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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1차대전 이전까지의 교리 발전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08 19:23:34
조회 572 추천 14 댓글 1
														

프랑스군이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후 전쟁부에서 새로운 전술교리를 내놨는데, 1875년엔 보병 교리, 1876년엔 기병 교리, 1878년엔 포병 교리를 내놨고 1883년엔 작전교리를 내놨음


다만 1883년 작전교리는 진정한 작전교리라기 보다는 각 병과의 역할과 협동을 나열한 수준에 불과했음


기병은 정보를 수집해야 하고, 적 기병이 정찰 못하게 막아야 하고, 포병은 대포병사격이 제일 중요하고, 보병은 준비사격이 끝나면 공격하고 그런 정도의 내용임


진정한 작전교리는 1895년이 되어서야 앙리 보날이라는 한 개인의 손에서 탄생함


1876년 기병 전술교리는 그 해 기동훈련이 끝난 후 폐기됐고 1878년 포병 전술교리는 드 방쥬 80, 90mm 야포 훈련법에 불과했으니


분석할만한 교리는 1875년 6월 12일에 갱신된 보병 전술교리 뿐임


보불전쟁 이전 보병 전술교리는 1867년에 나온 것이였는데, 3줄 요약하자면 이러함


1. 산병선이 공세를 준비한다

2. 2열 전열보병이 결정적인 사격을 퍼붓는다

3. 공격 종대로 대형을 바꾼 후 돌격한다


화기가 발명된 이래 화력학파와 충격학파는 쭉 대결해왔는데,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군은 진작에 화력학파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1875년 보병 전술교리를 화력학파가 만들었음


그래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함


1. 이제 사격이 엄청나게 중요해졌다

2. 전열은 이젠 적의 사계 내에서 횡대로든 종대로든 기동도 전투도 못한다

3. 그러니 산개대형으로 싸워야 한다

4. 따라서 이전엔 공세준비를 담당하던 산병선이 전투를 담당하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산병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산병과 전열보병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교리를 통해 프랑스군에선 전열보병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고 할 수 있음


또한 교리는 보병대대를 기본 전투대형이라고 명시했음


당대엔 사각편제를 썼기 때문에 대대가 4개의 중대로 이루어졌고, 2개의 중대 500m 뒤에 나머지 2개 중대가 예비대로 배치되었음


각 중대의 정면은 150m, 종심은 500m였음


중대를 구성하는 소대 중 하나가 산병선을 만들었고, 그 뒤엔 하나의 증원소대와 두개의 지원소대가 배치됨



보병은 포병의 준비사격이 끝나면 이러한 단계를 밟음


1. 적으로부터 2000~800m 사이: 대대가 적을 향해 접적행군으로 다가감

2. 800~300m 사이: 선두 중대가 사격하며 빠르게 접근함. 각 중대장은 이 과정에서 증원소대와 지원소대로 산병선을 증원함

3. 300m: 산병선에 병력 증원을 전부 쏟아넣고, 증원소대와 지원소대를 이미 다 써버렸다면 예비중대의 증원을 받음

이 때 산병선에서 각 보병의 밀도는 한 사람당 1m여야함

4.. 50m: 여기까지 접근하면 사실상 공격이 성공한 것. 최후의 공세를 위해 산병선의 모든 보병이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돌진함

5. 공격이 성공하면 예비중대가 적의 역공을 막아내기 위해서 점령한 진지에 배치됨


새로운 교리에선 전진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격하려는 수단으로, 돌격을 포병과 보병이 화력으로 함께 만들어낸 과실을 수확하는 수단으로 한정시켰는데


프로이센 화력학파라고 묘사된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의 보병전술을 모방한 거임


방어 편에선 수동적 방어는 반드시 망한다고 설명하는데, 이건 프랑스군이 기동하는 프로이센군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가 망했기 때문임


또한 새로운 교리는 이제부터 중대가 새로운 기본 전투 단위라고 규정하면서, 중대장이 받은 명령을 실행하기만 하는 감독자가 아닌 교향곡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함



새로운 화력학파 교리는 충격학파의 불만을 끌어냈음


예를 들어 앙리 보날은 1875년 보병전술을 남자답지 못한 거대한 술래잡기로 묘사했고


뤼시앙 카르도 대위는 1880년 7월 16일에 Revue militaire de l'étrnager에서


'프랑스군은 손실을 피하고 지형이 제공하는 미약한 수준의 엄폐물까지 활용하는 기예로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다. 프랑스군은 결정적인 전투에 필수적인 추동력, 정력, 용기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의 프랑스 보병은 적이 후퇴하기 전까진 전진하지 않는다.' 라고 비난함


또한 카르도는 '백병전을 위해 적에게 정력적이고 자비심없이 직진하지 않는 전술은 퇴행적인 전술, 병사에게 엄폐를 가르치는 건 쌍안경 장사꾼의 전술이자 비겁함을 가르치고 사기의 중요성을 헛되게 여기는 짓' 이라고 주장했음


이런 식으로 새로운 교리가 충격학파의 결집된 저항을 만나게 되었고


두번째론 초급간부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화력학파가 제시하는 분권화된 지휘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이런 불신이 징병제가 통과되자 더 강해짐)


전열보병 폐기와 징병제가 겹치자 훈련 인프라가 덜 필요한 전열보병 훈련을 한동안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어서 새로운 교리를 당장 교육하지 못하게 되었고


군단을 교리 따위 안읽는 실전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교리를 교육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음


게다가 보불전쟁 초기에 포로로 잡혀서 프로이센 화력학파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장교들이 돌아왔음




전술교리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작전교리 이야기를 하겠음


1883년 교리가 제대로 된 작전교리가 아닌 이유는 작전술을 다루지 않기 때문임


프랑스군의 역사에서 작전술을 최초로 다루는 교리는 1895년에 앙리 보날이 만들었음


앙리 보날은 1892년에 에콜 드 게르에서 마이야르의 전술 과정을 이어받고, 강좌 이름을 군사사 및 제병협동 전술 과정으로 바꿨음


마이야르와 앙리 보날은 프로이센식 워게임, 프로이센식 연구방법 등을 프랑스군에 가져온 다음 보불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프로이센식으로 연구해서 시대를 초월하는 군사적 진리를 찾아내려고 했음


앙리 보날은 1844년에 태어났고, 생 시리앙 보병장교이며, 보불전쟁의 베테랑이자, 에콜 드 게르의 1세대 교수임


보병장교로선 드물게 말 조련사 출신이였는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병사들을 군마처럼 훈련시켜서 습관화로 전투의 공포를 이겨내고 지휘관의 명령을 이행하는 자동인형으로 만들고자 했음


또한 위에서 보았듯이 충격학파 이론가이기도 했음


1888년에 에콜 드 게르에 들어간 보날은 프로이센식 연구법을 나폴레옹 전쟁에 적용해서 분석했고


1.행동의 자유

2.(적 지휘관에게)의지 강요

3.병력의 절약


3가지 원칙을 끌어낸 다음, 3원칙이 보불전쟁에 적용되는지 연구해서 대 몰트케가 저 원칙들을 지켜가며 작전을 벌였다는 결론을 내렸음


저 3원칙이 시대적 맥락을 초월하는 전쟁의 문법이라고 확신하게 된 거임


그리고 분석 대상이 전부 기동전이라 현대전=기동전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저 3원칙의 궁극적인 목적이 기동전을 벌이는 것이 됨


보날의 아이디어는 프랑스군이 구조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음에도 에콜 드 게르 너머까지 퍼져나갔고, 당대의 분열로 인한 교리적 공백을 채우는데 성공하여 1895년 작전 교리가 탄생하게 됨


앙리 보날은 외국에서도 유명해져서 독일군의 기동훈련에 초청받기까지 했음


보날은 나중에 정치적 성향과 사생활 스캔들 때문에 해임당했지만 작전 교리는 쭉 유지됨


그리고 보날의 후임인 포슈의 이론은 전임자의 이론을

1.병력의 절약

2.행동의 자유

3.방호


이렇게 재정립하며 계승한 것이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작전교리는 사실상 단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음


다만 포슈는 보날과 달리 화력학파였고, 행동의 자유가 임무형 지휘체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차이점이 있음




1895년 작전교리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면


먼저 기병의 역할을 기동중인 야전군이 기습당하지 않도록 보호, 적과 접촉, 정찰, 적 기병을 정찰 못하게 격퇴, 정보 탐색으로 정의함


기병의 약 10km 뒤엔 강화된 대대가 배치되어 기병을 지원하거나 적군의 배치를 확인함


그 뒤로는 제병협동부대로 조직된 아방가르드와 플랑가르드가 보호하는 종대가 배치됨


보날은 이 아방가르드(플랑가르드도 아방가르드의 범주에 들어감. 단지 위치에 따라 명칭이 바뀔 뿐임)가 모든 교리적 문제를 지배한다고 설명함


'소규모 분견대일 수도, 야전군일 수도, 심지어 집단군일 수도 있는 아방가르드는 정찰을 담당하고, 본대를 기습으로부터 보호하고, 지휘관이 행동할 시간과 수단을 제공하고, 적의 약점으로 기동하여 주공을 벌일 수 있게 하는 전체 병력의 일부분이다.'



앙리 보날이 중앙집권화된 지휘체계를 선호한 만큼, 지휘관을 체스 선수로 여기고 병력을 기물로 여기면서 아방가르드를 기물 배치를 돕는 개념으로 보았음


체스 선수가 적의 약점을 찾아내면 기물들을 기동시켜 집중시키고, 그리하여 결정적인 공격을 벌여 돌파하고, 예비대가 전과확대로 적을 섬멸함



다시 전술 이야기로 돌아와서


1875년 보병 전술교리의 다음 편은 1884년에 나왔는데, 이후로 나오는 1887, 1888, 1889, 1894, 1901, 1902년 보병 전술교리는 전부 이 1884년 교리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음


왜냐하면 1884~1902년 동안 보병 전술교리를 충격학파가 만들었기 때문임


충격학파는 1875년 교리에서 제시한 대형은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중대를 산병선-증원소대-예비소대로 나누는 게 아니라 중대 전체로 산병선을 만드는 밀집대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따라서 1887년 보병 전술교리가 보병의 밀도를 확 올려놨음


또한 충격학파는 1867년식 일제사격을 다시 가져왔음


그리고 이들이 화력학파와 달리 중앙집권적인 지휘를 선호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아닌 여단장이 사격과 돌격을 결정하도록 회귀시킴


이에 대해 프랑수아 오스카 드 네그리에는 '7년 전쟁으로 회귀' 라고 비판했고, 필리프 페탱은 '1870년의 교훈을 완전히 잊어버린' 이라고 비판함


그리고 충격학파는 돌격을 화력으로 이겨놓은 다음 적을 끝장내는 수단이 아닌, 적을 이기는 수단으로 중요성을 되돌려놨음


페탱은 충격학파식 돌격에 대해 '포화 속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밀물처럼 끊임없이 적에게 달려드는 바다. 이것은 가장 잔인한 형태로 병력을 지속적으로 던져주는 일종의 살인 게임이다.' 라고 비난했고


포병장교인 에드몽 뷔아는 1909년에 충격학파가 어떤 논리로 돌격과 밀집대형을 연관지으며 옹호했는지 이렇게 설명했음


'그러니까, 그들은 질량[M]에 속도[V2]를 곱한 값인 충격력을 기반으로 공격 성공 가능성을 계산한 것이다. 즉, MV2다. 하지만 V는 무한정 늘릴 수 없고, 사실 모두가 잘 알고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M을 늘리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그들은 이런 계산을 실제로 적용했다. 봄 기동훈련에서 사각형 덩어리로 밀집된 대규모 병력이 개활지에서 얇은 산병선 뒤에 배치된 채 혹은 산병선조차 없이 요새화된 진지로 돌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충격학파의 교리는 은엄폐를 시간낭비이자 화력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리는 짓이라고 서술하고, 기동할 땐 대대 단위로 뭉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함


1875년 보병 전술교리에선 중대가 저래야 한다고 주장하니 명백한 퇴행이였음


페탱의 지적을 보자면


'포화 속에 놓인 부대는 이러한 대형들 중 어느 것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를 억제하려는 정당한 이유로 지형이 제공해줄 수 있는 모든 보호막을 사용하려 들 것이며, 이를 위해 교리가 제시하는 방법이 아닌 아파치족이 사용한 것과 같은 교란술을 택할 것이다.'




그래도 1902년 보병 전술교리는 1895년 작전 교리에서 제시한 원칙을 전술적 수준에 적용하는 성과를 이루어냄


사단장이 각 대대를 준비대대, 충격대대, 예비대대로 나누고


준비대대가 적에게 700~400m까지 접근한 다음 사격하는 동안, 충격대대가 측면으로 기동한 후 돌격해서 결정적인 공격을 벌이거나 준비대대와 함께 300~250m까지 접근한 다음 돌격하라고 나와있음


예비대대는 전과확대 혹은 패배했을 때 피해 억제용으로 쓰임


그러나 1895년 작전 교리를 만든 보날이 체스식 지휘를 선호했으니 이 과정에서 지휘는 중앙집권적으로 이루어짐




근데 마침 2차 보어전쟁이 분석되기 시작하면서 1902년 교리가 곧 폐기됨


2차 보어전쟁은 마이야르가 들여온 프로이센식 연구방법으로 즉시 분석되었음


분석 결과가 어느 면으로 보나 화력학파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에 전술을 다시 화력학파식으로 만들 필요가 생겼음


교리 토론에 참여한 상임전쟁심의회는 다음 3가지를 강조함


1.이젠 적과 3~4km 떨어진 거리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접적행군 중 은엄폐를 위해 지형을 더욱 능숙하게 이용해야만 함

2.지속적인 화력지원, 특히 포병사격이 더이상 준비로 한정되어선 안됨

3.연쇄적인 돌격과 상호지원을 하는 소부대들이 접촉선을 따라 다소 분권화된 전투를 벌여야 함


화력학파는 1번 때문에 적에게 접근하려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게 된 점, 양쪽 모두 적극적으로 숨어다니게 된 점, 부대 간 거리가 멀어지면서 명령을 전달하기 힘들어진 점을 고려하여



총사령관이 적의 약점을 찾아내기 힘들어졌고, 찾아낸다 해도 기동시키기 어려워졌으므로 사령관이 곧 체스선수인 지휘체계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음


이에 따라 기동전 교리에 대한 공격이 발생함



논의가 끝난 후 탄생한 화력학파의 1904년 보병 전술교리의 서문을 보면


'훈련 교범은 무기의 발전과 군 복무기간의 변화를 반영해 개정되어야 한다. 또한 가장 최근에 발생한 전쟁의 경험을 반영해야만 한다. 현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무연화약이 소개되었다.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강화되고 있는 보병 화력과 안정된 탄도, 포병 화력의 강력함과 발사속도는 병력이 더더욱 파괴적인 효과에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병력 밀도를 낮춰야 하는 이유와 지형을 이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후


'지형에 밀접하게 적응하는 매우 유연한 대형을 사용하고, 전통적인 산병선을 전투선을 따라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치되는 집단이 대체해야만 한다.'


산병선이 폐기된 건 아니고, 이전보다 더 유연한 형태의 산병선을 제안한 거임



또한 교리는 소대를 새로운 기본 전술 단위 부대로 규정하고, 소대가 지형에 맞춘 불규칙한 대형을 사용하여 적에게 접근해야 한다고 서술함


교리는 이러한 접적행군 중엔 심지어 분대 단위로도 산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음


하지만 공격이 시작되면 소대 전체가 하나의 산병선을 만들어야 했음


이 때 산병선이 다른 소대의 산병선과 독립적으로 이동과 사격을 했음


교리가 소대를 기본전술단위로 설정했기 때문에 1875년 교리에서 중대장의 중요성을 높였듯 소대장의 중요성을 높이게 됨


심지어 교리는 병사와 부사관의 정신력도 강조하는데, 이건 병사가 자동인형에서 벗어나야 더 잘 싸울 거란 판단에서 나온 내용임


포슈가 보병 전술에 관여한 적은 없지만(애초에 전술은 포슈의 전공 분야가 아님) 1903년에 임무형 지휘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해 설명하며 병사와 부사관도 장교처럼 생각할 줄 알면 명백하게 더 잘 싸운다고 한마디 한 바가 있음



이 교리는 중앙집권적인 소대장의 사격 통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김


소대장의 사격 명령을 소대 전체가 귀로 들으려면 어느정도 밀집된 대형을 써야만 했던 거임


또한 일제사격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음


이는 대형 편에서 말하는 산개와 유연함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교리에 모순이 생겨버림


그리고 1904년 보병 전술교리는 이전의 충격학파 전술교리와 마찬가지로 1895년 작전 교리의 원칙인 행동의 자유, 의지 강요, 병력의 절약을 준수하기로 함


'이러한 원칙들은 교리의 통일성을 확립하도록 도우며, 전장에서 병과 간 협동과 노력을 조정하는데 필수적이다. 보병을 전투에서 사용하는 방식이 이러한 원칙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모든 장교가 이를 숙지하고 영감을 얻어야만 한다.'


하지만 원칙만 준수할 뿐, 저 원칙들의 목적인 기동전은 거부했음



1904년 보병 전술교리는 몇가지 혁신을 제시하지만 사격 통제 때문에 자체적인 모순이 생겼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문체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우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고


병사, 부사관, 소대장에게 부여된 강력한 주도권이 강한 거부감을 일으켰고


아무런 설명없이 전술 교리에서 작전 교리를 공격하니 영향력이 제한적이였다고 함



이 교리가 나온 다음 러일전쟁이 터졌음


프랑스군은 러일전쟁에서 2차 보어전쟁 때보다 훨씬 강력한 화력을 관찰할 수 있었음


참호의 중요성이 늘어났다는 관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서 1906년에 참호 교리를 제작하는 성과를 냈고


1907년엔 기관총 교리가 탄생했고


1905년 1월에 총참모부에서 적에게 관측당하면 곧 사살당하니 군복에서 빛을 반사하는 건 전부 없애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같은 날짜에 장교가 병사와 같은 색상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결론도 내렸고


위장성이 고려된 군복을 도입해야 한다는 결론도 내림


프랑스 이론가들의 논의를 보겠음




먼저 청년 튀르크들의 대장이자 충격학파인 그랑메종이 1908년에 화력학파식으로 분산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다고 지적함


'중요한 것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소부대를 대규모로 배치하는 것, 지형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 불규칙적이고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 완벽한 엄폐가 불가능하다면 땅에 엎드리는 것이다. 종대를 이루는 밀집된 병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정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배치되었는지와 상관없이 멀쩡한 적의 화력에 노출되면 증발해버릴 것이다.'


또한 그랑메종은 1904년 보병 전술교리도 충분한 분권화를 제시하지 않았다면서 반소대를 기본전술단위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함


외젠 드브네는 1913년에 사격조를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음



그리고 보병의 밀도도 논쟁 대상이였음


청년 튀르크 장 밥티스트 몽테뉴의 주장을 보면


'우린 1m마다 종심의 증원, 지원, 예비까지 합쳐서 대여섯명을 배치한다. 우리는 백병전과 사기 문제로 이렇게 하고 있다. 차라리 병사들에게 장창을 나눠주는 게 어떤가? 소총만큼이나 유용할 것이다! 1m당 1명조차 나한텐 미친 짓으로밖에 안보인다. 굳어진 습관 때문에 이런 악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청년 튀르크 빌라르는 밀도를 낮추면 취약성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소대 이하로 통제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음



러일전쟁이 프랑스군에 낳은 변화는 충격학파도 전진하려면 화력의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임


여전히 화력의 우위를 헛소리로 치부하던, 이젠 장군이 된 카르도같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따라서 포병이 보병의 진정한 방패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포병이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지 토론이 일어남


그 결론은 포병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였음


대포병사격이 보병의 가장 큰 장애물로 정의된 적 포병을 치워버리기 위해 강조되는 성과가 있었지만, 공격준비사격은 폐기되는 사태가 일어남


왜냐하면 은엄폐한 적을 상대론 포격해봤자 별 의미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임


교리는 '포병은 공격을 준비하지 않는다. 포병은 공격을 지원한다.' 라고 서술함


이 문제는 그 지원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는 설명이 없기에 심화됨



돌격은 논쟁거리로 남았음


우선 충격학파와 화력학파 이론가들 모두 화력만이 적에게 200m까지 전진할 수 있게 해준다는데 동의하게 되었음


일단 여기까지 전진한 다음 돌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로 논쟁이 발생했는데


화력학파의 장 콜랑은 정면돌격을 거부했고, 일본군의 요양 전투 승리가 화력으로 적을 진지에서 추방시켜놓고 돌격했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돌격이 승리를 매듭지었으나) 화력이 승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라고 결론내림


반면 충격학파의 그랑메종은 화력의 우위가 있다면 정면돌격이 가능하다면서 돌격을 논했음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선 전진해야 한다.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짐승처럼, 손실을 신경쓰지 말고, 병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러일전쟁은 짐승같은 정면공격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으며, 이에 대해 토론할 것도 없다.'

'적이 이미 무너지고 있어야 하고, 사기가 저하되어 항복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야 한다. 공격이 매우 뚜렷한 정신적, 신체적 우위를 점한 채로 진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야 한다.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이동을 보장해주는 건 화력 뿐이다.'

'돌격이란 군중심리학이다. 사기 문제다. 우리의 전술적 노력의 주요 목표는 화력에 의해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마비당해버린 적이 정신적 우월함을 유지하는 우리 병력과 가까이서 맞붙게 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돌격을 누가 하느냐도 논쟁거리였음


화력학파의 외젠 드브네는 '돌격은 언제나 산병선이 해야 하고, 적에게 접근한 다음 해야 한다.' 라면서 산병선이 돌격해야 한다고 주장함


같은 화력학파의 에드몽 뷔아는


'지속적으로 증원받는 산병선이 성공을 확정짓는 게 아니다. 돌격 결정권을 가진 산병선이 때가 왔을 때 그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추동은 산병선의 후방에서 시작된다.'

라면서 돌격용 예비대를 따로 둬야 한다고 주장함




프랑스 이론가들은 1차대전이 터질 때까지 약 9년 동안 이 모든 논쟁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음


1차대전 이전 마지막 보병 전술교리는 1914년 4월 20일에 나온 Règlement de manoeuvre d'infanterie du 20 avril 1914인데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전 교리랑 큰 차이점이 없었음


새로운 내용을 넣거나 수정하기엔 합의된 게 없었기 때문임


물론 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였고, 참호를 강조하는 내용이 추가되었음


교리에서 꽤 자세하게 방어정면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와 강점을 만드는데 필요한 수단을 제시하고, 1906년에 나오고 1911년에 갱신된 참호 교리와 연계할 수도 있었음


하지만 방어할 때 어떤 전술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선 적이 전진하기 위해 엄폐물에서 다른 엄폐물로 이동하는 순간 소대장이 사격을 지시하라는 내용과


'땅을 포기하느니 서서 죽는다.' 라면서 수사적인 문장을 써놨을 뿐임



그리고 10년 동안 일어난 기술의 발전이 기관총 하나에만 적용됐는데, 기관총이 향후에 맡게 될 역할은 꽤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상대하는 방법은 구상하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프랑스군의 전술은 2차 보어전쟁의 전훈을 상당수 받아들이는데는 성공했지만 러일전쟁의 교훈은 극히 일부만 받아들였을 뿐이고


이보다 퇴행적인 개념을 가진 장교가 다수에, 더 우수한 개념을 가진 장교 소수가 섞여있었으며


영향력이 제한적이였고


방어 전술은 공허했음



프랑스군이 1차대전 이전에 만들어둔 전술교리가 딱히 높은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프랑스군이 입은 심각한 피해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음


왜냐하면 프랑스군은 1871년 이래 해결되지 않은 사상적, 교리적 분열과 실전주의의 영향으로 교범을 아예 펴보지도 않은 장교가 대다수였기 때문임


실제로 프랑스 장교들이 국경 전투에서 어떤 식으로 지휘했는지와 교리 내용을 비교해보면, 교리를 따랐다고 볼 건덕지가 하나도 없음



작전 교리에 대해서도 조금 더 말하자면


2차 보어전쟁 혹은 러일전쟁 이후 기동전 교리에 반대하는 장교들이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오스카 드 네그리에, 샤를 케슬레, 루이 모뒤이, 에밀 마이에, 쥐스탕 베로가 있음


이 일련의 이론가들은


'기병은 정찰을 할 수 없고, 포병은 공격을 준비할 수 없고, 보병은 공격을 실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베로)


'전선이 북해에서 벨포르까지 뻗은 후 길고 정적인 전쟁이 펼쳐질 것이다.' (마이에)


'양쪽 병력이 서로 마주칠 때마다 빠르게 땅을 파고 요새화하길 반복하여 결국 긴 공성전이 이어질 것이다.' (모뒤이)


라고 주장하며 돌파 후 전과확대를 위한 결정적인 공격이 비현실적인 개념이니 기동전 교리를 폐기해야 한다고 요구함


(참고로 참호전을 예견한 이론가라고 해서 방어주의자로 착각하면 안됨


예를 들어 케슬레, 모뒤이는 명백히 공세주의자였음)



하지만 프랑스군의 포병 교리를 지배하던 이론가인 이폴리트 랑글루아는 현대식 야포 덕분에 기동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체스식 지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기동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보날의 후임인 포슈는 오히려 임무형 지휘만이 기동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했고


앙리 보날은 당연히 기동전 이론을 옹호했음


참호전 이론가들의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였으니, 참모총장이자 전시 총사령관이 된 조프르는 당연히 기동전 이론의 손을 들어줌



이에 따라 조프르는 1913년에 1차대전 개전 시점 프랑스군의 최신 교리인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 제작을 명령함


이 교리의 제작자들은 폴 포 장군, 엘리 두아셀 장군, 프랑수아 앙투안 대령, 앙리 베르틀로 대령, 샤를 브레캬르 중령, 알루앵 중령, 오귀스트 브로세 소령임


흔한 착각과 달리 포슈와 그랑메종 둘다 교리 제작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프랑스군의 교리가 엘랑 비탈이라는 건 그냥 인터넷 밈과 현실을 혼동하는 애들 헛소리임



어쨌든 이런 이유로 1차대전이 터졌을 때 프랑스군의 작전교리는 기동전 기반이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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