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野田 寛郎 (1922.3.19~2014.1.16) 오노다 히로
제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군 장교. 최종 계급이 소위이며, 필리핀 전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45년 종전 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홀로 싸워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원주민 수십 명을 무참히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오노다 히로는 1944년 12월 필리핀 마닐라 근처 작은 섬인 루방 섬에 지휘관으로 파견된다.
이때 사단장이었던 요코야마 시즈오가 오노다에게 직접 내린 명령은
옥쇄는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3년이건 5년이건 버텨라. 반드시 지원을 가겠다. 그동안 병사가 한 명이라도 살아있으면, 야자수 열매라도 따먹으면서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옥쇄는 용서하지 않는다. 였다.
오노다는 병사 수백 명을 휘하에 두고,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결사항전의 의지로 사수했다.
1945년 초, 필리핀 탈환전의 일환으로 미군이 함포 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해 오자, 크게 피해를 입고 휘하 군대가 반쯤 와해되어서 일부 부하들과 함께 섬 안쪽인 산속으로 패퇴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반쯤 빨치산화되어서 국지전을 계속 벌였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결국 패전했다.
미군은 이 사실을 삐라를 통해 산 속에 남아있던 일본군 패잔병들에게 알리고, 실제로 많은 패잔병들은 그 삐라를 보고 투항했지만, 오노다와 그 휘하의 일부 병사들은 '이것은 악랄한 미국놈들의 프로파간다이자 기만책'이라고 믿었다.
오노다 일행은 총 4명이었는데 이중에서 한명은 종전 몇 달만에 다른 3명이 말리는데도 필리핀 정부군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은 투항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계속했다.
이런 상황을 가만 냅두면 미군이나 일본, 무엇보다 필리핀 정부에게도 골치아파지므로, 어떻게든 오노다를 투항시키려고 했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부터 전쟁 중 오노다 휘하의 부하였던 사람을 섭외해서 전쟁은 끝났다고 설득하거나, 아예 오노다의 친인척까지 직접 데리고 와서 꾸준히 설득해보지만, 오노다는 이마저도 미군의 기만책으로 여기고 여전히 투항을 거부했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생존을 위해 식량 등은 반드시 필요했는데, 오노다는 필리핀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필리핀인들이 순순히 재물을 넘겨줄 리 없으니 대부분 저항했는데 살해하고 집을 불태운 뒤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투 와중에 붙잡은 필리핀군 포로들은 당연히 당시 일본군이 저지르던 관행대로 잔인하게 살해해서 필리핀인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오노다 히로 소위와 그 휘하 부하들은 29년 동안 이렇게 필리핀군과 민간인을 30명이나 살해했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아예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 지르는가 하면 사람을 토막 내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그는 99식 소총과 탄환을 무려 29년 동안이나 보관하면서 상시 사용 가능하게 관리했고, 이런 끔찍한 만행을 투항할 때까지 계속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이를 본 필리핀 정부 또한 당연히 토벌대를 보내서 일본군 잔당 퇴치 작전을 벌이며 대적했으며 다수의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살되었다.
이는 이걸 본 오노다가 역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치하던 상황에서 1954년 휘하 부하이던 시마다 오장이 사살당하고, 1972년에는 마지막 남은 휘하 부하인 고즈카 일병이 사망하면서 결국 홀로 남았다.
하지만 종종 루방 섬 상공을 지나다니는 비행기를 공습으로 착각하고, 단파수신기를 통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군용 전파를 잡는 등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후에 밝혀진 바로는, 토벌대가 일부러 당시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 등을 남겨 오노다에게 보게 했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 도카이도 신칸센의 개통이나, 당대 일본 황가의 사진 등 일본이 건재하다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전쟁은 끝났고 일본은 재기 중이라는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그걸 보고도 우리 조국인 일본이 이렇게 번영할 리가 없다면서 '이미 일본은 미국의 괴뢰 정권화됐고, 만주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운 게 분명하다.'고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뿐이었다고 한다.
만약 상황이 쭉 이대로 갔으면 오노다는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다른 패잔병들처럼 싸우다 죽었을 테지만, 1974년 스즈키 노리오(鈴木規夫)라는 대학생 때문에 상황이 급변했다.
스즈키는 '남방 군도에 구 일본군 패잔병이 아직도 살아있으며, 홀로 항쟁 중'이라는 소문에 흥미를 느껴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오노다를 만났다.
스즈키는 침착한 언행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끝내 오노다는 일본이 패전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전투를 중단했다.
하지만 오노다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직속 상관이 직접 와서 항복 명령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며 버텼다.
일본 정부 측에서도 이를 가만 두면 굉장한 골칫거리가 될 게 뻔하기에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전쟁 당시 오노다의 직속 상관 중 한 명이었던 타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를 통해 투항 명령서를 전달하면서 결국 혼자만의 전쟁을 끝내게 했다.
요시미는 종전 시 계급은 소좌(소령)로 종전 후 서점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고 한다. 3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때는 63세의 노인이었으나 워낙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고, 그래도 한때 전우였던 부하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노구를 이끌고 직접 루방 섬까지 갔다고 한다.
사수 명령을 내린 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横山静雄)가 직접 투항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즈오는 종전 후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어 1953년 석방된 뒤 1961년에 사망했는데, 오노다가 살아서 항쟁 중이라는 게 알려진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타니구치가 대신 가게 된 것.
타니구치 요시미의 명령서는 다음과 같다.
1. 천황폐하의 명령에 따라 제14방면군은 모든 작전행동을 해제하였다.
2. 참모부 별반(参謀部別班)은 작전 명령 갑-제2003호에 의하여 모든 임무가 해제되었다.
3. 참모부 별반 소속의 모든 부대와 장병들은 즉시 전투와 공작을 중지하고 가장 근접한 장교의 휘하에 들어가라. 직근(直近)의 장교가 없다면 미군 또는 필리핀군에 연락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ㅡ 제14방면군 참모부 별반 반장 타니구치 요시미
투항 직후 오노다는 타니구치 소좌에게 필리핀군의 최신 레이더 기지 등 그동안 획득한 군사 정보에 대해 보고했다.
오노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고, 각종 군장들도 전시 상태에 알맞게 제대로 정비된 상태였다고 한다.
모자 챙이 찢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군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었고, 사격이 가능한 상태의 99식 소총과 500발의 탄환, 대여섯개의 수류탄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끊임없이 손질하고 정비한 덕에 반짝반짝 빛나고 날이 살아있던 일본도였다.
그리고 이 상태로 옛 상관인 타니구치 소좌에게 날카로운 눈매로 경례를 하는 사진이 일본 열도를 센세이션으로 몰고 갔다.
이어 많은 일본 관료와 언론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인근 필리핀 군 기지를 찾아가 사령관에게 무릎을 꿇고 차고 있던 군도를 내놓으면서 정식으로 무장을 해제한 뒤 항복했다.
3줄 요약
살짝 미친 일본군 장교가 패전 후 29년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정글속에서 혼자만의 전쟁을 수행함.
그 과정에서 무고한 필리핀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다가 설득 끝에 항복(?)함.
필리핀 측에선 일본의 경제적 지원도 있고 무역적 문제도 있어서 처벌하지 않고 그냥 일본으로 보내줬고, 일본 우익들이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떠받들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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