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대다수의 반일 감정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상수로 봐야 한다. 다른 피식민 피해국에 비교해 봤을 때 좀 유별난 점은 있다고 하더라도, 식민지배라는 원죄가 어쨌든 일본에 있는데다, 지난 30~40년간(더 멀리 보면 1965년 한일협정 당시까지도) 일본이 사과를 했다가 내각멤버나 극우 담론가들이 망언을 하는 식의 패턴이 계속되다보니 상호 감정은 더 악화만 된 측면이 있다. 역대 한국 정부 측이 대일 문제 해결을 시도하다가 여론 수렴이 너무 부족한 채로 합의를 본(2015 위안부, 2023 징용) 점도 더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번에도 언론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표현을 너무 거칠게 했다. 친서방 노선을 밟고자 하는 윤석열 정부는 일처리를 어설프게 한다는 인상만 더 심어주게 되었다. 올바른 방향을 잡기는 했지만 이렇게 불쑥 말실수가 터져나오면 산통이 다 깨진다. 이미 대만해협의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에 반대한다는 (지극히 옳은) 발언 갖고도 국내의 반대파들이 껀수를 잡아 반정부 여론을 거대하게 형성하려고 선동 작업을 하는 와중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를 하려는 정책도 반대가 심하다.

외교안보 문제에서 한국의 여론지형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걸 정부여당 측이나 우파시민 측은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표현 하나하나도 조심해 가면서 일을 진행해도 시원치 않을 지경이란 말이다. 그나마도 예전에는 일본에 대한 과거사 감정 하나만 좀 조심하면 되었던 거지만 지금은 중국과의 경제적 실리, 러시아와의 외교적 실리를 찾는다는 사람들이 보통 목소리가 큰 게 아니다. 세계관 대결에서 친미/친서양 쪽이 친 북중러 쪽에 비해 불리한 구도다. (종종 존재하는 '친러반중파'들도 세계관 싸움 전선에 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 진영은 이참에 아예 노골적으로 북중러 진영에 베팅하겠다는 본심을 드러내고 있는 판인데, 일단 보수당을 혐오하는 30% 내외의 시민들은 친 북중러 세계관으로 똘똘 뭉칠 것이다. 그리고 이쪽이 지식인들과 인터넷 스피커들이 많아 화력은 머릿수 이상이다.

게다가 중도층 시민들도 북한을 싫어하는 것과는 다르게 중국, 러시아를 떼어내자는 데엔 상당히 주저하고 망설인다. 지난 30년간의 중국 수출 모델이 지금도, 앞으로도 유효할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꽉 잡혀 있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대다수다. 중국에서 산업구조와 정치경제구조의 내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눈에 잡히려면 아직은 시간이 몇년 정도는 필요하다. 중국의 내부 사정을 공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서,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로 지금까지 쭉 동일한데 윤석열 정부가 반중노선을 폈기 때문에 대중 무역적자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건 그나마 미국의 디커플링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이미 중국의 가공무역 산업에 상당한 여파를 미치고 있다는 건 고려하지도 않은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그나마 일반대중의 소박하지만 건강한 도덕감각이 러시아를 대체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대러 관계는 이와 별개로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러시아에 우호적인 시각은 민주당뿐만 아니라 중도와 보수진영까지도 얕지만 은근히 넓게 퍼져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뭔가 한국에게 외교적.경제적 불이익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정작 한국이 에너지, 식량, 자원을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이전부터도 높지 않았다. 수출은 현대자동차 등 러시아 사업이 잘되던 일부 회사들이 타격을 입긴 할것이다. 반면,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한국에게 직접 도움을 준 일은 딱히 지금껏 없었다. 어차피 러시아의 세계관에서 극동은 맨 마지막 순위에 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한국의 꽤 폭넓은 시민층이 중러와의 우호협력을 계속해서 원하는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지난 60년간 한국이 돌아가는 원리였던 수출제조업주의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수출제조업주의는 묻거나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자명한 상식이었다. 어른들과 학교로부터 그렇게 배우기도 했거니와 본인들이 직장을 다니면서도 분명히 체감했던 바였기 때문이다. 수출제조업주의 자체는 비록 냉전기에 태동은 했어도 그것이 가장 만개한 환경은 당연히도 탈냉전기 세계화경제 하에서였다. 탈냉전기 세계화경제에는 명시적인 적국이 (북한만 빼면) 아무도 없었으므로 한국의 기업들은 어디에든 발 닿는 곳이라면 가서 신나게 수출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 시간동안 일반대중 사이에도 중러는 외교안보적인 적대 세력이 아니라 한국의 거대한 수출시장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은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보호무역주의를 슬슬 시동 걸고 있는 미국보다 훨씬 덜 까다로운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냉전기에조차 적어도 자유우방국들은 재건이 필요했던 한국에 자국의 시장을 활짝 열어주었었다. 수출제조업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를 처음 만든 산업화 세대 노인층,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의 성장을 함께해온 40대와 50대의 민주당 지지층, 그리고 자연스럽게 60년간의 거시적인 환경에서 적응해왔던 중도층에게 강고하게 뿌리박혀있다.

지금의 이 지정학적 격변은 현대 한국인들의 세계관에서도 아주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