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중세유럽 조차도 헬조선처럼 목욕안하는 더러운 곳이 아니였다

ㅇㅇ(211.186) 2018.10.29 11:52:44
조회 1471 추천 102 댓글 4

서론

중세 유럽의 도시가 오물 천지에 더러웠다는 것은 대단히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고대 로마 도시의 청결한 '이미지'와 대비되어, 중세 문명을 미개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에 이르러, 학계 내에서 중세 문명의 여러 측면이 재조명을 받았고, 역사 매니아들에게도 그 성과가 많이 전달된 면이 있지만 그 매니아층을 조금만 벗어나도 대중들에게 뿌리박힌 '더럽고 미개한 중세'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하다.

이 글은 실제 중세 도시의 위생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이전, 몇 가지 전제를 세우고 가야 한다. 첫째. "현대 기준으로" 보면 근대든 중세든 고대 로마든 사람 살기 힘들다고 생각될 정도로 더럽고 악취나는 곳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이든지 건강하게 잘 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소위 '미개'해서 더러운 것을 당연한 상태로 여기고 살았다고 봐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청결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갖출 능력이 되었느냐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도시 위생 문제는 단순히 '겉보기에 깨끗하니 우월하고 더러우니 미개하다'라는 이분법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중세의 위생 이론

물론 중세 유럽인들의 병리학적 지식은 현대와 다르며 상당히 제한되있었다. 중세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의학 지식 역시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의학 이론과 중세 신학이 결합한 형태를 띄었다. 여기에 더해서 고대 그리스 의학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이슬람 의학의 수용도 폭넓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나온 4체액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신체의 건강은 근본적으로 열건습냉의 성격을 가지는 4개의 체액이 균형을 이루어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의학 이론 및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이슬람 의학을 바탕으로 중세인들의 몸 이론이 나왔다. 중세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한 몸으로 여겨졌다. 도시든, 국가든, 교회든 공동체는 한 몸이었으며, 이 몸은 개개인의 작은 신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하나의 건강은 다른 하나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도 둘이 아니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의 정신적 건강 못지 않게 신체적 건강을 돌보는 것은 공동체 전원의 책임이었다.

중세 의학자들은 당연히 근대적인 혈액 순환과 세균 감염 등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죄악과 방탕한 행위가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해친다고 믿었다. 따라서 경건한 생활은 건강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오물과 악취 섞인 공기는 자연스럽게 내면의 죄와 연계되었다. 중세인들은 경건함만으로 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영혼의 죄를 환기시켜주는 현실의 더러움 역시 영혼과 육신의 건강 모두를 위해 제거해야 될 것들이었다.



도시의 오물

흔히 중세의 거리는 거대한 오물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20세기 초반까지 학자들은 중세인들은 위생에 전혀 무관심했으며, 더럽고 악취나는 환경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살았다고 보았다. 이는 19세기 이래 역사학을 강력하게 지배해온 '역사의 진보' 사관의 영향이다. 그러나 중세인이라고 인간의 오감이 현대인과 달랐을 리가 없고, 이들이라고 깨끗한 환경을 싫어했을 리 없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중세의 의학과 신학 이론 전반에서 청결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당대의 행정 문서들은 현대인의 편견과는 상당히 다른 중세인의 이미지를 전해준다. 중세의 통치자들은 도시 위생에 끊임없이 신경썼다. 영국 요크의 도시 위생 개선을 위해 내린 에드워드 1세의 칙령은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이다.

'그 누구도 도시 내에 배설물, 거름, 혹은 다른 오물을 쌓아두는 것을 금한다. 배수로에 천과 아마포를 넣는 행위도 해서는 안된다. 나무 줄기나 목재가 들어갈 경우 신속히 제거할 것을 명한다. 대변은 신속하게 치울 것이며, 배수로는 수시로 청소하라. 또한 도시의 네 구역에 각각 공중 변소를 둘 것을 명한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나는 자신의 병사들이 요크에 머무는 동안 병에 걸릴까 염려했다. 위의 칙령은 그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는 중세인들이 더러운 환경은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국가의 행정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언제나 잘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중세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인력과 물력의 한계로 현대 도시의 청결 수준을 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중세인들이 청결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는 옛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1302년의 한 에피소드는 중세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인데, 국왕의 마부들 중 한 명이 급했는지 길거리에서 실례를 하다가 시민 2명에게 걸린 일이 있었다. 이때 시민들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볼일은 시내 공중 변소에서 보는게 상식 아니오?"

물론 길거리에서 볼일 보는 사람은 늘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게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중세에 공중 화장실이 있었단 말인가? 당연히 있었다. 앞서 보았듯, 에드워드 1세를 비롯한 통치자들과 도시의 시장들은 화장실 설치를 의무화했다. 중세 도시의 공중 화장실들은 대체로 가장 인파가 붐비는 지역과 강변, 다리 등에 설치되었다. 강변에 설치된 이유는 물론 아주 약간만 가공을 하면 원시적이지만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방식은 로마 시대에도 이용되던 방식이다.) 설치만 한 것이 아니라 관리인을 지정하여 봉급을 주면서 유지와 청소를 담당하게 하였다.

viewimage.php?id=20b2d423f7dc30af7dabd9a70f&no=24b0d769e1d32ca73cef8ffa11d02831424b310c0eeaa8669b91e4ace2ad459df2a7bbed69c9289b8cce32f75e9496ebcd8480eb01076cc546b1fb068d6a1b922c648b49

보다 부유한 이들은 집에 개인 화장실을 만들었다. 이런 경우 뒷처리가 문제인데, 대체로 집안에 파이프를 설치해서 뒷뜰에 파놓은 구덩이로 빠지게 하였고, 강이나 시냇물 근처에 사는 이들은 공중 변소와 비슷하게 흐르는 물을 이용했다.

그러나 14세기 말에 이르면 늘어난 도시 인구 때문에 수질 오염이 위험 수위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부터 도시 행정관들은 보다 치밀하게 배설물 처리를 관리하기 시작했다.(물론 이때부터 관리가 더욱 정밀해졌다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관리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행정 문서가 풍부하게 살아남기 시작하는 존 왕 시절부터 이미 기록은 찾아볼 수 있고, 그 기록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Rawcliff 선생이 지적하듯 존 왕 이전에도 관련 법규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 오물 처리와 관련한 규제는 흑사병을 겪고 난 뒤에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이때부터 뒷처리용 구덩이는 아무렇게나 파지 못하게 하고, 엄격한 규격을 따르게 하였고 반드시 둘레를 목재와 돌로 두르도록 하였으며, 엄격히 지정된 자리에만 파게 하였다. 심지어 이웃에게 악취로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이웃집까지의 거리까지 규정해놓았다. 그리고 이 오물들은 밤중에 정기적으로 도시를 도는 수거용 수레를 통해서 실어나가도록 하였다.



물과 목욕

도시 위생을 위해서는 청결한 물의 공급이 필수적이며, 몸이 청결을 유지하려면 씻어야 한다. 그런데 중세에는 로마와 달리 물 공급을 우물에만 의존했고, 목욕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도 대단히 깊게 뿌리박힌 편견이다.

우선, 그리스도교 교회는 목욕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 로마 제국 말기부터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전에 하던 그대로 목욕을 즐겼다. 많은 신학자와 사제들도 목욕을 청결 유지와 기분 전환을 위한 수단으로 권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어머니 모니카가 사망했을 때 슬픔을 이기려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목욕을 거부한 것은 몇몇 금욕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금욕의 한 수단으로 목욕이라는 즐거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교회 내에 목욕을 향한 이 두 가지 시선은 다음의 에피소드에 잘 드러난다. 4세기 말 한 주교는 너무 목욕을 좋아해서 하루에 두번씩 대중 목욕탕을 갔다고 한다. 이에 한 금욕주의자가 이렇게 물었다.

금욕주의자: 주교님, 대체 왜 하루에 목욕을 두번이나 하십니까?
주교: 세번 할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요.

서로마가 멸망한 뒤 이런 목욕 문화가 사라졌다는 서술이 많지만, Elizabeth Archibald 선생이 지적하듯이 이는 심한 과장이다. 사라진 것은 로마 시내에 황제들이 지었던 초대형 목욕탕들이다. 서로마 붕괴 직후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런 대형 목욕탕을 돌릴만한 노예들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형 목욕탕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영업했다.

중세에도 교회의 입장은 비슷했다. 앞서 보았듯 당시의 일반적인 태도는 신체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영혼이 죄를 피하듯 신체의 먼지와 오물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경계했던 것은 당시의 공중 목욕탕이 종종 매춘굴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목적이 청결에 있는 목욕은 교회가 적극 권장했다.

viewimage.php?id=20b2d423f7dc30af7dabd9a70f&no=24b0d769e1d32ca73cef8ffa11d02831424b310c0eeaa8669b91e4ace2ad459df2a7bbed69c9289b8cce32f75e9496ebcd8480eb01076cc542e2f15e8f68499632c94897


그러나, 교회가 어떻게 보든간에, 목욕탕은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대중 목욕탕이 급감한 것은 근대 초로 접어드는 16세기의 일이었다. 여기에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흑사병 시기를 거치면서 성적 분방함을 자제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한다는 믿음과, 동시에 뜨거운 물과 온도가 전염병의 원인이 된다는 속설이 퍼진 것도 그중 하나였다. 1526년 에라스무스는 "25년전만 해도 브라반트에서 대중 목욕탕만큼 인기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없다. 지난 역병으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라고 썼다.

어찌되었건 중세 중후반기에 청결에 대한 관심은 흔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는 도시 물 공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수도는 위생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상하수도를 건설하고 유지하는데는 막대한 비용과 조직력이 필요했다. 그때문에 비용과 조직을 갖춘 곳, 즉 수도원이 우선적으로 상하수도 시설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외에 부유한 이들도 집에 시설을 잘 갖출 수 있었다. 지금도 12세기 윈체스터 주교 저택의 유적에는 정교하게 지어진 상하수도 시설이 남아있다.

viewimage.php?id=20b2d423f7dc30af7dabd9a70f&no=24b0d769e1d32ca73cef8ffa11d02831424b310c0eeaa8669b91e4ace2ad459df2a7bbed69c9289b8cce32f75e9496ebcd8480eb01076cc544e6a656db6d1ec3d7a8bebb

(윈체스터 주교 저택의 수로 유적)



viewimage.php?id=20b2d423f7dc30af7dabd9a70f&no=24b0d769e1d32ca73cef8ffa11d02831424b310c0eeaa8669b91e4ace2ad459df2a7bbed69c9289b8cce32f75e9496ebcd8480eb01076cc54fe0f2528a3c1f91780fc205

(캔터베리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물 공급 시설. 저수조에 채워진 물은 파이프를 통해 수도원으로 공급되었다.)


도시 엘리트들도 상하수도 시설에 관심이 많았고, 끊임없이 투자하였다. 물과 관련된 시설들, 홈통, 배수로, 우물 등은 도시 정책에 있어서 우선순위였다. 각 주요 도시들에서 수도관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치열하고 지속적이었다. Lynn과 Exeter같은 도시들은 아예 전문 배관공과 금속 기술자들을 보유하면서 수시로 수도관을 점검하고 유지, 보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eter는 14-15세기 후반에 걸쳐, 수도관을 더욱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보수할 수 있도록 길이 2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터널을 만들었다. 이 터널은 사방이 돌로 마감되어 있었고, 배관공이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 터널은 아직도 남아서 관광 명소로 기능하고 있다.


viewimage.php?id=20b2d423f7dc30af7dabd9a70f&no=24b0d769e1d32ca73cef8ffa11d02831424b310c0eeaa8669b91e4ace2ad459df2a7bbed69c9289b8cce32f75e9496ebcd8480eb01076cc517e2f05f8d3a1c96c9cbdbb4


(엑시터 시내로 물을 공급하던 지하 수로)


비용과 원동력

당연히 위와 같은 도시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든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맨 처음에 언급했듯이 여러 왕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은 분명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아무리 국왕과 행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분권적인 유럽의 정치 구조 하에서는 그것을 실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결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던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그 많은 인프라들은 그 건축을 통해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던 엘리트들의 경쟁 덕분에 가능했다.

중세도 마찬가지였다. 국왕들과 행정관들의 노력 못지 않게, 시민 스스로의 공헌은 대단히 중요했다. 우선 중세 전성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시민적 정체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자치권을 얻어낸 도시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켜가고 있었으며, 도시 경관과 위생은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의 중요한 요소였다. 중세 중기 이후부터 이(lice)와 여타 더러움의 증거는 점차 야만인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시의 유력 시민들은 자기 도시에 이런 요소가 많을 경우 수치심을 느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도시 위생 유지에 상당한 자금을 댔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한 중세 특유의 '몸 이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는 여러 신체 부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신체였고, 공기와 수로는 그 혈관이었다. 몸 한 곳이 아프면 몸 전체가 힘들듯, 시민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관념은 도시 거주민들에게 강력한 연대의식을 불어넣었다. 부유한 시민 A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위생적인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비위생적인 곳에서 사는 다른 사람들을 남 일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동시에 선행으로 하늘의 공덕을 쌓는 중세 가톨릭 교회 특유의 신학도 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관념은 상당한 수의 엘리트와 유력자들이 도시 인프라 조성과 유지의 의무를 떠맡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아래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의 도시들은 공중 화장실을 만들고, 관리인을 고용하고, 밤새 분뇨 수거차를 돌리고, 배수로를 청소하고, 수도관을 설치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결론

사실 더러움의 강도나 양으로 본다면, 유럽의 도시들은 중세보다 오히려 17세기에 더욱 비위생적인 환경을 가졌을 것이다. 당연히 이는 17세기 사람들이 더 어리석거나 미개해져서가 아니라, 상업과 도시가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중세에 지었던 도시 인프라로는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고, 15세기까지 잘 기능하던 공중 변소들만으로는 17세기 도시 인구가 배출하는 양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섣불리 과거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려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준다. 단순히 한 시대를 재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 시대의 여러 측면을 낳은 복합적인 이유들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중세인은 결코 운명론에 빠져서, 질병을 천벌로 받아들이거나 더러움을 묵묵히 참고 살지 않았다. 인력과 물력, 기술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더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다. 분명 현대에 비하면 한계가 많았고,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을 '미개'하다고 비웃기보다는 이들이 어떻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더욱더 생산적인 논의를 낳는 진짜 공부일 것이다.

참고 문헌
Carole Rawcliffe, Urban Bodies: Communal Health in Late Medieval English Towns and Cities (Woodbridge, 2013).
Virginia Smith, Clean: A History of Personal Hygiene and Purity (Oxford, 2008).                          
Elizabeth Archibald 교수의 2014년 강의, Durham University.



출처: 부흥 카페 charger8607 님

추천 비추천

102

고정닉 17

26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연예인 안됐으면 어쩔 뻔, 누가 봐도 천상 연예인은? 운영자 24/06/17 - -
1966999 일본은 고대때부터 제국이며 백제, 신라, 발해를 지배했다. [7] ㅇㅇ(119.17) 19.01.02 1754 71
1966994 어.. 삼일절은.. [8] ㅁㅁ(121.180) 19.01.02 1286 83
1966990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4] ㅇㅇ(112.167) 19.01.02 816 55
1966981 우리 민족 끼리.jpg [20] ㅇㅇ(119.17) 19.01.02 2037 29
1966979 일본 역사 교과서에도 임나일본부가 있으며 이는 내선일체를 나타낸다 [20] ㅇㅇ(119.17) 19.01.02 1443 38
1966687 느그 국뻥부가 말 바뀐적이 없다고? [2] ㅇㅇ(110.70) 18.12.28 1573 153
1966669 일본 초계기 동영상이 가르쳐주는 진실 [9] ㅇㅇ(59.2) 18.12.28 2496 230
1966497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jpg [14] ㅇㅇ(119.17) 18.12.25 2679 110
1966483 죠선 감성으로 재탄생한 대일본제국 건축물.jpg [16] ㅇㅇ(58.124) 18.12.25 3194 231
1966420 한반도 그 5천년 개찌질의 역사 [3] 네임드(49.163) 18.12.24 2012 204
1966219 미국에 징징거리다 존나 쳐맞는 국뽕.jpg [9] ㅇㅇ(211.36) 18.12.20 2207 161
1966077 미국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한국!!! [10] 호랴(85.237) 18.12.17 2992 142
1966075 한국 교과서에서는 패전을 승전으로 가르치는 역사 [7] ㅁㅁㅁ(88.204) 18.12.17 2231 130
1966060 표리부동한 한국인 ... 일침날리는 남자 ... jpg [6] ㅇㅇ(110.70) 18.12.16 2014 120
1966022 한국 틀딱 특징 [6] 책사풍후미나모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2.16 1802 118
1966021 일제가 배출시킨 조선인 전투기 조종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6] aaa(211.178) 18.12.15 1904 87
1965651 《복습》조선인의 12가지 습성 [7] ㅇㅇ(121.187) 18.12.08 2215 149
1965518 욱일기 팩트.. [9] ㅇㅇ(49.143) 18.12.05 2528 163
1965142 일제시대가 수탈의 식민지 시대가 아닌.... 명백한 증거 [17] aaa(211.178) 18.11.28 2321 164
1965084 한국에서는 금지된 퀸 노래.jpg [7] dd(175.201) 18.11.28 2818 142
1965070 새해부터 반일영화 개봉하네 [8] ㅇㅇ(61.254) 18.11.27 2275 128
1965056 [동영상] 한국과는 넘사벽인 일본의 우주 산업 기술력 [6] ㅇㅇㅇ(41.60) 18.11.27 1252 107
1965031 중세 몽골군이 십자군보다도 약하다고 봐야하는 이유 [7] ㅇㅇ(59.22) 18.11.27 2759 98
1964289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현재 일본의 지도 [18] 충실한제국신민(182.210) 18.11.16 2329 100
1964233 한국 지역의 사람들은 일본어를 썻다는 어느 글이다.jpg [20] ㅇㅇ(119.17) 18.11.15 3104 65
1964132 갓서인... 반일 토인들에 일침 [6] ㅇㅇ(175.223) 18.11.14 2279 132
1964078 한반도의 병무청 일 꼬라지...(feat.공익갤 펌) [5] 스투코프(106.249) 18.11.13 1388 82
1963343 윤치호만큼 조선놈들을 정확하게 파악한 인물도 없다. [8] ㅇㅇ(110.14) 18.11.02 2398 126
1963239 혐일, 반일들 보다보면 정신병자같음 [8] ㅇㅇ(175.223) 18.11.01 1943 125
1963150 한국인들이 한국사를 컨텐츠로 만들어 외국에 소개할때 패턴 [6] 책사풍후미나모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10.30 2429 138
1963142 폴란드볼) 일한관계.jpg [17] ㅁㄴㅇㄹ(59.1) 18.10.30 3515 235
1963135 몽골로이드의 인지부조화.jpg [8] 와이짜(104.131) 18.10.30 3013 115
1963002 몽골이 유럽한테 학살당한 3차 유럽침공 [5] ㅇㅇ(220.74) 18.10.29 1527 95
1963001 몽골이 유럽한테 학살당한 2차 유럽침공에 대해 [3] ㅇㅇ(220.74) 18.10.29 1103 85
중세유럽 조차도 헬조선처럼 목욕안하는 더러운 곳이 아니였다 [4] ㅇㅇ(211.186) 18.10.29 1471 102
1962982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25] ㅇㅇ(1.252) 18.10.29 2184 86
1962849 골목식당...혐한 제조 방송...jpg [15] ㅇㅇ(60.100) 18.10.25 3740 111
1962832 한국과 중국의 문화재 야경 조성 차이. [13] 실라(211.230) 18.10.25 2024 94
1962482 중국은 천하의 둘도 없는 실수를 했지 오키나와 먹으랄때 안 먹고 [17] ㅇㅇ(119.17) 18.10.20 1671 40
1962321 FC 바르셀로나, 내년 여름 일본·중국 온다…한국은 '패싱' [1] 토파나(193.201) 18.10.17 333 17
1962318 한국인들의 반일정신병에 대한 러시아인의 일침 조선인(59.1) 18.10.17 613 16
1962317 유독 日本에게만 '고도의 도덕적 잣대' 들이대는 韓國 [2] ㅇㅇ(59.1) 18.10.17 526 18
1962314 175.193 특징 [1] ㅇㅇ(39.118) 18.10.17 314 14
1962301 美 “한국인, 주일미군기지에 앞으론 출입 통제” [2] 카일럼(5.134) 18.10.17 955 70
1962298 5년 전 아베노믹스 관련 한국 언론들 모습 [4] 스믹한(5.8) 18.10.17 944 58
1962276 관음증의 나라 일본.jpg [3] ㅇㅇ(1.252) 18.10.16 1673 46
1962243 고려인 물리치료하는 러시아인.gif [4] ㅇㅇ(180.182) 18.10.16 1644 39
1962142 센잘알 MMA파이터 차엘소넨 [4] 센순징(49.172) 18.10.14 986 90
1961989 황교익, "한국 관련 학문에는 국뽕끼 묻어있어" [1] ㅇㅇ(175.223) 18.10.13 882 39
1961974 조선인의 외모와 관련한 몇가지 팩트들 [1] ㅇㅇ(118.221) 18.10.12 1228 48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