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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바둑, 어찌할 것인가?

1(180.230) 2014.01.01 10:39:24
조회 1161 추천 3 댓글 3

서기 2013년은 한국바둑 역사에서 이정표를 다시 쓰는 해가 되었다. 한국은 올해에 국제기전에서 한번도 우승하지 못해서 1996년부터 2012년까지 17년 동안 해마다 한 개 이상의 국제기전 타이틀을 획득하는 전통을 지키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오래 동안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라고 자부심을 가져왔는데, 이제 더 이상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앞으로도 오랜 기간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한국바둑의 위기이다.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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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하며 한국바둑 영광의 서막을 열었다.


지난 날의 영광
오래 동안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무엇인가? <표1>에 역대 세계대회 우승자들의 명단을 기전 별로 적었고, 우승자가 활동하는 국가를 다음과 같은 색깔로 표시했다.
한국: 갈색, 중국: 얕은 초록색, 일본: 얕은 청색, 대만: 노란색.

<표1> 역대 세계대회 우승자. (여기를 클릭하면 도표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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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감추기


처음에는 후지쓰배에서 일본 기사들이 연거푸 우승하여 일본세가 만만치 않았는데 점점 일본은 약해지고 한국세가 등장했다. 1996년부터는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우승이 더 많아졌다. (비씨카드배는 동양증권배와 같은 종열에 적어 넣었다. 삼성화재배는 결승전을 1월에 진행하다가 12월로 바꿨으므로 1월에 결승전을 하던 때의 결과는 그 전 해로 표시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2008년에 이세돌이 삼성화재배와 LG배에서 우승했고, 구리가 후지쓰배와 도요타덴소배에서 우승해서 한국과 중국이 백중세였다.
- 다음해에는 중국이 4개의 타이틀을 땄고 한국이 2개의 타이틀을 따서 중국이 우세했는데, 우리의 에이스인 이세돌이 이 해 하반기에 휴직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 2010년에는 쿵제가 후지쓰배와 LG배의 두 타이틀을 땄고, 이세돌과 원성진이 각각 LG배와 삼성화재배의 타이틀을 땄다.
- 2011년에는 이세돌이 두 번 우승했고 박정환이 후지쓰배에서 우승했으며 구리와 파오원야오가 각각 삼성화재배와 LG배에서 우승해서 한국이 3대 2로 앞섰다.
- 2012년에는 이세돌과 백홍석이 삼성화재배와 비씨카드배에서 각각 우승했고, 장웨이제가 LG배에서 우승해서, 한국이 앞섰다.

이처럼 2008년에서 2012년까지는 한국과 중국이 국제기전 타이틀 숫자에서 엎치락뒤치락했는데, 한국이 조금 앞섰다고 볼 수 있고, 또 무엇보다도 세계 최강인 이세돌이 있기에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2013년에 와서는 그런 주장을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앞으로 이세돌이나 박정환이 중국의 어느 기사보다 더 여러 달 동안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하게 된다 하더라도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계 1위가 다른 기사들을 압도할 실력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비슷한 여러 명의 강자 중에서 약간 나은 군웅할거 시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상급 기사들이 훨씬 더 많은 중국이 더 많은 타이틀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목표인가?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인구도 많고 바둑 열기도 높고 바둑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커서 한국바둑이 중국바둑과 경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바라보자는 것은 패배주의에 불과하다. 아무 개혁도 하지 않고 이대로 나가면 일본바둑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지금 활약하고 있는 1980년대 생들이 나이가 들어가면 박정환과 김지석에게만 세계 타이틀을 딸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고, 그들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수 많은 강자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쩌다 한번씩 타이틀을 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 이외에는 기대할 기사가 별로 없고, 한국기사들이 국제기전 8강전에 한 명도 못 오르는 경우가 자주 생길 것이다. 그러면 바둑에 대한 열기는 더욱 식어지고 거기서 쉽게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여력이 있을 때에 개혁해야 한다. 너무 늦어지면 개혁할 동력도 없어지고 개혁해 보았자 효과도 미미하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은 한국바둑이 중국에게 밀리는 것은 중국바둑이 세어졌기 때문만이 아니고 한국기원의 정책적 실패가 중요한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은 할 마음과 생각만 있다면 바로 시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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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대회 4강까지 올랐던 나현은 요즘 국내 신예기전에서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실력이 늘지 않는 신예기사들과 속기
필자가 통계적 랭킹 방법을 한국기원의 공식 랭킹제도로 개발한 다음에 실력이 느는 신예기사가 있는지 주목해서 지켜 보았다. 처음에는 한상훈과 김승재에게 기대를 걸고 보았는데 그들의 실력이 시간이 지나도 별로 늘지 않았다. 다음으로 강유택에게, 그 다음으로 한웅규와 안형준에게, 그 다음 해에는 안국현에게 차례로 기대를 걸어 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실력이 늘지 않았다.

중국의 신예들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우리의 젊은 기사들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므로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를 아래 글에 발표한 바 있다.
○● “반짝 초단은 반짝 스타?”(사이버오로 2012년 6월30일자 칼럼) ☜ 클릭

이 글에서는 2006년에서 2009년 사이에 입단한 모든 한국기사들의 랭킹 변화 추이를 조사했다. 몇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젊은 기사들이 20세가 되기 전부터 랭킹 점수가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의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서 필자는 더 자세한 자료를 수집해 2004, 05년에 입단한 기사들과 2010년에 입단한 기사들의 점수 변화를 추가로 조사해서 다시 한번 다루었다.
○● “속기는 독이다” (사이버오로 2013년 9월27일자 칼럼) ☜ 클릭

거기서 얻은 결론은 입단 직후부터 한국바둑리그에 참여한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실력이 늘지 않았고, 실력이 는 신예 기사들의 대부분은 한국바둑리그에 참여하지 않은 기사들이었다.
이것은 입단 직후부터 속기에 너무 물들면 바둑 실력이 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을 확인하기 위해서 속기가 만연하지 않던 2000년 이전에 입단한 강자들의 랭킹 점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미 30세가 넘은 조한승과 안조영은 30세까지 실력이 늘어온 것을 발견했다. 아직 30세가 되지 않은 최철한과 원성진은 25세가 넘은 지금까지 실력이 늘어왔다.
이에 비해 속기가 많아지기 1, 2년 전인 2002년에 입단한 강동윤, 이영구, 윤준상, 홍성지, 등은 23세 무렵까지 비교적 빨리 실력이 늘다가 그 후에는 지지부진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속기의 영향 탓에 90년대에 출생한 기사들의 실력이 20세가 채 되기 전부터 늘지 않는다는 결론이 근거 없다 말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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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 요즘 기전은 대부분 스튜디오 조명 아래에서 두어진다. 팬들의 요구에 부응한 시대의 흐름이라고 넘기기엔 속기의 부작용(?)도 드러나고 있다.


왜 속기가 문제인가?
첫째, 거의 대부분의 기전이 속기전으로 변해서 장고바둑을 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장고바둑을 두어야 깊은 수읽기의 연습이 되는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므로 수읽기의 실력이 시간이 가도 별로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픈기전 중에서 명인전이 2시간이고 국수전이 3시간으로 장고바둑은 이 두 기전뿐이다. 올레배와 박카스배가 1시간짜리여서 준속기전이 둘이다. 그 외에 KBS바둑왕전, 물가정보배, 십단전이 모두 속기전이고 한국바둑리그도 속기전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신예기사들이 깊은 수읽기를 연습할 대국이 턱 없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초년생 때에 두 개뿐인 장고 기전에서 일찍이 탈락하면 장고바둑을 1년에 손 꼽을 만큼밖에 둘 기회가 없다.

둘째, 속기가 만연해 져서 속기의 나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만약에 속기의 악영향이 적어 수읽기 연습하는 기회를 박탈하기만 한다면 젊은 기사들의 실력이 느리지만 조금씩 늘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신예기사들이 20세가 되기 전부터 늘지 않는 것은 속기가 실력 향상을 방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속기에서는 중반에 누가 더 큰 실수를 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수가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포석공부를 등한시하게 된다. 우리 기사들이 중국선수들에게 포석에서 밀린다는 얘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또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할 때 깊은 수읽기에 뒤따른 형세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사의 성향에 의해서 결정하는 버릇도 속기의 나쁜 영향이다. 그런 식의 반면 운영은 수읽기에 강한 고수를 만나면 크게 당할 수밖에 없다. 또 속기전에서 수읽기가 뒷받침되지 않은 감으로 읽은 수의 인상(경험)이 너무 강해서 장고바둑에서도 그 감으로 읽은 수가 머리 속에 맴돌아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그대로 착수하는 경우가 많아질 수 있다.

좋은 목수는 못을 빨리 박아도 정확하게 박는다. 이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대충대충 빨리 못을 박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더 정확하게 빨리 못을 박는 실력을 키울 수 없다. 뜸을 들이더라도 못을 정확히 박는 연습을 하다 보면 점점 원숙해져서 종당에는 빨리 박아도 정확해지는 것이다. 바둑도 마찬가지이다. 대충 좋은 수를 감으로 빨리 찾는 연습을 어려서부터 해서는 최상의 수를 빨리 찾는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최상의 수를 찾는 연습을 하다 보면 그런 수를 빨리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자는 중국기사들도 인터넷사이트에 들어와서 속기를 많이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장고바둑을 두고 거기에다 속기 연습까지 하므로 속기의 나쁜 버릇에 쉽게 물들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한국기사들은 장고바둑은 거의 두지 않고 속기만 두니까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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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 한국기원 영재입단대회.


입단제도의 개선
입단연령 상한선을 15세로 낮추자는 주장을 “속기는 독이다”라는 글에서 이미 강하게 밝혔다. 입단연령을 18세로 잘라도 그 나이까지 바둑에 집중 투자하다가 실패하면 다른 진로를 찾기가 어렵다. 투자는 많고 위험부담은 크고 돌아오는 이득은 거기에 비해 작다면 기재가 있는 아이들이 바둑의 길을 찾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는커녕 입단연령 상한선을 오히려 늘여서 25세가 넘은 사람도 입단하게 개악해 놓았다. 중국기사 중에는 17세에 세계기전에서 우승하는 사람이 둘이나 나왔고 박정환도 18세에 세계기전에서 우승했는데 18세에야 겨우 입단한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입단연령 상한선을 낮추어야 투자비용이 줄어들고 위험부담이 줄어들어서 바둑의 길을 찾는 것이 매력적일 수 있다. 그래야 기재가 있는 어린이들이 바둑을 지망하게 될 것이다. 기재 있는 어린이들이 바둑의 길을 찾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이다. 일본은 해마다 여러 명의 입단자들을 내지만 기재가 있는 기사들이 거의 없어서 일본바둑이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다.

기전 진행의 문제
금년에 우리 선수가 아무도 세계타이틀을 따지 못했지만 두 기전에서는 특히 아쉬움을 가진다. 첫째가 응씨배 결승인데, 준결승 후에 몇 달을 기다렸다가 여는 결승전을 하필이면 박정환이 농심신라면배에서 장웨이제와 셰허를 상대로 두 판을 두고 난 직후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갖도록 한 것일까? 이것은 한국기원의 커다란 실수라고 본다. 박정환이 정상적 상황에서 판팅위와 대결하였다면 결과는 달리 나왔을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위빈 감독이 출전 선수를 위해서 얼마나 자상한 배려를 했는지, 프로기사들의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기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숙소에서 대국장까지 두 번이나 왕복하면서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쟀다고 한다. 나이 어린 판팅위가 너무 일찍 도착하여 어른들에게 인사하느라 바쁘다 보면 대국에 임하는 투지가 약화될까봐 경기 1, 2분전에 대국 장소에 도착해서 대국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렇게 세세한 데까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점심시간 때는 판팅위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편안하게 보살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환은 대국일에 혼자 점심을 먹었다. 감독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어도 불편해서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기원은 예우 차원에서 주로 원로나 중견기사들을 세계대회에 단장(감독)으로 보내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선수에게 편안하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사람을 골라서 보내는 세심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참 기사들에게 특권을 나누어준다는 관점에서 돌아가면서 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응씨배의 우승과 준우승의 상금의 차이가 매우 크고 그것의 1/10을 한국기원이 받으면 한국기원의 재정적인 입장에서만 보아도 매우 중요한데, 거기에 맞게 결승 대국 일정과 감독의 선발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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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응씨배 결승. 2국 점심시간에 스마트폰을 보며 대국장을 나서는 박정환 9단


기전 진행이라는 관점에서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이세돌의 삼성화재배 결승전이다. 이세돌이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국수전 결승, 올레배 결승, 명인전 결승, 거기다 바둑리그 포스트 시즌이 겹쳐있는데, 그런 와중에서 삼성화재배 결승을 맞게 되었다. 이런 살인적 스케줄 속에서 이세돌이 삼성화재배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세돌이 2013년 전반기에 부진했기에 이 정도였지 만약에 전반기에도 잘했다면 더 바쁜 대국 스케줄 때문에 시달렸을 것이다.

왜 수많은 기전의 결승전이 연말에 진행되도록 스케줄을 잡는가? 우리의 최고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기전 스케줄을 좀 더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없는가?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의 애로는, 스폰서로부터의 예산확보와 예산이 지급되는 시기가 들쭉날쭉하고, 다음 대회가 지속될지 여부 등 불확실한 것들이 많아 1년 단위로 일정을 확정해 놓고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시스템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언제까지나 허겁지겁 허둥대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 기전의 결승은 일년 내내 잘 배치되어 있다. 서남왕배 2월, 이광배 4월, 중신은행배 4월, 천원전 5월, 명인전 8월, 난가배 8월, 아함 동산배 9월, 기왕전 10월, 용성전 12월 등으로 잘 분산되어 있다.

그리고 상위 선수들에게 시드를 주어서 살인적 스케줄로부터 해방시켜라. 이창호의 전성기 때에도 ‘살인적 스케줄’이라는 말이 회자되었고 이세돌의 전성기 때에도 이 말이 회자되는데 왜 최상위 기사들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개인 스포츠에서 한국바둑처럼 상위 선수들에게 시드를 주지 않는 스포츠를 본 적이 없다. 타이거 우즈에게 예선부터 참가하라는 골프대회가 있다면 그는 당연히 참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인적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나달이나 쟈코비치에게 예선부터 참가하라는 테니스 대회가 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도 모든 기전이 적어도 16명에게 시드를 주어서 예선을 면제시킨다. 그런데 한국바둑은 상위 선수들을 무시하고 거의 모든 기전에서 예선부터 뛰도록 만들었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세돌이나 박정환 같은 최상위 기사들이 150위나 200위 기사들과 대국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국바둑은 자기들에게 유리할 때는 스포츠라고 주장하고 정작 스포츠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데, 시드를 주는 것은 모든 스포츠의 기본이다.

한국기원의 의사결정 구조
가장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가자. 벌써 2년 전부터 중국세의 등장을 예견했고, 속기의 폐해에 대해서도 2년 전에 논의되기 시작했다. 입단제도의 개선에 대해서는 더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이 왜 이렇게 미루어지고 있을까?

이것은 한국기원의 의사결정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만약에 국제경쟁을 하는 기업이 2년 전에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실패해서 도산했을 것이다. 한국기원은 국제경쟁에서 보호된 독점 기업이기 때문에 이렇게 늑장을 부리고도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기원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무엇을 개선해야 할까?
첫째 프로기사의 입김을 줄여야 한다고 본다. 한국기원의 의사결정 구조는, 안건에 따라 그때그때 절차가 다를 수도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상임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걸로 알고 있다. 사안에 따라, 그러니까 굵직한 안건은 한국기원 총재(이사장)이 주재하는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이에 앞서 기사총회에서 토의나 투표로 의견을 수렴하거나 기사대의원회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만 기사회(총회)나 기사대의원회는 의견을 말할 수는 있어도 의결 권한은 없다.

하지만 한국기원 최상위 의결체는 이사회지만 실질적으로 프로기사들의 의견,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프로기사들의 이해득실과 직결되는 사안에 대해 프로기사들이 의견개진하는 걸 비상식적이라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사총회나 기사들이 대표로 내세운 대의원들은 당연히 프로기사 전원의 회의체다. 여기에 한국기원 사무총장도 프로기사들이 이어가며 역임한다. 외관상 평시 일반 안건을 결정하고 있는 상임이사회에도 13명 중 프로기사가 4명 들어가 있다. 여기에 기사회장이 참관인(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한다. 최고 의결체인 한국기원 이사회는 보통 특별한 문제가 없는, 비상한 안건이 아닌 한 프로기사들의 의견대로 가결하므로 앞 단위에서 정책을 기안하고 수렴하는 조직체-기사회, 대의원회, 사무국(총장) 들의 생각이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기사들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는 속성상 기사회의 ‘승인(?)’ 없이는 시행하기 힘든 구조다. 프로기사들만의 집결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한국기원은 프로기사협회의 역할만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헤아려야 한다.

한국바둑의 의견개진, 정책결정 과정에서 프로기사들의 생각만 담아내는 건 자칫 폐쇄적인 조직체로 흐를 수 있다. 보완할 필요가 있다. 좀더 개방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고 다양한 바둑 층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의결 시스템을 마련할 때다. 어느 조직계층이건 ‘자가 개혁’은 난망이기 때문이다. ‘입단제도 개혁’의 지지부진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왜 기사들의 입김이 세어졌는가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최병두 씨가 한국기원 사무총장이었을 때에 사무국의 전횡에 못마땅해한 기사들과 충돌이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 한국기사 대부분이 1974년에 한국기원을 탈퇴하여 대한기원을 결성한 그 사건이 ‘기사 파동’이다. 이 파동을 겪은 후에 기사회의 영향력이 커졌다. 거기에 이후 프로기사 김재구와 동명이인인 김재구 씨가 한국기원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재정적 비리를 저지른 것이 발각된 것을 계기로 기사들이 사무총장직을 맡는 관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래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고 이제는 기사회의 역할을 재고할 때가 되었다.

둘째, 사무총장의 재량권을 확대하라. 사무총장이 정책에 관한 책임이 없고 사무행정에 전념하는 느낌이 드는데, 사무총장의 재량권을 확대하여 책임 있게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확실한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묻되, 프로기사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인재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바둑만 잘두면 만사형통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매니징, 마케팅 등등이 요구되는 시대다.

셋째, 이사회가 개선책을 주도적으로 마련하라. 이러기 위해서는 이사들이 회의하는 날 모여서 그 날에야 이슈에 관해 토론하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이슈에 관해서 미리 연구하고 필요하면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을 통해 파악하고 결정해 나가야 한국바둑이 활성화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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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 한국기원 이사회 장면.


결론- 새 총재와 이사회에 거는 기대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 된 것은 한국기원이 조직적인 노력으로 얻은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순풍 요인과 몇 명의 걸출한 기사들 덕이 컸다고 본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헌신한 한국기원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하는 게 아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나름 고생한 점 인정하면서도 그만큼 체계적이고 한발 앞서가는 인상적인 정책을 접한 바 없기에, 팬들의 칭찬이 박한 것이다.

조치훈, 조훈현, 이창호가 대활약하던 1980~90년대 말은 바둑 붐이 발원하고 중흥하던 시기라 영웅들의 활약만으로도 국민이 환호하고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못지않은 바둑 고수 이세돌이 2000년대에 등장했으나 이미 바둑 최강국에 익숙한 뉴스와 승전보는 미디어의 조명을 크게 받지도 못했고 거기에 따라서 바둑 열기가 고조되지도 못했다.

‘한국기원 노력에 의해서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게 아니다. 필자가 아쉬워하는 부분은 ‘우리가 누린 그 시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놓쳐버렸다.’는 점이다. 필자는 무조건적으로 한국기원을 비판하는 이들과 다르다고 자부한다. 한국기원이라는 ‘언덕’이 없었고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프로기사들의 분투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최강국의 위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이 점 잘 알고 누구보다 인정하면서도 오늘 다소 격한 비판을 쏟아붓는 건 200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이 아쉽고 안타까워서이다. 답답한 행태를 반복하지 말자는 호소다.

가만히 앉아서도 굴러가는 시대가 있고 ‘최강국’의 도취에서 깨 한발 앞서 걸음해야 하는 시대가 있는 것이다. 팬이야 연이은 우승의 달콤함에 환호하고 있을지라도 한국바둑을 총괄하는 한국기원은 다시 10년 앞날을 준비했어야 하는 아쉬움 말이다. 지나간 건 이미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다. 중국바둑에 추월 당한 건 당한 거다. 뒤처졌으면 신발끈 다시 묶고 열심히 쫓아가면 된다. 이러한 충정에 필자가 잘못 알고 떠든 대목이 있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욕먹을 각오로, 감히 주제넘은 발언을 하게 됐다.

때마침 한국기원의 새 총대가 추대되었다. 지금이라도 과감한 개혁을 해야 한국바둑이 작으나마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바둑처럼 될 것이다. 한국기원 이사회가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배태일]

 

 

 

 

사이버오로에서 이 글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아서 가져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드 문제는 정말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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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004 김성룡 돈 잘벌잖아.. ㅇㅇ(116.120) 18.01.16 63 0
408003 바둑기사들 개무섭노 바둑티비 이제 맘편히 못보겠네 ㅇㅇ(180.69) 18.01.16 101 0
408002 김성룡이 탄핵 당하는 것 아닌지 걱정된다... ㅇㅇ(112.156) 18.01.16 73 0
408001 금요일 방송이 기대되잖어 ㅋㅋㅋ [1] ㅇㅇ(49.172) 18.01.16 184 0
408000 림종석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문제 봉인됬으니 아가리 닥쳐라 ㅋㅋㅋㅋㅋㅋ ㅇㅇ(112.156) 18.01.16 55 1
407998 홍민표 6시간전 게시글 원본.jpg [4] ㅇㅇ(223.38) 18.01.16 859 9
407997 돌바람vs랴오싱원 대결은 너무 싱겁게 끝이 나는데요.. ㅇㅇ(1.224) 18.01.16 10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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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973 바갤러는 바둑이나 둬야지 뭐 볼게있냐 ㅇㅇ(110.70) 18.01.16 2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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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970 오카게배만도 못한 바둑리그의 위상과 ㅇㅇ(223.62) 18.01.16 68 1
407969 까놓고, 김성룡 보다 재밌는 대체자 있으면 놓아준다 ㅇㅇ(223.39) 18.01.16 43 3
407968 한국바둑은 연구실 타내는 김성룡 능력이 더 필요한건 사실 ㅇㅇ(223.39) 18.01.16 61 1
407967 코인입문 3주, 돈이 접힘 듀에르(175.223) 18.01.16 8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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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965 한명이 김구라쉴드 오지게 치는중 ㅋㅋㅋ [2] ㅇㅇ(220.83) 18.01.16 179 9
407964 않이 근데 예선결승탈락의 아픔 약팔았다고 그걸 또 기록 확인 ㅋㅋㅋ [1] ㅇㅇ(223.39) 18.01.16 92 2
407962 박탑글 보고나서 박탑 모임사진 보니까 자동으로 [1] ㅇㅇ(223.39) 18.01.16 164 3
407961 예능용 msg에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할줄은 몰랐네 [1] ㅇㅇ(223.33) 18.01.16 87 0
407960 윤준상 봉수 성님한테 진거 이제 알았네 ㅋㅋㅋㅋ ㅇㅇ(223.39) 18.01.16 60 0
407959 김성룡 함부로 까지마라 [1] ㅇㅇ(223.39) 18.01.16 206 3
407957 김성룡9단 입장이 나왔으면 좋겠음 ㅇㅇ(182.231) 18.01.16 40 0
407956 박탑이 떡밥 큰거 하나 주셔서 고마운게 우리들의 시선이다 [2] ㅇㅇ(223.39) 18.01.16 105 0
407955 근데 박탑글보면 평소에 뒷담화 오지게 한 것 같은데 ㅋㅋㅋ [2] ㅇㅇ(223.39) 18.01.16 186 3
407953 공부할데도 없는 놈들 연구실까지 얻어다준건 능력 쩌는거 맞지 ㅇㅇ(223.33) 18.01.16 64 0
407952 김성룡 해설도 바알못용 약팔이긴한데 ㅇㅇ(110.70) 18.01.16 90 7
407951 약쟁이,그랜드슬램 범법자들이 TV 장악하고 있는데, 바둑계만 문제일까? ㅇㅇ(223.39) 18.01.16 56 0
407950 제2고 제3이고 현실사기꾼이랑 방송중 msg치는걸 같이 묶네 [1] ㅇㅇ(223.33) 18.01.16 8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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