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언제나 성공회 신자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왔읍니다.

1. 하드코어 고교회파 분이든 감리교에 가까운 복음주의자 분이든 마찬가지루요. 그러므로 당연히 성공회를 우리 라틴교회의 하위호환(?!)이라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몇몇 가톨릭 신자분들이 속으로 생각하듯이 가톨릭과 성공회 사이의  에큐메니컬 운동이
가. Personal ordinariate 설치해서 너네 전례전통 지켜줄테니 하이 앵글리칸들은 가톨릭 품으로 와라 or 나. 최소한 로마의 Primus inter pares는 존중해라 식의 결말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1의 경우는 그 의미를 가톨릭으로 '오고자 하나' 앵글로 감사성찬례의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 이상으로 확장되는 순간 형제자매애를 해친다고 확신합니다.)
그건 '에큐메니컬'이 아니라 흡수합병 시도겠죠. 예수님께서 보시기 좋은 일이 아닙니다.

2. '교단'이 다르다는 것은 결국 '어느 정도는 우리가 너네보다 옳다.'라는 감정을 소극적으로라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상통을 이루거나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도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명목상 교파연합운동을 강하게 지향하는 연신원에 다니는 지인들도 그 부분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얘기하더라구요. 특히 가톨릭교회, 정교회, 개혁교회같이 교회론이 선명한 교파들끼리는 더욱 이런 일이 빈번하죠.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에 사도계승과 삼성직을 납득시킬 수는 없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만인사제설과(물론 가톨릭과 정교회도 모든 세례받은 이들의 보편사제직의 개념은 있지만) 당회식 교회운영을 납득시킬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론을 강조하다 보니 교단 내부적으로는 정합한 이야기라도 상대 형제자매 교단에게는 상처가
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겠죠.
요컨대 성공회의 여성사제서품/동성애자 서품, 가톨릭의 동방 sui iuris church나 앞서 말했던 Anglicanorum coetibus의 반포, 정교회 신자를 제외한 (사실상) 타교파 자매님 형제님들의 성찬전례 참여 제한,  정교회의 현지 국가권력과의 결탁을 통한 공공연한 소수 타종파 신자들에 대한 차별 등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교단 내적으로는 정합할지 모르나 특히 공동선을 이뤄나가는 데 해가 된다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3. 한편 '한국적' 상황에서 가톨릭과 성공회 신자분들 사이에서 감정이 상하고 에큐메니컬적 형제애를 손상시키는 다음과 같은 특유한 이유들이 분명 있다 보입니다.

먼저 가톨릭교회의 경우
일단 몇몇(생각보다 다수일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성공회에 대해 지닌 양가감정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좀 이상하다고는..생각하지만 몇몇 가톨릭 신자분들은
성공회 형제자매님들에게 막연한 친밀감과 동시에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분들의 시각에선) '근본없는' 다른 개신교와는 달리 삼성직 제도도 있고 전례도 있고 사도좌만 없는 가톨릭이네~식으로 막연한 친밀감을 느낌과 동시에, 아 그래도 우리가 참된 보편교회지. 성공회는 사도전승도 없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본질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지. 식으로 은근한 우월감을 지니고 또 그걸 표출하다 보니 성공회 신자분들께 상처를 주게 되지요.
심한 이들은 여기에 이단 패드립을 치니..
(물론 몇몇 성공회 사제분들의 '튀는(지나치게 radical한..)'발언을 가지고 뭐라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건 교파에 대한 비판은 아니니까..)
그러한 단죄가 교파 내부적으로 정합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연히 입밖에 내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 전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편 성공회 측에서는 예장이나 고신이 너네는 가톨릭 2중대 아니냐..고 수십년간 비방해 온 것에 피로가 누적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 걔네 성차별적이고 수꼴임. 우리가 걔네한테 왜 감? 식의 사고를 지니고 이를 또 특히 장로회/감리회에서 성공회로 온 신자분들이 종종 표현하는 것이 교회론과 보편성에 있어 무한한 자부심을 지닌 몇몇 가톨릭 신자분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습니다.
특히 제 사견과는 별개로 가톨릭교회는 굉장히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회론과 성윤리를 지니고 있는 교파이고, 한국의 광교회ㅡ복음주의 계열 성공회 신자분들의 젠더적/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발언 자체가 몇몇 소수의 가톨릭 신자분들에게는 교리적 선전포고 수준으로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성공회는 훌륭한 교회이지만 정말 소수교파다 보니 절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공회의 존재를 모릅니다 ㅠ.ㅠ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해의 정도는 한국에 있어서는 메이저 종파인 가톨릭 측의 귀책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4. 물론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의 현실이나 넷상에서의 갈등은 분명 한국의 종교갈등에선 가장 소소하고 작고 평화로운 축에 속합니다.
일단 성공회가..너무 작고...(ㅠ.ㅠ) 절대다수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교회도 신자의 정체성은 확실하나 종교적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나이롱 신자분들이 많습니다.) 호전적인 호교론이나 타교파 비방에 관심이 없으며 무엇보다 500만 가톨릭 신자중에 성공회의 사도전승이니 옥스퍼드 운동이니 여성사제서품이니 이런 가톨릭ㅡ성공회 교파간 이슈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잡아야 1%도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 소수의 스피커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만 자제하면 되지 않을까..생각합니다.

5. 한국은 철저한 세속공화국이고, 종교의 사회적 비중은 지속해서 감소중입니다. 실제 액팅 신자수에 비해 가톨릭과 보수 장로회 양 교파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과다대표되어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러므로 사실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의 각 구성원들 사이에서 실현할 수 있는 에큐메니컬이란 단기간 내에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여성사제서품, 성사교류, 교회론적 차이)이나 자신의 교파의 애착으로 입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기부 한번 더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놀러 가고..이런 일들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은 성 토마스 모어나 크랜머의 시대도 아니고 웨슬리나 뉴먼의 시대도 아니라 2022년.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사회적 소수가 되었고, 종교의 의미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틴교회와 앵글로교회가 한반도에서 '에큐메니컬'을 이뤄내는 건 이런 일상적인 삶ㅡ예수가 바라는 사랑의 실천 아니겠나욤.


다들 보람찬 새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