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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농민의 생활앱에서 작성

Ga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7.01 12: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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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농민들은 전체 인구의 80%를 점하고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90%를 상회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중세의 근간을 이루는 집단이 농민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 하겠다. 중세의 인구비율은 대체로 80-85%의 농민과 10-15%의 도시민 그리고 5%의 귀족과 성직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도시민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들이 인구 5만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지니고 있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중세기간 내내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계급으로 도약하게 된다. 하지만 중세 초기에 도시는 반 시골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시 안에도 농촌처럼 텃밭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가축도 키우고 있었다.

중세 농민들은 자유농과 농노와 노예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구분은 농민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었다. 중세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대가족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토지의 소유는 항상 부족한 상태였다. 중세 시대의 수확량은 현대 유럽의 수확량과 비교해 볼 때 대략 7분의 1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의 수는 많았기 때문에 만성적인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토지 역시 현대 유럽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시에도 자신의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치 못했다. 전체 인구의 80%에 달하는 농민 가운데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를 보유한 농민은 절반이 채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중세 유럽 농촌에서 가장 열악한 것은 농기구의 후진성이었다. 쟁기는 아직도 대부분 나무를 불에 태워 단단하게 만든 것을 사용하였고, 보습 날에 금속을 부착하는 것은 10세기경이 되어서야 겨우 가능했다. 그리고 농경지는 척박하여 수확량이 미흡하였다. 한 예로 밀 1부셀-대략 36.37L-을 뿌리면 3부셀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확량이 적은 것은 땅의 지력이 급속하게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중세 유럽에서는 계속 삼포제三圃制형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가축의 배설물이 가장 효과적이었지만 이마저도 충분치 못했다.한국의 경우 고려시대까지 유럽처럼 휴경제를 통해 땅의 지력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택하였지만, 세종 때에 이르러 농사직설에 인분을 이용한 똥재의 이용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퇴비를 만들기 위해 목초와 가축의 배설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목초지는 가축의 사료로도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다량의 퇴비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중세의 농민들을 억눌렀던 것은 봉건적인 부과세였다. 여기에는 임시세와 상속세가 있었는데 임시세는 매년 그 액수와 부과 횟수가 변하는 세금으로 농민이 보유한 땅의 면적과 기르는 가축 수에 의해 책정되었다. 임시세는 말 그대로 세금을 부과하는 사람의 자의성이 강한 세금이었기 때문에 중세의 농민들이 가장 증오하는 세금이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이 반 강제적인 임시세를 조달하기 위해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힘들게 일해야만 했다. 임시세는 말 그대로 임시적인 세금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임시세가 관습적으로 고정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럴 경우 농민들은 관습적으로 고정된 세금 위에 특별 임시세가 또 부과되기도 하였다.

상속세는 농민이 사망하였을 때 거둬들이는 것으로 영주는 가장 좋은 땅이나 가축의 요구하였다. 그리고 교회 역시 미망인이나 상속자에게 장례비용으로 가축과 땅을 요구하였다. 이 결과 농민들이 영주와 교회에 빼앗기는 상속세가 많게는 재산의 반에서 적게는 3분의 1에 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빼앗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상속자가 상속받은 재산을 등록하면서 영주에게 또 다시 등록에 따른 세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렇게 볼 때 중세의 농민들은 영주와 교회의 밥이었던 셈이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중세의 풍경은 농촌과 농민이 배제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농민들의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나가는 이야기로 말해지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도시 부르주아지들이 보는 농민의 모습은 결코 자신들과 같은 부류에 합류시킬 수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농민은 우둔하고 농촌은 야만스럽다는 고정관념이 15세기의 이야기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중세 농촌의 삶이 얼마나 빈곤과 비참 속에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중세 농촌의 가옥의 구조는 매우 열악했다. 비바람을 막기 위해 집은 대체적으로 낮았고, 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해 벽은 두꺼웠다. 그리고 창은 작았으며 아예 없는 집도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채광이 되지 않는 집안은 어두웠고 온갖 냄새가 혼합되어 있었다. 집의 한 가운데는 난로 비슷한 것이 있어 불을 피워 취사와 난방을 함께 하였다. 굴뚝이 없는 관계로 여기서 나오는 연기는 빠져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중세의 농촌에는 지붕 한 쪽을 뚫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이런 집은 그래도 양호한 것이었다. 중세 시대 최하층의 농민들은 진흙을 쌓아올린 둥근 진흙집에서 지냈는데 이 집은 토굴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중세 농민의 가옥은 온 집안이 검댕이로 그을러 있었다. 그리고 집 안에 가구다운 것은 거의 없었다. 당시 유언장에 기록된 가구로는 식탁, 궤짝, 걸상과 부엌에서 사용하는 놋쇠그릇과 냄비가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잠자리는 밀대나 양털을 집어넣은 자루를 깔고 잠을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도 없는 사람들은 짚을 넣은 자루를 깔고 자야만 했다. 그리고 가축들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배설물을 아무데나 질러대므로 집안은 인간의 땀 냄새, 가축의 배설물 냄새 그리고 연기에서 나는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당시 농민들은 주로 귀리와 보리를 재배하였다. 밀은 재배하였지만 자신들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주에게 세금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세 농민들은 평생 밀로 만든 부드러운 하얀 빵을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보리나 귀리로 만든 검고 딱딱한 빵을 완두콩이나 야채를 섞어 만든 스프와 함께 먹었다. 농민들은 이렇게 거칠고 조악한 음식을 상용하였기 때문에 20살이 넘으면 튼튼한 이빨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당시 농민들이 상시로 음용하였던 것이 에일ale이란 맥주였다. 이것은 호프를 넣지 않고 보리나 귀리의 맥아로만 만든 것으로 아주 걸쭉한 형태를 띠었다. 농민들은 이 음료를 수시로 마심으로서 허기진 배를 달랬던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은 강낭콩과 양파, 완두콩과 마늘을 많이 먹었다. 고기는 돼지고기와 닭을 가끔 섭취하였다.이와 다른 이론을 보려면 맛시모 몬타나리의 <유럽의 음식 문화>를 참조할 것. 여기서는 유럽의 음식문화를 귀족 중심으로 설명함으로서 농민의 식생활이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묘사되고 있다. 당연히 귀족 중심의 음식 설명의 결론은 농민 중심의 결론과는 상반되게 도출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비관적인 중세사를 낙관적인 중세사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할 만 하다.

당시 중세 유럽의 농민들의 평균 수명은 대략 40세를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20살이 넘으면 노화가 시작되었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노인이라고 하는 60세까지 살아남았다. 중세 농민의 모습은 깡마르고 검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진 모습으로 지금의 제3세계 농민들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그래서 당시 신분의 차이를 얼굴의 색에서 찾았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얀 피부는 귀족의 상징이었던 반면 검고 주름진 얼굴은 농민의 상징이었다.

당시 농촌에서 위생시설은 전무하였다. 방 하나에서 온 가족이 생활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지저분한 환경으로 인해 출산과 병고에 따른 사망률이 엄청 높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집 안에는 하수구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고 화장실 또한 변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부엌이 독립되어 있지 않아 요리하는 장소는 언제나 축축하고 불결하였다.당시 농민들의 삶은 14세기에 지어진 <쟁기꾼 피어스>라는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땅을 밟을 때는 두꺼운 밑창 단 낡은 구두의 벌어진 틈새로 발가락이 삐져나왔고, 양말을 신었지만 복사뼈가 드러나....온 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끼고 있는 장갑도 조잡한 천으로 만든 데다 그것도 손가락 부분이 닳아빠져 오물만 덕지덕지 묻어...그의 아내는 긴 막대기를 쥐고 옆에 따라 걷고 있었지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키질하는 널빤지를 두르고 있더군요. 그녀는 맨발로 얼음 섞인 땅 위를 걸었는데 피가 흘렀습니다. 이랑 끝에는 작은 빵 그릇과 그 옆에 누더기 걸친 소년이 있었고, 건너편에 두 살쯤 먹은 간난아이 둘이 누워있었어요... 구슬픈 어조로 거의 울부짖고 있었어요. 사내는 혼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이놈들이 좀 조용히 해”>

농민들의 삶의 터전은 토지였다. 그래서 토지가 없는 농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결과 남자들은 토지를 보유하기 전에는 아내를 먹이고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이는 남자는 결혼 전에 토지를 보유해야만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게다가 농노의 경우에는 영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결혼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자유민 농민보다 어려움이 더 했다. 중세의 결혼은 애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좀더 본질적인 경제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 문제는 자연히 중세의 상속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중세의 상속제도는 특별히 예외가 없는 한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남 이하의 자녀들은 적당한 때가 되면 집을 나가 자신만의 새로운 독립된 구성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독립된 구성체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부랑자, 도적으로 변모하였고 일부는 도시로 들어가 가내수공업을 하는 사람들의 도제가 되어 숙식을 해결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정한 미래는 사회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 지배자에 대한 불만은 항상 농촌지역과 이들 유리걸식하는 불만집단이 결합되어 크게 확대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만큼 농민들의 삶은 열악한 조건 속에 내팽개쳐져있었던 것이다.조셉 폰타나의 <거울에 비친 유럽>의 제5장 촌뜨기의 거울을 참조할 것. 중세 유럽의 급속한 인구 팽창과 페스트의 급습, 그리고 인구의 감소와 함께 농민 반란의 증가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농민계층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매개로 하여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페스트로 인구가 감소하고 노동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농민들의 이런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도움을 주었다. 대신 농민 계층들은 귀족들의 엄중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귀족들의 경제의 중심은 여전히 토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토지와 연계된 장원경제의 한 축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이를 포기할 의향은 없었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까지도 농민 반란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당시 상위 지배계층의 의식이 어느 세계에 머물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중세의 농민들이 소속되어 있던 장원경제의 세계는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였다. 이 조그만 세계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일생을 보내야만 하는 장소였다. 이곳을 벗어나는 길은 봉건제도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급자족의 봉건세계에서 공동체에서 추방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도시가 조금씩 발달하게 됨에 따라 도시 역시 인구의 유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도시는 갖은 혜택으로 농촌의 인구를 유혹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은 농촌의 도망자가 도시에 들어와 <일 년하고도 하루>를 잡히지 않고 지낸다면 자유민이 된다는 조항이었다. 농촌에서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농노들이나 노예계층들은 이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공 역시 보장할 수 없었다.

중세 농촌은 자유민과 부자유민-농노, 노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유민은 말 그대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계층으로 영주에게 예속된 계층이 아니었다. 반면 농노와 노예는 영주에게 예속된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영주의 땅을 빌어 농사짓는 소작농이었다. 하지만 땅의 소유를 가지고 이들 계층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유민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지를 잃게 되는 경우가 있고, 반면에 농노가 토지를 구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유민과 부자유민의 결혼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이 결과 자유민과 부자유민의 엄격한 구별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유민과 부자유민은 법률적, 경제적, 사회적인 모든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였다. 다만 상층계급들에게 있어서 자유민과 부자유민은 자신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하층계급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런 변화는 농노를 뜻하는 villein이란 단어의 변화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원래 노르만 계 불어에서 유래된 말로 ‘부역을 대가로 토지를 보유하는 농민’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촌뜨기, 상놈이란 뜻으로 변하였다. 게다가 고대 영어에서 단순히 농민을 의미하던 보어boor란 단어가 후대에 와서는 꼴사납고 버릇없는 작자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농민들의 위치가 시대를 지나면서 하향 평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런 경향은 노르만계가 정복한 영국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즉 앵글로-색슨의 농민들의 용어인 암소cow, 송아지calf, 돼지swine와 양sheep이란 용어가 정복자의 용어인 쇠고기beef, 송아지고기veal, 돼지고기pork, 양고기mutton으로 분리되어 호칭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정복자의 용어는 가공된 의미를 피정복자의 용어는 자연적인 의미를 갖게 됨으로써 정복자의 용어가 더 세련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용어의 대체 혹은 우월적 지위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는 항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중세 유럽의 농촌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사실 로마제국이 붕괴된 이후 중세 유럽은 선으로 연결된 유기적 결합이 아닌 점으로 형성된 반 독립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농촌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도 숲과 황야가 펼쳐졌다. 로마인들이 닦아 놓았던 도로는 잡초에 덮여 더 이상 도시와 도시, 농촌과 도시, 농촌과 농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숲은 농촌이 확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숲과의 싸움은 중세 시대 내내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이 결과 중세 후기로 들어서면서 울창했던 유럽의 자연림은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의 발전에 따른 결과로 이야기하지만 중세는 여전히 그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가장 밑바닥에 농민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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