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흥미로운 주제였다.
출제자의 정확한 의도와 다소 엇나갈 소지가 있는 주관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르겠지만,
술을 마신 김에, 사진과 그 단어에 대한 개똥철학을 적당히 늘어놓기에 좋은 주제였다.
좋은 토양에서 뿌리를 내렸으면,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련만,
척박함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한, 창틀 사이 작은 틈새에, 저것도 생명이라고 치열하게 살아있다.
사이는 간격을 뜻하기도 한다.
저 층간 사이마다 빼곡한 실외기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달린 실외기가 무엇인지, 가장 나중에 달린 실외기가 무엇인지,
어느 시간 간격을 두고 하나하나 차례로 들어섰는지 궁금해졌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동물들은, 대체로 사람을 경계한다.
만일의 위협이 일어났을 시, 충분히 달아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있다.
당신의 사이는 거리를 뜻하는가?
그나저나, 저 두 고양이 사이는 친한지, 친하지 않은지 쓸데없는 궁금함이 생긴다.
일정한 사이의 간격은,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주고,
일정한 패턴은 재밌는 피사체가 된다.
교각이나, 고가도로의 기둥들 사이도,
왠지, 애니팡 하고 싶게 만드는 우산 장식의 군집 사이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에 문구점(문방구)이라는 곳은,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등교하면서, 혹은 하교하면서 늘상 기웃거리던 공간.
아는 누가 있나, 혹은 괜히 군것질할 만한 것이 있나, 문방구 문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넣어본다.
물론, 어릴 적보다 키가 훌쩍 자랐기에, 허리춤에 카메라를 놓고 어릴 적의 시선으로 찍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저 송전탑 사이의 중앙에 일출하는 해를 두고 사진을 많이 찍는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땐 자욱한 안개와 굵은 눈발이 휘날렸을 뿐이었다.
해가 저물 시간즈음엔,
건물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태양 빛을 담아보기도 한다.
사이는 시간의 흐름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사이,
무성한 수풀들이, 부서진 건물 잔해들과 뒤섞여 우거져있다.
계단 사이를 뚫고 피어있는 들풀 또한 마찬가지.
고요한 잠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파수꾼처럼 그렇게 지키고 있다.
빼곡한 창문들 사이만큼, 많은 가구의 사람들이 저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을 것이다.
정신없어 보이기까지 한, 쭉 늘어진 상가들 또한,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벽과 창문을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벽 하나로 나뉘어진 이질적인 공간의 느낌을 말이다.
길 가장자리, 길목 사이마다, 자신들이 살고 간 오랜 흔적들이 나와 있다.
사진가들은 어떠한 공간을 마주했을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사이로 무언가 지나가 줬으면 좋겠다.'라고.
내가 아는 누군가는 말했다.
공간과 순간이 만나는 그 타이밍을 실수 없이 빠르게 담아내는 것이
사진을 잘 찍는 것이라고.
분식집 매대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아니 그냥 가게 안에 나무가 있다. 분식집 지붕을 뚫고 엄청나게 우거진...
저 가게가 생겨나고 나무가 자란 것인지,
아니면 큰 나무를 베지 않고 가게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해괴한 모습이 참 눈길을 이끌었다.
직선과 수평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건축물 구조 사이에,
사선으로 위치한 에스컬레이터.
사실, 사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제출하려 했던 한 장의 사진이었다.
장수 제한이 없다는 답변이, 사이라는 명사에 조금 더 추상적인 관념을 넣게 되었고,
이렇게 이런저런 넋두리 또한 늘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찰나의 순간 역시, 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긴 기다림을 하기도 한다.
이전에 말한, '저 사이로 무언가 지나가 줬으면 좋겠다.'라고 기도하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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