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26일 서정권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미국행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3년간의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다. 16일간의 향해 끝에 서정권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 곳이 서정권의 신세계, 미국의 첫무대다.
1932년 5월 27일 서정권은 도착한 지 열흘만에 첫 대전을 갖는다. 서정권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금요일 밤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재키 카바노. 페더급이었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올라간 역사적인 미국 무대. 어찌 긴장되지 않으랴? 서정권의 몸은 뻣뻣이 굳어 왔다. 그러나 서정권이 달리 서정권이겠는가?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서정권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마침내 4라운드. 서정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레프트 훅을 날렸다. 주먹을 떼는 순간 카바노의 얼굴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며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KO였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서정권은 미국에서 내리 3연속 KO승을 거둔다. 보도 기관들은 조 데이켄(서정권의 일본이름) 대신 ‘동양에서 온 철권 리틀 조’란 애칭으로 연일 서정권의 경기 소식을 보도했다.
미국에서 서정권은 1주일에 한 번 꼴로 경기를 가졌다. 서정권의 4회전 파이트 머니는 60달러. 당시 4회전 선수들의 파이트 머니는 25달러였다. 당시 미국은 극심한 경제 공황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서정권이 뜨기만 하면 평소에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동양 사람들이 마구 몰려드는 통에 수입이 꽤 짭짤했다. 그래서 서정권에겐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줬던 것이다.
서정권은 한 번의 승리와 한 번의 패배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되는데, 서정권에게 확실한 입지를 굳혀 준 시합은 4차전, 타피 파폰과의 6라운드 메인 이벤트 경기였다.
타피 파폰의 별명은 피스톤. 펀치의 스피드가 그만큼 뛰어 났기 때문이다. 경쾌한 풋워크, 장신에서 내뿜는 가공할 만한 좌우 스트레이트의 위력, 그것은 지금까지 서정권이 경험한 복싱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서정권은 대시했으나, 도무지 파고 들 틈이 없었다. 반면 파폰의 피스톤 펀치는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콧잔등에 정통으로 한 대 맞고 나니 얼떨떨한 게 도무지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2라운드까지 서정권의 수세가 계속됐다. 패색이 완연한 게임, 관중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적의 서정권이었다. 3라운드, ‘컴 온! 컴 온!‘ 파폰은 승리의 제스처를 취하며 허연 가슴을 드러냈다. 그 때 였다. 번개같은 서정권의 카운터 퍼니가 터졌다. 라이트 훅이 먼저 옆구리를 찌르고, 잇따라 레프트 훅이 턱을 강타하자 파폰이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다음날 신문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링에 ’도쿄의 테러‘ 엄습하다 란 헤드 라인으로 서정권의 4연속 KO소식을 크게 전했고, 이때부터 서정권은 인기몰이에 들어간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쉬움은 서정권의 국적이 일본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 였다. 어떻게 하면 그의 이름 앞에 붙은 JAPAN을 뗄 수 있을까? 서정권은 자신을 응원하러 온 한인 노동자들을 볼 때마다 이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50차례가 넘는 서정권의 복싱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힘겨운 시합으로 기억되는 영 토미와의 10회전 경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필리핀 출신의 영 토미는 캘리포니아주 챔피언으로 세계 랭킹 5위, 당시 서부 지역에서 가장 인기를 끌던 철권이었다. 서정권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던 날 저녁, 일행이 모두 오클랜드까지 몰려가 영 토미의 경기를 구경했을 정도로 유명한 그 영 토미와 서정권이 맞붙는다. 미국 원정 시합 6번째에···.
애초에 서정권이 훈련하던 무스다지 다이앤 체육관의 관계자들은 이 경기를 반대했다. 우선 영 토미에 대한 서정권이 아는 게 없고, 또 무리한 경기 스케줄로 인해 너무 지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매니저 와타나베는 시합을 강행했다.
이 때 서정권의 파이트 머니는 2천달러를 호가하고 있었다. 이 중 2/3가 와타나베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와타나베로선 물러설 이유가 없는 시합이었다.
1932년 8월 17일. 서정권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준 10회 경기가 시작됐다.
4라운드까지 서정권은 악착스런 인파이팅으로 영 토미를 당황시켰다. 영 토미는 서정권의 예리한 레프트 훅에 몇 번 이고 휘청거렸다. 미국 관중들도 “도쿄 테러,브라보!”, “리틀 조,화이팅!”을 외치며 서정권 응원했다.
서정권은 4라운드, 결정적인 기회를 잡는다. 영 토미의 턱을 가린 단단한 가드가 떨어진 것이다. 서정권은 토미의 턱을 향해 레프트 어퍼컷을 날렸다. 그러나 노련한 영 토미는 재빻리 고갯짓, 머리로 서정권의 공격을 막았다. 그 순간 서정권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왼손 엄지손가락이 빠진 것이다. 결국 대세는 역전, 서정권은 10회까지 정신없이 맞다가 경기를 끝낸다. 결과는 서정권의 판정패.
“리틀 조, 영 토미를 상대로 KO패 안 당한 것만도 큰 영광이야!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안 벗겨져?” 세컨드가 글러브를 벗기며 말했다. 간신히 글러브를 벗겨내고 보니, 서정권의 왼손은 처참할 정도로 부어 있었다.
“뭐야? 리틀 조, 손가락이 삐었잖아?” 그제야 서정권의 부상을 눈치챈 사람들은 서정권의 등을 두드리며 잘 싸웠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서정권에게 이런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판정패라니?’ 프로 복서 생활 1년 2개월만에 처음 경험해 본 패배. 아마추어 전적까지 합치면 95전만에 1패를 기록한 것이다. 서정권의 32연승 행진이 여기서 스톱됐다.
그러나 서정권은 이 패배를 대가로 자유를 얻었다. 영 토미와의 시합을 끝으로 서정권의 파이트 머니를 갈취하던 와타나베와 결별하게 된 것이다. 서정권은 프랭크 데이버라는 새로운 매니저를 맞아 그의 복싱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어려운 일이 지나면 새로운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지니···. 그때까지 줄곧 ‘도쿄 테러’란 별명과 함께 ‘일본이 낳은 작은 KO왕’으로 묘사되던 서정권이 비로소 ‘코리아’란 우리 국적을 찾게 됐다. 이때부터 신문들은 일제히 서정권을 ‘코리언 조’라 표기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클로니클>지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코리언 선수가 있다. 그는 세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코리아에서는 서정권, 일본에서는 조 데이켄, 그리고 미국에선 테이켄 조다. 그는 여자보다 작은 구두를 신는 5fit 정도의 꼬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그럼 리틀 조를 배출한 코리아는 어떤 나란가? 코리아는 1910년 8월 29일 이래 일본의 강점으로 식민지가 되어 있다. 코리아의 역사를 소개하면···(중략).]
미국의 대도시 일간지에 처음으로 우리 나라가 소개됐다. 그것은 한 권투 선수, 서정권이라는 작은 거인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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