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난 한국사람으로서 당연히 신진서가 성적 잘 내고 우승도 많이 했으면 좋겠어. 다만 아주 아주 솔직한 심정으론 신진서가 이창호 넘을 정도까진 안 돼서 다른 후배기사한테 후계자 자리 물려줬으면 좋겠어. 신진서가 밉거나 그래서 그런건 물론 아니고 왜 그런거 있쟎아.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는 독보적인 기록이 그냥 영원히 지켜졌으면 하는 마음. 이창호란 바둑계 레전드 기사에 대한 내 심정이 그러하고 아마 나같은 사람 나말고도 많을거야.  
근데 나이 많이 먹어서 틀딱소리 듣는게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이창호의 바둑계(그 중에서도 세계바둑계) 자취를 거의 처음부터 늘 봐온 팬입장에서 보자면 이창호 바둑은 여타 1인자들과는 좀 다른데가 있어. 꼰대같은 소리 하려는건 아닌데 아마 처음부터 이창호란 사람을 쭉 봐온게 아니라 이창호의 성적표만 손에 들고 보는 젊은 팬들은 그런 구체적인 느낌까진 아마 없을 거야. 구체적으로 그게 뭐냐면...


1. 압도적 바둑
현재의 젊은 바둑팬들 입장에서야 이창호의 바둑에 대한 승패 결과 자료만 놓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거고 그게 당연하기도 한데 이창호의 바둑을 라이브로 지켜봐온 팬입장에선 뭐랄까. 이창호 바둑은 그냥 압도적 바둑 그 자체였어. 누구랑 둬도 안 질 것같은 막강한 느낌. 뚜벅뚜벅 한칸 뛰고 두텁게 꼬부리면서 두는, 마치 바둑학원 교재에서나 나올 법한 정석적인 수들로 다양한 기풍과 행마를 보여주는 뭇고수들을 압살해 나갔는데 그게 거의 경악스러운 정도였거든. 심지어 아무리 불리해도 결국은 따라가서 이기고 말거라는 신뢰감이 워낙 깊은 기사라서 이길까 질까를 걱정하고 초조하게 응원하는게 아니라 지금 반면 10집이 불리해도 뭐 결국은 어떻게든 따라가서 이기겠지 하면서 구경했고 실제로 결국은 딱 한집반이나 반집 차이로 결승점 통과하는 모습은 약간의 환상적 감상 이입해서 보자면 거의 바둑신의 재림이었지. 그런 느낌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누구에게서도 못 느껴본 것 같아.

2.  한국바둑 최후의 보루로서의 펼친 감동의 승부
이창호 바둑을 계속 봐온게 아닌 젊은 팬 입장에선 당대 최고수 이름을 쭉 펼쳐놓고 그들의 우승횟수 데이타를 조사해가며 누구는 우승 17회, 누구는 14회, 누구는 8회. 그러니 역대 1위는 2위는 3위는... 하는 식으로 순위를 매기겠지만
이창호는 그의 메이저 17회 우승만큼과 거의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 단체전 명승부를 숱하게 펼쳐온 사람이고 이 부분에서만큼은 비교대상조차 없을 정도로 그냥 올타임 넘버원이야. 그리고 이창호의 팬들이 결정적으로 이창호를 온마음 담아 사랑하게 되고 역대최고기사 반열에 올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는 바둑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그의 전성기가 지난 시점에서 나오기 시작한 거야.
전성기가 지나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든 시점에서 국내 후배인 최철한 강동윤 등등한테 줄창 패점을 안고 정작 최철한 강동윤이 외국기사한테는 신통치 못하게 번번히 지고 돌아올 때도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한국바둑 최후의 보루로 남아있는 상황이라면 이창호는 반드시 마지막 관문을 지키고 막아내며 최강 한국바둑의 명예를 지켜낸 거라고. 마치 선봉으로 나간 젊은 장수들이 다 무참히 깨진 뒤 이미 은퇴한 노장수가 분연히 갑옷 챙겨입고 몸을 일으켜 신들린 검무로 적장들을 다 막아내듯 말이지. 농심배, 아시안게임 등 단체전에서 그런 일이 몇번이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야. 추천하고 싶은 기보가 있는데 2010광저우 아시안게임 단체전 결승 구리와의 대국을 한 번 찾아봐. 그 당시 세계1인자로 평가받던 구리가 전성기 지난 이창호한테 어떤식으로 압도당하는지를. 난 구리가 그 전에도 후에도 승패를 떠나 이렇게 누군가에게 처절하게 제압당하는 바둑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창호란 사람이, 전설의 대기사가 혼신의 힘을 쏟아부으면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바둑이 나오는지 감상해 보라고.
우승횟수를 시대보정해가며 누가 더 뛰어나니를 설왕설래하지만 바둑팬들한텐 그게 전부가 아니쟎아. 단체전에서 보여준 이런 감동과 투혼은 이세돌 커제 박정환 신진서 누구를 데리고와도 비교 자체가 불가일거야.

롄샤오와 둔 바둑을 보니 처절하게 버티고 승부수 던지며 고군분투하는 신진서의 모습에서 드디어 언뜻 이창호의 모습이 보이더라고. 조-이-이가 단순히 한국바둑의 적통라인 아니쟎아? 압도적 세계 1인자라인이기에 팬들이 아직 박-신을 그 라인에 넣기에 미온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고. 신진서가 조이이라인을 잇는 한국바둑 적통이자 세계최강자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