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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폭설과 탄피 - 10

카이요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18 2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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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타고 시내로 돌아온 토모에와 칼리스는 북적이는 백화점에 도착해 지하 푸드 코트로 내려왔다. 주변에서 카트를 끌며 달그락 거리거나, 어린애들의 왁자지껄한 소란 사이에서도 겸손했던 평소 모습 그대로 쇼핑몰을 둘러보기 시작한 토모에는 때마침 찾고 있었던 정육 코너 앞에 멈춰 서 휴대폰으로 저장해둔 주문 증명서를 보여주었다.


직후 점원에게서 고기 구이용 고베규 세트를 포함해 돼지 등심과 꼬치구이용 샤모를 건네 받고는 칼리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고기들은 스즈카 씨가 사시는 거예요, 같이 여행 준비하면서 얘기 들어 보니까 칼리스 씨가 고기 좋아하신다면서요?”


조용히 카트에 올려진 고기팩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한 칼리스는 능청스러운 한숨을 동반해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떼었다.


“그 녀석 참 센스 없네, 맥주 싫어서 같이 시드니 시내에 있던 술집 갔다가 비프 웰링턴 먹었던 걸로 그렇게 생각한거야?”


또렷이 머릿 속으로 그가 하는 말을 해석해갔다. 넋 놓고 듣는다면 불평하는 걸로 잘못 알아 들을 수 있었겠지만 목소리 사이에서 시원 시원한 장난기가 섞인 것을 인지한 토모에는 눈을 깜빡이며 어색하게 미소짓기만 했다. 이윽고 나무 상자에 화려하게 포장 된 고베규를 내려다보던 칼리스는 그녀의 미소에 맞춰주듯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달링(Darling)이 골라둔 고기면 달링이 직접 받아 가야지, 허니(Honey)에게 시키고 너무하네 그 녀석.”


그 한마디에 살짝 당황하며 얼굴을 붉힌 토모에는 떨리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까... 혹시... 들으신 건가요...?”


아까 전 료칸에서 자신을 당황하게 했던 주인 아주머니의 질문을 떠올리며 되물으면서도, 어떻게든 겸손한 웃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적어도(I dare say), ‘애인’(paramour)이 너희 나라 말로 뭔지는 알지.”


칼리스의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장난을 인지하고 있었던 토모에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고, 뺨에 희미한 홍조를 물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칼리스는 천천히 카트를 앞으로 세우면서 다시 찌르고 들어왔다.


“인정은 해야지, 너희 둘 자매 사이라기 보단 애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믿을 거야. 너희 둘 서로 보는 눈만 봐도 쌍성처럼 서로 주위를 도는 것 같다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흰 둘 다 여자라구요...”


능글맞은 장난에 최대한 겸손하게 응수하고 싶었지만 아까 전 센다이 역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떨떠름한 눈빛으로 칼리스를 올려다 보면서 튀어나오려다 삼키려고 했던 말을 겨우 끄집어냈다.


어쩌면 이 남자는 토모에와 스즈카간의 미묘한 벽을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장난처럼 포장할 의도로 둘의 관계를 쌍성으로 표현했겠지만 두 별이 결국에는 이어지지 않고 계속 거리를 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테니까.


“사실 잘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저희가 가까워지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다는거.”


“뭐?”


“쌍성은 가까울 뿐... 계속 거리를 두잖아요.”


놀람과 태연함을 반씩 섞어낸 눈빛으로 토모에를 내려다본 칼리스는 인파에 가로 막힌 카트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그냥 웃고 덮어갈 줄 알았는데 핵심을 건져버리네.”


사실 두 여자에게 느낀 기류를 언어유희로 덮고 크게 참견할 생각은 없었던 칼리스였지만 막상 이 숨겨진 뜻을 알아채버린 그녀에게 내심 놀라면서도 어떻게 대꾸할지 궁리하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기차 탔을 때도 너희 둘 분위기가 영 안좋았잖아.”


그 말을 들은 토모에는 쓸쓸하게 입을 움직이며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사실 아까 역에서 제가 실수를 크게 했는데 너무 스즈카 씨 답지 않은 반응이셨거든요.”


“걔가 화를 냈어? 믿기지가 않는데.”


“아니요, 화를 내시거나 폭언을 한 건 아니지만... 너무 정색하셨거든요.”


토모에는 다음 목적지인 해산물 코너 쪽을 바라보곤 걱정 섞인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저를 학교 앞에다 태워다 주는 것 말고 아무 관심도 없으셨지만, 나름 친해지면서 저한테 조금씩 다가오고는 계셨어요. 대화도 점점 많이 했구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제 눈치도 보시는 것 같고, 그 이상으로 다가오려고 하지는 않으세요...”


칼리스는 튀어 나올 법한 걱정 섞인 시선을 애써 감추었다.


‘찰리가 이 아가씨에게 뭔가 숨기는게 분명하군...’


스즈카가 자신에게 숨기는게 있다는 걸 이 아가씨도 분명히 알고는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이 대놓고 이를 언급해버리면 트리거가 되어 이 아가씨의 의문에 확신을 심어줄 것이고, 찰리와의 불신 관계를 형성 시킬 수 있었기에 칼리스는 신중하게 대답을 결정했다.


“그냥 잘 돼고 있는 거야, 내 경험상.”


칼리스는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파도로 말을 이었다.


“그 애는 너도 알다시피 딱딱한 애라 자기 위치는 잘 지키는 거야, 너의 입지 때문에 걔도 부담 돼서 적당히 선 지키는 거지.”


사실 이 한마디로 납득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지만 옆에 있던 토모에가 어떻게 하면 서로 더 가까워질수 있을지 알려달라는 듯 간절한 시선을 올려 보낸다. 사실 록우드 양과도 사용인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 남매 같은 모습을 대놓고 보였던 탓일까 이 아가씨는 제대로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최악으로 이어질수 있는 상황은 피했다는 안도감을 품은채 칼리스는 반년 전 기억을 되새기며 말했다.


“내가 어쩌다 록우드 양이랑 지내는지는 말 안했지?”


그 한마디에 토모에의 우울한 인상은 살짝 흥미가 돋힌 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반년 전 런던 기숙 학교에서 지내시다 간만에 친구들 따라서 시드니로 놀러 왔을 때, 험한 꼴 당하실 뻔한거 내가 구해줬거든.”


오래 전 그날 밤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자 칼리스의 눈은 차갑고 건조해져갔다.


“그것 때문에 본래 직장에서 짤릴 뻔 했던거, 록우드 경이 배려해줘서 개인 가드로 붙게 된 건데, 그 사고 트라우마 때문에 잠도 못주무시고, 식사도 못할 정도로 힘들어해서 한동안 런던으로 못돌아가고 심리 치료만 받고 다니셨어. 사람이 죽는 걸 눈 앞에서 봤으니까.”


칼리스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새겨 들은 토모에는 귀를 의심하면서도 발걸음이 더더욱 무거워지는걸 느꼈다. 하지만 엘리노어와 공항에서 재회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계속 멀쩡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그 뒷사정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토모에는 스스로를 꾸짖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내가 해줄수 있는 일을 했어.”


칼리스는 쓴웃음을 동반하며 말을 이었다.


“계속 옆에 있었어, 내가 모르는 여자 애들 영역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서 다 들어줬고, 지금 너랑 하는 것처럼 같이 쇼핑몰도 데려가면서 많은 얘기를 했지. 그런데 애가 저번 달부터 자주 웃더라고.”


서서히 평소 같은 목소리처럼 돌아오고 있던 칼리스는 다시 토모에를 내려다 보았다. 그 목소리는 능청스러운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록우드 양을 내심 걱정하는 감정을 은유적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아가씨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 찰리를 위해 계속 옆에 있어 봐. 지금도 항상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인거 알지? 걔가 지켜보는 것처럼 너도 항상 봐줘야 해.”


“네...”


천천히 새겨 듣던 토모에는 그 뜻을 이해하고는 거의 억지스러운 웃음으로 수긍했다. 심한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상태에서도 오랜만에 재회한 자신 앞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엘리노어를 다시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래도... 감사해요...”


모든 말을 깊게 새겨둔채 쓸쓸히 답하는 토모에와 해산물 매장 쪽으로 들어섰을 때, 칼리스는 속으로 큰 한숨을 머금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찰리랑 얘기는 해봐야겠네...’


--


일본 삿포로 국제 스키장.


수령한 장비들을 팔에 짊어매고 렌탈숍에서 나온 순간 청아한 산 공기와 뒤섞인 겨울의 공기가 폐를 차갑게 했다. 묵직한 트롤리 백들을 한꺼번에 짊어매고 가던 스즈카를 따라 리조트 밖으로 나온 엘리노어의 시선에서 붉은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저물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튀어나오는 노을은 눈 덮인 경사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도 주변 전체를 부드러운 황금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락커룸 방향으로 향하며 설산의 공기를 식전주의 와인처럼 음미해가던 엘리노어는 지나쳐가는 시간과 겨루기라도 할 기세로 살짝 백스텝을 받고 리프트들과 노을에 빚춰진 슬로프 쪽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그림자처럼 조용히 손 하나 까딱 않하고 살펴본 스즈카는 조용히 멈추고 흥미롭게 구경하는 엘리노어를 지켜보았다. 빨리 가자는 눈치 보단 그녀를 존중하는 의도로 멈춰선 스즈카는 엘리노어를 지켜보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그녀의 주변을 휩쓸었다.


스키나 스노우 보드 같은 설산 스포츠 자체에 흥미를 느끼던 것인지 슬로프에서 벌어지는 모든 걸 눈에 담아가던 엘리노어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면서도, 멈춰 서있었던 스즈카를 의식하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작 엘리노어를 보호하고자 하던 스즈카의 칼날 같은 눈빛을 의식한 순간 약간 무서운 느낌과 더불어 등이 떠밀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락커룸에 도착해 지정 된 락커들을 찾자마자 트롤리 백들을 하나씩 집어 넣기 시작했다. 칼리스가 별도로 스노우 보드 세트까지 요청했던 탓에 칼리스의 락커에는 두 개의 트롤리 백들을 쑤셔 넣어야 했다.


“록우드 양, 이제 해야 할 일은 다했지만, 더 둘러보시겠습니까?”


마지막 락커를 부드럽게 닫자마자 정중하고, 엘리노어와 똑같은 포쉬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물어본 스즈카는 자신의 시선에 담겨진 상대가 잠시 놀랐다가 가득 긴장하며 말하는 것을 보았다.


“아... 그냥 요 앞에만 잠시 걸으면 안될까요? 이런 눈 덮힌 산은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사실 택시 타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말 한마디도 안하던 그녀가 먼저 제안해오자 내심 놀란 엘리노어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조절하며 답하던 그때였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본 스키장은 17시 30분에 운영을 종료하며, 정확히 1시간 뒤 곤돌라 가동이 종료 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이어 영어로도 되돌아온 그 방송에 유독 귀를 기울이던 엘리노어는 살짝 아쉬운 듯한 시선으로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까 말한대로 오랜만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사실상 눈이라는 걸 처음보기라도 하는 눈빛이다. 그걸 조용히 지켜보던 스즈카는 락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과, 엘리노어의 락커를 다시 열더니 스키 장비가 들어 있는 트롤리 백들을 꺼내었다.


락커가 요란하게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엘리노어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적응 못하면서도 내심 설레면서 금방 이 스키장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의 불씨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스즈카가 조용히 트롤리 백 하나를 건네자 엘리노어는 들뜬 마음으로 그 가방을 끌어안 듯이 건네 받았다.


“시간도 있으니 한번 올라 갔다 오시겠습니까?”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쁨에 휩쓸려버린 엘리노어는 자신 답지 않게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야 좋죠!”


직후 기대에 부풀려 맑은 기쁨으로 따라오는 엘리노어를 에스코트하며 매표소에서 오후 티켓 두 장을 뽑은 스즈카는 곤돌라 쪽으로 탑승장 쪽으로 향했다. 탑승장 쪽은 이미 하루 일정을 끝내고 리조트로 돌아오는 사람으로 붐볐지만 그 사이를 망설임 없이 스쳐지나는 쪽은 둘 밖에 없었다.


아무도 안타는 곤돌라로 올라탄 둘은 락커룸에서 꺼냈던 스키 장비들을 짊어진채 서로 마주 앉았다. 슬로프 정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지만 서서히 폐장을 앞두고 빠져드는 인파에 좋은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으리라 믿은 엘리노어는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휴대폰을 꺼내고 전망 좋은 위치에서 내려다 보이는 주변 산맥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바로 반대편에 있는 케이블 라인 쪽에서 시야를 차단하는 곤돌라가 지나 칠때마다 휴대폰 카메라의 요란한 소음이 곤돌라 안에 메아리쳤고, 슬쩍 스즈카에게 고개를 돌린 엘리노어는 약간 쑥스러운 듯이 눈동자를 깔며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저기 실례지만... 혹시 풀네임 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스즈카는 태연하게 답했다.


“스즈카 후유키라고 합니다만, ‘제포’씨가 부르는 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엘리노어는 웃음 지으며 개의치 않다는 듯 가슴 앞에 손을 얹었다.


“엘리라고 불러주세요, 주변에선 저를 ‘넬’(Nell)이라고도 불러요.”


노을 빛으로 부드럽게 물드는 눈 덮힌 산의 경사를 잠시 흥분있게 쳐다본 엘리노어는 다시 스즈카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스즈씨는 토모처럼 굉장히 고급스러운 영어(포쉬 악센트) 쓰시네요?”


“네... 뭐... 록우드 양에게 맞춰주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임에도 호주 억양이 강했던 칼리스에게도 비슷하게 포쉬 억양을 섞어가며 대화하던 그녀를 떠올린 엘리노어는 다시 한번 속으로 엉뚱한 의문을 품으면서도 약간 온화하게 웃었다.


“사실 저는 학교에서 익숙해진거라 지금은 실수로 좀 튀어나오는거지, 막상 영국에서도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봐요. 특히 외국인이면.”


그러니 편하게 말해달라는 듯한 웃음 섞인 눈빛과 마주한 스즈카는 회피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호주에서 별로 안지내고 영국 기숙 학교에서 주로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사실 호주는 방학 때만 가끔 돌아왔었어요. 그런데...”


높게 띄어진 곤돌라가 서서히 슬로프 쪽으로 접근 했을 때, 말 끝을 흐리던 엘리노어는 약간 기가 꺾인 듯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거기 분위기가 많이 엄격했어요... 스키나 스케이트 같은 것도 기숙사 파벌에 밀려서 배우고 싶어도 못배웠거든요... 눈 내리는 시기에도 눈 싸움 하나 못하고...”


그녀에게 시선도 안던지고 공허하게 바깥만 보고 있었던 스즈카는 순간적으로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맞추었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내심 놀라며 어안이 벙벙해진 눈치였다.


“방학 때 오스트리아든, 멜버른이든 스키장은 가야겠거니 생각 하면서도 밀리고 또 밀리다가... 작년에 좀 안좋은 일에 휘말려서 호주에서 요양하게 됐거든요...”


작년에 그녀가 어떤 사고에 휘말렸는지는 스즈카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그때를 기점으로 칼리스와 엘리노어가 이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 생각도 못했는데 아버지랑 ‘제포’씨가 학교 일은 신경쓰지 말고 여행 한 번 길게 다녀와보자고 제안하셨어요. 때마침 토모가 보낸 편지도 생각 났고, 다시 보고 싶기도 해서 다짜고짜 같이 놀러 가자고 한건데... 혹시 이것도 제가 토모한테 부담 끼친 걸까요?”


스즈카는 곧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록우드 양이 오신다는 얘기에 카미조님도 나름 기대하시면서 여행 계획을 준비하셨으니까요. 그 분도 당신을 매우 중요한 친구분으로 보고 계십니다.”


약간 한숨을 머금은 엘리노어는 약간 안도한 듯 하면서도 괜히 무례한 질문을 한건 아닐까 머뭇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는 동안 곤돌라가 정상까지 도착했고,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오클리 M 프레임(방한 장치 적용) 고글을 착용한 스즈카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려와 엘리노어에게 손을 뻗었다.


“1시간이면 택도 없지만 적응은 시켜 드릴 만큼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네!”


가라 앉아 있던 기분을 떨쳐내고 살짝 흥분하며 스즈카의 손을 잡고 뒤뚱거리며 튀어나온 엘리노어는 그녀를 따라 초급자용 코스 지점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스즈카의 지도에 따라 갈아신은 스키화를 스키 플래이트에 결합 시키고, 지팡이 같은 폴로 지면을 찍어 내렸을 때, 평지인데도 미끄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폴을 단단히 붙잡았다.


“스키 본체랑 스키 부츠의 결속을 해제 할 때는 폴로 뒷꿈치를 찍으시면 됩니다. 일단 먼저 폴 잡는 법도 아셨으니 기본 자세랑 평지 주행 부터 가죠.”


막상 평면에서도 위태롭게 다리를 떨던 엘리노어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선 스즈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는 뒤로 빼되 상체는 앞으로... 이제 다시 곧게 서셔서 A자로 맞춰 보실까요?”


비록 인파가 줄어들고 있는 시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초보 코스로 지나쳐가던 사람들의 눈길이 둘에게 꽂혔다. 고글로 가린 얼굴 바깥으로 석양과 함께 빛나며 휘날리는 금발을 가진 겸손한 외국인 숙녀와, 이곳 강사도 아님에도 유창한 영어로 이 소녀를 가르쳐주던 현지인. 국제 스키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이곳에서도 흔한 광경이 아니였기에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국제 커플로 의심 받을 지경이였다.


“잘 따라오고 계십니다, 이제 평지 이동 한 번 해보겠습니다.”


조촐한 수업이 진행 됨에 따라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한 엘리노어는 처음부터 느꼈던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져가며 폴을 찍으면 찍을수록 자신감이 더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혼자서도 잘 하는 모습을 본 스즈카가 옆에서 잠시 떨어지며 한바퀴를 돌아 보라는 신호를 주었다. 평지에서도 자신이 폴을 찍을 때마다 스키와 동화 된 자신이 눈밭 위를 자연스럽게 지나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엘리노어는 점점 욕심을 더하며 경사길 쪽으로 폴을 점점 찍어 눌러 움직였다.


“잠깐! 록우드 양! 거기서 정지!”


이대로면 경사길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멈춰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한 엘리노어는 순식간에 자신이 실수 했다는 걸 깨달았다. 완전히 동화 된 줄만 알았던 스키는 경사길 앞에서 멈추지 않은채 그대로 통과해버렸고, 갑작스럽게 추진력이 붙으며 경사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 어어!”


순식간에 자신만만하게 자리 잡은 자세가 흐트러지며 위태롭게 허둥거리는 뒷모습을 본 스즈카는 곧 바로 폴을 찍으며 그쪽으로 달려 들었다. 바로 경사길로 돌입해 앞으로 엎어지기 직전이였던 그녀를 추월할 기세로 접근하는데 성공한 스즈카는 바로 손을 뻗어 엘리노어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그렇게 다 같이 뒤로 고꾸라진 둘은 코너에 가까운 위치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자 지면에서부터 솟아오른 작은 눈폭풍이 이 둘을 은막처럼 감싸안았다. 직후 코너 방향의 안전 펜스에 스키 플레이트가 닿으며 겨우 멈춰서자 스즈카는 자신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하하하... 죄송해요, 진짜 잘 컨트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하...”


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던 엘리노어를 살펴보며 다친 곳은 없는 것을 알아차린 스즈카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다시 냉소적인 시선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럴 땐 앞으로 무게가 쏠리거나, 손을 뻗으면 위험하니 그냥 뒤로 쓰러지시는게 좋습니다.”


그리곤 자신과, 엘리노어의 발과 결합 되어 있던 스키의 바운딩을 해제 시키고 일어서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엘리노어는 여전히 부끄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남기고 있었지만 서서히 얼굴을 붉혀가며 부드러운 손길로 맞대주며 일어섰다. 이내 스즈카가 몸을 숙여 엘리노어의 코트 곳곳에 묻은 눈을 털어주던 와중 주변의 찬바람을 짓누르는 방송 소리가 울려퍼졌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모든 이용객 분들은 폐장 10분 전 퇴장해주시고...]


“이제 돌아갈까요...?”


--


슬로프에서 내려와 장비들을 정리하고 택시에 올라탄 스즈카와 엘리노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조잔케이로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료칸 바깥에 있던 야외 바비큐장 쪽에서 일련의 소란이 일고 있었고, 그중에서 바깥 정원과 맞닿은 자리에 있던 토모에가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응대하듯 순진무구한 미소로 손을 흔드며 발걸음을 점점 빠르게 앞세우는 엘리노어를 따라가던 스즈카는 공허하게 그 뒷모습과 더불어 건너편에서 자신들을 맞이하던 토모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엘리노어와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간만에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안정 시켜주며 행복이라는 걸 상기 시켰던 순간이였다. 하지만 저 너머의 토모에 앞에서 이런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최근 우연히 알게 된 자신의 죄에 무게감을 더하게 되었다. 과거의 죄업으로 생긴 토모에와의 벽을 넘어선다면 이런 행복을 항상 느낄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그걸 넘어설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잘 느끼고 있었고, 이를 고백 할 날이 올 때까지 짊어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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