 정도. 한 사람은 핑크, 한 사람은 옐로로 뒤덮인 소녀들을 향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에이! 씨! 어떻게 좀 해봐!」
「삐삐가 소리지르는 거 처음 봐. 근데 삐삐, 욕하면 안된다?」
「나 농담할 시간 없어어어 빨리이이」
「그대로 조금만 버텨! 로코톱, 부탁해!」
지금간다

마지막으로 말한 것, 아니, 마지막으로 메세지를 보낸 것은 날고 있는 소녀들이 아니었다. 핑크 빛 소녀의 어깨에 달라 붙어있는, 다리가 여덟이나 달린 사파이어 두 개. 그 공작거미의 이름은 로코, 풀네임은 [로코톱/locotorp] . 로코는 나이팅게일 A의 어깨에서 깡총 뛰어서 바람을 탄다. 가는 실 같은 스파크가 로코를 앞으로 추진시킨다. 왼편에서 온 로코는 내 어깨 위 앉았다가, 90도로 방향을 바꾸어 요화의 갈기를 정면으로 거슬러 오른다. 나는 어깨에 남은 짜릿한 감촉을 지우고 싶었지만 남는 손이 없었다.

로코는 여덟 개의 다리를 요령좋게 이용하여 요화의 미간으로 올라갔다. 요화의 눈두덩이와 눈두덩이 사이 엔 그 이름에 걸맞게 불길한 꽃이 피어있다. 유니콘의 뿔처럼, 그 꽃의 검은 암술은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로코는 길게 늘어진 암술을 타고 올라, 그 위에 얇고 푸른 거미줄을 두른다. 육각형의 연속으로 이뤄진 그물은 바싹 달라붙어, 그 안에 암술을 가둔다. 거미줄엔 아침 이슬이 맺히듯이 간간히 스파크가 맺힌다. 올라갔던 요화의 앞바퀴가 서서히 내려오며 속도가 줄어든다. 오렌지 빛 반죽이었던 세계가 또렷함을 되찾는다. 옐로 일색인 나이팅게일 C는 오른편으로 이동해, 주문을 준비했다. 공중에서 한 번 롤링을 곁들여 멋을 부리는 게, 그 애답다.

「아프지 않아.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왼편에서 나이팅게일 A가 요화의 귓가에 속삭이며, 완드의 뾰족한 끝을 찔러넣었다. 요화의 비틀거림이 멎기도 전에, 이번엔 오른편에서 나이팅게일 C가 똑같이 완드의 뾰족한 끝을 찔러넣었다. 마지막으로 나도 나의 파란 완드를 두 손으로 쥐고 요화의 목 위에 찔러넣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주문을 외운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다친 아가 아픈 아가. 잘도 잔다. 꿈을 꾸면 착한 아가.
자장 자장. 자장자장.

완드의 아이리스 장식을 눌러 밀자, 찬란한 빛이 쏟아져 흐른다.

* * *

나는 부시는 햇살에 눈을 가렸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평소와 다름 없다. 일어나 몸을 씻고, 거실로 나와 토스트 기에 식빵을 꽂아놓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다 놓는다. 30평 짜리 아파트에 빵 굽는 냄새가 퍼진다. 그 뒤엔 방으로 돌아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고, 브래지어를 하고는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겨울이니 보습용 크림도 바른다. 가는 테의 안경을 끼고, 오늘도 이상한 건 없는지 화장대의 거울로 확인하고 나면 준비 끝. 그러다보면 커피포트 끓는 소리에 엄마가 일어나 안방에서 나온다. 아빠는 없다. 아빠는 1년 동안 집에 있는 날보다 해외 어딘가에 출장 가있는 날이 더 많다.

「엄마가 깨워줘야 했는데 또 늦게 일어났네」
「아냐, 괜찮아」

내가 4인용 식탁에 앉자,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어제도 일한다고 잠을 못 주무셨는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다. 엄마의 직업은 동화책 일러스트레이터인데, 남들과 달리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해서 잘 때는 끝도 없이 자고 안 잘 때는 끝도 없이 안 잔다. 반면 나는 깨끗한 교복 차림에 포니 테일. 학생답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엄마가 달걀 후라이라도 만들어줄까」
「아냐, 나 1교시에 수학 쪽지 시험있단 말야. 빨리 가야해」
「자꾸 안 먹으면 마를텐데」
「살 안 찌고 좋지, 뭐」

내가 대충 빵에다 잼을 바르고, 커피를 호호 불며 마시는 와중에 엄마는 자꾸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난 엄마가 자기가 엄마 역할을 자주 못해주는데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나에게 귀찮게 구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 땡큐. 나는 더는 애가 아니다. 쟁반을 치우고, 코트와 가방을 챙기고는 현관으로 향한다.

「린아, 조심히 잘 다녀와」
「응」

엄마에게 그렇게 대답하고서 바깥으로 나가려다, 나는 왼쪽 가슴께가 왠지 허전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내 방으로 돌아가, 붓꽃 형태의 브로치를 가슴에 단다. 내 이름은 린. [이 린/李 燐]. 평범한 중학교 2학년. 아니, 실은 내게는 비밀이 있다. 내 [법명/法名]은 나이팅게일 B. 요화로부터 이 도시를 지키는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이다.

나는 하아-, 하고 손에 입김을 불었다. 어제 온 함박눈 때문에 세상은 온통 흰 색이다. 나는 거기에 새하얀 입김으로 한 겹 더 덧댄다. 버스 정거장의 벽 위쪽에는, 앞으로 3분 뒤에 버스가 온다고 오렌지색 자막이 지나간다. 추워죽겠는데, 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버스가 도착했다. 럭키.

우리 집은 거의 종점에 있어서, 이 혼잡한 아침 시간에 버스를 타도 자리가 남는다. 나는 약간 발판이 올라간 자리를 좋아한다. 그 자리에 발을 올려다 놓고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든다. 물론 수학 교과서는 아니다. 아침에 쪽지 시험이 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

가방에서 꺼내든 책의 표지는 검은 색, 제목은 은빛으로 박혀있는 양장본 소설이다. 요즘 내 취미는 고딕 호러. 저번에는 카밀라를 읽었고, 요번에는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 오츠 이치의 [고스/Goth]를 보고 있었더니, 하나가 와서 옛날 것도 재밌다며 추천해주고 갔다. 나는 하나가 말하는 건 모든 읽기 때문에 금방 도서관에서 빌렸다. 버스 안으로 조금씩 사람들이 밀려들고 빽빽해지는 걸 느끼지만, 나는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책은 그게 좋다. 책을 읽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나와 책 단둘이 된다. 물론, 그래서 너무 책에 집중하다보면 학교를 지나쳐서 더 내리기도 하지만 걱정 없다. 나는 언제나 학교를 조금 일찍 가니까. 보통 요화를 퇴치하는 일은 밤이나 새벽에 있기 때문에 피곤하지만, 그래도 조금 일찍 간다. 소란스럽지 않은 편이 책 읽기에 좋기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하나가 일찍 학교를 오기 때문이다. 성까지 하면 [류 하나/柳 夏奈]. 검고 긴 생머리에, 헤어밴드를 하고 다니면서, 항상 조근조근한 목소리. 눈의 검은색이 깊어서 보면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미소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 지낸 소중한 내 단짝.

그리고,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 A.

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연금술의 비의에 빠져든 부분 즈음에서 책을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다음 정거장이 우리 중학교 앞이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교탁과 빈 책상. 그러나 내 시선은 조금 더 멀리 있다. 햇살을 반사하는 석재. 그 위에 놓여진 화분들. 이미 1년초인 녀석들은 전부 다 말라서, 물을 줄 필요도 없어졌다. 주번 일이 하나 줄긴 했지만 별로 기쁘진 않다. 왜냐면, 원래는 나와 하나가 주번 대신에 물을 주곤 했으니까. 담임 선생님만 모르는, 비밀의 화원. 하나에게 말하면 부끄러워할 테니까, 나 혼자만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안녕」

하나의 자리는 바로 그 주변, 창가 끝자리. 책상에 앉은 하나가 항상 먼저 인사를 한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하나는 아침에 학교에 제일 먼저 와서,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이따금 넘기며, 책상 자리에서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다. 대체로 학원 숙제로 하는 오답 노트다. 나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인사를 받았다.

「응, 안녕」
「프랑켄슈타인 읽고 있더라」
「아직 앞부분 조금. 또 [읽었어]?」
「미안. 요즘은 잠이 안 오면, 일부러 읽는 게 아니라 저절로 보여」
「괜찮은 거야?」

나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요화들이 날뛰는 건 보통 밤이나 새벽이다. 당연하지만 우리의 수면 시간은, 엄마처럼, 불규칙하다. 로코의 말, 이랄까 메시지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은 누릴 수 없는 숙면을 누릴 수 있다곤 하지만. 우리는 로코가 목소리를 쓰지 않아도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듣고, 로코를 통해서 서로 텔레파시 같은 것을 쓰기도 한다. 로코에 의하면, 로코의 메시지를 알아듣는 것부터가 나이팅게일이 되기 위한 재능이라고 한다. 하나가 나이팅게일 A가 된 것도, 가장 로코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알게 뭐냐, 자라나는 여중생에겐 잠은 모자라고 또 모자라다. 숙제하다가 저녁 먹고 학원 갔다 돌아오면 대충 하루가 끝나는 대한민국 여중생이라면 더더욱. 어쨌거나, 그런 와중에 잠을 못 잔다고 하면 걱정이 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멋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읽힌다니.

「응, 괜찮아. 걱정하지마」

그렇게 말하는 하나의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진 않았지만, 하나의 오른쪽 어깨 위에 있는 로코를 보고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하나의 앞자리로 가서, 책을 꺼내어 읽는다. 책을 꺼내어 읽으면 나와 책 단둘뿐이지만, 나는 안다. 나와 하나는 이어져있음을. 주번이 들어와 가벼운 청소를 하고, 아이들이 들어오며 야단법석을 떤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책을 읽었다. 곧, 담임이 들어왔다.

점심시간. 하나와 함께 배식을 받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나만 도서관에 들르기로 했다. 목적은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 이것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권유. 내 취향은 이렇게까지나 고전의 영역은 아니다. 하나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주석에서 막히지 않고 죽죽 읽어치우는 애니까, 그런 책들의 이름을 척척 알려준다.

나는 재빨리 책만 빌려서 도서관에서 나왔다. 5교시는 과학. 미친개로 유명한 선생님의 수업이라 늦었다가는 큰일 난다. 하나의 조근조근한 태도에 비하면, 5교시의 과학 선생은 대단한 걸 이야기하는 것처럼 굴지만, 정말 시시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허파꽈리에 산소가 모여드는 이야기에 뭐가 놀랄 구석이 있다고. 아마 18세기, 19세기에 태어났으면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생명의 비의를 알아낸다고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시체 냄새나 맡았을 사람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나와서 종종걸음으로 구교사로 향했다. 2학년 교실은 4층. 거기까지 빨리 가지 않으면, 하고 책을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이 너무 급했던 걸까, 몇 계단씩 한 번에 오르려다 발을 삐긋해서 균형을 잃었다. 나는 그만 뒷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담배 냄새.

「뭐야아」
「앗, 저, 죄송합니다」

이름표를 보니 3학년 선배였다. 아마도 감시를 피해서 일부러 2학년 화장실에 몰래 피우러 왔던 거겠지. 타이트하게 줄인 조끼와 치마. 딱 봐도 나는 내가 어려워하는 부류라는 걸 눈치 챘다. 그리고, 그쪽도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아챈 듯 했다.

「미안해? 미안하면 다야?」
「아뇨, 저, 죄송한데 지금 제가 가봐야 해서」
「야, 너만 바쁘냐?」

이제는 순 시비조로 어깨를 밀쳤다.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책을 꼭 쥔 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땅을 내려보았다. 나는 먹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 」
「야, 삐삐! 과학이 너 불러! 프린트 좀 옮겨달라던데?」

갑자기 위에서 누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3학년 선배는 과학이란 말에 움찔했으나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그때 위에서 시끄럽게 빨리, 빨리, 하고 재촉하는 소리가 났다. 선배는 야 너 운 좋다, 하고 빈정거리고는 빠르게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계단 위쪽을 쳐다보았다. 나를 삐삐라고 부를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김 리혜/金 理惠]. 리혜는 웨이브진 갈색머리를 치렁이며, 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리혜가 한 거면, 분명 과학이 내가 불렀다느니 어쨌느니 백프로 거짓말이다.

리혜는 다른 반이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들끼리 친해서 서로 자주 보고 지내는 사이였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리혜는 생긴 것도 귀엽고, 어리광도 잘 부리고 꾀도 잘 써서, 원하는 건 뭐든지 얻어내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안 보는 곳에서 사람을 곧잘 부리곤 했는데, 나는 툭하면 당하는 역할이었다. 사람을 삐삐 말랐다고 삐삐라고 부르기나 하고.

「넌 또 거기서 그러고 있냐? 맨날 땅만 보고 딴 생각만 하니까 그렇지」
「과학이 나 안 불렀지?」
「행여나 부르겠다야. 이 언니한테 고마운 줄이나 알아」
「빵?」
「요번에 새로 생긴 떡볶이 집 있는데, 진짜 맛있더라」
「나중에」

나 오늘 바빠, 내일, 하고 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리혜가 뒤에서 한 마디를 더 붙인다.

「나중에 하나도 불러. 나 이상한 거 찾았어」

나는 주변을 살펴보고, 리혜의 눈을 쳐다보았다.

요화?
아직 몰라, 근데 「그때 가서 얘기할게. 내일 놀이터에서 보자?」

리혜는 텔레파시로 이야기하다 말고, 중간에 입을 열어 직접 말을 전했다. 아마 그 편이 더 자연스럽게 보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리혜도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 그 중에서도 나이팅게일 C. 우리 셋이 놀이터에서 모인다는 건, 요화에 대한 작전회의를 한다는 얘기다.

* * *

하교할 때 타는 버스는 무척이나 시끄럽다. 교문에서 뛰쳐나온 학생들은 꾸역꾸역 좁은 마을 버스 안에 몸을 밀어넣고, 삼삼오오 모여 쉬지 않고 조잘거린다. 난 운 좋게 창가 자리를 차지했지만, 도무지가 시끄러워서 책 같은 걸 읽을 기분은 들지 않는다. 우리 집은 종점 가까이에 있으니까,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엔. 일단 이어폰부터 끼고 생각하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 폰의 볼륨을 올리면 그나마 안전하게 떨어진 느낌이 든다. 심심해서 나이팅게일들에게 텔레파시도 보내봤지만, 시끄러우니까 할 거면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하라는 리혜의 메시지에 그만뒀다. 어차피 단체 메시지창도 잘 안 보면서. 나는 창 밖을 보면서 괜히 안경을 닦거나, 스마트폰에서 셔플로 아무 음악이나 재생하거나 했다. 게임은 배터리가 금방 달아서 별로다. 그 와중에도 사람은 조금씩 줄어, 내 옆자리도 비게 되었다. 그때였다, 그 여자가 버스 안으로 들어온 건. 여자를 보는 순간, 내 감상은 딱 이랬다. 우와.

옷은 주변 여고의 교복이었다. 그리고 그게 평범함의 끝. 먼저, 여자의 키는 170 센치 미터는 훨씬 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턱까지 오는 단발머리는 짙은 초록색으로 염색했고,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었다. 등에는 기타인지 뭔지를 담는 하드케이스도 매고 있었다. 거기에도 뭔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하지만 압권은 눈에 있었다. 컬러 컨택즈 렌즈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개성. 왼쪽 눈에, 커다랗고 새까만 안대를 하고 있었던 거다. 해적 영화에나 나올법한 그 안대를. 반대편인 오른쪽 눈가 밑에 조그맣게 눈물점은 그 언밸런스함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 안대 소녀는 버스 안을 쓱 보더니 망설임 없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제발 내 옆만은 앉지 말기를, 제발 내 옆만은 앉지 말기를, 제발 내 옆만은 … 그리고 안대 소녀는, 아니나 다를까, 하드케이스를 벗어서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껌을 짝짝 씹는 소리에 나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싶어도, 하드케이스의 위치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애매했다. 불편하니 빨리 좀 내려줬으면 했지만, 안대 소녀는 껌으로 풍선을 만들었다가 다시 씹었다가 할 뿐, 내릴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턱까지 괸 태평한 자세를 한 안대 소녀와, 가방을 끌어안은 채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나. 버스의 정거장 안내 방송은 점차 우리 집에 가까워지자, 이제 나는 새로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 안대 소녀를 헤치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나는 가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저기요, 하고 말을 걸면 좋을까. 아니, 좀 더 정중하게. 실례합니다? 아냐, 너무 딱딱해. 혹시 가능하시면 …

「아, 혹시 내리세요?」

어떡해.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면 좋지.

「저기요, 혹시 내리시냐구요」

안대 소녀 쪽에서 먼저 물어왔다. 그 껄렁껄렁한 느낌과는 너무나 다른, 굉장히 맑고 상냥한 목소리로. 버스의 안내방송은 「이번 정류소는 24시 편의점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 」 하면서, 우리 집 앞에 다가왔음을 알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고개만 열렬하게 끄덕였다. 대답을 안해서 건방져 보였으려나. 내가 허둥지둥 입을 떼려고 할 때, 안대 소녀는 씨익 웃으면서 하드케이스를 맸다.

「말씀하시지」

뭔가 밴드의 [아이콘/인장]을 잔뜩 붙여놓은 하드케이스를 등에 걸친 채, 안대 소녀는 버스의 뒷문의 손잡이에 몸을 맡겼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잖아 — 하고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내가 교통카드를 리더기에 찍자, 안대 소녀는 아참, 하는 표정을 짓고는 코트에서 지갑을 꺼내어 리더기에 가져다 댔다. 슬쩍 그쪽을 살펴보자,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껌을 씹으며 싱글벙글한 표정이다. 괜찮아, 집까지 같이 가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나를 안심시켰다. 리혜를 만났을 때 들려줄 정~말 신기한 이야기거리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어째서. 이 안대 소녀는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건데! 딱히 같은 방향이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길을 물어본 것도 아니지만 신경 쓰였다. 정말, 정말 신경 쓰였다. 발소리도 나고 껌 씹는 냄새도 나는데 신경이 안 쓰이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나는 일부러 큰길이 아니라 골목길로 빠져서, 좀 돌아가긴 하지만 안대 소녀와 떨어져서 가기로 했다.

「아가씨」

그 여자의, 맑고 상냥한 목소리.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가 빨라지더니, 어느새인가 안대 소녀는 나를 가로질러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당장 고개를 들어보니 내 눈높이에선 가슴만이 들어올 지경으로, 그녀의 장신이 실감이 났다.

「저, 저 집에 가야하는데」
「하나만 물어볼게요」

뭐야, 무슨 사이비 종교? 그렇다면 그 모습도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다.

「아가씨 혹시, 나이팅게일이란 말 들어봤어요?」

…어?

내가 순간적으로 사고를 정지하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젖혔다. 그러더니 곧장 내 얼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 치 앞도 되지 않는 거리에 그녀의 커다란 안대가 있었다. 뭐, 뭐에요, 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코를 발름거리기 시작했다.

「귀머거리 냄새는 아닌데. 나이팅게일이요, 나, 이, 팅, 게, 일」

그런 걸 냄새로 어떻게 아는 거야! 그보다 뭐하는 짓이야!

「새, 새, 새 이름이잖아요! 그보다 뭐하는 거에요!」

그녀는 짜증난다는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닌가. 처음에 괜히 나이팅게일이란 말에 동요를 한 게 잘못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돌아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말할게요. [요화]라고 들어봤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들만이, 요화와 요화와 싸우는 나이팅게일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는데.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을 뽑는 로코가 말했으니까 분명 사실일 거다. 도대체 누구야 이거. 혹시 새로운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 하지만 이런 이상한 아가씨랑 같이 팀을 하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은데.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그녀는 이번에는 자화자찬을 하듯이 등을 젖히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 역시 그런가 보네. 내가 눈 하나만 뜬 반 장님이지만 코 하나는 기가 막혀서 틀리질 않는다니까. 아, 내 소개가 늦었지? 반가워. 내 [법명]은 나이팅게일 므닌. 저번 꽃의 요정 나이팅게일이야. 너희 선배쯤 되는 사람이지」

이 연극적인 성격의 여자는 하드케이스를 내려놓더니, 그걸 발로 차 열었다. 거기엔 나팅게일들의 완드가 … 밑 부분이 깨졌다고 할까, 아니, 갈아서 더 뾰족하게 만들어진 모습으로 담겨있었다. 므닌은 발끝으로 완드를 튕겨서 공중으로 회전시키고는, 오른손으로 낚아채듯이 그걸 잡았다. 보통 완드를 잡는 방식과는 완전히 거꾸로. 완드의 아이리스 장식은 밑으로 내려가고, 뾰족한 끝이 내 얼굴 쪽을 향했다. 마치 검을 쥐듯이. 므닌은 껌을 뱉고는 그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구역을 접수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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