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23일 새벽 5시 30분,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0km 떨어진 Le Bourget 비행장에 Ju 52 1대가 착륙했다. 그 비행기에서 한 남자가 수행원들을 데리고 내렸다.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였다. 딱 하루 전인 6월 22일, 콩피뉴에 숲에서 프랑스의 항복선언을 받아낸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회색코트를 입은 그는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대의 호위를 받으며 메르세데스 G4 오픈카 5대에 나눠타고 파리 시내로 향했다.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26년 전 이프르의 진창 참호에서 구르던 시절, 그렇게나 도저히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적국의 수도는 이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혹시나 모를 소요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파리시내 전체는 독일군에 의해 통제되어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히틀러는 이 투어에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헤르만 기슬러(Hermann Giesler),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같은 독일 건축가들을 동참 시켰다. 그는 오스만 남작(Georges Eugène Haussmann)이 설계한 파리의 넓은 거리들에 감탄하는 한편, 3제국의 수도가 될 게르마니아(Germania)는 이 곳보다 위대해야한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오페라 가르니에(OPERA GARNIER),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마들렌 성당(Eglise La Madeline)등을 구경하고 에투알 광장(Arc de triomphe de l'Étoile)과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Élysées)를 지나 마침내 트로카데로 광장(Place du Trocadéro)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그 유명한 사진을 찍었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라고 평가한 히틀러는 이제 호텔 데 앵발리드(Hotel des Invalides)로 향했다. 이쯤 되어서 해가 뜨고 날씨가 더워지자 그는 회색 코트를 벗고 얇은 트렌치코트 차림이 되었다. 루이 14세 시절 상이군인들을 위해 지어진 이 시설은 그가 살아 생전 제일 오고 싶어했던 곳이었다. 바로 프랑스 제1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영묘가 있는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히틀러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한손에 들었다. 단순히 날씨가 더워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나폴레옹이 1806년 베를린에 입성했을 때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II)의 묘를 찾아 삼각모를 벗었던 일화를 기억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수행원들중 그가 나폴레옹의 존경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히틀러가 모자를 벗자 다른 수행원들도 그를 따라서 전원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꼈다. 나폴레옹의 묘는 건물 지하에 우뚝 서있었다. 히틀러는 거대한 무덤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없이 대리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모두 나폴레옹이 정복한 도시들의 이름들이었다. 밀라노, 베네치아, 토리노, 카이로, 비엔나, 베를린, 쾨니히스베르크, 마드리드, 리스본, 그리고 모스크바. 일부 측근들은 히틀러의 시선이 모스크바라는 단어 앞에 유독 오래 머무는 것을 눈치챘다.
몇 분 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 히틀러는 몸을 돌려 다음 코스인 판테온(Panthéon)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면서 기슬러에게 말했다.
"미래에는 나도 무덤이 필요할 걸세. 난 베를린보단 뮌헨에 묻히길 원해. 그리고 조문객들이 날 올려다 봤으면 좋겠네, 내려다보는게 아니라. 석공들에게 전해주게, 내 비석에는 단 두단어만 넣으면 충분하다고 말이야. '아돌프, 히틀러'. 그 정도면 모든 독일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겠지."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