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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번역] 점자성서) 날지 못하는 까마귀앱에서 작성

Psychedelic_surrea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03 12:40:30
조회 157 추천 5 댓글 5
														

...그 어떤 낮보다도 찬란하다...

노을 속으로 몸을 담그며 나는 생각했었다. 언제나처럼 머리가 저릿한 기분이 느껴진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몸을 뒤덮은 상처가 조금 아릿하지만, 개의치 않고 걸어간다.

어느새 차분히 내려앉은 밤의 장막, 은은한 공기. 잠든 듯 이상하리만치 고요해보이는 도시는 그러나 그 안에 광기를 숨기고 있다.

나도 그 일부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처음부터 사냥꾼을 업으로 삼는 이는 극히 드물다. 더욱이 그것을 유업으로 물려주는 부모는 사실상 없다 봐도 무방하다. 적어도 야남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내 고향은 조금 다르다.

매 세대마다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그 사명을 이어받는 자들은 대대로 야남 바깥, 이방의 벽지에서 온 혈통이며, 그 전통에 걸맞게 까마귀의 옷을 입는다. 비록 피에 취해 한 마리 야수로 영락하여 망가졌지만 한때는 고결한 사냥꾼이었던 한 인간을 기리기 위해, 그 유지를 잇기 위해 입는 것이 까마귀 옷이다. 물론 부리 가면은 속에 향로를 채워 악취가 새어들어오는 것을 막고 피에 취하지 않게 해주며 깃털은 팔을 가려 자유로운 움직임을 감춰주지만, 까마귀의 의복은 그런 실용적인 쓸모 이전에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조장. 새들로써 치루어지는 장례. 들판에 놔두어진 시체는 새들에게 쪼아먹히고 그로서 다시 생명과 하나 되어 저 창공으로 날아간다. 까마귀 옷은 조장을 의미한다.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야수의 처단자인 동시에 인간의 장례자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까마귀 옷의 의미를 항상 염두에 새기고서 피에 취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피에 취한 이들을 드높은 하늘로 돌려보낼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다들 그렇게 믿었다. 매 세대의 까마귀들이 똑같이 찢겨죽고 베여죽고 타죽고 빠져죽고 행방불명이 되어 사라져도, 이 혈통은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양 그 후손 중 으뜸 가는 자를 거듭 까마귀로 만들어 야수들과 야수나 다름없는 인간들의 틈바구니로 내던졌다.


그리고 까마귀들은 매번 똑같이 죽어갔다.


이제 어린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해낸다 해도 지금과 별반 다를 바는 없으리라. 요즘 들어서는 더욱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래서 더욱 과거에 매달린다.


내 아버지는 까마귀였다. 당신께서는 그 사명을 자랑스러워하셨고 그렇기에 항상 까마귀로서의 영예와 힘을 거듭 말해주고는 하셨다.

어릴 적부터 야남으로 건너왔지만 이방의 말을 하고 이방의 혈통에 이방의 옷을 입는 나는 또래 아이들과 결코 어울리지 못했다. 개의치 않았다. 나는 남는 시간에 대신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 단련에 매진했다. 매 세대마다 까마귀는 한 명이라지만, 그 세대는 말만 세대일 뿐 수 년 단위조차 겨우겨우 닿는 경이로운 갱신 속도를 자랑하기에 결코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그것도 친자식에게 이런 미친 짓을 미화해대는 것이냐, 춘부장께서는 제정신이냐는 질문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질문에 대신 우리의 훌륭한 어머니께서는 피에 취해 일가친척을 몰살한 다음 아버지의 품 속에서 죽어가셨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잔혹하게도 어머니가 까마귀로서의 아버지를 열렬히 긍정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까마귀의 일이야말로 제일 잔혹하기에 제일 상냥한 과업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까마귀로서의 긍지를 놓지 않았다. 사냥의 밤이 찾아올 때마다 야남을 누비며 당신은 한 번도 빠짐없이 검을 들었다. 달빛 내려오는 창문에 기대 밖을 바라보다 이따금씩 들리는,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야수인 것 같기도 한 성대가 피거품에 질식해가며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량으로 절규하는 소리를, 나는 음악 듣듯 기쁘게 즐겼다.

아아, 아버지는 역시 대단해.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별에 준비할 수는 없다.


야속하게도 그것은 축제에서 찾아왔다.

매년 야남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지금의 야남이 어떤지 생각해보면 무슨 야수의 껍질을 산 채로 벗겨 태운 다음 혈주라도 벌컥벌컥 들이키는 건가 싶겠지만 결코 그런 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냥꾼들이 모여 사냥의 성공을 자축하며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무기 제조법을 공유하며 야수에 맞서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다.

사이가 영 좋지 못한 공방의 분파들이 모두 옹기종기 모여 서로 욕하거나 싸우는 대신 우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드문 자리이기에, 많은 사냥꾼들이 손 꼽아 기다리는 날이기도 했다.

내가 갓 성년이 되던 해에도 축제는 열렸다. 그 무렵 내 기량은 절정에 달해 아버지는 머지않아 네가 이 유업을 물려받을 거라 말하시고는 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맨날 대련만 하면 압도적으로 이기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라며 투덜대었다.

그 날은 유독 달이 낮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아련히 익숙한 느낌에 머리가 조금 저릿했지만, 뭐, 달이 낯선 사람이 있다면 그 자야말로 광인이 아니겠는가. 나는 개의치 않고 축제로 향했다.

괴짜 아치볼드는 언제나처럼 검은 야수의 번개와 연관된 것들만 한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는 혼자 주절대고, 화약고는 넓은 칠판에 방정식도 이것보다는 간단하겠다 싶은 설계도를 그려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설명했다. 최초의 사냥꾼의 방식을 이어받은 분파와 치유 교단의 분파는 속도와 완력 중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 싸워댄다. 나는 슬쩍 끼어들어 속도가 최고라고 한 마디 던져주고서는 유유자적 떠나갔다.

야남이 따뜻한, 유일하다시피 한 날.

몇 번이고 거듭 잘만 열려왔던 축제였고,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야수들이 온다 해도 온 사방이 사냥꾼인데 걱정할 것이 무엇 있으랴.


어느 순간부터 낮게 걸린 달은 핏빛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인간의 비명과 야수의 포효 중 어느 것이 더 많은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던 밤, 치유 교단은 수많은 사냥꾼들을 저버렸다. 구시가지는 불의 혀에 속속들이 유린당했다. 피와 불과 살 타는 냄새와 잿더미가 서로 섞여들어 온 도시를 진하게 물들여갔다.

사람들이 공포와 공황에 질려 내지르던 비명 중 몇 가지를 기억한다. 야수가 축제장 안에서 나오고 있다. 사냥꾼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

나도 최선을 다해 맞서싸웠다. 아니, 이성이 있고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들은 전부 그 참상을 막으려, 혹은 조금이라도 늦추려 맞서 싸웠다. 온 사방이 무기였기에 아버지가 가르쳐준 방식에 맞는, 최대한 가벼운 무기를 들고 휘둘러댔다. 다행히도 공방의 무기들은 아버지의 쌍단검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빠르게 손에 익었다.

단검이 뭉개지는 동공을 꿰뚫고 뇌를 잘랐다. 망치가 다리를 부수고 심장을 터뜨렸다. 도끼가 등뼈와 내장을 끊었다. 나대가 머리를 두 동강내고 목을 갈랐다. 대검이 배를 꿰어 조각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마차에서 방금 떼온 듯한 바퀴를 무기 삼아 살점을 으깨는 광경이 신기했다. 자세히 보니 처음부터 무기로 만들어진 듯했지만 오히려, 그리고 당연히, 그 편이 더 신기했다.

아비규환. 대죄인이 있다면 이런 곳에서 벌을 받지 않을까 싶은 곳에서 무고한 자들이 수없이 죽어갔다. 구할 수 있었던 자보다 구하지 못한 자들이 점점 많아져갔다. 약사와 음유시인, 환자와 사냥꾼, 친우와 시민.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나를 반으로 찢는 듯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탁을 따라 어느 어린아이를 축제장 바깥으로 데려다주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한 사냥꾼의 손에 배를 뜯기는 아버지를 보았다. 화염을 뒤로 펼쳐지는 그 모습은 마치 연극처럼 꿈처럼 아찔하게, 몽롱하게 다가왔다.

멀리서 보아도 꽤나 깊은 상처였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장이 후두둑 쏟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맨손으로 아버지를 공격한 사냥꾼의 얼굴을 돌바닥에 대고 갈고 있었다. 살이 갈려나가는 소리가 뼈의 으드득 소리로 바뀌고 얼마 안 있어, 놈은 절명했다. 눈알이 빠져 굴러나왔고 이빨이 돌바닥에 박혀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간신히 나는 애원했다. 제발 살아줘. 이건 아니야. 하지만 아버지는 나보다도 더 또렷한 눈으로 나를 마주보며 당부할 뿐이었다. 그 손에는 어느새 쌍단검과 까마귀 사냥꾼의 기장이 들려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아버지는 내 이마에 당신에 이마를 맞대었다. 그 때 느낀 찌릿한 기분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다 넘어가는 숨을 쥐어짜내어 말했다.

"이제, 너도 물든 깃털의 새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었다.


슬퍼할 틈은 없었다. 나는 기장을 급히 쑤셔넣은 다음 아버지의 가면만 겨우 쓰고 단검을 챙겼다. 그러나 가면을 쓰자마자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까마귀들의 유지가 아직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일까.

향료가 채워진 가면을 벗으면 피냄새에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지만, 상처도 별로 없는데 숨을 못 쉬어서 죽는다는 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가면을 벗어던지고 싸웠다.

기묘하게도, 화염이 내뿜는 농연과 매캐하고 비릿한 피냄새가 온 사방을 뒤덮은 와중에서도, 그 편이 더 숨쉬기 쉬웠다.


싸움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동은 언제나처럼, 이 구덩이의 참상을 전혀 모르겠다는 듯 터왔다. 미쳐버린 사냥꾼과 아수들을 대부분 처단할 수 있었지만,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혼돈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구시가지는 그렇게 그 이름을 얻었다.



아침, 나는 야속하리만치 밝은 햇살을 뒤로 한 채 한 손에 가면을 들고서 걸어갔다. 분수 앞에서 술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비척거리면서 일어나 목을 만지작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던 누군가를 지나치고, 나는 공방으로 향했다.

향료의 냄새도, 피와 불의 냄새에도 무뎌져버린 코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맡지 못했다. 검댕에 뒤덮인 얼굴은 어떤 표정도 짓지 못했다. 모든 것이 한낱 하룻밤의 꿈 같았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감각은 전부 무너져내렸고 개념은 그 의미를 잃었다.

터덜터덜 내딛는 걸음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나는 거기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공방 지부는 이미 임시변통의 야전 병원이 되어있었다. 비명과 고함으로 가득 차 귀가 먹을 것 같은 그 속은 그러나 이상하게도 텅 빈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의사에게 치료받으며 그저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되뇌일 뿐이었다.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타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어떤 의미도 담을 수 없고 담기지도 않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 위로랍시고 늘어놓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서러워 나는 조금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까마귀로서의 첫 날이었다.




의복은 크기가 맞지 않아 새로이 받았지만, 아버지의 가면과 당신의 쌍단검만큼은 결코 대체할 수 없었다.

운철로 만들었다는 한 쌍의 단검은 결코 망가지는 일 없이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었다. 가끔씩 커다란 야수와 맞닥뜨릴 때면 교단의 큼지막한 무기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역시 까마귀 사냥꾼에게는 이 무기가 제격이다. 사냥꾼들의 몸놀림은 여간 날랜 것이 아니고, 특히 피에 취해 야수화의 조짐을 보이는 자들은 가히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를 보인다. 그 찰나의 빈틈을 정확하게 노려 피해를 누적시키면서도 치명적인 일격을 전부 피하려면 가벼운 무기는 필수적이다.

나 자신도 피에 취해버리지는 않을지 두려웠던 적도 물론 있었다. 그래서 중절모를 쓰고 톱날의 지팡이를 무기 삼은 사냥꾼들을 다른 자들이 비웃을 때에도, 나는 속 편히 그들을 비웃어줄 수 없었다. 진짜로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 이면에 자리한 것은 고고한 깔끔함 같은 것이 아니라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부리 가면 안에 향료를 꽉꽉 눌러담아온 것이었다.




다만 오늘이라는 표현은 이제 조금 부적절할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기이할 정도로 푸른 쪽빛 하늘에 떠 빛나는 붉은 달. 저 달은 이상하리만치 지는 법이 없다. 시간 감각이 뒤틀린 지 오래기에 정확히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알 수 없다. 몇 일? 몇 주? 몇 달? 몇 년?

어쩌면...

나는 고개를 돌려 대성당의 입구를 슬쩍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문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저 안에 또다른 「까마귀」가 있다.




구시가지에서 보았던 붉은 달이 다시 뜨던 밤, 나는 이상하게도 고요한 야남에 오히려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온 도심을 돌아다니며 재앙의 전조를 찾아다녔다. 또 그 비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야남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심지어 그리도 지긋지긋하게 들리던 쥐소리조차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딱 하나 살아있는 존재를, 나는 대성당 안에서 만났다.

매 세대마다 까마귀는 하나일 터이다. 즉 나 이외의 까마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자도 분명 까마귀였다. 습관적인 몸놀림이 특히 그 점을 잘 드러냈다.

장비나 복장은 조금 다른 면이 있었지만, 그 자의 말은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었다. 살짝은 귀에 익은 듯한 그 억양은 그러나 기묘하게도 고대의 것이었다.

"안녕하시렵니까, 어린 까마귀여. 고름 속에서 헤매이는 자여."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가 어떻게 있지?"

"아아. 압니다. 까마귀는 한 번에 하나. 그러나 이 세상 위에 겹쳐지고 그 위로 펼쳐지는 경이에는 불가능이 없지요."

"굳이 필요없는 현학을 즐기는 놈들치고 제정신인 경우를 못 봤단 말이지."

놈은 잠시 큭큭댔다.

"너무 각박하게 굴지는 말아주시지요. 그저, 즐기는 것일 뿐이니."

역시, 사냥감이다.

"묻고 싶은 질문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니 먼저 여러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변방의 한지에 있는 고성에서 왔습니다. 「카인허스트」라는 이름의 성이지요. 피를-"

"나도 알아. 금단의 피를 몸에 받아들이고 고대인들의 힘을 얻은 여왕과 그 혈족. 내 손으로 쓰러뜨린 놈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으니 설명은 집어치워. 안 그래도 너희들의 방식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그건, 듣기 서글프군요. 하지만 이 끝없는 사냥과 참극이 지긋지긋하지 않으십니까. 속세의 굴레에 묶여 신음하고 있는 까마귀여. 한때 그 업을 짊어졌던 자로서, 저도 그 고통이 무엇인지, 얼마나 큰지 압니다. 이 구저분한 인과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와 같이 카인허스트로 가, 여왕의 피를 받아들이십시다."

"제정신이냐?"

단검을 뽑는다. 운철의 날카로운 스르릉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붉은 달이 또 떴는데 나만 야남을 벗어나라는 건가? 그러고서 피에 취해 도살을 반복하며 자신에게 감탄하는 머저리로 전락하라는 건가? 받아들일 수 없다."

혈족의 까마귀는 이리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을 꾸고 있지 않으십니까."

살짝 머리가 저릿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지금껏 잘만 깨있었다. 꿈 따위를 살아간 적은...

...설마 사냥꾼의 꿈을 말하는 건가. 그 기묘한 인형과 만나 더 강한 몸을 얻은 적은 있었지. 모든 죽음을 한낱 하룻밤의 꿈으로 치부해버리고 어디서든지 깨어나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나로 하여금 그 원천을 궁금해하기보다도 그 유용함에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꿈보다도 현실에 훨씬 더 가닿은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간에 가까웠다.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주 유용한 도구를 잃었다는 것에 가까운 감각을 줄 정도로.

이제 죽음은 영원히 나를 옭아매겠지만, 이미 나는 준비를 마쳤다. 가능한 한 끝까지 삶에 매달리겠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나를 더 빠르고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검을 뽑았다.


다만 놈은 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놈은 기이하게도 최초의 사냥꾼이 쓰던 기술을 사용했다. 「가속」을 쓰는 자들은 오래 전에 다 죽어 그 명맥은 끊겼을 터인데, 라는 의문을 품을 새는 그러나 없었다.

마치 내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다 알고 있는 듯한 움직임에서는 노련함이 묻어나왔다. 그 기민함에 감탄할 새도 없이 부상은 늘어만 갔고 나는 이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총탄이 배를 뚫고 피의 칼날이 팔을 가른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 어두운 아가리가 아른히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피에 취한 사냥꾼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 끝까지 맞서싸운다. 이어져 내려오는 사명을 잊지 않고서 명예로운 사냥을 완수한-

머리를 잡혔다. 무슨 속셈이지. 이대로 잡아 부숴버리려는 건가 싶었던 찰나.


"이번에도 실패군요.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어린 까마귀."


다음 순간 나는 허공을 날았다.

대성당의 계단 아래 피를 흘리며 기대누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한다. 저 까마귀는, 분명 내 빈틈에 도를 꽂아넣는 대신 나를 집어던졌다.

굴욕적이다. 나를 제대로 된 상대로 보지도 않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비참하고 볼품없는 꼴이란 말인가.


이대로 죽는 건가. 부상이 심하다. 수치심에 화끈거리는 얼굴보다도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듯한 환부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의식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 기억은 발버둥치듯 기어나온다. 주마등일까, 생에의 처절한 손 뻗음일까. 

그 멍청이 개스코인이랑 헨릭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교단 쪽에 엮인 사람들치고는 드물게 멀쩡한 놈들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언젠가 야수 사태가 끝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퍼마시며 축하하기로 했던 게 기억난다. 피에 미친 병자들이 담근 혈주 말고, 곡물로 담근 진짜 술로. 지금 그 둘은...

...아, 그래. 둘 다 죽었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 명이 더 의식의 수면 위로 나타난다. 이방의 사냥꾼. 개스코인과 헨릭을 둘 다 죽인 녀석.


다만 원망은 없다. 오히려 내가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개스코인도 헨릭도 이미 피에 취해 미쳐있었다. 내가 할 일을, 아니, 오히려 나라면 하지 못했을 대신 해준 셈이다. 나라면 아마 망설이다가 베여 죽거나 설령 내 쪽에서 죽였더라도 죄책감에 미쳐버렸겠지.

...누군가 오고 있다. 대성당 바깥쪽에서부터이기는 하지만, 이제 검을 들 힘도 더 이상은 없는데, 어떡하지. 저 투구는, 분명 혈족의...

그러나 다음 순간 눈 앞에 나타난 자는 눈에 익다. 안도감에 몸이 조금 흘러내리는 듯하다. 온갖 세력의 옷을 전부 섞어 입은 듯한 기묘한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과도 같아, 못 알아볼 수가 없다. 마치, 저주와 유지를 그 몸에 모아 준비를 마친 듯.


그래, 너였나.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잠시 쉬는 중이야. 약간, 실수를 해서 말이지."

말도 안되는 변명을 내뱉는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성격은 버릴 수가 없는 듯하다. 객기일까, 의지일까.

"좀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요? 대체 무슨 실수를 했길래..."

"늙은이에게 못하는 질문이 없군그래."

"아니, 딱히 그러려던 게 아니라..."

큭큭대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네 허탈해하는 표정은 참 재밌단 말이지.

"걱정은 말라고. 늙은 몸이지만 피는 충분히 맞았어. 아직은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니 무슨 말이예요?"

"더는 꿈을 꾸지 않거든.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

"꿈이라면, 설마 사냥꾼의..."

말을 하려 하지만 이내 피를 토해낸다. 향료가 피와 섞여들여 달큰하고도 비릿한, 기묘한 냄새를 풍긴다.

"...어지간히도 멍청한 짓을 했군. 조심할 걸 그랬어."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머리가 어질거린다. 이 느낌은 언제나 싫다.

"맞아. 한때 나도 그 꿈을 꾸었지. 말 나온 김에, 나중에 인형에게 내 안부 좀 전해줘."

"...네. 하지만, 직접 전하시는 게..."

"너는 온갖 것을 다 알면서 이상한 부분에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지. 그 점이 재밌어."

큭큭. 조금 웃음을 흘린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됐어. 설명은 나중에 하지. 어차피, 이제 곧..."

다시 팔다리를 움직여보지만, 여전히 잘 되지가 않는다.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출혈이 더 심해지지만,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몸은 멈춰버린 듯하다.

"...무슨 실수를 했는지 물었었나. 저 놈이다." 대성당 안쪽을 슬쩍 가리키며 말한다. "저 놈이 아직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지. 돌아가. 이건 내 사냥이다."

"그 몸으로 싸우려는 건 아니겠죠."

"농담 같나? 오만?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하게 박살난 상태로도 싸워본 적이 있는 걸. 너무 얕보지는 말라고."

"얕보는 게 아니예요. 에일린 씨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적이 도주한 자까지 제대로 쫓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면, 그 자는 분명..."

"...역시 이상한 부분을 빼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란 말이야. 너도 그 머리 속의 눈인가 뭔가 하는 게 있는 건지 원."


...


"왜 대답이 없어? 정곡을 찔렸나?"


...


"...아무튼, 하다못해 에일린 씨를 돕기라도 하겠어요. 헨릭 때처럼."

"뭐?"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대성당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대답도 제대로 안 하다니, 영 예의가 없다니까. 바보 자식. 죽지만 마라...

출혈이 이렇게 심한데도 기절조차 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인 걸까. 가쁜 숨을 내쉰다. 차가우면서 뜨거운 몸을 뒤챈다. 이 어지러운 무력감이 나는 싫다. 곧, 괜찮아지겠지...

밤하늘이 묘한 금색으로 빛난다. 간만에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는구나 싶어 조금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이내 통증이 입꼬리를 잡아 끌어내린다.

잠시 가면을 벗고 밤공기를 들이마쉬고 싶지만, 이내 생각을 접는다. 온 도시가 피에 취해, 이제는 공기마저 탁하다. 비릿하고, 톡 쏘는 듯한, 마치 바다 같은...


...헨릭 때처럼, 이라고 했던가.

개스코인도 헨릭도, 모두 피에 취해 망가졌다. 고결한 사냥꾼에서 한낱, 한 마리 야수로 굴러떨어졌다.

그 이유는, 수많은 사냥과 죽음, 그리고 그 화약에 불을 당긴 무언가.

어쩌면 나도,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섬뜩한 생각에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피에 취한 사냥꾼들에게 안식을 주는 자가 피에 취해버린다니. 선대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들 중에서도 드문 사례였고, 전부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취급되어 거의 기록 말살되다시피 한 경우다. 어쩌면 대성당 안의 저 까마귀도, 벌써 피에 취한 것일지도. 혈족은 죄다 그런 부류다. 내가 저 놈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그래서일까.

나는, 결단코 그렇게 되지 않아...

그 말을 만트라처럼 되뇌이다, 이윽고, 정신이 아득해져간다.



......



얼마나 기다렸을까.

대성당 안에서 누군가 걸어나온다. 녀석이다.

...아아, 기어코 그 까마귀를 죽인 건가. 훌륭하다. 너도 야남 아닌 곳에서 왔다고 했지. 너도, 어쩌면 괜찮은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가 될 수 있겠어...

영 기묘한, 사냥꾼들의 나대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질적인 무기에서 피를 닦아내며 네가 계단을 내려온다. 옷은 피투성이에, 날카로운 장갑은 베어낸 살점으로 조금 덮여있는 모습. 살벌하기 이전에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른들 말은 들을 생각이 없군?"

"혼자 뛰어들어간 거 말이죠? 그건 그냥... 그러니까..."

"됐어. 감추고 싶은 것을 굳이 캐묻는 건 악취미지. 말하지 않아도 돼."

"...고마워요. 이제 치료를..."

밑을 힐긋한다. 벌써 피가 진하게 고여 계단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내 몸 속에 이렇게 피가 많다는 것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 막대한 출혈량을 인지하는 순간 눈 앞이 아찔해진다. 알지 않아도 될 것을 괜히 알아버렸어.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 에일린도 이제는 한 물 갔군... 좋은 시절도 다 지났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일린 씨는 아직 강하세요."

"이런 상황에 꺼내게 되는 순간 지독하고 고약한 농락이 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은 해봤나?"

"앗, 아니, 그게..."

큭큭, 딱 어릴 적의 나 같다. 허둥지둥, 갈팡질팡,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초보. 연륜은 힘에 반비례하는 걸까.


하지만 연륜이란 곧 지혜이자 지식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머리 속의 눈. 육체가 아닌 정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초월, 계몽. 피와는 다른 길. 너는 그토록 오랫동안 피에 취하지 않았지.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다. 너라면, 어쩌면.

"...흠, 그래. 이거, 받아."

까마귀 사냥꾼의 기장. 오랜 세월 동안 내 정체성이자 명예였던 그것을 떼어내 너한테 넘긴다. 얼떨떨하게 쭈뼛쭈뼛, 그러나 그것을 받아드는 손에는 의문이 없다. 마음에 들어.

그리고 하나 더.

"잠시 허리를 숙여봐. 이마를 이 쪽으로."

바로 이마를 내 눈 앞에 가져다 댄 너에게 이마를 맞댄다. 곧, 가시투성이의 밤톨이 온 뇌를 헤집는 듯한 격통을 뚫고 뇌리에 각인된 하나의 문자가 떠오른다.


매달린 자. 사냥꾼의 룬. 까마귀들이 대대로 계승받는 문자.


비르겐워스의, 모든 사냥꾼들이 영원히 짊어져야 할 원죄에서 탄생한, 속죄와 성찰의 문자. 같은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다짐.

그 상징을 너에게로 넘겨준다. 피와 뼛조각에 뒤덮여 신음하며, 온갖 것들의 비탄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죽이고 죽임당하면서도 이어받아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이건..."

"옛 우주. 꿈 속에서 죽은 위대한 자. 저주. 추구에 절제와 한계가 없어진다면 우리 모두가 도달하게 될 최후. 그 경고다. 공포를 마음 속에 새기고, 언제까지나 인간으로 남아라. 노예도 야수도 아닌, 괴물도 벌레도 아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네 눈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알 것 같다. 너는 분명, 그 비극의 장에 직접 가보았을 터.

"이것 또한 사냥꾼의 업. 그러나 명예는 없는 짐덩어리이기도 하지. 선택은 오롯이 너만의 몫이야."

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은 안심이 된다. 마음이 놓이는 이 편안한 기분, 대체 얼마만이던가.

"...아아, 눈이 감기는군. 잠시 쉬어야겠어."

"여기서 잠드시면-"

"괜찮을 거야. 그냥 좀 기다려..."

"잠깐만요, 그게..."

정말이지 쉴 틈을 안 주는 군. 뭐냐는 듯 고개를 든다.


"...깨버렸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죠?"

"아아, 사냥꾼의 꿈 말인가. 그래, 다 못한 얘기니 이 참에 끝내자고. 말 그대로야. 더 이상 죽음도 머나먼 땅도 하룻밤 꿈으로 넘겨버릴 수 없다는 거지. 그 꿈은 두 번 다시 꿀 수 없어.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해지고 나면, 이성이 다시 정신을 지배하고, 싸움을 속행하는 손에는 다시 땀이 쥐어져."

검을 들어 보여주고 싶지만 힘이 빠져 그럴 수가 없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많이도 보여주게 되는구만.

"나는 그 느낌을 다시 받고 싶었어. 현실을 벗어나 점점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는 듯한 그 감각도 좋았지만 결국 나는 인간이고,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죽으려 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다가 어느새 인간이 아니게 될까봐, 그게 무서웠거든."

"어떻게 깬 거예요? 사냥꾼의 꿈에서 죽으면 되나요? 하지만 그래도 깰 수는 없던데..."

"알아. 근데 대답해주기 전에, 왜 그 꿈에서 깨고 싶어하는 거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을 텐데."

네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피를 두려워하라」."

"비르겐워스의 격언인가. 치유 교단 소속 사냥꾼을 사냥하다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지.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저는 이제, 너무 두려워요. 더는 못하겠어요. 여기서 멈춰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어요. 앞으로 딱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기도 해요."

손까지 벌벌 떨고 있다니.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러는 거지.

"너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군. 기껏 까마귀까지 되어놓고서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닌데. 실례일 수 있겠지만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물어도 되겠나."

"사실, 여기 온 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심란함을 달래려 온 거예요. 아까 사냥꾼의 꿈에서 한 번 깨면 돌아갈 수 없다 했었죠. 그런 다음 죽으면 영원히 죽는 거라고. 돌이킬 수 없다고. 그런데..."

너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상하리만치 평소와 다르게 힘이 없는 동작이다. 투구를 벗자 드러난 너의 눈은 도저히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 깊고, 더 어두운, 무언가 들여다보고 마주본 듯한 그 눈은 마치 밤하늘 같다. 대체 무슨 얘기를...

"「창백한 피를 구하여 사냥을 뛰어넘어라」. 야남 진료소에서 깨어났을 때 봤던 수기예요. 이 밤이 찾아오기 전의 마지막 저녁에, 처음으로 보았던 그 글..."

"창백한 피. 그래.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만 잡것들이 계속 되뇌이고 다니니 이젠 좀 친근해질 지경이긴 하지. 그게 뭔지 알아낸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그 글의 필체가 제 것이었어요."

"뭐?"

...설마. 그렇다면 그 저릿한 느낌도.

"그리고 사냥꾼의 꿈에 묘비가 하나 있는데, 거기 적혀있는 이름도, 내 것이었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딱히 생각나는 설명은 있나."

"혹시, 이 밤이 묘하게 익숙한 느낌 받은 적 없어요?"

"조금은. 근데 사냥의 밤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

"아니, 그 정도 말고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똑같이 반복되는, 그런 느낌이요. 마치, 그래요. 기시감에 머리가 조금 저릿한 그 느낌."


...아아, 아아.

정녕, 그런 것이었단 말인가. 너도, 나도, 이 지옥에 갇혀...



"...그렇다면, 나도..."

"아마도요."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가, 전부 끝도 없이 되풀이된다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눈앞이 아찔해져 넋이 나갈 것만 같다. 똑같은 운명을, 반복해서...

"이 모든 싸움과 죽음에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 건가. 언젠가는 찾아낼 수 있을까."

...

"...해보죠. 언젠가는, 언젠가는 가능하겠죠. 영원히 이 숙명을 되풀이한다면 기회도 영원히 있지 않겠어요?"

눈이 조금 뜨이는 듯한 기분에 오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런가. 영원히 회귀하고 영원히 고통받는 그 굴레 속에서 무언가 찾아낼 수 있을까.

"너무 대책 없이 낙관적인 것 아닌가.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우리다. 지금까지 내렸던 결정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고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은 결과에 닿겠지. 기억도 사라지고 의식도 원점으로 돌아가고 나면 다음번 밤에도 우리는 이 대화를 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저번에 이미 했을지도." 

"...그렇다 해도, 시도는 해봐야죠. 언젠가는 이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기회가 끝없이 주어지니, 언젠가는..."

"앞에 무엇이 놓였는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겠다는 건가."

"딱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의하는 거예요. 부디, 제 각오를 지켜봐주세요. 에일린 씨도, 저도, 이 악몽에서 깰 수 있도록..."

너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장비를 정리한다. 이제 가려는 건가. 어차피 그 말에 뭐라 반박할지 생각이 안 나던 참이다. 차라리 잘됐어.

"...그럼, 이만. 언젠가 다시 만나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이내 유유히 떠나가 밤의 장막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영원한 허무, 끝없는 공허. 한없이 되풀이되고 어리석음과 피와 오물 속에서 언제까지고 발버둥친다. 고통을 주고받으며 신음하고 절규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

이를 악문다. 결의를 다져본다. 곧 모든 것을 잃고 또 얻겠지만 두려움은 없다.

돌이켜보면, 불길과 야수에 뒤덮여 살아온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미치지도 않았고 야수가 되지도 않았다.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 그렇다면 아득한 피 속에서, 다음 번의 나에게 나를 넘긴다. 유지를 넘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날로 돌아가 아버지를 구할 수 있기를.




눈꺼풀이 무겁다. 숨을 쉬고 있는 건지가 점점 모호해진다. 무거워지는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간다.

...그래. 조금만, 쉬자. 아주 잠깐만, 잠깐만 휴식을 갖자...

다시 가면을 벗는다. 상쾌한 밤 공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언제 맡아도 참 좋은 냄새야.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다가 가면을 벗고 맞이하는 첫 수 초는 항상 즐겁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간다. 곧 모든 기억을 잃고 어딜지도 모르는 과거로 돌아갈 텐데, 정말이지 불필요한 것들만이 기억난다. 유년기의 음식, 훈련장의 냄새, 야수의 비명, 창문 너머 달...

그리고, 두려움.

기억하라. 나는 에일린, 까마귀 사냥꾼. 그리고 한 명의 인간.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를 댄다. 숨을 내쉬고 몸을 조금 뒤챈다.

미안. 개스코인, 헨릭.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미안. 아빠. 나중에 다시 만나.

잘 자.








추워.




춥다. 새벽의 습한 공기가 몸을 눌러댄다. 하늘이 파랗다.

그런데 그 파란색이 조금 다르다. 불쾌할 정도로 짙은 쪽빛이 아닌, 내가 아련히 기억하는 새벽녘의 옅은 하늘색. 터오는 동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푸르름.

그것은 「창백한 피」의 하늘이 아니었다. 진짜 새벽이었다.

녀석은 어디 간 건지 고민할 새도 없이, 영원한 밤에서 드디어 깨어났다는 놀라움이 몸을 채워갔다. 부상도 어느새 반쯤은 아문 것 같다. 조금씩 활기가 도는 몸을 움직여 일어난다. 해는 금방이라도 지평선을 뚫고 떠오를 듯 그 광채를 뿌려온다.

옆에 떨어진 가면을 다시 쓰고 일단은 공방으로 향한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면 그 편이 좋을 터이다. 부상을 다 치료하기에도 그 편이 좋을 터.

계단을 내려가고 다리를 건넌다. 건물의 틈을 뚫고 걷고 또 걷는다. 항상 밤의 어둠 속에 잠겨있던 건축물들이 다르게 보인다. 다시 생기를 되찾은 듯한 그 모습에 기분이 묘해진다.

저 멀리 분수 앞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 누군가는 곧 일어나 비척비척 걸어간다. 목을 만지작거리며. 그 위로 해가 떠오른다. 그 영롱함에, 그리웠던 광채에 눈물이 조금 난다.

갑자기 아련한, 그리운 기분이 들어 달려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본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모르는 사람인가. 저 쪽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가 보이지 않아 머쓱하게 그냥 헤어진다.


넋을 놓고 걷다 어느새 공방에 도착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오랫동안 버려져있던 듯한 공방 안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있다. 오랜만에 들이마쉬는 공기에 나무는 기침을 하며 먼지를 토해낸다. 가면을 쓰고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더 깊숙이 들어갔다.

온갖 무기가 걸려있다. 나대, 낫, 창, 추... 새삼 사냥꾼들은 멀쩡한 무기는 왜 못 쓰는 건지 궁금하다.

많은 사냥꾼들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다. 누군가는 조용히 무기를 다듬고, 또 누군가는 치료를 받고 있다. 나도 의료 지원을 요청한 다음 조용히 치료대 위에 눕는다.

의사들은 말없이 상처를 꿰매고 약을 놓는다. 치료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어느새 점심을 지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이 검은 나무바닥을 물들인 피 중 나의 것이 꽤 될 테지. 이제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다.

창문 너머로 해의 따뜻함이 나를 반겨준다. 그러나 사냥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테고 할 일은 많다. 내가 몸 담고 쬐야 할 것은 차가운 월광. 그 아래에서 나는 야수와 야수나 다름없는 자들을 주살한다. 그래야만 한다.


피와 오물에 뒤덮여 신음하는 새. 나는 까마귀.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 에일린. 기억하라.


환부의 치료를 끝내고 무기의 날을 간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준비를 마치고 노을 타오르는 바깥으로 다시 나가려던 찰나,

...잠시, 가면을 벗어 바라본다.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아, 아빠...

언젠가는 기억해낼 수 있을까. 이 저릿한 느낌은 뭘까.

오묘한 기분 속에서 다시 가면을 쓴다.


다시 잠들지 않고 깨지도 않는 도시 속으로 향한다.


...나의 어스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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