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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소개]궁예는 신라의 제도에 의거해 관직을 설치했을까앱에서 작성

하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5.01 19: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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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우 (2024).『삼국사기』 신라본기 효공왕 8년조 기사 검토.한국고대사연구,(113),12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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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세운 태봉의 관제는 초기 고려의 관제와 연속적이기에, 초기 고려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료가 극단적으로 적은 탓에 무언가를 추정하거나 학설을 내놓기가 상당히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다만 전통적으로 삼국사기 효광왕조의 기사에 의거해 태봉의 관제가 신라의 관제를 본뜬 것이라고 추정해 왔죠. 하지만, 이 논문은 삼국사기의 편제 상의 이유와 기록상 보여지는 인식의 차이 등을 들어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합니다.

1.효공왕 8년조 기사에 대한 인식
먼저 해당하는 효공왕 8년조 기사부터 보시겠습니다.

"8년(서기 904),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여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제정한 관직 호칭은 비록 신라의 제도를 인용하였으나,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패서도(浿西道)의 10여 주와 현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八年 弓裔設百官 依新羅制[所制官號 雖因羅制 多有異者] 國號摩震 年號武泰元年 浿西道十餘州縣 降於弓裔"

이 기사에는 몇가지 특징점이 있습니다. '신라본기'에 쓰여져 신라와 연관된 기록을 다루는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자국에 대해서는 '신라'라고 3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는 자국에 대한 기록은 ‘我'라고 표기하거나 생략하는 일반적인 삼국사기의 표현 방식과는 이질적입니다. 특히 비슷한 시기 궁예를 다루는 다른 신라본기 기사에서 신라가 '우리(我)'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어색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신라를 3인칭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 기사 하나가 아닙니다.

"(경애왕) 2년(925) 겨울 10월에 高鬱府 장군 能文이 태조에 투항하였는데 그 를 위로하여 타일러 돌려보냈으니, 그 성이 신라 왕도[新羅王都]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二年 冬十月 高鬱府將軍能文 投於太祖 勞諭還之 以其城迫近新羅王都故也"

이 기사는 신라 장군 능문이 고려에 투항하였을 때 그가 다스리는 지역이 신라 왕도에 가까우니 돌려보냈다는 기사입니다. 이 기사도 신라를 3인칭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일반적인 표기 방식이었다면 '우리 왕도'라고 표기했겠지요. 같은 장소를 다루는 다른 기사와 비교해보겠습니다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습격하였다.
秋九月, 甄萱侵我軍於髙欝府."

신라본기 바로 2년 뒤에는 고을부를 견훤이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이 고을부를 공격당한 주체는 신라이므로 '우리 군사'라고 써 놓았습니다. 앞에서 본 사례와 똑같습니다. 이는, 위에서 본 이러한 신라본기 몇몇 기사의 자료가 신라측 기록이 아닌 다른 국내 기록, 어쩌면 태봉-고려의 기록을 인용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자는 이러한 서술상의 특징을 통해 보이는 전거 자료의 차이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태봉의 관제는 신라를 모방했는가?
이러한 서술상의 의문점에 이어, 실제로 궁예의 관제가 신라와 비슷한지를 따져보면, 전체적으로 보아 기본적으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이 해당 논문에 첨부된 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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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나온 것처럼 신라의 관부와 기본적인 측면에서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정작 해당 기록을 전하는 삼국하기 신라본기의 기록 이외에 잡지 직관지나 열전 궁예전, 고려사나 하물며 중국 기록에서조차 태봉의 관제와 신라의 관제 간 유사성을 논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궁예전에는 이보다 앞서 894년 기록에 궁예가 이미 왕을 칭하고자 하여 관제를 정했다는 기사가 보이기에, 과연 궁예가 관제를 정한게 신라본기와 달리 이때가 처음이 맞는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조치가 사실인데 신라본기에는 쓰이지 않았다면, 신라본기의 저자가 해당 기록을 넣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신라의 그것과는 관련이 없었거나,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관제 정비라고 여기지 않은 것이겠지요. 904년에 성립된 광평성을 비롯한 태봉의 관제를 신라의 관제를 모방해 국가의 관제를 정하고자 한 것이라는 견해와 관부나 관직의 이름을 바꾸어 독자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그것보다는 연표나 직관지에 나타난 고구려 뒤에 부착된 궁예의 사적에 대한 구조를 더 고려했습니다. 이는 연표나 지를 정리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신라보다는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더 인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궁예가 신라 관제를 모방한 것이 맞다면 왕건이 즉위 당시 내린 조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집니다. 왕건은 즉위 시에 '​前主(궁예-인용자)는 신라의 階官과 郡邑의 호칭이 모두 천하고 촌스럽다 하여 새로운 제도로 고치고 여러 해 동안 시행하였으나, 백성들이 익히 알지 못하여 헷갈리고 어지럽게 되었다. 이제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라 이름과 뜻을 바꾸되, 알기 쉬운 것은 새로운 제도를 따르도록 하라​'라고 함으로서 신라의 관제를 모방해 새로 관제를 제정했는데, 이는 태봉의 관제가 신라의 그것과는 다르며, '새로운 제도로 고치고 여러 해 동안 시행하였'다는 것을 통해 904년의 관제 정비가 실제로는 신라의 관제와 달랐을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신라를 매우 증오하고 신라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새 나라를 건국하고 고구려 계승을 선포한 궁예 입장에서 신라의 관제를 따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니까요.

3. 효공왕 8년조의 분주에 대해
거기에, 궁에의 관제가 신라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다른 것도 많았다는 주석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당 기록 역시 신라를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측 기록은 아닐 텐데, 이 기록이 삽입된 시점에 대해 저자는 신라본기의 효공왕 8년조 편찬자 본인이 삽입했다는 설은 어색하다고 부정하면서 이 주석이 후대에 삽입된 후주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반면 이것이 후대에 정리한 삼국사기 편찬자가 교차검증을 통해 삽입했다는 것도 이상한데, 궁예와 관련해 들어간 모든 분주 23개 중 저 기록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궁예의 관제와 삼국사기 편찬 시점인 고려 중기의 관제를 비교하는 내용이며, 만약 삼국사기 편찬자가 신라본기의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는 기록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다른 것도 많았다'라고 비판, 교차검증할 만한 자료가 있었다면 왜 다른 후고구려, 궁예 관련 기록에서 발생하는 본기와 열전 간의 모순은 해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강래에 따르면, 삼국사기는 궁예의 행보를 묘사함에 있어서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언급하는 것을 극히 꺼려왔습니다. 본기는 물론이고, 궁예전에도 궁예가 고구려 계승 의지를 표명하며 왕이 된 것에 대해 '신라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단서를 닮으로서 궁예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가급적이면 부정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예가 신라에 증오를 가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적시했습니다.이를 보아 저자는 저 분주의 내용이 궁예의 관제가 신라의 것을 따랐다는 신라본기 해당 기사의 인식과, 궁예의 고구려 계승을 부정하고 신라에 대한 증오나 갈등을 부각하고 싶었던 삼국사기의 논리 사이에서의 간극 때문이 아닐까 하는 설을 제기합니다. 즉 삼국사기 편찬자가 후에 교차검증을 통해 넣은 것은 맞으나, 그 이유가 정치적이라는 것입니다.

4. 열전과 본기의 기록 차이를 통해 본 전거 자료의 차이
다시 돌아와, 본기와 열전 간의 서술 차이를 통해 참고한 전거자료의 차이를 논합니다. 궁예가 처음 일어나 투탁한 시점, 양길과 비뇌성 전투를 치른 시점과 전투의 동기, 세부 양상 등 행적에 있어서 세세한 차이가 열전과 본기 사이에 발생하며, 궁예의 세력 확장 과정에 대해 본기와 열전이 서로 상대에게는 없는 독자적인 정보들을 전달합니다. 또 열전에는 894년의 관제 정비 이후 등장하는 관직들이 아찬, 태수 등 신라적이라고 볼 수 있는 점에서 태봉 건국 이전에 궁예가 신라 관제를 취했으리라 추정되는 반면, 본기 기록의 원저자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태봉 건국시의 관제만을 신라와 연관시켰습니다.

이외에도 궁예가 명주, 또는 하슬라에 입성한 시점과 부대 규모, 궁예가 장군이 된 방식 등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이러한 시점 및 서술의 차이에 대해 요즘은 대체로 선후관계로 보아 양측 모두 존중하면서도 열전의 궁예 미화적인 정보는 열전의 성격 및 궁예전의 성립 주체와 관련지어 논해지는데, 비뇌성 전투의 양상이나 전투 장소 등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열전과 본기를 시간 순서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표합니다. 또 909년의 진도 공격처럼 견훤과 궁예 간의 전투임에도 양 인물의 열전에는 없고 정작 고려사에서만 자세한 상황이 나타나는 정보가 본기에 기술되어 있는 등, 신라본기의 원저자는 열전 저자들과는 별도로 참고할 수 있었던, 효공왕 8년조와는 달리 신라 계통의 자료를 참고해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열전의 정보들은 각자의 고유 정보들, 즉 궁예전의 경우 태봉계 자료들을 참고해 작성했겠지요.

5. 결론
결론적으로, 저자는 열전과 본기의 차이점, 궁예의 행적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본기와 열전 중 어느 기록이 맞다고 성급히 결론내릴 수는 없으며, 열전과 본기 원저자들이 참고한 전거 자료의 차이로 보아 인식해야 한다고 결론내립니다. 본기의 전거자료의 경우 궁예의 확장 과정과 행보는 대부분은 신라계 독자적인 자료로 추정되는 반면, 문제의 효공왕 8년조를 비롯해 신라를 3인칭으로 칭하는 기록들은 비신라계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고, 효공왕 8년조의 분주는 삼국사기의 저자들이 열전과 본기의 차이를 보고 써넣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궁예를 고구려와 연관시킨 표와 잡지(직관지)의 인삭에 대해서도 검토가 이루어져야겠지요.




다른 곳에서 피드백 받은 바로는 궁예가 신라를 정말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의 관제를 안썼다면 고구려 관제는 쓸 환경이 되었는가, 애초에 그런게 남을 만한 기록이 있었는가 등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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