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초초장문) 오늘 마침내 대인기피증 극복함

히프노스 · 2024.05.26 02:42:43

어릴때부터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사람들이 무조건 나를 싫어할거다

다들 겉으로는 좋아하는척 하지만 뒤에서는 미친듯이 헐뜯을거다

이런 식으로 피해망상 가득한 생각을 하거나,

갑자기 사람들 목이 내쪽으로 기괴하게 돌아오면서 나를 노려보는 것 처럼 환각이 보인다거나 했는데,

의사선생님이 내가 만화랑 게임 좋아하니까, 코스프레같은거 한번 해보라고 조언을 주셨음.

처음 듣고선 “사람 대하는거 무섭고 관심받는게 무서운 사람한테 이게 맞아요?” 같은 뉘앙스로 의아해하면서 질문해봤는데

화장하고 마스크 쓰고, 너가 평소에 입는 옷이랑 완전히 다른 스타일 옷일테니 알아보기도 힘들거고, 그리고 다들 코스프레 하는 곳인데 너 하나 더 한다고 뭐 그리 튀겠냐고 말하셔서, 그리고 자기가 보증하건데 넌 어릴때 일 때문에 그렇지 분명 무대 체질이라고 하셔서 큰 결심 하고 해봤음.

그래서 오늘 킨텍스에서 플레이엑스포 하는거 알고 한두달쯤 전부터 코스프레 준비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음

’기왕 하는거, 확실하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 보자‘

그래서 무선 트챨 들고 나가서 코스프레한 게임 노래 연주해보기로 결심함. 아무리 봐도 미친 생각이었는데, 왠지 이걸 꼭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거임… 안 하면 내가 또 도망쳐버리는 겁쟁이가 될 것 같다는 식으로.

그래서 오늘 아침에 화장하고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고, 일렉기타 칠줄도 모르면서 팬심으로 샀던 파란색 텔레 들쳐메고 야외에 사람들 줄 서있는 입장대기줄쪽으로 걸어가는데 진짜 뒤지게 부끄럽고 무서웠음..

멀대같이 길쭉한게 치마 입고선 일렉기타 메고 걸어다니는걸 당연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에 눈 질끈 감고 바닥만 보고 걸었음. 걷다보니 결국에 줄 뭉쳐있는 장소 근처까지 와버려서, 올 게 왔다 하고 심호흡 크게 한번 하고 앰프 셋팅했음.

처음 했던 곡은 프로젝트 세카이라는 게임의 스텔라라는 곡이었는데, 밴드 유닛 테마송임. 이 노래 처음 듣고선 ‘나도 언젠가는’ 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었다고 해야 하나..

부모님 졸라서 처음 일렉기타 잡고 타브악보도 볼 줄 모르는 상태에서 영상 속 손 모양 보고 따라해가면서 했던 기억이 떠올랐음.

셋.

둘.

그리고 하나.

심호흡 하고, 박자 세고 노래를 틀었음.

옥타브 주법으로 시작해서 파워코드 스트로크가 거의 전부인 간단한 곡이었는데도 시작하자마자 손이 떨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거임;;

그래도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 차려보니까 지판밖에 안 보였음.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쳤는데, 중간쯤에 잠깐 앞을 보니까 아무도 날 신경쓰질 않는거임.

그제서야 사람들이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걸 알아챔.

그러고 나니까 시야가 돌아오고 뭘 해야할지 생각났음.

그냥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싶은걸 해보자.

부끄러운 건 잠시니까, 어떻게든 해보자.

할 수 있다.

손떨림도 멈추고 다리도 안 떨렸음.

피킹에 힘이 붙는게 느껴졌음.

곡 하나 끝나니까 사람들이 폰만 보고 있는거임.

그래서 오늘 내가 하루정도 미친다 생각하고 사람 더 많은 곳으로 가봤음.

가서 말해줘 한번 연주했는데 이번에는 몇명정도 박수가 나온거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기분좋은 건지 몰랐음.

진짜 날아갈 것만 같더라.

근데 너무 긴장해서 힘들길래 구석에 가서 쉬고 멍하니 있다 보니까 한시쯤 됐음. 이정도면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고 집 가려는데 남성분 하나가 오셔서 기타치는거 엄청 멋있었다고,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자고 해주신거임. 혼자 어버버대다가 사진 찍어드리고 나니까 용기가 생겨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슬슬 내 캐릭터 뭔지 아는 분들도 많이 보이고 해서 사람 제일 많을때 다시 나갔음.

다시 또 준비하고 하는데 캐릭터 알아보고 사람들이 조금씩 앞에 모여서 쪼그려앉으시는거임.. 그래서 이번에는 순서 바꿔서 말해줘부터 시작했음. 솔로 다 틀려서 그냥 비비는데도 끝나니깐 박수도 쳐주시더라. 진짜 고마웠음.

슬슬 사람들이 나한테 시선을 많이들 주시길래 이게 내가 빛날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스텔라 한번 더 틀었음.

가사랑 내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연주하는 도중에도 울 것 같은거임…

열심히 참으면서 끝냈음.

박수 소리, 멋지다는 외침, 그리고 디스토션의 잔음,

그리고 날 바라보는 수많은 눈들.

하지만 처음으로 눈들이 무섭지가 않았음.

아는 노래도 아닌데 그렇게 집중해서 들어주고 응원해주고,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음.

사람들이랑 사진 좀 찍고, 잘 마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한숨 한 번 내쉬고 정리하는데, 초등학생 쯤 되보이는 애 하나가 와서는 완전 멋있다고, 내일도 오냐고, 자기도 일렉기타 칠거라면서 엄청 신나하다가 사진 찍어달라기에 찍어주고 나니까 부모님한테 달려가서는 자기도 일렉기타 치겠다고 조르는 모습을 봤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처럼,

오늘의 나는, 누군가의 기타 히어로였구나.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다독여주는 느낌을 받았음.

어쩌면 내가 드디어 날 인정해준걸지도 모르지.

어머니가 데리러 오시고 차 타서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엄청 우셔서 놀랐음. 그걸 보니까 긴장때문에 잊고 있었던 기쁨이 몰려온거임.

해냈다.

내가 해냈다.

십수년간 바뀌지 않던 것이 마침내 바뀌었다.

해냈다.

둘이서 한참 울고 나서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짐.

이제서야 깨서 새벽감성 가득한 채로 글 쓰고 있네…

이어폰으로 스텔라 또 들으니까 감회가 새롭다.

일마갤 와서 일렉기타 이야기 듣고 하는게 가장 큰 낙이었음.

그 덕에 많이 버티기도 했고.

그냥 모두한테 고맙다는 말 전해주고 싶어서 올림.

아래는 스텔라 가사 일부임.

———————————————

“이것은 그래, 오늘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

날개깃을 드높여 하늘을 향해

비참해지고 싫어졌어도 빛나고 있는 꿈을

이룰 수 있는 날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자라 있었어

…

누구보다도 더 멀리 저 너머로 가자며 날개짓한 별의 한 순간을

밤하늘은 계속 기다리고 있어, 빛날 날을, 기다리고 있어.”

———————————————

셀카도 찍어봤는데 여기 올릴 이유 없어서 그냥 글만 썼음..

일마갤 여러분, 다들 새벽감성 가득 이불킥 예약글을 읽어줘서 고마워요.

항상 고마워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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