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훼이크고
1073년 힐데브란트는 58세로서 교황의 관을 쓰고 그레고리 7세라 칭하였다. 그는 교황이 되자,첫째로 성직매매의 풍습을 엄금하고 범하는 자에게 엄벌을 준일이다. 둘째로 교직의 독신생활을 감행한 일이다. 교직자로서 아내가있는 사람은 이혼을 해야하며 그렇지않으면 간음죄를 범한것으로 간주하였다. 셋째는 교직자를 임면하거나 혹은 교회에 속하는 재산을 감독하는 권한을 국왕 혹은 제후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한 아래 둔 것이다. 그레고리는 영국왕 윌리암1세에게 보내는 편지중에 기록하기를
{조물주는 하늘에 두빛을 달아두시므로 만물을 비치는 것처럼 땅에는 두큰 권력을 세우시므로서 만민을 지배하여 잘못된데 빠지지 않게 하신다. 이 두 권력은 교황과 국왕이다. 교황은 큰빛이고 국왕은 작은 빛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래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도의 권력이 국왕의 권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정해져있다.}
이포부를 행함에 있어서 지상의 왕자와의 충돌이 생기지 않을수없었다.특히 힐데부란트의 정책을 실행하는것이 독일제국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없었다. 왜냐하면 독일제국의 토지의 절반은 감독과 회당장의 소유이므로 그 사람들이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지않는다면 독일제국의 주권은 침해를 당하지않을수 없는것이다. 이 때문에 교황과 하인리히 4세와 사이에는 큰 충돌을 피치 못하였다.
교황은 하인리히가 그의 악정으로 제후들의 반심을 사고있는 것을 이용하여 독일제국에 권위를 행사하려 하여 자기소행을 로마에 와서 친히 변명할것을 명하고 ,또 황제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감독이 관직매매에 의하여 그의 지위를 얻었다고 그를 파문하였다.하인리히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1076년 웜스에 국회를 소집하여 교황을 폐할것을 결의하고교황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기를 [지금은 교황이 아니고 거짓수도자인 힐데부란트에게]라고 쓰기 시작한 편지를 보냈다.
교황은 2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를 파문함과 동시에 폐위할 것을 선언하고 국민은 그에게 충성을 다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독일에는 하인리히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인심은 동요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던 제후들 가운데도 교황에게 사죄하라고 강박하는 자가 있으므로 하인리히는 굴욕을 참고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하였다.이 때 교황은 타스카니 백작의 과부 마틸다가 거주하고 있는 아페니 산중의 카노사성에 와있었다.교황은 사죄하려고 찾아 온 하인리히를 용납하지 않았다.
황제는 눈이 내리는 사흘동안을 맨발로 성문 밖에 서서 기다리다가 나흘째 되는 날에야 겨우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 교황의 발 아래 엎드려서 그의 사면을 얻었다.독일에서는 황제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국회를 열고 슈와벤공 루돌프를 택하여 황제의 자리에 앉게 하였다.
교황은 일시 중립을 지켰으나,마침내 루돌프의 편이 되어서 다시 하인리히를 파문하였다.이에 하인리히를 따르는 감독은 회의를 열고 교황을 파문하고 따로 클레멘스3세를 추대하여 교황을 삼고 나아가서 로마를 포위하였다.3년후에는 로마는 함락되고 천하를 호령하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살레르노로 물러가서 1085년 5월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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