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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계탑의 마녀 -2- 자 씹고 물고 뜯어라!

1(152.99) 2016.05.11 16:18:21
조회 447 추천 1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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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는 것은 황혼으로 물들던 운동장의 트랙. 저물어가는 노을 속에 어른거리는 광경. 넘실거리는 운동장 위로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달리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시간을 재주는 사람조차 없고, 더 이상 그 노력을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출발선까지 걸어갔다. 이름…뭐였더라? 역시 기억나질 않네. 그야 제대로 말을 해본 사이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나. 이름 정도는 들어두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부활동에서 좋은 기록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기억에조차 남지 않는 희미한 인상이었다. 단지 연습을 하고 있던 때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언제나 운동장 트랙의 구석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 날은 대회가 막 끝난 날이었기에 대부분 아이들은 저마다의 성과를 가지고서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충분히 노력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우는 아이들도 있었고, 자신의 노력이 맺은 결실을 뽐내며 웃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운동장을 바라보는 내 손에도 자그마한 트로피가 쥐어져있었다. 결국 대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손에 넣은 게 없던 그녀와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 

 

오늘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텐데. 트로피를 쥐고서 돌아가던 내가 그녀를 발견하고서 중얼거린 한 마디. 별다른 이유랄 것도 없이 멍하게 서서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은, 파랗던 하늘이 황혼빛으로 물들 때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결과를 내지 못한 분함에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달리는 것이 좋다며 웃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그녀는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그렇게 출발 신호도 없이 다시 한 번 트랙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쳐 흔들리는 다리를 끌며 골라인을 향해 달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육상 선수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희미하게 예감했다.

 

"타카와 씨!"

 

"흑?!"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소리에 무심코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얼굴을 들어올리자 뿌옇게 흐린 교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졸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수업 중에는 참아주세요."

 

국어 교사인 미카죠 선생님의 목소리에 몽롱하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자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미카죠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미카죠 선생님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슬쩍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른스러운 연한 화장에 앳되어 보이는 양갈래 머리. 그래도 어느 쪽이냐면 작은 체구 때문인지 묘하게 귀여워 보인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이럴 때의 진지한 얼굴도 그렇고 희미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도 그렇고 '역시 어른은 어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잘 못 주무셨나요?"

 

미카죠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아, 네….'라며 엉성한 대답을 흘리고 말았다. 교실의 이목을 한눈에 끌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애매하게 미소를 짓자 시야의 구석에서 시노미야 씨의 모습의 슬쩍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곧 있으면 끝나니까 조금만 참고 집중해주세요."

 

미카죠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연상의 포용력? 그게 아니면 관록이라고 해야 할까? 겉보기에는 어려보이는 미카죠 선생님이지만 이런 행동에는 묘하게 안심하고 마는 것이다.

 

"(왠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

 

언니가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미카죠 선생님이 쓰다듬은 머리카락을 덧쓰듯이 문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뭐 동생이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 언니가 생길 리도 없지…. 아아, 안 돼. 잠이 덜 깬 탓인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언니라니…. 바보도 아니고.

 

아직 가시지 않은 잠기운에서 깨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자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울리며 교실 앞문이 열렸다. 한 박자 늦어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감싸고 있는 여학생이 걸어 들어왔다. 마죠…. 마죠모토 리카라고 했던가? 워낙 특이한 이름인지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려나. 교복 위에 가디건을 겹쳐 입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란지 얼굴이 파묻힐 정도로 목도리를 둘러맨데다 잘 보면 다리도 뭔가 스타킹을 신고 있고…. 그야말로 완전 냉방대책! 이라는 느낌.

 

"마죠모토 씨! 이제서야 등교하시면 어떡해요!"

 

미카죠 선생님은 타이르듯 말했다. 그 말에 마죠모토 씨는 '죄송합니다. 늦잠을 잤어요.'라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의 틈새로 그녀의 옆얼굴이 슬쩍 보였다. 피부가 되게 하얗네….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시노미야 씨도 그렇지만 역시 마죠모토 씨도 그렇고 저렇게 귀여운 애들은 뭔가 피부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죠모토 씨를 보고 있자 눈이 마주쳤다.

 

"(어라? 왠지 날 노려보고 있어?)"

 

마죠모토 씨는 빈말로도 박력 있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에 오싹한 나머지 눈을 돌리고 말았다. 평소와의 갭 때문일까? 이것도 저것도 흥미가 없다는 듯 멍한 눈초리를 하던 그녀의 시선이 목을 죄는 것처럼 들러붙었다. 

 

'마녀야'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래, 생각해보면 마죠모토 씨의 이름을 기억하던 건 특이한 이름만이 이유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언니가 실종됐다고 했었지….)"

 

학기 초에 웅성거리던 소문을 떠올린다. 그 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제대로 기억하진 않았지만, 그건 분명 마죠모토 리카 씨의 이야기였다. 2년 전 이 고등학교에서 그녀의 언니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밝고 쾌활하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실종되어버린 사건은 당시 학생들에겐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마죠모토 씨가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 당시 재학 중이던 학생들로부터 곧바로 소문이 퍼졌다. 2주 정도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은 잠잠해진 편이지만 아직도 소문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개중에는 '마죠모토 리카가 이 학교에 언니를 묻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도는 모양이다. 

 

"마죠모토 씨도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절도 있는 생활을 하셔야죠! 언제까지고 중학생처럼 지내시면 안 되잖아요!"

 

미카죠 선생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마죠모토 씨를 향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닐 텐데 마죠모토 씨는 그저 의연하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딱히 소문의 당사자가 아닌 내가 듣기에도 이 속닥거림은 기분 나쁠 따름이었다. 정작 그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인 것 같지만…. 

 

미카죠 선생님의 설교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 자신의 자리(창가쪽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책상에서 국어 교과서를 꺼낼 무렵에는 다시 수업이 재개되었고 점차 수근거리는 소리도 사그라들었다. 수업 도중에 힐끗 쳐다본 그녀는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2




문득 바라본 창밖은 어느 새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라며 중얼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두 손에 묵직하게 실리는 책더미를 고쳐 안으며 그저 복도를 걸어갔다. '수업시간에 잔 벌이에요!'라며 미카죠 선생님이 내린 그 벌이라는 것은 방과 후에 남아 선생님의 잡일거리를 돕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심부름꾼이 필요했던 것 뿐이었으려나. 딱히 집에가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로 상관 없지만…. 


역시나 이 광경은 가슴이 아프다. 휘날리는 커튼처럼 넘실거리는 황혼이 복도를 가득 매우는 동안 내 머릿속에 차오르는 것은 뇌리에 깊게 새겨진 그 때의 기억 뿐이었다. 쏟아지는 노을을 받으며 트랙을 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화상자국처럼.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계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 같다. 살면서 그 때만큼 좌절감을 맛본 기억도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 사실은 육상을 그만두면 이제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역시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진 않는 모양이지만. 


"타카와 씨?"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주 들었던 목소리지만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다. 마지막 한 번만 옮기면 된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책을 쌓아올린 탓인지 솔직히 말해서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멈춰 생각해보고서야 겨우 이름이 떠올랐다.


"요시다 씨?"


그렇게 겨우 떠올린 이름을 말하자 타박타박 발소리를 울리며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야 겨우 그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도와줄까?"


"아, 아니. 괜찮아. 혼자서 옮길 수 있어."


"정말? 무리하는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요시다 씨는 그렇게 말했다. 신경써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일일히 과민반응을 하면 오히려 더 불편하다. 요시다 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조금 부담스럽네.


"으응, 이 정도 쯤은 괜찮아. 그보다 요시다 씨는 뭐하고 있어? 지금 시간이면 아직 육상부는 연습 중인거 아니야?"


"아, 잠깐 갈아입을 옷 좀 가지러…."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힐끔 바라본 요시다 씨는 여전히 변함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 또한 키가 상당히 큰 편이어서 1학년 중에서는 나와 비슷한 눈높이로 마주볼 수 있는 몇 없는 사람이었다. 피부는 항상 햇빛을 쬔 탓인지 갈색빛으로 그을려있었고 머리카락은 적당히 짧은 길이로 잘려있었다. 상당히 보이쉬한 인상에 서글서글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학기 초부터 꽤나 인기가 많았다. 뭐 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녀와 별로 친하게 지낸 기억은 없지만. 언제나 그녀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요즘은 어때? 기록은 잘 나오고 있어?"


아무런 대화도 없이 함께 걸어가는 거북함을 참지 못해 내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꽤나 가벼운 기분으로 물어본 셈이었는데도 요시다 씨는 불편한 듯이 한참동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아, 이건 실수를 한 거려나? 육상에 관한 이야기는 피하는 편이 좋았을 지도. 


"기록은, 좋아지고 있어. 체력이 좀 붙었으니까. 폼도 고쳤고…. 그러고보면 폼을 고치는 편이 빨라질거라고 말해준거 타카와 씨였지."


그랬던가? 솔직히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틈틈히 조언 비스무리한 걸 했던 기억은 있지만….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 나중에 상 같은거 받으면 내 덕분이라고 인터뷰라도 해줘."


하하, 라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요시다 씨는 전혀 웃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나보다도 그녀가 더 불편해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불편하면 그냥 도망치면 될텐데. 참 의리 있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타카와 씨는…. 괜찮아? 그…다리 말이야."


쥐어 짜내듯 겨우 털어낸 말은 아니나 다를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말이었다. 갈색빛으로 그을린 얼굴인데도 창백하게 질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아, 괜찮아. 아무런 지장도 없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딱히 요시다 씨가 잘못한게 아니니까."


그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그치만…. 나 때문에…."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은 요시다 씨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가슴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으아아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싶었다. 


"요시다 씨. 역시 이거 조금 무거운데, 몇 개만 들어줄래?"


그렇게 말하자 요시다 씨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더미를 반쯤 가져갔다. 부탁을 받은 탓인지 그녀의 얼굴을 한결 편해보였다. 무언가 보상을 해야한다는 심리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괜한 오해로 그녀에게 짐을 지운 것만 같아서 속이 씁쓸했다.


"나 말야,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요시다 씨를 신경 써서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아니야. 정말로 요시다 씨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지금은 다리도 괜찮고."


"그럼 왜…."


요시다 씨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곤란한 듯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왜 육상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하지만 그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힘들다. 남들에게 설명하기엔 복잡하고 또 구차하기도 하니까. 아니, 어쩌면 나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여기까지만 옮겨주면 돼. 고마워. 바쁠텐데 도와줘서."


그렇게 말하며 교실 문앞에 책더미를 내려놓자 요시다 씨도 똑같이 책더미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떠나지는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머뭇거리는 몸짓과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어넘기고 말았다.


"자자, 요시다 씨는 이제 연습하러 가봐. 농땡이 부리면 안되지."


애써 웃음 지으며 말하자 요시다 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몇 걸음 걸어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말야, 열심히 할게. 타카와 씨 몫만큼 열심히 할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말 없이 손을 흔들었다. 타카와 씨는 다시 등을 돌려 달려나갔다. 노을이 넘실거리는 복도를 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타박타박 울리던 발소리도. 조용히 남겨진 나는 아무것도 없는 복도를 한동안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열심히…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릴 수 있는 거구나. 무서워 할 것도, 힘들어 할 것도 없이. 그렇게나 간단하게.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엔 아직도 떠나지 않은 체육부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내가 서있던 트랙 위로 몇몇의 학생들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한숨에 창가에서 눈을 돌려 문앞에 쌓인 책더미들을 교실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때엔 몰두할만한 일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대로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무너저버렸을 테니까. 


겨우 하교를 한 것은 미카죠 선생님이 떠맡긴 일을 끝내고 교실 문단속까지 마치고서 미카죠 선생님께 인사를 한 후였다. 하교시간이 한참 지나 텅 비어버린 복도를 걸으며 문득 이런 시간에 하교하는게 꽤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도 편안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익숙해지지 않았다. 육상을 그만두기 전에는 3년 가까이 매일매일 욱씬거리는 몸으로 돌아갔으니까. 아픈 곳이 없다는 것이 어색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관둬버리면 후련할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공허한 부분이 더 컸다. 익숙해져버리고 마는 걸까? 텅 비어버린 듯한 이 공허함도, 아프지 않은 몸도, 목표가 없는 생활도. 그저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는 걸까? 그것은 굉장히 안도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잔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문득 귀에 닿는 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귀를 기울여보면 희미하게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그마한 선율은 조용해진 복도를 타고서 흐르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반쯤은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이유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게 누구려나 하는 자그마한 흥미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걸어가던 도중에는 이미 소리의 출처가 음악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관현악부가 아직까지 연습을 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니겠지.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것은 체육계 학생들 정도였다. 


음악실 앞에 도착하자 희미하던 소리가 선명해졌다. 바이올린이려나? 현악기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음악에 대한 교양이 없는 나로서는 정확한 가늠이 힘들었다. 단지 그 침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복잡하던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해주는 듯한 음색이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던 재잘거리던 잡음까지 모두 지워버리고서, 오로지 그 선명한 선율만이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한동안 자그맣게 열린 음악실의 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는 멈추고 말았다. 연주가 끝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문 틈새를 훔쳐보았다. 


그곳에 있던 것은 시노미야 씨였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일까? 넘실거리는 음악실의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황혼빛을 받으며 시노미야 씨는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틈새로 보인 목덜미는 자그맣게 어린 땀방울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환상적인 광경으로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덧쓰는 얇은 손가락과 작게 한숨을 내쉬는 입술을, 나는 그저 멈춰서서 어쩔 줄도 모른 채 그 모습만을 눈동자에 새기고 있었다. 인기척이라도 느낀 것인지 시노미야 씨는 별안간 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급하게 몸을 숨겼다. 애써 숨을 죽이며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동안 새하얗게 물든 머릿속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정신을 차리면 나는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다급하게. 복도를 내달리는 요란한 발소리도 두근거리는 소리에 지워져버렸다. 왜 도망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 되뇌어보았지만 마땅한 대답조차 없이 나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은 그냥 단편으로 끝내고 다음부턴 진짜 이렇게 막 무게 잡고 있는 척하며 글쓰는건 관두고 가볍고 캐쥬얼하고 재밌는걸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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