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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26

ㅇㅇ(14.32) 2024.02.19 01:10:02
조회 199 추천 18 댓글 7

“언제부터요?!”


그야 물론 출입국 게이트를 통과한 다음부터라고 일러줘야 할지 엘사가 망설이던 중, 안나의 입에서는 재차 대왕 뿔피리와도 같은 발성이 뿜어져 나왔다.


“설마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요?!”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대강은...... 그런데 조금만 목소릴 낮춰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럼 나만 몰랐단 소리잖아?! 엘사의 미력한 간원에도 안나의 볼륨은 점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는 무슨 그런 말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니?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저-저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줄 알고......”

“들은 적 없어요! 애시당초 그렇게 유창하게, 아니- 아닌가? 그래서 가끔 말귀를...... 잠깐,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여태 그런 말 없다가 뜬금없이 이국 출신이라 하면 어떻게 받아들이란 거예요?”


하지만 원작도 그랬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다, 이거 거짓말이죠?!”


그쵸? 맨날 던지던 시시콜콜한 농담 중 하나죠? 급기야 머리를 부여 맨 채 현실을 부정하는 안나를 지켜보며 엘사는 물증만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라 판단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코코아 잔을 협탁 위에 내려두고서, 벽장 금고 안에 꽁꽁 감춰두었던 여권을 꺼내 안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서 한 마디 덧붙였다. 부디 찢지는 말아주세요.


“이미 한 번 재발급 받은 거라서...... 듣고 있는 거죠?”

“......”


설마 할 얘기란 게 이런 거였어? 빼도 박도 못 할 증거가 눈앞에 펼쳐지자 안나의 다리는 서서히 힘이 풀려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졸지에 성별의 문턱을 넘어 국경의 관문까지 넘어야 하는 이 판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 잠깐, 당장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그때서야 안나는 직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가 생각이 미쳤다. 아니, 엘사!


“귀국을 한다구요?!”

“저기, 당장 떠난다는 게 아니고.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처음부터 다시 설명할 테니 부디 진정......”

“진정이 되겠어, 너 같으면?!”


도리 찾자고 나설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설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비원이 담겨 있을 줄은! 패닉 일보직전인 안나의 손아귀에서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듯 파들거리는 여권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엘사는 다시금 자초지종을 밝혔다. 그러니까, 간략하게 말해서......


“처음에는 이 땅에 학위를 위해 발을 들였다가, 뭐, 그간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요. 현재로썬 마음을 접고,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이 곳에 신세를......”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시큰거리는 콧날을 움켜쥐며 안나가 쏟아지는 충격 발언을 멈춰 세웠다. 그보다 더욱 꺼림칙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제 귀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어쩌구 조항들을 단 하나라도 어기면 그 길로 출국 절차를 밟겠다고 한 것 같은데요.”

“그랬죠. 하지만 저로서도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내 말 안 끝났어요. 그리고 제 눈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개중에 무척이나 심란한 문구도 끼어있던 것 같은데요.”

“......그랬나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저한테 오늘 하려던 말이란 게......”


안나는 내심 ‘만에 하나’라는 기대가 담긴 룰렛판을 돌렸으나, 뒤이어 엘사가 던진 말이 꽂힌 곳은......


“그게...... 전에 있던 일들은 뒤로 하고, 앞으로도 친구로 지내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 기회에’ 도 아닌 오로지 ‘꽝’이었다. 


친구!


문제의 일반명사로 인해 안나의 지병인 외상후친구스트레스증후군이 재발한 사이, 엘사는 몸소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도 재현하려는지 지뢰밭 한복판을 용감무쌍히 누비는 만행을 이어갔다. 


“사실 지난번에는 금기를 넘었을 때 저도 난감했지만, 어찌 보면 ‘작은 실수’로부터 비롯된 일이니까 예외 상황으로 두고- 아아, 물론 술 얘기예요. 하지만 그게 물이 아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무심코 입에 댔더니 그만......”


그러니 엘사는 혹시라도 간밤의 제 행동이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면 미안했다고, 연말특선 망언 모음집에 방점을 찍고 끝내려했으나 직후 반사적으로 내지른 안나의 사자후에 사죄는 맥없이 묻혔다.


“오해?!”


그럼 어제 있던 일이 죄다 진정한 우★정의 행위라도 된다는 말인가? 기대와는 540도 정도 다른 고백이 할퀴고 지나간 여파로, 다시금 논리왕의 자아에 눈을 뜬 안나가 쟁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실수- 그래요, 알겠어. 문제의 원인 제공도 내가 했으니까, 알코올 부분은 다 좋아. 거기까지도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자...... 그런데 술 들이부은 보답을 입술 들이대면서 갚은 게 바로 누구시더라!”

“그게 말이죠, 음, 우리가 했던 키스는...... (스스로도 겸연스러운지, 양 손 검지 끝을 맞부딪히며 엘사가 어물거렸다) 친구 사이에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럼 나도 친구 없어!”


이 나라에서는 불법(?)이거든, 이 외국인아! 두 눈을 부릅뜬 채 안나가 소리쳤다. 거기다 또! 역시나 맹점을 발견한 안나가 반론을 이어갔다.


“너는 친구끼리 애무하니!?”

“알-알았어요. 친구사이가 껄끄러우면 자매관계는 어떠세요? 모처럼 여사님께서도 진지하게 검토 중이신 것 같은데......”

“뭘 ‘어때요’ 같은 소리하네, 이 변태야!”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망발뿐인지? 성별에 국경에 이제는 근친의 벽까지 손수 지어올리려 하는 엘사의 폐쇄적이고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던 안나가 당연한 의문을 표했다. 애초에 우리 관계가 진전될 수 없는 이유가 고작 종이 한 장에 달렸다는 게 무슨 뜻이야?


“대체 이 계명들은 어디서부터 떨어졌길래 떠받들고 살아야하는 건데요? 아~ 내가 맞춰볼까, 시나이 산?”

“일반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아요, 그렇지만...... 지도교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곧 입헌군주제를 용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걸요!”

“지도교수? 그러니까, 이게 다 당신 교수께서 내리신 어명이다? 혹시 대학원이 아니라 수도원에 몸담았던 건지 기억을 되짚어 볼 때가 아닐까요?”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학비는 낭비할 필요 없었을 테니. 엘사가 씁쓸한 심정을 입에 머금었다. 그러나 회한에 잠겨있을 시간도 잠시, 다시금 안나가 상대를 링 위로 끄집어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죄다 무슨 상관이람? 진작 그만뒀다면서요! 설마 연구실 바깥에도 적용되는 치외법권은 아니겠죠?”

“제, 제가 자치적으로 도입한 거예요. 갈등이 일어날 상황을 될 수 있으면 피하고자......”

“저기요, 학생.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게 갈등이 아니면 대체 뭐 같은데요?”

“‘될 수 있으면’ 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대화를 하러 여기 있는 거고......”

“여태까진 대화가 아니라 통보였잖아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안나의 언성이 높아졌고, 덩달아 엘사의 목소리 톤도 한 단계 올라갔다.


“전 우리가 같은 생각인 줄 알았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그나저나 어딜 봐서?”

“그야 이전 날에,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시길래.......”

“그 땐 저도 입장이 곤란한 처지였으니까, 아잇, 이야기가 자꾸 딴 데로 새네, 중요한 건 그 다음 날 벌어진 일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이 자릴 마련한 거라구요!”


어차피 여기서 더 물러날 곳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으니 확실하게 말할게요. 결심을 굳힌 안나가 이 밤의 본질로 돌입했다.


“난 당신과 친구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길 원하고,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연인 사이란 뜻이에요!”

“하, 하지만 전 이 나라에 언제까지 남아있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신세라......”

“내가 당신 여자친구인지 아닌지 그것만 말 해!”


엘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안나가 재빨리 덧붙였다.


“띄어쓰기 안 한 걸로!”


그러자 다시 합, 하고 다물었다.


“......진심이에요?”

“......”

“하, 하하.”


침묵이란 회답을 받은 안나가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쓸데없는 말은 있는 대로 꺼내서 괴롭히더니 정작 외국인이란 사실은 뻐끔거리지도 않다가, 아무리 술김이었다지만 셀프 벌칙 게임도 아니로소니 키스는 무슨 연유로 본인 쪽에서 시작한데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당 못할 일은 고작 148mm x 105mm 사이즈에 서린 고행의 메시지였다. 아니, 다른 항목은 다 그렇다 치고, 연애 금지...... 그게 대체 왜 필요한데?


물론 마지막은 마을 숙녀분들의 능동-공격적인 구애에 들볶이다 못한 엘사가 끼워 넣은 중립 조항이었지만, 아직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안나로선 제시된 단서를 그러모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래도 교수란 작자가 연구 외엔 한 눈 팔지 못하도록 타락한 대학원생들의 영혼을 갈아 넣어 저 종이쪼가리에 저주를 내린 것이 틀림없어! 


그리고는 엘사의 곁을 비껴지나가며 쥐고 있던 여권을 등 뒤로 휑하니 팽개쳤다. 안 돼! 혹여나 바닥에 닿으면 폭발할까, 온 몸을 동원해 아슬아슬한 찰나로 받아낸 엘사가 당황한 듯이 물었다.


“어, 어디 가세요?”

“호크룩스 부수러.”

“이 방에 그런 게 있어요?”


어쩐지 집세가 저렴하더라니, 따위를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피는 엘사에게 안나가 속으로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는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액자를 해체하더니 내용물을 꽉꽉 구겨 그대로 입안에 쑤셔 넣었다. 뭐하는 거예요, 지금!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엘사가 외쳤다.


“설마 키세스도 종이줄까지 먹어요?!”

“그으으! (그래, 혀로 매듭짓는 것도 보여줄까!)”

“그렇다고 종이만 골라먹으면 어떡해, 탈나니까 당장 뱉어!”


‘퉤’해, ‘퉤’! 엘사가 양 손을 모아 안나의 턱가로 가져다 댔지만, 돌아오는 건 알아듣기 힘든 음절(아마도 욕)뿐이었다. 결국 꿋꿋이 입 속 내용물을 전부 씹어 삼킨 안나가 외쳤다. 자, 봤죠! 


“이제 좀 정신이 드시려나?”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


텅 빈 액자를 망연히 바라보며 엘사가 말했다. 아니요! 안나가 검지로 엘사의 어깨를 꾹꾹 누르며 문장을 보완했다.


“당신이 사악한 주박에서 풀려났는지 묻는 거예요!”

“뭐? 지금 제가 세뇌라도 된 줄 알고 이런... 개인기를 보여주신 건가요?”

“아니면요?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그것 외엔 없잖아요!”

“안나......”


마치 떼쓰는 아이를 착잡하게 바라보는 말투였다. 엘사는 한 손 위에 턱을 괴고, 본인의 뒤숭숭한 속사정을 어떻게 하면 원만히 납득시키면 좋을지 고민한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들어보세요, 제가 저 카드를 제 안에서 다시 꺼내들 때엔- 물론, 다소 심신미약인 상태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모두 제 의지였어요. 모처럼 되찾은 평온한 일상이 여기서도 무너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평온한 일상이라니......”


핑계도 참 가지가지다, 라고 안나가 돌려주려던 찰나, 뒤늦게 화자의 숨은 발언 의도가 대뇌로 전송되었다. 잠깐만, 그 소리는...... 나랑 있으면 유유자적한 삶이 무너져 내린다 이 말인가? 그러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즉각 떠올랐다. 


설마 나로 인해 각종 사건에 시달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그게 사귀지 못할 이유일 수...... 있잖아?


과거의 업보들과 마주한 대죄인이 제 발 저린 듯이 굳어있자, 좋지 않은 징조라고 여겼는지 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상대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학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도망쳐 나온 의미가...... 안나?”

“그래서 결론은 제가 차-차였단 거네요?”


안나가 떨리는 입술로 현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아, 망했다. 그러자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의 눈물샘이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했음을 깨달은 엘사의 말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사귀지 않고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보니까, 그래, 맞죠? 자, 다시 생각해보세요, 어제 그 일만 일어나기 전에도 저희 충분히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하지만 소란을 몰고 다니는 저하고 사귀느니 차라리 이 나라를 뜨고 만다면서요!”

“뭐,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


누구 내 말 들은 사람? 억울했던 엘사가 무심결에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으나, 요르겐비요르겐경조차도 단추눈으로 주인을 흘길 뿐이었다. 너마저 나한테 이러기야? 다행히 솟아날 구멍은 있는지, 시선을 살짝 옆으로 옮기자 좀 전의 머그잔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다! 울음보 붕괴를 막을 해결책을 손에 넣은 엘사는 긴급 초콜릿 투여를 시도했다.


“자, 잠깐만요. 코코아부터 마시고 우리 차분하게 얘기하는 건 어떨까? 조금만 있어 봐요, 금방 다시 데워올-”

“필요 없으니까 치워!”

“네에?!”


초콜릿이 통하지 않다니?! 전무후무한 대사태를 앞에 둔 한 떨기 작은 영혼이 잘못 들었기만을 바라며 재차 의중을 떠보았다.


“깎지 않고 일곱 스푼이나 넣은 건데도?”

“치우라고 했잖아! 몇 통을 넣던지 간에 무슨 상관이에요, 넉넉한 인심 발휘할거면 차라리 나를...... 아, 됐어! 어쨌거나 차인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잖아요!”

“차, 찬 게 아니라니까, 난 그냥, 여태처럼 부담 없이 우리가 서로 도와가며 힘들 때는 서로 기댈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럼 당신 말마따나 우리가 그런 식의 애틋한 친구라면, 대수롭지 않다던 키스 역시 가능하고도 남겠죠?”


안나가 사무친 원망을 토로하듯 잇새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는 어디 배짱 있으면 해보시지, 라는 듯이 서서히 거리를 메웠다. 엘사는 안나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그렁그렁한 눈물을 지워주고 싶은 유혹에 흔들렸지만, 이조차 남겨두어선 안 될 마음이란 것을 깨닫고선 힘주어 말했다.


“못 해요!”

“그거 봐!”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안나가 원성을 쏟아냈다.


“잘 꾸며봤자 차인 거 맞지!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가 뭔데!”


종이맛 키스는 사양이야! ......라고 돌려주려던 엘사였으나, 눈물에 적잖이 동요했던지라 그만 컨씰돈삘(이탤릭체) 선택지를 누르고야 말았다. 


“거기서 멈출 자신이 없으니까!”


새어나온 본심에 스스로조차 놀란 엘사가 혀끝을 빼물었다. 그러자 승산을 내다본 안나는 곧장 돌격을 감행했고,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던지라 엘사는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물체를 치켜들고는 그 뒤로 얼굴을 숨겼다. 목표물을 잃은 안나의 입술은 그대로 머그잔 블로킹에 막혔고, 전달된 힘은운동량보존으로인해잔속코코아로이동되어액체는그대로솟구쳐올라안나의안면과엘사의손을적시며또한점성계수가높았던특징상유체의흐름은(후략)...... 


아, 진짜로 망했다. 본인이 초래한 물리현상에 당혹을 금치 못한 나머지, 현실과 자아의 연결이 분리되어 그저 눈앞의 장면을 동공에 담던 엘사를 깨운 것은 안나의 한 맺힌 이의 제기였다.


“......베개로 막을 수도 있었잖아!”


옆에 널린 게 침구였는데! 눈가에 스며든 코코아를 닦아내며 안나가 울분을 터트렸다. 미안, 이-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급한 대로 엘사는 소매를 끌어올려 안나의 턱을 부여잡고 뚝뚝 흘러내리는 초콜릿을 여러 번에 훔쳐냈다. 


에퉤, 이거 뭐야, 보풀? 계속해서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실자락을 낼름 뱉어내던 안나는, 문득 상대의 입술은커녕 스웨터 자락하고나 얼굴 부비고 있는 본인의 서글픈 신세를 자각하곤 끝내 레드카드를 치켜들었다. 


“됐어, 이제 끝이야!”


안나는 엘사의 손을 뿌리쳐 이 공간을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안 돼, 기다려! 엘사가 곧장 반목의 싹을 붙들려했으나, 양손이 찐득찐득한 상태임을 깨닫고 대신 허공에 ‘항복’ 자세로 펼쳐둔 채로 물었다.


“이, 이번에는 어디 가세요?”

“가출한다.”

“뭐... 다른 사람 집에서요?”

“너도 어제 했잖아?”


나라고 왜 못해! 합당한 의문이 엘사에게 지난밤의 행적을 되새겨주었다. 자, 잠깐, 흥분한 건 알지만 다시 생각해보세요! 어느새 현관까지 도착해 문고리를 움켜쥐려던 안나의 앞을 막아서며 엘사가 외쳤다.


“이 밤에 어떻게 가려고!”

“하,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설마 뛰어가려고요? 난 취하기라도 했었지, 지금 밖이 얼마나 추운지 아세요?”


여기도 만만찮게 춥거든! 안나가 으르릉대며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그렇잖아도 네가 그리 애지중지하는 택시 부를 참이야, 머릿속으로 대꾸하던 안나는 대기화면을 켜자마자 숨을 삼켰다. 엄마로부터 온 메시지 2건이 수신 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구!


설마 내 몸에 녹음기라도 붙여놓은 건 아니시겠지? 충분하고도 남는 계획실행력을 떠올린 안나는 황급히 옷가지를 더듬으며 ‘긴급재난소식’을 확인했다.


[내가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은 제대로 만끽하고 있니?]


아니요! 안나가 속으로 답장했다. 반품 접수 버튼이 있었다면 저 인간 코에 대고 눌러버렸을 거예요! 그나마 파국의 현장이 실시간 중계되고 있는 상황은 피한 모양인지, 그 사실에 조금은 안도하며 안나가 이어 다음 메시지를 읽었다. ‘아까는... 욕... 구에......’


[아까는 욕구에 눈이 뒤집혀 못 들은 척 했을 테니, 잡아떼지 못하도록 증거를 남겨둔다. 어쨌거나 아침까지는 무조건 돌아오렴. 아직 우리끼리만 나눌 얘기가 있잖아, 말괄량이 공주님?]


맞다! 안나는 삽시간에 다섯 손가락을 거뜬히 채우고도 남는 죄목(※예: 금전 갈등 및 기망 행위)들을 떠올리고서, 이대로라면 성스러운 축일이 본인의 기일이 될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수, 수신 회송 기능은 없을까, 이거? 절박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눌러보던 중, 명랑한 차임과 함께 화면이 ‘메아리효과’로 두둥실 채워졌다.


[읽었네? :)]


악!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연출의 여파로, 안나의 손아귀에서 핸드폰이 튕겨 날아가 곧장 불효자의 발등으로 안착했다. 다시금 외마디 비명이 비져나왔다. 안나는 고꾸라져 신음했다. 발도 골치도 마음도 다 아파! 치명타를 입은 곳은 세 군데이건만, 보듬을 손이 두 개뿐이란 사실이 그녀를 더욱 설움 속에 몰아넣었다.


“저기, 안나, 다시 말하지만......”


갑자기 핸드폰에 쏘이기라도 한 걸까 걱정스레 지켜보던 엘사가 입을 떼었다.


“자고 갈 거죠, 응?”


차라리 이대로 현관 앞에 쓰러진 채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며, 성냥팔이 소녀가 말했다. 


“......갈아입을 옷이나 가져다주세요.”



*



엘사는 잠들 준비를 마쳤음에도 통 눈을 붙이지 못했다. 방 한 켠으로부터 뒤척이는 소리가 부단히도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길바닥에서도 쿨쿨 자던 분이 이 시각까지도 깨어있다니, 조금은 죄책감을 느끼며 엘사가 쉬잇, 하고 말을 붙였다. 저기, 안나?


“뭐하고 있어요?”

“......자는데요.”

“......자면서 대답은 어떻게 해요?”

“......잠꼬대하는 건데요.”


빈틈없는 논리에도 굴하지 않고 엘사가 꿋꿋이 화해의 잔을 권유했다. 


“잠이 안 오면 코코아라도 다시 만들어 줄까요?”


이걸 진짜...... 안나는 ‘네가 나한테 다섯 가지 엿을 선사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꿈나라 입국 심사 마치고 면세점 구경 중이었을 거야’라는 말은 가슴 속에 묻어두고, 대신 살기 짙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잠투정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눈 닫고 입 감고 주무세요.”


그래, 눈이랑 입이 막혔으니 이제 귀가 남았군. 묘수를 떠올린 엘사는 잠자코 숙면환경이나 조성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밖으로 손을 뻗어 엘사가 음악을 재생했고, 곧이어 쇼스X코비치 제5번 교향곡 3악장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30초도 지나지 않아 더는 못 참겠다, 라는 듯이 안나가 머리끝까지 싸맨 이불을 헤쳐 나왔다.


“나보고 이런 우울한 노래를 들으면서 자라는 거예요?”


울다 지쳐 자란 거야, 뭐야! 더할 나위 없는 선곡 센스에 안나가 클레임을 보냈지만, 응대는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되도록 다음 악장 시작하기 전에 주무시는 편이......”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던 중, 바이올린 선율 사이로 간간히 노이즈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엘사가 슬며시 눈을 뜨자 익숙한 실루엣이 시야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점점 졸음이 달아남과 동시에, 시선을 위로 올리니 어렴풋이 찌푸려진 미간과 옆구리에 낀 베개가 눈에 비쳤다. 머릿속에서 ‘베개’, ‘자는 사람’, ‘질식사’ 등의 퍼즐 조각이 둥실거리자마자 엘사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끌게, 끌게!” 


그러나 갈등 요소가 해결되었음에도 민원객은 물러나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엘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히 여쭈었다.


“이-이 먼 곳까지는 어떤 일로 방문해주셨을까요?”

“한밤중에 누가 계속 말동무를 찾으시기에.”

“그게... 방금 모집 기간이 마감되었나 봐요.”

“아쉽네요, 그럼 좀 비켜주시겠어요?”

“네? 두 문장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 거죠?”

“옆으로 구르라고.”


엘사는 한 번 더 ‘네?’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손수 시범을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자코 몸을 옮겼다. 이번에는 무슨 ‘잠투정’을 부리시려나, 모로 누운 채 걱정하던 엘사의 몸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네?


좋지 않은 예감에 곧장 몸을 돌린 엘사는 침대 한 구석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이젠 이불 속마저 파고드는 안나를 맞닥뜨리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니...! 점점 좁혀지는 퍼스널 스페이스에 당황한 엘사가 즉각 항의를 보내려했지만, ‘뭐가 잘못 되었냐’는 듯이 가늘게 뜬 눈을 대하고는 어투를 누그러뜨렸다.


“저, 저기, 잠결에 자리를 헷갈리신 것 같은데......”

“좀 전에 ‘양보’해주셨잖아요?”


얘가 기어이 나를 잡아먹으러 온 건가? 엘사가 끙, 소리를 내며 앓았다.


“침대는 그렇다 쳐도 제 이불까지 허락한 적은 없어요!”

“실례, 겨울 이불이 워낙 무거운지라.”

“들출 힘은 따로 남겨두셨나 보죠?”

“말이 왜 이렇게 많지? 정 그러시면 저번에 부모님 댁에서 내 침대 기웃거렸던 건이랑 서로 퉁쳐요.”

“기웃......” 


나는 그때 ‘퇴근’하던 중이었어! 다시 생각해도 억울했는지, 엘사가 툴툴거렸다.


“‘퉁’이 맞나요? 눈탱이 맞는 게 아니고요?”

“맞을래, 그냥 잘래?”

“그럼요, 너부터 잠들면 기꺼이.”

“아, 그럼 어디 먼저 재워 보시든가요. 저도 아침부터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일심재판을 버텨내려면 1초라도 더 눈 붙이는 편이 이득이에요.”

“코코아도 싫어, 음악도 싫어. 바라시는 게 뭔데요, 공주님?”

“꼭 그 두 가지만 고집해야겠어요?”


먼젓번 시도를 떠올리니 다시금 열이 받았는지, 안나가 이를 악문 채 대꾸했다.


“아니면 동화라도 읽어드려요? 남의 침대에 무단으로 들어온 기념으로 ‘곰 세 마리’는 어때요?”

“아 네, 물론이죠,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현재 시각 새벽 4시, 두 사람의 의식은 렘수면과 각성 사이 그 어딘가를 오갔다.


“......혹시 제가 잠깐 졸았나요?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 거죠?”

“불만이라면 지금까지 이 방법으로 절 재우시려하는 우리 엄마에게로 접수해주세요.”

“하하, 농담이겠지, 설마 독립한 성인을......”

“음......”

“......성인이겠죠, 제발?”


본인이 말하고서도 멋쩍은 듯,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엘사의 얼굴에서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지금까지 저지른 일만으로도 당국에 체포될 것이란 우려를 표정으로부터 읽어냈는지 안나가 되레 성을 냈다.


“나도 내가 이 나이까지 사춘기를 못 끝낸 사실이 충분히 유감이에요!”

“과연 사춘기까지나 갔을까......”

“뭐라고 했어요?”

“글쎄, 제 잠도 깨워줘서 어지간히 고맙다고 했어요.”

“고마운 줄 알았으면 이제 순순히 협조 좀 해주시겠어요?”

“무슨 협조요? 설마 진짜 읽어달라는 말은 아니죠?”

“동화는 됐으니까!”

“그러면?”


대답대신 안나는 등을 돌아눕고서, 팔을 끌어와 자신의 몸 앞으로 가져왔다. 사실 나는 아까 베개에 맞아 기절했고 여기는 내 꿈속이 아닐까? 엘사는 스스로에게 닥친 미션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있다, “이상한 데 만지면 죽는다.”는 경고에 제정신이 복귀했다.


“왜...... 왜 당신 부모님이 오냐오냐 키우신 대가를 제가 대신 지불해야하는 거죠?”

“절 날밤 지새우게 만든 사연이 다 누구로부터 왔을 것 같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대체 어떻게 구워삶을 작정이야, 또?”

“어떤 작정이냐니, 그 쪽이 나랑 지지고 볶을 마음 없대서 친히 전연령 해결책으로 안내해드렸잖아요!”

“아, 토닥이기만 해주면 얌전히 주무시겠다고요? 네가?”

“......아마도?”


짧은 침묵이 흐르고, 엘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냥 내가 간이침대에서 잘게,”

“뭐, 안 돼요, 춥잖아!”

“얼어 죽진 않으니까 팔 좀 놔줄래요? 나름 제 밥줄인지라......”

“내가 춥다구요!”


캬악, 안나는 윗니를 드러낸 채 위협을 시도했다. ‘널 오늘의 치악력 테스트 피험자로 임명해주겠어’라고 경고하는 모습에 엘사는 겁을 먹는 것도 잠시, 상대의 하악질로부터 이 침대습격사건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꼈지만 얘는 역시, 사람 말 할 줄 아는 고양이인 게 틀림없어!


깨닫고 나니 엘사의 안에서는 오늘 밤의 의문이 차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래, 이러면 다짜고짜 자는 사람 밀어내고 ‘나를 만지라옹’을 시도하는 것도 모두 설명이 돼! 그렇게 확신을 얻은 엘사는 다시금 몸을 뉘이며 이어질 사상 최대 담백한 스킨십을 도모했다. 맞아, 단순히 고양이일 뿐이라면 이렇게 긴장할 필요도 없잖아? 


“좋아, 내가 졌어.”

“그렇게 나와야지.”

“바라시던 대로 ‘쓰담쓰담’ 해드릴 테니 돌아누우세요.”

“......가 아니라, 뭐라고요?”


제가 주문한 건 ‘토닥토닥’인데요, 사장님? 요청사항이 잘못 입력되었음을 인지한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불행히도 엘사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디 보자, 고양이들은 어딜 만져줘야 좋아하더라...... 배?


허나 그건 강아지였다는 걸 떠올리자마자 엘사의 팔에는 송곳니가 박혔다. 아야야야, 오답자의 신음에는 개의치 않은 채 안나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오, 옷 위로 만져야죠!”


큰일 날 사람이야! 흥분한 안나가 꽥꽥 항의를 보냈다. 치한! 비매너! 수족냉증!(?)


“미-미안, 착각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착각? 대체 누구랑 착각했길래, 이 난봉꾼아?”

“아니......”


애초에 종이 다르다고 변명하려던 엘사였으나, 이 또한 오해를 쌓는 초석이 되리라 짐작하고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가만 보니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이거저거별거 다 하나 봐?”

“우리 그냥 눈 감고 ‘누가 빨리 자나’ 시합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

“네 침대에 누운 모든 여자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니?”


제발 그만 떠들고 자자! 말로는 안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엘사가 양손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조차 패인이었다. 안나는 눈을 덮은 손가락을 깨물어드리는 식으로 친절한 안대 서비스에 보답했다. 아얏!


“또 물었어, 이 야생... 고양이!”

“난 분명 토닥이라고만 했어요!”

“차라리 만져도 되는 부위를 알려주세요, 그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알려주면 뭐해, 어차피 맨살로 파고드는데!”


나도 문제만 일으키는 이 매직 핸드가 저주스러워, 엘사가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대답했다.


“맹세하는데 이번에는 진짜, 진짜 정신 차릴게요. 그러니까 더는 안 문다고 약속해주실래요?”

“자기방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안다면.”


나름 긍정의 대답을 얻은 엘사는, 오른손에 모든 영혼을 뺀 채로 안나의 어깨 부근을 툭툭 두들겼다. 착하지, 어서 자자~


과연 몇 분이나 이어졌을까? 이번에는 힘을 너무 빼버렸는지, 얼마 못가 멈춰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안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니가 자면 어떡해! 안나의 송곳니가 다시금 번뜩였다. 아파! 또다시 물린 손을 감싸 쥐며 엘사가 울먹였다.


“안 문다며!”

“모르지, 주무시는 동안 그 쪽 손등이 제 입 속으로 굴러들어왔나 보죠.”

“저기,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못 주무시는 거예요? 기껏 요구에 맞춰드렸건만!”

“......성의가 부족하잖아요!”


이번에는 성의랜다, 엘사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만지랬다, 만지지 말랬다......”

“방금같이 두들기면 누군들 잠이 오겠어요? 착각했다는 게 혹시 젬베야?”

“아님 잠들 성의가 부족한 걸 수도 있죠. 따라해 봐요, 저처럼 양손을 가슴에 얹고 차분히......”

“뭐, 그럼 이게 내 문제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쓰다듬는 쪽으로 갔으면 진작 성공했을지 누가 알겠어......”

“하, 기어이 또 저지르시겠다?”

“기대를 저버려 미안한데, 저는 이미 틀린 것 같아요......” 

“무슨, 설마 졸고 있는 건 아니죠!”


이 배신자! 불안감을 느낀 안나가 몸을 돌리자 역시나 두 눈은 영업종료라는 듯이 꾹 닫혀있었다.


“안 돼, 치사하게 먼저 자지 마!”

“파자마 파티는 이만 끝이야......”

“시작한 적도 없어요!”

“하... 고양이는 야행성이라더니 정말......”

“그나저나 왜 아까부터 고양이 타령이에요, 뜬금없이!”

“하지만 낮에 자는 모습도 딱히 본적이 없는데......”

“설마 잠꼬대 중인가? 아니야,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하늘이......” 

“우리 불면증 야옹씨는 어딜 만져야 곱게 주무시려나......”

“야옹이?!”


소름 돋는 애칭(?)에 경악한 반응은 뒤로 한 채, 엘사는 설렁설렁 머릿속 잡지식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고양이가 좋아하는 스킨십’. 1번, ‘궁디팡팡’...... 이건 못 본 거로 치자.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생존본능은 무뎌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어 다음 항목을 읽어나갔다. 2번, ‘턱 어루만지기’, 그래, 이거다!


“아니, 잠깐만... 지금 어딜......!”

“자, 눈 감고 50까지 세는 거예요, 하나, 둘, 셋... 다서엇...... 일곱...... 그런데 간이 7엽이던가, 8엽이던가......”

“손, 손! 점점 내려가잖아, 딴 생각 좀 그만해!”

“맞다,.. 자, 다시 긁어줄게......”

“자-잠깐만, 여긴 아니지! 아윽, 이 (삐-삐-) 진짜 자는 거 맞아?”


골골송치고는 가사가 살벌한데, 희뿌연 의식 속에 잠긴 채로 엘사가 감상을 남겼다.


“설마 ‘궁디팡팡’ 쪽이 정답이었나......”


뭐, 안 돼! 이대로 가다간 밤새 농락당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안나는 기겁하며 피드백을 돌려주었다.


“아냐아냐, 충분히 효과 있어, 봐요, 눈 감았다! 그러니 전 그만 주무르시고 네 잠이나 주무시라구요!”

“옳지, 잘한다......”


엘사는 마침내 잠들 의지를 보인 안나를 칭찬하려는 듯 도닥도닥 두드렸다. 그래, 내가 바랐던 건 이런 거였어! 돌고 돌아 원하던 바를 이뤄낸 안나는 꾸벅꾸벅 조는 엘사를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도대체 얘를 어떡하면 좋지?


앞으로 이 웬수를 어떻게 꼬셔야, 아니, 죽여야, 아니...... 안나의 앙심이 여느 때보다 가까운 미모를 두고 집합과 해산을 반복하다, 야금야금 몰려오는 피로에 여지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아침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할까? 안나는 몸 위를 덮은 팔로부터 은은한 맥동과 온기를 느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가 어우러지며 기나긴 겨울밤이 지나나 싶었지만...... 이두나가 경고했던 진정한 잠버릇이 시작되자 엘사는 초콜릿으로 가득 찬 산타의 선물보따리에 짓눌리는 악몽과 붉은 기 도는 털색의 대장고양이에게 묵직한 냥냥펀치를 얻어맞는 악몽을 번갈아 꾸다, (결국) 이불마저 전부 빼앗기고는 맨몸으로 안나의 잠꼬대 페이즈 2에 맞서느라 숙면을 이루지 못한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



어쨌거나 베드인 성공!!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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