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군이라는 닉으로 이글루스에서 활동해던 아재가 2008년에 작성한 글임
러일전쟁까지의 구 제국 육군은 멕켈 등의 영향으로 인해 독일육군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독일식의 화력주의............ 요컨데, 신속히 기동하는 소총과 포병 화력의 집중에 의해 상대를 압도한다는 전술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보병의 백병(총검)돌격에 의지하기보단 화력(소총탄/포탄의 물량)으로 승패를 결정하려는 전술 사상이 주류였지요. 뭐 이것에 대해 이러한 화력주의의 맹아는 이미 서남전쟁 후반의 소총 화력 집중 사용에서 충분히 보여지고 있다고 일본측 서적은 주장하지만 뭐 이건 아무리 봐도 오바(...)
이 당시(메이지) 일본 육군의 1891년판 보병교범은 1888년판 독일 제국 육군의 그것을 거의 완전히 카피한 것으로, 1898년에 청일전쟁의 전훈을 대폭 받아들여 개정된 것도 사실 거의 이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의 전술교리가 서구 열강 육군과는 정 반대로 나가게 된 계기는 바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러일전쟁이었습니다다. 러일전쟁시 대거 일본군과 러시아군에 종군한 각국 관전무관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의해, 구미 열강 육군이 얻은 장차전의 전훈은...............-ㅅ-;
1. 중기관총을 진지 방어의 요점으로 한다.
2. 적진돌파의 결정적 수단은 화력 집중, 특히 구경 15 cm 이상의 유탄포와 10 cm 이상의 캐논포 등 중포의 집중 운용에 있다.
3. 대규모 참호선 구축과 륜형철조망의 전선 방어효과는 절대적이다.
............등 크게 세가지로 요악되는데, 하여간 이후 각국은 이러한 전훈에 따라 중기관총과 보병 지원용 중포의 개발과 대량 배치가 육군 전력 증강의 주요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일본육군이 이후 백병주의 중시, 화력 경시가 된 것에는 일본이 실제 이 전쟁에서 겪은 전훈이 그 근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소개해보자면....-ㅅ-;
첫째. 포탄과 소총탄의 결핍에 의해 화력주의는 관철할 수 없었다
- 물론 일본도 만주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개전 직전인 1903년부터 도쿄와 오사카의 육군공창 및 민간의 공장을 풀 가동시켜서까지 소총탄과 포탄의 대량 생산과 비축을 개시했습니다. 허나, 그런데도 개전 후의 막대한 소비량을 생산량이 따라 잡지 못한다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던 것이었지요. -ㅅ-;
실례로 요동 상륙 직후 벌어진 남산 전투에서는 불과 이틀만에 약 3 만발의 포탄을 소모했는데, 이것은 참모본부가 예상한 개전 전소비량 반년분의 소비량이자 당시 일본 전체 연간 포탄 생산량에 약 1/4(3개월분) 이라는 엄청난 물량이었지요. 이후 제 1차 뤼순 요새 총공격과 랴오양 회전으로 일본 육군의 포탄 재고량은 완전히 결핍되었고 득리사 전투에서는 소총탄조차 바닥을 친 상태였습니다.(뽀핫)
둘째. 포병운용의 근본적 미스로 평지의 회전(결전의 의도한 야전)이나 대 요새전이나 포탄은 유산탄만을 다용한 것.
- 러일전쟁시 일본 육군이 소비한 야포탄의 탄종 비율은 유탄 1에 대해 유산탄 6이었습니다. 물론 전훈의 비판적인 말투를 보셔서도 알겠지만 유산탄이 효과적이라 그렇게 대량으로 쓴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실상을 말하자면 유산탄밖에 없어서(...) 그렇게 사용했다가 정답이랄까요(...)
실제로도 야전에 전개한 부대에서는 유탄 보급이 격렬히 요청되고 있었지만 육군의 중앙은 이것을 묵살, 재고가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량의 유산탄만을 보냈습니다. 결국 전선에서는 효과가 떨어지는 포격을 할 수밖에 없었고 포병측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보병의 대량 희생 이후에야 작전이 종결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보병측에서는 포병에 대한 불신감이 결정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셋째, 포탄으로도 적의 왕성한 공격 정신을 저지할 수 없었다.
- 당시 제정 러시아 육군은 프랑스 육군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의 포슈 - 그랑메종식 총검 돌격주의(강고한 진지 축성에 의해 상대의 화력을 흡수, 이후 기동전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화력 지원아래 적 전열에 강행접근, 최종적으론 보병의 총검 돌격으로 자웅을 결정짓는.)를 용병의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었기에 사실 러일전쟁기엔 오히려 러시아군측이 백병전을 먼저 시도했던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리고.....이것에 대한 일본군 포병으로부터의 지원 포격은 위 둘째 항에서 상술한 것처럼 효과가 미약했고 전후 조사된 결과에 의해서도 러시아군의 포격 사상율은 비교적 낮은( 러시아 육군성이 발표한 자료에 의해도 일본군 포탄에 의한 사상율은 최대 14% 정도) 결과가 밝혀지자 일본육군의 수뇌부는 타격력이 예상 외로 낮은 포병에 대한 평가 저하가 이루어졌습니다.
.............뭐 일단 크게 정리하자면 이상의 세가지 이유로 인해 러일전쟁 후 일본 육군에선 오히려 화력주의에 대한 불신감이 싹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오히려 포탄과 소총탄이 거의 소모된 사하회전 이후의 전황에서도 여전히 전술적 이니셔티브를 쥔 만주군 쪽이 결국 희생을 감수한 총검 돌격으로(...) - 특히 노기의 제 3 군 - 결국 러일전쟁을「승리」해 버린 이후...........독자적인「일본식 전법」이 모색되기 시작했습니다. -ㅅ-;
이것의 결과가 1909년의 보병교범 개정, 이듬해의 야전포병 교범, 치중병 교범 개정과 1912년의 기병교범 개정으로 이어집니다.
1898년판 보병교범에서는「 보병전투는 화력으로 결착짓는 것이 상책 」이라는 대명제 아래,「 과거 전사를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경우 근거리에서 우세한 사격을 전선의 주요 화점에 집중시키는 상태에서 결전의 향방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백병돌격(총검돌격)은 잔적 소탕 혹은 점령진지의 입성시에 행해지는 것 」- 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비해,
1909년에 개정된 보병교범 개정 이유서에서는「 보병의 주요 전투행위는 백병전이 우선이다. 사격은 이 백병전을 치루기 위해 적에게 근접하는 것의 한가지 수단이다. 」- 라고 거의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을 주 교리로 정립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 요인에 대해 개정 교범에서 명확하게 그 근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 고유의 전투 양식은 백병주의다. 때문에 지난 전쟁(러일전쟁)과 장차전에서도 총검의 사용은 우리 나라 군비의 독특한 특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더욱 더 이 강점을 발휘해 백병전투의 숙달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성격에도 적절하므로 장래의 전투에 대한 중요한 강점이 될 것이다. 국군은 이점에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야 할 것이다. 」
- 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훈과 군축의 사이에서 분명 어느 정도의 근대화를 달성합니다. -ㅅ-;
하지만, 이것은 일본 특유의 지리적 조건에 의해 - 도서국가라는 태생적 한계, 이러한 국가라면 대량의 동원병력을 유지하는 병역제는 사실 불필요합니다. 왜냐면 동원이란 국경선이 맞닿은 국가에서나 전면전시 그 급박한 필요성이 있으니까요. - 제정 러시아의 붕괴 이후는 순 군사적으로 보아 서양의 제 1 급 육군부대와의 대규모 전투는 발생할래야 할 수 없었던 것이었으니까요. -ㅅ-; 따라서 구미 열강 육군과 동질한 화력 중시의 무장을 반드시 갗추어야 하는 임박성이 부족했기에, 육군 내부에서도 이를 둘러싼 대립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 참고로 이것에 대해서는 구 지역적 파벌(조슈벌)이나 통제파, 황도파가 마구 뒤섞여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없으면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은 저도 수박 겉햙기 수준(...) -
당시, 소위 근대화 노선파는 육상 우가키 카즈시게를 정점으로 하는 육군성 중추의 주로 조슈계 군정가 외 나카타 데츠잔 등의 러일전쟁 직후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지역색이 덜한 육군대학교 출신의 엘리트 막료들이었습니다. - 뭐 조슈벌의 육군 인사권 독점을 비판하고 타도하려 한 나카타 등의 훗날 통제파 라인입니다만 군비의 근대화(기계화)라는 점에서는 둘의 지향점이 같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죠. ㅋ -
단, 이들의 한계라면 한계인 것은 장비의 갱신을 그저 막연히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고로, 서구 열강들과 같은 본격적인 국가 총력전을 지향하는 층부터(나가테 테츠잔 중장 주도의 통제파 라인) 제한적인 국지전을 상정한 층(조슈계) 등등 세부 내용에서는 역시 꽤 차이점이 존재했습니다. 뭐 그래도 이들의 접접을 정리하자면 평시의 소수정예 / 전시의 대량 동원 / 어느 정도의 기계화 정도는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현상 유지파는 보병중심 / 백병주의를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으로 정예 현역 다수사단 보유주의, 속전즉결, 백병돌격 만능론을 말하는 소위 보수파였습니다.
이들은 우에하라 류사쿠나 후쿠다 마사타로 등 구 사츠마벌 출신의 육군 작전가를 먼저 규합했는데, 이후 조슈벌 우선의 파벌 인사로 좌천된 비주류파 장교 외 당시 참모본부 제 2 부(외국정보부)의 중견 막료층을 비롯 비 육대출신 하급장교단을 중심으로 지지를 모아「 궁핍한 살림의 일본이 구미류「장기 소모전」을 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하다. 」- 는 대전제 아래, 앞서 말한 조슈계 군정가 + 통제파 막료라인이 추구하는 육군 근대화 노선을「기계주의」, 「구미 모방의 폐풍」, 「황국 독자성의 방폐」,「공격정신의 쇠퇴」로 비판했으며 심지어는「 국군의 전복을 기도 한다.」- 고까지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현상 유지파는 군축에 의해 대량으로 해고(학교 교련교관으로 파견)된 비 육대출신 하급 장교층의 불만을 이용해 우가키 카즈시게 등의 중추부 비판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분위기 조성은 사실 훗날 외정군(현지군)의「하극상」불씨를 남기게 한 중요한 팩터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극단적인 백병주의 사상은 이후로도 오랬동안 육군의 작전사상에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죠....-ㅅ-;
그리고.......이러한 노선과 파벌대립의 한중간이던 1928년, 드디어 일본 육군의 통수강령이 개정됩니다. 뭐 이후는 잘 아시다시피 일본군은 거의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총검 돌격 패티쉬즘으로(...) 흐르게 되지요.
..............이것의 요지를 간단히 요약해 볼작시면.
「 통수의 본지는 항상 전력의 충실을 바탕으로 그 무위를 적군에게 지향하고 다른 무형적 위력도 최고도로 발양하는데 있다. 이처럼 물질적 진보보다 현저하게 큰 것이 바로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차후에도 이것을 국군의 본지에 두어 승패의 주된 요인은 정신적 요소에 달려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 제국군은 다소의 병수와 자재 부족이 가져오는 제반의 요구를 정신력으로 보충해야 할 것이다. 」
이후....... 1928년 보병교범 등의 소개정에 대해서도 그 개정 이유서에는........
「 우리 장병은 제국 육군의 비교할 수 없는 역사와 전통을 생각할 때, 더욱더 충군 애국의 지성을 닦고 훈련의 실행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이에 상하 서로 신뢰하여 일체가 되어 필승의 신념을 항상 확보한다면 어떠한 강적과 대적하여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
라며..........점점 정신주의가 강조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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