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다. 나도 네 나이 때는 그랬으니까.


그리고, 너랑 난 같은 지망생이 아니다. 난 적어도 2차 시험장은 지겹도록 다녀왔거든. 그래놓고도 아직까지 지망생인건 스스로에게는 부끄럽지만, 너희같은 햇병아리들에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야.

이곳 저곳 학원을 참 많이도 다녔다. 뭐 하고 일 하고 쉬고 하느라 실제로 다닌 기간은 더 적겠지만 햇수로만 따지면 7년차네. 학원에 다니다 보면 많은 인간 군상들을 본다. 인사를 듣자마자 목소리가 귀에 꽂힐 정도로 좋은 음색을 가진 친구들도 있고, 이 친구는 도대체 왜 성우를 지망하겠다는건지 알 수 없는 친구들도 있지. 다른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고학력, 고소득) 성우 세계도 그처럼 만만할 것이라 생각하곤 겁 없이 덤비는 사럄, 재능도 없고 발전도 없어 보이지만 집안이 잘 살아서 매일 행복하고 여기 저기 놀러다니는 사람, 성우란 직업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근성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 제대로 준비하겠다며 직장을 때려치더니 일취월장하여 결국 합격해버리는 사람, 그리고 똑같은 선택을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이 길을 영영 떠나버리는 사람도..

너희들은 성우가 단지 하나의 직업인이라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인 난이도 그리고 천부적 재능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성우 합격이 요구하는 재능과 경쟁력 수준은 상위 0.1%다. 대한민국에 한 해 SKY에 입학하는 학생이 수험생 중 1%라지.. 성우에 합격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비록 성우 지망생이지만 좋은 학교 다니고 돈 많이 번다는 대기업 의사 변호사 봐도 꿀리지 않는다. 내가 성우 합격하면 그들보다 위라는 프라이드가 있거든. 물론 사람들이 보는 시선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직접 이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알거다, 사법고시 합격하거나 의대 입학하는거보다 결코 성우 합격하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단순 숫자로만 생각해봐도 1년에 변호사는 2천명 의사는 3천명 나오지만 성우는 열 명 좀 넘게 나올 뿐이다.

그런 직업을, 그렇게 되기 어려운 직업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는 철저해야 한다. 열정이라는 단어도 부족하지. 어찌보면 처절하고 필사적일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 일상 생활과 성우 공부의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간판을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하고 영화나 드라마나 심지어 지나가는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그들의 말이 연령대 성별 직업 외모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학원에 꾸준히 나와 겸허하게 피드백을 받아들이고 원생들과 스터디를 하며 다른 이들의 연기도 충분히 들어보며 자신에게 있을지 모를 문제점을 찾아내기도 하고 공채 시험이 있는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더빙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연기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봐야 한다. 그런 자세로 해도, 몇년이 걸려도 된다고 보장할 수 없는 시험이 성우 공채 시험이고 그만큼 성우란 직업은 위대한 직업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런 직업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 좋은 스승을 만나고 스승에게 학생의 예를 보이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 아닌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아도 사회 생활을 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예의라는 것이 있다. 무릇 가르침을 받으러 온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이 관계가 단순히 학원에서 끝날 단기적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성우 세계에서 끝까지 이어질 직업적 선후배 관계로 변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감히 스승님을 처음 뵈러 가는데 건방지게 모자를 쓰고 간다? 상상도 용납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게 꼰대고 틀딱이라 생각된다면 네 행실을 되돌아 봐라. 이게 꼰대라면 난 그냥 꼰대를 하겠다. 근데 한마디만 해주자면, 그 수준의 얄팍하고 가벼운 마음가짐으로는 10년 아니 20년을 해도 네 이름이 성우 극회에 올라오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