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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전등 아래서 빛났다 -9-

설갤러(121.166) 2023.12.26 16:47:04
조회 195 추천 21 댓글 5





"지금 뭐하는 짓이야!"


두 여성이 거의 동시에 같은 말을 외쳤다. 온열등을 내리친 안나는 분노에 몸이 저려진 채로, '진정' 작업을 수행하던 멜리사는 중요한 작업이 망쳐졌다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성경책만큼이나 크고 묵직한 온열등을 얻어맞았음에도 멜리사는 몸이 좌측으로 기울 뿐 큰 부상을 입지 못했다. 두세 겹 씩 껴입은 가죽코트와 주삿바늘도 불허하는 팔근육이 한 몫한 것 같았다. 안나는 자신을 향해 뻗은 가시를 손으로 살짝 밀어 피하며 멜리사의 목을 팔로 낚아채서 엘사의 몸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필요한 조치만 취하라고 했을텐데, 목을 졸라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안색 시퍼래지는 걸 못 봤어?! 아니, 기껏 말로 다 진정시켜놓고, 마지막에 가서 사람을 반쯤... 반을 죽여놓냐고!"



안나의 눈동자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엘사와 멜리사 사이를 분주하게 오고 갔다. 이 돌팔이에게 항의를 쏟아내면서도, 바닥에 편히 쓰러지지도 못하고 가시와 몸통이 짓눌리면서 통증으로 괴로운 신음을 내지르는 제 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언니를 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 한나를 제외하고 자신을 평민출신이라 굳게 믿고 있는 나머지들과 까만 머리의 돌팔이 앞에서 혈통을 논할 수는 없었다.



"하, 대장님도 제 손을 겪어 보셨잖아요. 제가 직접 사망에 이르게 한 환자는 없었어요. 지금은 너무 추워서 마취 주사도 다 얼어서 쓸 수가 없고요. 보세요. 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걸요?"



멜리사는 외투의 단추를 몇 개 풀더니 우측 안주머니에서 하얀 비단으로 포장된 갈색 약병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담는데 쓰던 병을 수차례 흔들었음에도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는 없었다.



"성공적이라고? 안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두 눈이 까뒤집혔는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목에 멍든 건 어떻게 하고? 하~~ 하하... 그래. 니 말 맞다. 의사 선생님이 항상 맞겠지. 이제야 어디 도망 못 가게 확실하게 만들었으니... 소원 이뤄준 건 고마워, 응.


...하지만 엘사의 목을 조르고 있을 때 니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졌던 건 나중에 집고 넘어 가야겠어."



날선 눈빛을 멜리사의 부릅뜬 눈동자로 향한 안나는 바닥에 쓰러진 환자를 부축했다. 큼지막한 송곳 하나를 빼면 그나마 가시가 적은 엘사의 왼쪽 몸이었다. 몇몇 자잘한 가시가 두꺼운 코트로 가려진 오른팔을 찔렀지만, 워낙 코트가 두툼해서 살까지 파고들지는 못하고 외투만 찔렀다. 환자는 자기가 격리 시키겠다며 내민 멜리사의 손을 뿌리치며 대장의 듬직한 걸음걸이는 연회장 밖으로 움직였다. 침실로 가자. 치료할 방법이 있을 거야. 힘이 빠진 채 흔들리는 몸통을 부여잡으며, 대답 없는 엘사를 도닥였다.



그러나 멜리사는 코트 품에서 꺼낸 끝이 휘어진 지팡이로 안나를 툭툭 치더니, 환자로부터 물러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러곤 휘어진 부위를 쓰러진 엘사의 오른쪽 어깨에 걸고 질질 끌고 움직였다. 이런 건 자기가 더 잘 안다고 한 소리 하면서. 가시가 꽂혔었던 멜리사의 코트 가슴팍 전체가 얼음기로 뒤덮혔지만, 그녀는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호흡이 거칠어져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안나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청사병'이라 칭하던 그 병의 초기 증상이 얼마나 가슴 깊이 사무치는 고통을 남기는 지를.



"잠깐만, 어디로 가면 되죠? 이 궁전에도 의무실이 있을텐데..."


"있긴 한데 침대가 다 얼어붙어 있었어. 윗층에 내가 찾아둔 방에 이런 상태의 환자를 눕힐 자리를 만들어 볼테니까, 우선 끌고 올라와."



안나는 발에 붙여둔 무거운 등반장치를 풀고, 계단을 한 번에 두 개 씩 뛰어서 건너며 위층으로 향했다. 왼쪽으로 돌아서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 들어선 그녀는 녹색 둥근 양탄자가 깔린 아늑한 풍경을 지나쳐 창가로 향했다. 열려있던 창문에는 소녀 한 명이 탈 수 있을 작은 그네가 매달려있었다. 아직 치우지 않은 눈가루가 흩날리고 있을 뿐 멀쩡했다. 그녀는 그네의 안장을 품에 안고 바깥 천장에서 떼어내었다. 그리고 침대에 놓여있던 넓으면서 하얗고 푹신한 베개를 같이 챙겨서 엘사가 쓰던 눈송이 장식이 달린 문을 열었다.



"이 방이야. 저 언... 엄... 아가씨가 쓰고 있던 방 같았어."



방에 한때 안나 자신의 초상화가 빼곡하게 걸려있던 자리는 네모난 서리 자국만 남겨둔 채 쓸쓸히 비었다. 안나의 정체에게는 다행히게도, 멜리사는 그 벽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심근경색의 순간처럼 뻣뻣하게 굳는 심장과 멋대로 가빠지는 숨을 고르는 와중에 엘사를 이송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멜리사의 안색은 통증과 사무치는 한기에 창백해지고 있었다.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치료를 하기도 전에 힘을 잃고 있었다. 그네를 천장에 걸고 배게를 안장에 엮은 안나는 아까의 거만한 기색은 온데간데 없는 그 의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아... 흐아... 아냐 아냐 아니야. 내가 걸렸을 리가..."


"못 버티겠으면 그 온열등 출력을 세게 맞춰봐. 어차피 내 등은 못 쓰게 되었으니 필요한 연료는 다 내줄께."



안나는 외투를 열어 작은 석탄 조각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를 건내었다. 환자까지 던져 놓고 가슴을 부여잡던 멜리사는 주머니를 낚아채듯이 받아서 빛을 깜빡이기 시작하는 온열등의 탱크에 최대치까지 채웠다. 기계는 마라톤을 뛴 심장처럼 파르르 떨더니 사방으로 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멜리사의 가슴팍에는 얼음기가 녹아내리는 치이익 거리는 안도의 소리가 그녀의 한숨과 함께 새어나왔다. 흉부 전체를 덮어가던 서리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 그리고 아까 내가 등으로 내리친 건 정말 미안해. 오랜만에 찾은 여성의 눈이 회까닥 뒤집어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봐. 내가 너처럼 여자를 사랑... 그러니까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용모가 나도 반할 정도로 아름답고... 아니다. 내 말은, 이 환자분 안위만 신경써준다면 도시에 돌아가서 보상할께."


"연초."


"뭐?"


"외투 안주머니에 연초 좀 피워다 입에 물려줘요. 지금 폐가... 좀 차갑고 쓰리니까 온기를 좀 불어넣어야겠어요."


"아, 알았어. 이쪽인가... 여기 있네. 잠깐만. 이참에 난로도 지피자."



외투를 젖히자 속에 날이 선 수술용 칼과 핀셋, 크기별로 정리된 주사기, 그리고 접어서 보관할 수 있는 톱이 보였다. 그리고 네모난 곽이 보이는 왼쪽 안주머니에서 안나는 담배곽 하나를 꺼내들었다. 5 파운드화 지폐를 돌돌 말고 앞에 톱밥을 채워 넣어 필터로 쓰는 담배였다. 엘사의 송곳을 끼워 넣었던 왼쪽 가슴을 부여잡던 멜리사는 서서히 눈이 초점을 잃고 사방이 흐려지는 기운을 느꼈다. 안나가 어깨를 받쳐주고 얼음이 된 침대에 기대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엘사 옆에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나는 추운 방을 덥히기 위해 작은 풍경화 한 장을 조각 내서 벽난로에 넣었다. 두 팔을 구부리자마자 우지끈 부서지는 약한 액자였음에도, 안나는 사무치는 울음을 삭히며 속으로 흐느꼈다.



조각난 액자를 불쏘시개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서리로 뒤덮혀있던 장작더미를 녹이며 몸집을 불렸고,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공간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안나는 모닥불에 담뱃불을 붙이고, 정신이 혼미해진 멜리사에게 건내주었다. 흐으음... 하아... 칙칙한 담배연기를 들이쉰 멜리사는 그새 진정이 되었는지 눈은 다시 또렷해졌고 하얗게 질린 안색은 도로 붉게 돌아왔다.



"휴우... 아까 온열등 휘두르신 거, 이걸로 됐어요. 좀 진정을 해야..."


"정신 차렸으면 어서 수술부터 해! 누가 환잔지 모르겠다!"



멜리사의 안색이 돌아오자마자, 안나는 다시금 눈을 날카롭게 뜨며 엘사를 끌고 천장에 매달린 그네에 눕혔다. 등과 배에 솟아난 가시 때문에 침대를 쓸 수 없기에 내린 방법이었다. 그네 아래에는 고정을 위해 낮은 의자를 끼워넣었고, 두 줄을 붙들었다. 멜리사는 외투 안쪽에서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갈색 가죽상자와 작은 도구들을 꺼내서 얼음 침대에 정렬시켰다.



얼마나 자주 썼는지, 하나같이 성한 도구가 없었고 손잡이에 다는 가죽조각은 손가락 모양으로 깊게 파여있었다. 핀셋, 검붉은 핏자국이 남은 뼈톱, 이가 빠진 갈고리모양 칼, 충치를 뽑는데 쓰는 포셉, 갈색 유리 약병, 붕대와 바늘 등의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십자 문양이 그려진 담배갑과 인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인두는 표면이 널찍하지만 둥그스름해서, 옷에 지지는데에는 부족했다*. 곡선이 진 몸뚱이에 댄다면 모를까...


*(인두는 고문기구로 유명하지만, 원래 다리미의 일종이었음)


멜리사는 말조차 없이 얼어서 굳은 클로로포름이 든 갈색 유리병과 손수건 한 장을 안나에게 건내었고, 즉시 그녀는 타오르고 있는 난로 주변에 가져다 천천히 녹였다. 그리고 손수건에 약을 희미하게 묻힌 뒤 돌려주었다.



"저 인두도 좀 데워두세요. 붉게 달아오르지 않고, 김만 올라오는 정도로."



엘사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숨은 쌔액거리며 힘겹게 내쉬고 있었다. 이처럼 호흡이 가쁘면 전신에 진동이 돌 것이고 수술에 차질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외압에 짓눌린 목의 성대는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아서 통증을 쏟아내는 듯한 신음을 토해냈다. 목과 쇄골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엘사의 호흡을 최대한 진정시킨 멜리사는 마취제가 젖은 손수건을 엘사의 채도 낮은 보라빛 입술에 가져대 대었다. 가쁘게 쉬던 호흡은 잦아들었고, 탈진해서 잠든 사람처럼 고개를 뒤로 떨궜다.



그녀는 환자의 온몸에 솟아난 가시를 절단해보기로 했다. 저 침대에 눕혀서 나머지 수술을 보다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뼈까지 잘라낼 수 있는 묵직한 칼은 얼음 역시 한 번에 썰었다. 등에 빼곡히 솟아난 가시들은 밑동만 남았다. 안나는 바닥에 떨어진 얼음 파편들을 장갑 낀 손으로 집으려 다가갔지만, 멜리사는 손가락으로 모닥불에 걸린 집게를 가리키며 제지했다.



"이 '송곳병'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이 파편들은 한센병 환자의 피부만큼이나 위험할 거에요. 손으로 집지 마세요."


"으... 알겠어. 아픈 사람에게 못할 말이... 아니다."



안나는 제 언니를 위험덩어리로 취급하는 멜리사의 말투에 화가 목 끝까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내 언니를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줄 존재로 여기지 않는구나. 그저 핏기 묻은 뼈톱으로 환부를 뿌리째 썰어버려서 '치료'하고 병석에서 쫒아낼 환자로만 보는구나.



'저놈이 손댄 사람 중 수술 때문에 죽은 이는 분명 없었어... 그 뒤가 문제였지.'



등과 종아리에서 가시를 잘라낸 뒤 멜리사는 얼음장이 되어 쓸 수 없는 이불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유리 깨지는 요란한 소음이 점점 온기가 올라오는 방을 가득 메웠다. 엘사의 온몸에 돋아난 송곳은 동전처럼 작은 것과 가로로 비스듬한 것을 빼고는 모두 밑동만 남았다. 안나는 가시에 찔릴 걱정 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 멜리사는 가방에서 장갑을 한 쌍 더 꺼내더니, 이미 검은 장갑으로 가려진 손에 한 겹 더 씌웠다. 어깨와 가슴 사이에 걸린 순백의 드레스를 벗기기 위해서였다.



"대장님, 이 분 드레스를 벗겨야 작은 가시까지 뽑아낼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려면 흉부에 손을 대야 할테고, 나신을 봐야 할텐데..."


"좋을대로 해. 가슴 쳐다보느라 시간 보내지 말고."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멜리사는 천을 집더니 식탁보처럼 한번에 벗겨내었다. 원피스 구조였고, 환자의 몸은 그 타이트한 백색 드레스 틈에 손바닥을 무리없이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야위었기에 벗겨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의사는 찢어진 단면을 보더니 뒤늦게 이 옷에서 바느질 흔적이 하나도 없었음을 알아채고 말았다. 마법일까? 멜리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각난 옷을 온열등 바로 옆에 던져놓자, 얼음을 불에 녹일 때 들리는 치이익 수증기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멜리사는 수 차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마 환자의 옷은 본디 평범한 흰색 드레스였을 것이다. 청사병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공포감에 미쳐버린 나머지, 옷을 가벼운 천 드레스로 갈아입어버린 것이다. 아마 버려진 아렌델 어디엔가에 있는 따뜻한 피난처에는 엘사 본인이 입던 두툼한 외투와 장갑 한 쌍이 남아 있을테고. 옷에 서리가 가득 끼인 끝에 서리가 옷 그 자체가 되어서 바느질 흔적조차 메워버린 것이겠다. 그칠 줄 모르는 폭설이 방랑자의 발자국까지 집어삼켜 지우듯이. 멜리사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흉부에 달린 두 개의 탐스러운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모든 사람이 몸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두툼한 방한복 차림에, 햇빛을 막을 고글까지 쓰는, 숨막히는 인상 뿐인 세상. 모든 성적 매력이 거세당한 빙하기에서 얼음 침대에 누운 채 약기운에 곤히 잠든 환자를 볼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약기운에 취해 곤히 잠든 채 소곤소곤 숨을 뱉으며 가슴을 떠는 환자는.



멜리사는 최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부위에 눈길을 주지 않고 포셉*으로 송곳의 뿌리를 헤집었다. 더 내려갈 구석이 느껴지지 않을 때, 못을 장도리로 뽑듯이 뒤로 젖혀서 하얀 살같을 파고 든 얼음을 빼내었다. 상처부위를 지혈제 묻힌 솜으로 눌러서 피를 멎게 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의 기운이 없어지자 멜리사는 솜을 버리고 다음 송곳을 뽑았다.



가시가 뽑혀서 붉은 후유증이 남은 환부에 김이 올라오는 인두를 대었다. 살이 고온에 닿는 치이익 거리는 소음보다는, 열수를 얼음에 쏟을 때 나는 듯한 수증기 소리가 났다. 새하얗다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에서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놀랍게도 인두에 닿은 엘사의 살같은 더욱 붉게 달아오를 뿐, 화상은 입지 않았다. 단지 작열통만큼은 버틸 수 없었는지 목구멍 너머로 삭히던 신음이 점점 더 많이 새어나올 뿐.



그렇게 하나, 하나 뽑아갔지만 바닥을 울리는 청아한 얼음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배와 옆구리를 뽑아내고 무릎과 팔을 손 본 뒤, 지혈 상태를 확인하려고 복부에 시선을 옮기면 도로 작은 송곳이 솟아나있었다. 한 번 더 뽑아내어도 마찬가지였다. 무력화된 몸으로 주변 사람들을 멀리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분명 마취를 했는데도 엘사는 가위에 눌린 아이처럼 다시 숨이 가뻐졌다. 흉터 속에서 도로 가시가 돋아날 때 엘사는 눈썹에 짓누르듯이 힘을 주었다. 꾹꾹 눌러담은 목 너머에서 신음했다. 멜리사는 최대한 곪은 상처에 집중하며 환자를 우선시하려고 노력했지만, 눈 가장자리에 과호흡과 함께 파르르 떨리는 두 생명의 열매가 들어오자 끝내 스스로를 인정하고 말았다.


*치과에서 발치를 위해 쓰는 도구



이 엘사라는 여성에게서는 오랜만에 느껴졌다.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열기를. 송곳이 솟아난 허리와 옆구리부터 붉게 달아오른 가슴의 정점, 깊은 골이 파인 쇄골,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목과, 모든 아름다움이 정점에 이르는 얼굴까지. 환부만을 바라보던 시선은 끝내 엘사의 온몸을 보고 말았다.



멜리사는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하느님의 노고에 의문을 던졌다. 하느님께서 천하를 창조할 때, 아마 하루는 분명 이 보석을 만드는데 쓰셨을 것이라고. 사람 재주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자태였다. 육중한 빙하와 방한복에 익숙하던 눈이 그녀의 나신과 함께한 30여 분의 수술 속에서 제 갈길을 잊어버리고 맴돈다. 아래를 봐도, 욕정이, 위를 봐도 욕망이 피어 또 한 발자국 뒤로 갈 때도 변화가 와서 결국 수술용 포셉을 내려둘 수밖에 없었다. 툭.



*치과에서 발치를 위해 쓰는 도구



"뭐야. 수술 안 할 꺼야?"


"...못하겠어요. 저, 환자에게 반해버린 거 같아요. 뽑아내야 할 송곳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정말 가지가지한다. 니가 그러고도 의사야?! 이건 대장님 명령이다. 그 도구 잡고 이 송곳부터 뽑아."


"지금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못 합니다. 잠깐 방에 나가서 한 대 더 피우고 오겠어요. 환자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될까봐 우려스럽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이거 한 개비 줄테니까 10분만에 다 피우고 와. 난 내 나름대로 치료해볼테니까. 송곳 뽑는 건 못해도, 따스하게 해줄 수는 있어."


"네, 네 고마워요. 환자 끌어안지는 마세요. 병 옮아요."



대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멜리사는 담배를 물고 문을 닫고 나갔다. 안쪽으로는 서리가 거의 사라진 문 너머에서 불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멜리사가 시야에서 다시 사라지자 안나는 온몸을 꽁꽁 두르고 있던 코트와 온열등을 옷걸이에 매어두었다. 한결 가벼워진 몸은 검정색에 갈색 띠를 팔의 윤곽에 매단 여행복을 걸치고 있었다. 가을 밤의 낙엽처럼 은은한 분위기를 품은 옷이었다. 안나는 거추장스럽지 않은 팔과 장갑을 벗은 손으로 엘사에게 다가가 한결 쓰다듬었다.



"걱정 마. 내가 왔어(I got you)."



마취에 홀린 정신으로 온전히 들었을리는 만무했지만, 가슴에 본능만큼이나 서려있던 감정이 누그러지는 것이었을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벌벌 떨던 보라빛 눈꺼풀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인 입꼬리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혼미해지는 약기운 속에서도 희미하게 내지르던 신음은 사그라들었다. 비로소 완전한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아직 반사적인 정도로 움직일 수 있던 손발 끝은 오랜만에 느끼는 체온을 찰나만큼이라도 더 갈망하는지, 안나의 손길을 받아들인 채 손가락 마디를 안으로 저었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았다. 차갑던 그녀의 가슴에 기계심장이 만들어낸 온기가 전해진다. 쿵. 쿵. 웅. 웅. 숨은 잦아드나 박동 소리는 커져 간다. 하나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빠르게, 하나는 낡은 기관차처럼 박력있게. 그리고 둘 다 빠르게. 호흡까지 점점 동시에 내쉰다. 두 사람이 있는 방임에도 사람의 소리는 하나 뿐이었다.



"아... 아. 안ㄴ...ㅏ..."


"그래. 나야. 더 누군가를 다치게 할 까봐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난 언니를 사랑하고, 언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우린 다 방법을 찾았어.



진정한 사랑이 얼음을 녹인다. 그때... 심장이 얼어가는 순간에, 크리스토프를 뿌리치고... 언니를 조금만 빨리 떠올렸어도... 아니, 내가 언니를 위해 나쁜 왕자의 칼에 언니 대신 몸을 바칠 기력이 남아있었더라면... 다리만 얼어붙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빙하기조차 없던 일이 되지 않았을까. 안나는 눈물을 한 줄기 흘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끌어안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안돼!!!!!"



눈보라마저 얼어붙었던 7월의 아렌델의 차가운 공기 속을 한 소녀의 외침이 울렸다. 헛다리 집은 사랑이 가져온 포옹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삶을 포기해버린 두 다리의 관절이 먼저 굳어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언니를 위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검을 든 한스를 향해 뻣뻣한 다리로 달려가는 것뿐. 이러한 와중에도 벌벌 떨리면서라도 움직일 수 있는 두 손을, 안나는 원망했다.


마음과 같았으면 그 파렴치한의 검에 손을 뻗어 막아보고 싶었지만 찰나의 온기에 낭비한 시간은 달려갈 자유마저 앗아갔다.



그리고 제 언니를 지배하던 마법은, 속까지 얼어붙어 죽어가던 안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왕자의 칼을 얼려서 산산조각 내버렸다. 빙판에 쏟아진 쇳조각은 날카롭게 그녀를 비웃었다. 네놈이 없더라도 어차피 이 여자는 살았을 것이라며. 그제서야 겁이 난 왕자는 사색이 된 채 도망쳤다. 저런 줏대도 없는 녀석이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달려오던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동생을 보고만 여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원망어린 눈초리로 두 손을 물어뜯었다. 쪼개진 칼 파편 하나를 집어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왼손목을 그었다. 파스락. 또 칼이 조각났다. 동생으로부터 뒷걸음질친 그녀는 냉기를 머금기 시작한 원수같은 왼손을 제 가슴에 내리쳤다. 속에 든 물기와 기력을 눈물과 애통으로 쏟아 보내던 그녀의 몸은 심장에서 시작된 얼음의 뿌리를 받아들였고, 소원을 들어주었다. 더 이상 안나를 안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 이 죄인에게 타인의 온정을 받을 기회를 앗아가기를.



가슴에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송곳을 가지고서는 안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릴 수 없었다. 엘사는 애탄으로 지친 몸을 등돌리고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 폭풍 속으로 들어갔다. 제 여동생의 가슴 속에서 다시금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안나의 모든 냉기가 몸 밖으로 사라지고 빙판에 주저앉았을 무렵에, 그녀들은 혼자였다.



한 가지 착각 때문에, 다리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냉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엇갈렸고, 여기서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지?"



안나는 미소를 건네며 부드러운 담요를 배낭에서 꺼내어 엘사의 몸을 덮어주었다. 드디어 제 곁에 두게 된 언니를 쓰다듬으며 오금과 등을 받쳐 올렸다. 분명 키는 자기보다 조금 더 큰데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얀 머리를 면사포처럼 쓰고 눈을 감은 그 모습은 사랑 받는 신부의 형상이었다.




협곡 저편 북쪽에

우뚝 선 그녀가

모든 것을 지키고 있단다

여기 있구나, 아가야

그 곳에서 모든 것을 밝혀 줄 꺼야


닫혀있는 너의 마음을

열어 줄 따스한 마법의 손

모든 온기가 시작되는 곳 아래서

진실이 기다릴 거야


그 깊이 들어 가자꾸나

언제나 밝은 곳으로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다시 만날 거야


대지 저편 북쪽에

우뚝 선 그녀가

모든 것을 지키네

가자꾸나, 아가야

그림자가 없는 곳으로



머릿속을 더듬어 찾아낸 희미한 자장가를 안나는 읊었다. 어릴 적 기억에서 찾아낸 멜로디 속에서 그녀의 본심이 우러나왔다. 비밀도, 감출 곳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만 있다면. 따스한 자장가와 포옹 속에서, 김이 올라오는 인두로도 녹지 않던 남아있는 송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빛 속을 엘사의 등을 토닥이며 걸었다. 그녀들은 작은 태양이 가슴 속에 불을 지피는 기분을 느꼈다. 출력을 서서히 높이던 온열등과 난로가 만들어낸, 쓸쓸한 침실의 서리를 구석으로 밀어 넣는 원형의 공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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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비난 여론에도 뻔뻔하게 잘 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03 - -
1122379 [짧만화] 안메가 엘파 그렸던 거 찾았다 [6] ㅇㅇ(125.138) 03.02 281 14
1122356 [고찰] 엘사는 PTSD 진단기준에 해당할까? [14] ㅇㅇ(125.138) 03.01 247 13
1122316 엘사몬…아니 엘사선배 당신은 내 거야 [5] ㅇㅇ(125.138) 02.28 281 13
1122315 결혼해주세요 선배님!!!! [5] ㅇㅇ(125.138) 02.28 285 12
1122311 당신! 평민 주제에 이 아렌델 아카데미에 발을 들이다니! [5] ㅇㅇ(125.138) 02.28 220 11
1122308 호그와트 엘사도 엄청 말랑할 것 같아 [6] ㅇㅇ(125.138) 02.28 271 13
1122294 딪니 뉴굿즈 [5] ㅇㅇ(110.47) 02.27 114 10
1122290 사제 엘사? 아무튼 [7] ㅇㅇ(125.138) 02.27 236 16
1122280 안나 애인 뺏는 엘사 [7] 태정태세문단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6 270 20
1122257 연녕생 자매한테 집착 당하는 안나 보고 싶다 2 [8] ㅁㄴㅇ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5 278 19
1122196 [고통주의] 옴뇸뇸 여왕님은 이슬밖에 먹을 게 없어요 -2 [7] ㅇㅇ(121.166) 02.19 271 17
1122185 [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26 [7] ㅇㅇ(14.32) 02.19 200 18
1122153 트위터) 아미친개웃겨 [9] 마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6 326 12
1122134 심즈)엘산나 키스! [5] 설갤러(192.241) 02.14 292 14
1122126 심즈) 예쁘긴 한데..... [5] 마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4 253 11
1122119 [번역] 언니의 마법으로 죽어가는 백안나와 혐관집착찌통 노래 [6] ㅇㅇ(121.166) 02.13 291 14
1122103 족장엘사if(42) [5]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2 152 11
1122102 족장엘사84 [5]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2 149 10
1122091 [팬픽] Superposition (중첩) - 1 [5] 마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2 216 12
1122082 쌍둥이 엘사한테 집착 당하는 안나 보고 싶다 1 [7] ㅁㄴㅇ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1 296 18
1122079 짧썰)초딩 엘린이의 일기 [5] ㅇㅇ(121.180) 02.11 242 17
1122057 [그림]쑥맥의 여왕 [7]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10 278 18
1121975 그림)사랑은 열린 문♡ [5]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03 209 14
1121968 [번역] Stolen Ice 52 [5] 재키브라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03 167 18
1121955 아렌델 다녀왔다 [6] ㅇㅇ(118.235) 02.02 272 16
1121908 [약간 캐붕] 옴뇸뇸 여왕님은 이슬만 먹고 살아요 -1- [8] ㅇㅇ(219.249) 01.30 361 17
1121893 [엘공위크]정략결혼 같이 어쩔 수 없이 만나는거 보고싶다 [6]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29 333 16
1121884 [낛]안여왕으로 상상 [6]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28 279 17
1121859 엘사 너무 귀여움 [5] 설갤러(218.150) 01.26 356 14
1121833 [엘공위크]스트레스 극에 달했을 때의 엘사 [7]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24 444 20
1121783 냅다 엘공위크 열기 [5] ㅇㅇ(110.47) 01.21 259 13
1121710 안나도 엘사가 대의를 위해 희생한 거니까 극복했지 [5] 설갤러(218.150) 01.17 381 15
1121698 10주년그림) 사랑은 영원하다 [5]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16 224 17
1121674 ㄱㅇ) 대충 봐줘! [10] ㅇㅇ(110.47) 01.15 345 18
1121671 햄쥐의 호흡 제 1형 [7]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14 249 13
1121642 가족이 교통사고 당해 혼자 남은 엘사 [7]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12 353 14
1121632 [번역] Forces of Nature 팟캐스트 Ep. 8 [7] 설갤러(218.150) 01.11 324 18
1121631 토끼수인엘사×00수인안나 자영업 겸 그림 [5] 엘산나픽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11 352 18
1121510 굿즈는 역시 일본 [9]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5 327 11
1121509 엘사를 보면 굉장히 이타적인 캐릭터거든? [6] 설갤러(221.143) 01.05 335 16
1121354 2023년 마무리 자영업 및 Q&A (스압) [11] 엘산나픽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9 429 15
1121325 아 ㅋㅋㅋㅋㅋㅋㅋ 좀 웃긴 거 생각났네 [5] 태정태세문단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8 339 15
태양이 전등 아래서 빛났다 -9- [5] 설갤러(121.166) 23.12.26 195 21
1121282 굿즈자랑)이건아무도없을걸!! [5] 재키브라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5 311 11
1121281 굿즈자랑) 이상한 자작 굿즈들 [8]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5 278 11
1121276 [굿즈자랑]에 진심인 편 [6] 설갤러(175.205) 23.12.25 213 11
1121275 그림)산타 엘사×루돌프 안나 [4]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5 239 13
1121273 굿즈자랑) 1등으로 참여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5 165 11
1121272 오 이번에 디즈니 100주년 단편 유툽 올라왔다 [5]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3.12.25 220 12
1121266 심심한데 굿즈자랑 하는거 어때? [6] ㅇㅇ(211.246) 23.12.25 13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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