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99년 1월 겨울.

그야말로 북쪽 설국의 이국적 풍경이 되어버린
눈내린 해안초소에서 맞선임과 근무를 설때의 일이다.

영하 12도, 체감온도 영하 19도의 살벌한 추위.
그 속에서 우리는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가슴속의 뜨거운 젊은 열기에
의무감과 원죄라는 눈물을 들이부어,
싸늘하게 식어버린 난로와 같은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지은채
그날도 어김없이 의미없는 새벽동을 기다렸다.

깊은 겨울밤의 바닷바람은 차디찼다.
양모장갑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는 한국군의 합성섬유 털실 장갑.
이 5만원짜리 거적대기를 씌운 손으론 이런 강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소총을 쥔 손의 감각이 사라져갈 무렵,
맞선임이 부시럭대며 스키파카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꼴꼴꼴..'
선임은 철제 머그컵에 보온병의 뜨끈한 액채를 따르고 있었다.
이내 초소 망루를 뒤덮은 포근한 커피향에 몽롱했던 정신이 께어났다.

"춥냐?"
맞선임 강태욱 해병님이 커피를 호록 거리며 물었다.
"일병 김승수 아임다!"
"쌔끼... 입술이 퍼래졌구만 아니긴..."

김해병님은 얼마 남지않은 커피를 초소 아래로 털어내셨다.
그리곤,
"따듯하게 한잔하면 살얼음판 같은 군생활도 순탄하게 가는거야. 나도 아쎄이 시절부터 선임들이 주시는거 받아 마시면서 삭막한 군생활 버텨내왔다."



김해병 님은 하의 단추를 푸시곤 두 다리 사이 수도 꼭지를 꺼내셨다.
그리고 컵을 수도꼭지 앞에 대시곤 열심히 펌프질을 하셨다.
'푸슛...'

"자, 악으로 마셔라."

영하 12도의 추운 날씨,
철제컵에선 아지랑이 같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뜨끈하고 끈적한 해병의 DNA.
아마 무적 대한민국 해병대는 선배들의 우수한 전투력과 악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기 위해, 여지껏 전우애란 전통으로
선배 해병들의 DNA를 그토록 처절하게 마셔왔던 것은 아닐까?

"좀 더 줘?"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채,
김해병님은 나의 어깨를 눌러 무릎을 꿇게만드셨다.

눈앞에 보이는 거무튀튀한 온수 수도꼭지...



체감온도 영하 19도의 새벽 해변가.
동이틀 무렵까지 손발은 얼어붙듯 차가웠으나,
나의 뱃속은 한가득한 해병의 DNA로 뜨거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