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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번역] 점자성서) 석별앱에서 작성

Psychedelic_surreal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12 10:14:39
조회 168 추천 7 댓글 13
														

「석별의 정은 그러나 덧없기에 그 애틋함은 오직 탄지경 속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 가라앉은 도시의 금언








지금 내 손 안에 들린 것은 무엇인가.

소울, 혹은 추억, 어쩌면 불, 또는 과거.


태초의 화로가 만들어낸 「화신」, 장작의 왕들의 마음이 모여 탄생한 옛 신은 끝내 쓰러져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져갔다.


강대한 자들의 소울은 으레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그런 특이한 힘을 가진 소울은, 금술을 통해 아예 소울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화시킬 수도 있고, 막대한 양의 평범한 소울로 변환한 다음 자신의 힘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유의 특질을 온전히 유지하며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히 고행이다. 그 자칭 성자라는 식인귀도 그래서 심해의 시대를 준비한답시고 신을 먹었다가 형체를 잃고 부푼 돼지 시체같은 비참한 꼴이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소울은 무언가 다르다. 그것은 내 안으로 흡수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를 아주 벗어나지도 않았다. 싸움을 끝낸 내 손에는 어느샌가 알 수 없는 펜던트가 들려있었다. 다 낡고 해져서 이제는 무슨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지, 안에 누가 혹은 무엇이 있었는지도 모를...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화신의 소울. 왕과 신과 전사들의 기억. 침잠하고 반추하고 또 희생하며 불의 시대를 이어나간 자들의 이야기.


심연에서 돌아온 첫 번째 화방녀의 눈동자를 넘겨받은 이후로 제사장의 화방녀는 나에게 태초의 불을 거두기로 약속했다. 피부 밑에 들끓는 수많은 인간성을 끌어안은 화방녀는 그 어둠 속에서 불의 시대의 종막을 본 것이리라. 그리고 더욱이, 그 어둠의 아득한 너머에서 아스라이 춤추는 잔불도.

나는 거기에 동참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같은 사명으로 묶인 동포이기에, 결단은 어쩌면 빨랐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이유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종말은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어차피 찾아올 끝을 아주 조금 더 늦추느니, 차라리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다음 불씨를 기약 없이 기다리기를 택한 것이겠지. 그 선택에서 나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지금 당장은 어둠이 내려앉을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빛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이.


그래서 나는 화신에게 마지막으로 자검을 찔러넣고서 숨을 고른 다음 준비를 마쳤었다. 그것은 잔혹한 배신. 불 꺼진 재라면 응당 태초의 불을 계승하리라 믿고 기대한 모든 이들을 저버리고, 또 사명을 끝마치면 망자가 되어 이지를 잃게 될 나 자신도 내버리는, 무도한 결단.

이 세상도, 나도, 종극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헤어질 때가 되었다.


하지만, 화방녀를 소환하는 사인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자꾸만 멈칫하게 된다. 이 펜던트가 나를 잡아끄는 듯하다.

귀를 기울이면, 마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장작들은 이 불 꺼진 재에게, 한 시대를 끝내려 하는 나에게 무엇을 넘기고자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한때 이름이 있었다. 삶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저주의 표식과 함께 나는 불사자가 되었고,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다.

그 때의 나에게 삶을 이어나갈 이유 따위는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목을 옥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뭔가 원대한 대의에 나를 바칠 수 있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 시도의 목적은 차라리 탈출에 가까웠다. 여기서 내보내달라는, 절박한 외침.

그렇게 나는 태초의 불을 계승하려 했다. 나는, 실패했다. 그리고 불에게도 어둠에게도 버려진 채, 이름도 의미도 없는 잿더미가 되어 다른 수많은 재들이 흩뿌려진 땅에 묻혔다. 마지막 순간 나는 분명, 증오의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나에게서 나를 앗아간 어둠에게, 그리고 생명을 앗아간 불에게. 이런 비참한 최후로 나를 조롱한 세상과 운명에게.

까마득한 시간이 흐르고, 종소리와 함께 나는 불 꺼진 재로서 다시 살아났다. 여전히 내 이름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거의 생도 인연도, 전부 보잘것없이 비참하게 줄어든 채 내가 묻힌 관 속에 영원히 갇혀버렸다. 그 소중한 추억들은 이 가증스러우리만치 질긴 육신과 함께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고마워요, 재의 사람. 이걸로 저는, 세계를 그릴 거에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새로운 그림에 그 이름을 붙이고 싶어요."

..그 화가,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나는 이름이 없다고 대답해줄 수밖에는 없었다.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이제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아있지가 않다. 그리고 나 자신도 내 이름을 잊었다. 나를 나로서 있게 하던 그 모든 것들을 잃었다. 관 바깥으로 처절하게 기어나오며, 나는 그 사실을 제일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름도 없고, 장작조차 되지 못한, 저주받은 불사.

불을 잇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어중간한 머저리.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잔불에 이끌렸다. 그것은 따뜻했다. 잃어버린 무언가가 채워지고, 내 속에 없는 무언가가 생겨나는 느낌. 이제는 다 꺼져가는 불씨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이 좋아 매달렸다. 불 꺼진 재에게 찬란하리만치 아름답게 활활 타오르는 맹염은 어울리지 않아. 잉걸불이야말로, 나의 불이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다시금 규정했다. 빼앗고 또 앗아간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채우려 하는 끝없고도 어리석은 여정의 길을 걷는 자.

그래, 빼앗은 것들로는 언제까지고 메울 수 없을 허무.




...이 펜던트, 열어야 할까.

분명 루드레스에게 가져가면 그 금술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터이다. 그것은 아마도 불의 기억, 혹은 시작의 이야기. 어느 쪽이 되었건 참으로 멋있고 근사한 무언가로 재탄하여 내 곁에 남겠지.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해답이 알고 싶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필요없는 몸이건만 해답에 매달리고 집착했다. 아직은 알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나만의 답.

나는 누구인가. 알려줘...


나는 조심스레 펜던트를 열었다.

타닥거리고 바지직거리며, 화르륵. 그 찬란한 미광의 번득임은 이내 춤추는 불이 되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펜던트에서 타올라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양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톳불 앞에 앉아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조용히 그 불꽃을 바라보았다. 곧, 추억이, 이야기가, 전설이, 불을 수놓아갔다.




북부의 감옥에 갇혔던 한 불사자는, 순례하는 기사의 사명을 이어받고 불의 계승식의 사자에게 이끌려 옛 신들의 땅으로 향했다.

그것은 원래 있을 리 없는 운명일 터였다. 그러나 유지라는 것은 곧 본질적으로 계승이기에, 누군가는 그것을 필연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아련하고도 어렴풋해 도무지 말로 옮길 수가 없는 기묘하게 따뜻한 느낌. 신과 왕과 전사들이 멀쩡히 살아서 숨쉬는데도 등을 타고 오르는 파멸의 예감.

그 상극의 감정을 모두 품고 있는 첫 몰락의 시대인 동시에 마지막 영광의 시대를 지켜나가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땅, 로드란은 운명된 불사를 맞이했다. 그리고 도시와 숲과 동굴과 묘지와 호수와 탑과 성을 누비고 기사와 데몬과 이형에 맞서싸우며 불사는 그 위를 나아갔다.

풀무로 불을 지피듯 바친 인간성을 태워 불을 키우고, 그 온기로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금 인간성을 회복해나가는 기이한 순환 속에서 불사는 많은 해후를 가졌다. 암살자, 궁수, 마법사, 거인, 고양이, 용, 나비, 전사, 주술사, 도적, 처형자, 마술사, 사냥꾼, 늑대, 괴물, 조개, 뱀, 해골, 거미, 망령, 왕...

어떨 때는 싱글벙글하게 웃으며 연 상자에 씹어먹히며 비명을 질렀고, 또 어떨 때는 전투의 열기 속에서 마구 무기를 휘두르다 벽에 무기가 튕기는 소리를 듣고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강대하고 거대한 존재들에 맞서 싸워 이겼으면서 개 몇 마리와 버섯에게 쩔쩔매는 자신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여정 끝에 쓰러진 친우를 떠나보내고서 화톳불 앞에 멍하니 한참을 앉아있기도 했고 어둠 속을 헤매이며 공포와 추위에 몸을 벌벌 떨기도 했다. 허공을 걸으며 경이에 전율했고 비참하게 영락한 신을 보며 연민에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누군가는 우스꽝스러웠고 누군가는 비장했다. 누군가는 약했고 누군가는 강했다. 누군가는 선했고 누군가는 악했다. 누군가는 거짓되었고 누군가는 진실되었다. 마음이 있는 자도 있었고 마음이 없는 것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어받은 타인의 사명이었던 불의 계승은 어느새 불사에게 있어 추구할 단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모험을 선사한 잔인하고도 광대한 로드란을, 불사는 사랑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불사는 심연의 괴물과 만났다.

어두운 영혼에 잠식되어 뒤틀려 있었지만 분명히 인간이었던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서 매달릴 과거를 되찾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뒤트는 빛의 도시의 비술을 써서라도 자신의 것이었던 펜던트를, 추억을 되찾고 싶어했다.

스러져가는 괴물을 보며 불사는 생각했다. 저것이 과연 괴물일까.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도...

불사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불사 자신이 여정의 시작부터 간직해온 펜던트였다.

힘든 여행 중에는 따뜻한 추억이 필요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앎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둡든 밝든, 차갑든 따뜻하든, 자신을 잃지 않은 자야말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이다.

뇌리에 깊게 각인된 괴물, 혹은 인간을 뒤로 한 채 불사는 빛의 왕에 도전해 이겼다. 그리고 그 불을 이어받았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하는 저주를 끊고 속절없이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을 밝히고자 했다.

불사는, 성공했다. 강렬하고도 화려하게 타오르는 태초의 불은 이내 불사를 집어삼켰고 둘은 하나가 되었다. 두 번째 장작의 왕으로서 그 골육이 재가 되어가면서도 불사는 생각했다.

따뜻한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자.




...

아아,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았어...

강한 의지로 올곧게 선 전사들, 친우들. 불쏘시개를 바치면 바치는 대로 양껏 집어삼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이름도 없는 불 꺼진 재라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부러웠다.


나의 여정은, 과연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펜던트 속의 그가 누볐던 세상은 분명 이어나갈 가치가 있었고 또 충분히 이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죽기 싫다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몸을 뒤채며 살아남고자 했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타인이 준 유지를, 그 불의 사명을 이어받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는 진정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추억을 이어받은 그는 여정의 끝에서 직접 타인들의 추억이 되어주었다.


지금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은 돌이킬 수가 없다. 살릴 수 없다. 뒤틀려만 갈 뿐 쌕쌕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속절없이, 착실히 죽어간다.

종말에 가까워진 세상에서는 시공간이 뒤틀리며 그가 살았던 세상의 편린이 나의 세상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영광, 그 손에 잡히지 않을 듯 결국에는 잡히는 따뜻함은 내 세상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것은 그저 잔재일 뿐, 유산이 될 수 없다. 나는 그 누구의 추억도 될 수 없으리라.


역시 내 결정은, 아니, 화방녀의 결정은 옳았던 것일까. 불을 거두고 사명을 끝마치는 편이 나을까. 이대로 이지 없는 망자가 되어버리는 쪽이, 더 편할까...


저절로 열린 펜던트에서 불길이 다시 타오른 것은 그 때였다. 뜻밖의 일섬에 당황한 나를 다독이듯, 불은 다시금 나를 기억 속으로 이끌었다.

어느 고양이와 초록 옷의 여인의 대화를 지켜보던 자의 기억이었다.




"...죽어가는 자를 위한 기적?"

"그래. 원래는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야. 임종을 눈앞에 둔 이가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적이지. 고룡이 조용히 잠들어있는 지하 도시의 신관들이 처음 만들었다고 들었어."

"그럼 기왕 그러는 김에 다 죽어가는 사람도 팔팔하게 살려놓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지 왜 딱 숨 한두 번만 쉴 수 있을 정도로 해놓은 거래?"

"그 기적을 만든 자들과 도시의 신념이었다는 것 같더라고. 「석별의 정은」... 아, 뭐였더라. 어쨌든, 떠나보내야 할 건 떠나보내야 한다는 주의였지. 꼬인 것을 풀어 정리하거나 널린 것을 매듭지어 깔끔히 할 딱 한 순간, 그 이상은 안된다는 거야."

"매정하네. 서로 헤어지는 것을 섭섭해하고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한다는 뜻의 이름치고는 아주 냉혹하기가 짝이 없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솔직히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긴 해. 하지만 그 지하 도시는 독에 뒤덮여 모든 것이 서서히 죽어갔다고 들었어. 죽음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은 곳에서는 필연을 피하고 거기에 슬퍼하기보다는 그저 덤덤히 받아들이는 걸까. 그렇게 보니 죽지 않는 존재와도 어째 사고가 비슷해지네. 역시 상극은 본질적으로 같은 게 맞다니까."

"글쎄. 언젠가는 찾아올 피할 수 없는 것에 조용히 순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에도 나름의 멋이 있다고 보는 편이라."

"「길 따윈 없다」...라는 건가."

"그건 누가 한 말이야? 무슨 경구 같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알던 자가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말이니까. 답을 찾으려 발버둥치던 사내. 가장 어리석기에 가장 지혜롭고 가장 지혜롭기에 가장 어리석은, 가련한 사내였지. 하지만 그 나름대로 보기가 좋았어. 후훗."

"왠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것만 같네. 그 날이 올 때까지 답을 찾아 헤매이며 그 나름대로 언제까지고 떠돈다. 멋있잖아?"

"그냥 우둔하고 미련한 건 아니라 생각하는 거고?"

"낭만이라 불러줘."

"하."




...당신들은, 불의 계승자들은, 나에게 대체 무슨 말을...

머리가 혼란과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미쳐버릴 것만 같다. 뜨겁고 어지럽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한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째서 주지 않는 거야...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내 방황, 그 목적 없고 이유도 없는 죽임과 죽음의 소산일 터인 이지러짐이 나를 집어삼킨다.


"...아직, 있었나.
자아, 내게 내놔라, 너의 어두운 영혼을.
...내 아가씨의 그림을 위해."

게일, 그에게는 목적이 있었고 사명이 있었다. 충성의 대상이 있었고 따를 신앙이 있었다. 그 끝에서 그는 결국 신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한 세계를 만들기는 커녕 끝장내려 하고 있다.

꼴 좋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없이 헤매이는 얼간이에게 걸맞는 벌이 아니겠는가.


몸을 돌려 대자로 드러눕는다. 나도 모르게 벌려진 입을 다물 힘조차 없이 초점 풀린 눈으로 흐린 하늘을 응시한다.

어둡다. 검붉은 색으로 미약하게 칠해진 천공은 기분 나쁜 불길함을 품고 있었다. 시야를 조금만 돌리면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태양이 보이겠지만, 그 점을 제하더라도 하늘은 께름칙한 느낌으로 온통 뒤덮여있었다.

힘이 없다. 더는 움직일 기력도, 생각할 원기도 없다.

불사자가 쓰기에는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대로 까무러쳐 죽어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눈을 떴다.

바뀐 것은 없었다. 하늘은 똑같이 언짢은 느낌을 뿜어냈고 몸에도 머리에도 힘은 없었다.


멸망을 목전에 둔 세상, 그리고 그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인 나.

나는 어째서 여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것일까. 어째서 더는 수복할 수조차 없는 세상을 위해 이리도 발버둥쳐온 것일까. 어째서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 끈질기게 도전해온 것일까.

왜 화방녀의 간청을 받아들였던 걸까. 왜 나는 지금의 내가 된 걸까. 왜 이리도 괴로워하는 걸까.


한참을 앉아 고뇌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이내 다른 의문도 머릿속을 갉아먹어온다.

가슴을 답답하게 내리누르는 이 감각은 진정 두 갈래 길 사이에 놓인 우유부단인가, 아니면 한 길을 나아가지 못하는 의지박약인가.


빛의 왕의 이래로 그 누구도 태초의 불을 받아들이고서 온전히 자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빛의 왕은 태초의 불을 그 몸에 이어붙여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불사의 사명이라 천명했고, 그로써 아직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분명히 존재할지도 모르는 다른 가능성을 전부 차단하고 일단 지금 당장 가능한 길을 향해 모든 불사를 이끌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의 계승, 그 인신공양의 악몽 같은 고리는 계승자 개개인보다는 불을 우선하는 것이었다. 왕국 로스릭은 기어코 수천, 수만을 자살시켜 그 소울을 계승자 한 명에게 일임하는 역겨운 소업까지 자행했다. 단지 계승자가 장작으로서 더 오래 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장작의 왕이 이름 없는 불사라서 얕보기라도 한 건가, 바보들. 그는 여느 평범한 불사는 고사하고 그 누구와도 궤를 달리하는 자였어.

불사는 그것을 원했을까. 그가 만들고자 한 따뜻한 추억 속에서 살아갈 자들과 그 업을 이룰 수 있게 해주었던 불. 둘 중 불사는 어느 쪽을 원했을까.


기억 속의 고양이는 어떤 경구를 읊었다. 해답을,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한한 투쟁조차 긍정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본질에 다가가 그것을 느낀다. 만물은 그저 존재할 뿐 의미는 각자가 나름대로 부여하는 것일 뿐임을 인지한다.

평범한 고양이가 맞는 건가. 나보다 똑똑한 고양이가 있구나 싶어 피식 웃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군다. 과연 나도 그리할 수 있을까. 끝이 없는 끝을 향해 헤매이고 떠돌며 싸워나간다. 원하고 갈망하며 무한히 걷고 또 걷는다.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할까.

아니,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나만의 답을 알고 있다. 가능한지 어쩐지는 결국 시도해봐야 알 수 있는 법.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나는 일단 부딪혀보고 싶다.


잠시 손에 들린 흑색의 자검을 바라본다. 까마귀 날개. 회화의 까마귀 인간 기사가 사용했던 무기. 그들은 썩어가는 것일지라도 자신들의 세계를 사랑했다. 그 끝을 보기 싫었기에 수도녀에게 심취하여 죽어가는 세상의 마지막 수호자가 되었고, 모두 하나 되어 흐느끼며 동포들의 처형자가 되었다.

여신의 신자였던 그들은 신이 떠나간 세상을 따라 떠나려 날개를 원했고, 그 망집의 끝에 이르러 결국 이형으로 변했다. 하지만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들은 그토록 떠나기를 원하며 몸부림쳤던 세계를 끝내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 그리고 인력. 무엇에 이끌리는지를 정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이 무기를 쓰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까.


수많은 관념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남는 것은, 묘한 기시감.

어째서일까. 불편한 기분은 이내 사라진다. 아른히 반쯤 감겨있던 눈이 스르르 뜨이고 이를 악물게 된다. 주먹을 쥐고서 땅을 조금 치고 일어나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어가다 바위에 기대어 주저앉아 다시 일식을 바라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무너져가는 세상을 사랑했다.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 재와는 달리, 이 세상은 종말을 목전에 두고서도 살아숨쉬고 있었다. 영락한 신들조차 경이로울 정도의 권능을 휘둘러댔다. 그 속에서 오직 나만이, 나만의 것 없이 헤매이고 있었다.


학도들은 다가오는 파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탐구를 속행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수양하며 발전했다. 전승되어오는 이야기들은 그 힘을 잃어가면서도 신자들을 변함없이 강하게 수호했다. 혼돈은 전해내려줄 스승과 이어받을 제자가 거의 다 사라진 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생명을 가진 듯 타올랐다. 심지어 인간의 어둠조차 광기 어린 온기 속에서 가라앉고 뒤틀리며 불의 시대의 끝을 보겠다는 양 계속 꿈틀거렸다.

그들은 모두 최후의 최후까지 추구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바랬고, 얻었고, 그래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어스름의 하늘을 밝히는 회광반조였다.


그런 의지로, 사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나는 사랑했다. 쌓이고 억눌린 어둠이 고름이 되어 터져나와 망자들을 집어삼킨 채 뱀의 형상으로 이 몸을 찢어도, 하나 되어 움직이는 수백의 구더기들이 내 살 위를 기어다니고 옷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도, 파리와 다족의 괴물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져도, 달궈진 쇠에 지져지고 주먹에 으깨지며 화살에 벌집이 되어 죽어도, 나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자들의 의지를 잇고 받아들이고서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나아갔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사명이라기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그것을 움직이는 의지를 사랑했고, 그렇기에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내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싶었다. 내가 이리도 사랑하는 동시에 나를 가혹하리만치 내치고 괴롭히고 미워하는 이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인지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게 있어 나는 무엇일까, 알아내고 싶었다.

아득해져만 가는 불꽃, 떨어져내리는 어둠. 높은 기대와 잔혹한 현실. 고결한 이상과 더러운 행동. 관념과 실재. 그 사이에 놓인 채 반으로 찢기는 듯한 육과 영을 부여잡고서, 무언가를 바라듯, 나는 무너져가는 세상을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없다.

나에게 나의 것은 없다. 이 갑옷도 무기도, 주문도 힘도, 모두 타자의 것. 나의 것은, 나만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무수한 것들의 집합일 뿐 결국 고유한 나 자신이 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선택과 결단과 반응은 전부 수동적이었다. 타인이 친절하면 친절으로, 웃으면 웃음으로, 화를 내면 화로, 조롱하면 조롱으로 답해왔다. 나는 그저 거울일 뿐이다. 다만 타인의 적의를 두려워할 뿐인, 나약한 거울. 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아.

부탁을 받으면 들어주는 것을 나는 당연하다 생각해왔고 그 정도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래, 한 시대를 끝내달라는 부탁조차...

나는 태초의 불을 거두어달라는 화방녀의 부탁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같은 사명에 묶인 동포라서? 일말의 희망이 보였기에? 헛소리 따위는 집어치워. 나는 그저 그 애처롭고도 나긋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리고 그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아서 부탁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그 선택에 나 자신의 확고한 의지는 없었다.

그리 이지적이지도 못하고, 깊은 믿음으로 무언가에 몰입하지도 못하고, 그닥 인간적이지도 않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어느 무엇이 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없다.

나는 죽어가는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있는 나를 경시했다.




그래. 그랬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끝까지 발버둥쳐야하는 것은 아닐까. 사명을 위해서건, 힘을 위해서건. 이 선택도, 아니, 이 선택이야말로, 진정 희망인 것은 아닐까.

아직은 포기하기 싫다. 섭섭하다. 아쉽다. 안타깝다. 이 세상을, 아주 조금만 더 보고 싶다.

다 꺼져가는 불에 태양마저 저주로 뒤덮여 피 흘리고 있지만, 이 죽어가는 세상을, 아직은 떠나보내기 싫다. 내가 사랑하는 이 세계를 아주 조금이라도 더 살려놓아 바라보고 싶다. 망자가 되기도 싫다. 아직 내가 무엇인지 찾지 못했다. 나를 알고 나만의 것을 얻고 싶다.

그 전까지는, 그 전까지만이라도, 이 세상을 끝낼 수 없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허락된다면, 어쩌면, 나는 나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이 절박하고 애타는 갈망의 정체는 어리석은 미련.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망집. 하지만 나는 거기에 진지하게 매달리고 싶다.

그 무엇보다도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될 수 없을지라도, 세상의 한 구석자리에서 보일 듯 말 듯 조용히 타들어가며 망각에 저항하고 싶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아가리를 찢고 끝까지 목이 터져라 울부짖고 싶다. 몸부림치며 울고 웃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손가락을 조금 꺾고서 바람을 맞고 싶다. 그러려면...


그러려면,

길은, 단 하나.

그리고 잔악한 배반을 준비한다.




사인이 있던 자리에서 빛과 함께 화방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태초의 불을 직접 거둔다면 망자화는 피할 수 있겠지만, 결국 나는 불 꺼진 재. 불은 붙지 않을 테고 설령 붙는다 해도 그 끝에는 잿더미만이 있을 뿐, 나는 남지 않을 터이다. 그것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힘이자, 나를 내가 아니게 할 불이다. 또 하나의 저주다.

하지만, 이 방법을 쓰면,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힘이 되어줄 뿐이다. 거기에 물려받는 사명은 없다.


화방녀는 조용히 손 안에 태초의 불을 담았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아 주변을 감싸안는다.


"태초의 불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맞아요. 이제는 거의 다 죽어, 불꽃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잔불. 서글플 정도로 작아진 영광.


"이제 곧 암흑이 찾아오겠지요."


두려운 필연, 예견된 절망. 온 세상을 뒤덮고 또다시 영겁에 이르는 시대를 군림할 새로운 규율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인간의 본질은 어둠, 그리고 그 갈망. 본성에 이끌리고 거기서 온기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저주.

하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 본능마저 거스르며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암흑 속에 작은 불꽃들이 나타날 겁니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진다. 의식은 아득해지고 저 너머에 더 가까워진다. 사명을 다한 불사자는 결국 망자가 되는 법이다.


"왕들이 계승해온 잔불이..."


하지만 두렵지 않다. 각오되어있기 때문이 아니다.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푹.

일순간 몸을 떤 화방녀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나 자검에 꿰뚫린 아랫배를 본 화방녀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자신과 나의 관계를 찰나 속에서 재정립하고 나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그 모습에서는 냉철한 지성이 엿보였다. 솔직히 조금은 감탄했다.

하지만 동시에 엿보이는 비참함에 나는 더 강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제 헛된 발버둥은 관두고 그냥 안식에 들어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두 팔을 모으고 한참을 달리다 결국 땅바닥에 쓰러져도 화방녀는 포갠 손으로 태초의 불을 지키려 했다. 아니면 거두려는 것일까. 뭐가 되었든 나에게는 이제 저지해야 할 무언가일 뿐이다.

"...재의 귀인, 어째...서."

...이제 그만, 더는 말하지 말아줘요. 이만 그 불을 나에게로 옮기고, 조용히 떠나가줘요. 더는 괴로워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기 싫어요.

"...불...을, 이을, 수...는, 없..."

그렇겠죠. 알아요.


...하지만, 왜 굳이 다시 일깨워주는 건가요.

당신도, 당신마저도, 나를 그저 사명의 도구로 보았던 건가요.

아아. 그랬던 것이군요.


"...제, 발... 지...금이,라...도...."

안돼요, 아마도. 이미, 늦었으니까. 나도, 당신도.

저벅저벅 걸어가 쓰러진 화방녀에게 끝내 도달한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고개가 아닌 시선만이 밑으로 향했다.

그리고 잔인한 갈망이 고개를 서서히 치켜든다.

나는, 무엇이 되어가는 걸까. 하지만 상관없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머릿속이 상쾌해진다. 깔끔함, 투명함, 맑음.

그래, 이것이야말로, 잉걸불밖에는 피워올리지 못하는 비참한 나에게, 끝까지 무능했던 나에게 걸맞는 길.


이름도 없고, 장작조차 되지 못한, 저주받은 불사.

불을 잇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어중간한 머저리.


하지만 이제 드디어, 나만의 것이 생긴다. 나 자신을, 다시 규정한다.

빼앗은 것들로는 언제까지고 메울 수 없을 허무를, 영원히 채워나간다. 빼앗고 또 빼앗고, 앗아가고 또 앗아가며, 그 모든 것을 한데 뭉친다. 저 저주도, 이 불도. 기적과 마술과 주술과 암술도. 빛과 어둠도, 물과 벼락과 나무와 바위도. 눈과 폭풍과 결정과 진흙과 풀과 살점도. 모두 내 안에서 절규하고 짓이겨지다 자신을 잃고 하나 되어 합쳐진다. 전혀 다른 무언가로 재탄한다.

그 때야말로, 나만의 것은 생겨나리라. 나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나를 다시금 규정할 수 있겠지.

불도 어둠도, 모두 저주이자 따뜻함이며 힘인 동시에 추억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끝, 퇴적지를 떠올린다. 모든 땅이 하나 되는 곳. 관념들도 이제는 하나가 되어간다. 나의 안에서 거대한 하나로 변해간다.


화방녀의 머리를 밟는다. 머리카락이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티아라가 끼긱거리는 소리가 이중주를 부른다. 밑으로 손을 뻗어 태초의 불을 낚아챈다.

그리고 뭐라 말하려 하는 화방녀의 머리에 자검을 내리꽂는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명운을 다한 몸이 축 늘어진다. 작디작은 자상에서 방울방울 새어나오는 피가 금빛 머리칼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물들여간다. 화방녀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처연하리만치 꼭 모은 손으로 불을 지키려 했지만 그 손의 감촉은, 온기는, 금속 장갑을 뚫지 못하고, 나한테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온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몸을 다시 펴고 손 안을 내려다본다. 이제는 다 죽어가는, 태초의 불. 그러나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아직은, 아직은 살아있다는 뜻도 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세상도, 나도. 헤어질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거야.

손 너머로 시체가 보이는 시야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크링. 봉인되어있던 어둠이 미어터져 나와 기어코 빛의 왕의 상징을 집어삼키고 있다.

아름답다. 아름답고도 찬란하다. 떨어지는 것도 올라가는 것도, 고결한 것도 더러운 것도. 모두 너무나도 아름답다. 나는 역시 이 세상을 사랑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서, 태초의 불을 그 모습에 올려 바친다.

지켜봐주소서. 지켜봐주세요. 지켜봐줘. 나의 결의를.

이 세상을, 아직은 죽게 놔두지 않아. 아직은 떠나보내지 않아. 그 동안 나를 찾고, 어쩌면 이 세상을 구할 방법도, 찾아낼 것이다.

슬며시 미소가 나온다. 아아, 이게 맞는 길이었구나.

처음으로 옳은 선택을 내린 기분이 든다. 고양감이 몸을 달군다. 피어오르는 잔화의 불씨가 휘날리는 모습마저 보기가 좋았다.


생이란 혼돈이자 미지. 그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기에 나는 이 자리에 있다. 내가 뼈저리게 원망했던 어둠은 나에게 이 순간까지 버텨올 생명을 주었고 나를 잿더미로 만들어 죽인 불은 이 다음을 이어나갈 나만의 추억이 되어주었다. 종말의 순간까지 여정을 선사한 세상도 운명도, 이제는 너무나 아름다워보인다.

그토록 증오했던 저주들을, 나는 세상의 끝에 이르러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 피의 세계 속 실의 알. 그리고 그러므로, 인력. 무엇에 이끌리는지를 정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운명의 실이 짜낸 피륙의 무늬 대신 실 하나하나에서도, 피로써 그려진 세계의 모습 대신 그 속의 아주 작은 점 하나하나에서도, 의미는 찾을 수 있으니까."


이제서야 화가가 남긴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지금 내 손 안에 들린 것은, 소울, 추억, 불, 과거.

그리고, 힘. 여기 사명은 없다. 원대한 뜻은 없다.

나는 살아있다. 세상은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불을 잇지 못하고 스러졌지만, 미처 다 타지도 못한, 그러나 확실히 꺼져가는 재.

그리고, 그렇기에,

재는 잔불을 바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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