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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아버지와 도둑 아들 5

운영자 2010.04.08 10:21:24
조회 225 추천 0 댓글 0

  재판하는 날 아침도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법정으로 가는 길인 강변도로는 온통 차량으로 뒤엉켜 있었다. 아예 차들이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배기가스만 붕붕 뿜으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재판 시간은 다가오는데 차는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으로 있었던 것이다. 초조하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차 안에 부착된 라디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조금 전에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렸다는 아나운서의 경악에 찬 보도가 흘러나왔다. 잘못하면 애써 변론을 재개한 법정에 못 갈 것 같은 불안감이 언습했다. 안간힘을 쓰며 차들 사이를 비집고 한 시간 가량 늦게 법원에 도착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법정으로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재판장을 향해 “사건번호 ○○번 피고인 김순호 입니다.”라고 외치며 법대 밑 오른쪽의 변호인석에 간신히 가서 앉았다.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이제야 “휴”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것이었다.

  재판장이 법정에 나와 있는 교도관에게 명령을 했다. 김순호가 수갑을 찬 채 걸어 나와 피고인 석 앞에 섰다. 뒤에서 쳐다보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지난번에 검찰에서 다 신문을 했으니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하시죠.”

  재판장은 바로 변호인인 내가 할 소리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재판장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문을 열어 달라고 말이다.


  “피고인! 재판장님 앞에서 지금부터 내가 ane는 말에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까?”
  “네..”


  금순호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먼저 피고인이 한 행동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죠? 변명의 여지도 없지요?”

  “네..”


  “피고인은 가난한 아버지가 뒤늦게 화랑에 그림을 팔아서 어음을 받고 다시 그 어음을 할인해서 돈을 만들어 피해자와 합의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구치소에서 면회 온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피고인은 아버지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든 의미가 무언지 알고 있나요?”

  “....”


  “피고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S대 서양학과를 나온 이후부터 내 후년이면 환갑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을 오직 작품 창작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피고인 아버지는 남에게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거저 주면줬지 한 번도 화랑에 가져가 상품으로 내놓은 적이 없는 진정한 예술가 아니었나요? 그런 피고인의 아버지는 피고인이 이번에 감옥에 갇히게 되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화랑에 가지고 가서 돈을 구걸했습니다. 그 순간은 몇 품의 돈이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지켜 온 한 예술가의 혼이 꺾여진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흐흑..”


  구슬 같은 눈방울이 떨어지며 김순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피고인은 일찍이 어머니가 무능한 아버지를 탓하며 도망을 가자 아버지의 화실 한 귀퉁이에서 자라났지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코펠에 밥을 해 주고 밤이면 건물주 몰래 화장실에 스며들어 피고인의 양말이나 때 묻은 옷들을 빨래하며 자식을 키운 걸 기억하고 있지요? 이제는 늙고 힘없는 아버지에게 효도할 때가 아니었나요?”
  “어엉엉..”


  김순호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청석 뒷자리에서 아들의 재판을 지켜보던 그의 눈도 흥건히 젖어 가는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피고인은 작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구치소에 찾아간 본 변호사에게 말한 적이 있죠?”

  “네.”


  간신히 대답하면 그는 흐느꼈다.


  “그래서 피고인은 이번에 남의 신용카드로 공부하고 싶었던 일본의 산업 디자인 책과 일본말을 배우기 위한 일본어 교재, 그리고 그래픽을 실습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게 된 것 아닙니까?”

  “....”


  “피고인은 지난 번 법정에서 잘못을 뉘우치면서 모든 것을 자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따질 건 따져 둡시다. 피고인은 책과 컴퓨터 이외에는 신용카드로 산 게 없지요? 그런데 피고인의 공소장에는 피고인이 신사복도 해 입고 식사도 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어떻게 된 겁니까?”

  “네, 저는 양복이나 밥 사먹은 적은 없어요..”


  “그렇다면 수사 과정에서 신용카드의 임자가 한 것도 일부 피고인이 한 양 잘못되었다는 소린데요. 피고인,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요?”

  “네.”


  담당 공판 검사의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법대에 있는 판사들과 재판장의 태도에서도 연민의 빛이 서서히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듯 했다.


  “피고인! 피고인은 이제 어른입니다. 대학에 가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지 못했다고 해서 예술적으로는 몰라도 사회적으로 아버지를 무능하다고 원망할 나이가 아닙니다. 또 공부하고 싶어도 남의 신용카드를 훔쳐서 했다는 건 백보를 양보해도 좋지 못한 일입니다. 피고인은 비록 반성은 하더라도 그 점에 대한 책임은 질 각오가 되어 있지요?”

  “네.”


  눈물을 닦으며 그는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전체적인 그의 모습에서 이미 그만큼의 징역살이는 각오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피고인이 음주운전으로 벌금 30만원이 나온 게 두려워서 우연히 주운 남의 주민등록증에 사진을 오려 붙였습니다. 피고인은 돈 30만원보다 공문서 위조가 얼마나 중한 죄인지 몰랐나요?”

  “그건 정말 단순한 생각에서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 했을 뿐입니다.”


  “재판장님, 마치겠습니다.”

  재판장이 옆에 있던 배석판사와 무엇을 의논하는 듯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재판장이 무슨 결심이 섰다는 듯 검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검찰 측 어떻습니까? 피고인이 훔쳤다고 하는 물건 중 신용카드로 식사를 했다는 부분이나 신사복을 샀다는 부분은 빼시지요?”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서 재판장 쪽을 향했다.


  “네, 공소 사실 중 그 부분뿐만 아니라 증거가 명확치 않은, 다른 지갑을 훔쳤다는 부분까지 모두 공소를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면 공소를 취소하심 부분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공소기각의 결정을 하겠습니다.”


  순간적으로 그의 죄가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추가 조사를 생략한 공판검사의 온정이 그 행동 속에 스며 있었다. 나는 이미 지난번 법정에서 모든 절차를 거친 상태라 바로 일어서 변론에 들어갔다.


  “재판장님! 이 사건은 잘못된 인격 형성으로 남의 물건을 훔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 변호인은 생각합니다. 비록 피고인이 남의 신용카드를 훔치기는 했지만 그는 결코 다른 범인들처럼 유흥에 그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의 책과 컴퓨터를 샀을 뿐입니다. 피고인이 유복한 환경에 있었더라면 산업디자인 책이나 공부 도구는 물론 그 부모가 온갖 과외를 시키면서 대학 입시에 재수를 시켰을 아직 어린 나이입니다. 아직 어린 피고인은 공부하고 싶은 열망을 눌러 참으면서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냉대와 모멸의 시선을 받으며 외판 사원으로 다녔습니다. 그는 무능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비슷한 또래의 부잣집 망나니 아이들에게 질시의 마음을 가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 피고인은 순간적인 잘못으로 두 달 동안을 어둡고 음산한 구치소의 잡범들이 모이는 미결방에서 지내왔습니다.  처음으로 잘못을 범한 피고인은 처음에 뼈저린 반성과는 달리 지금 수많은 잡범 사이에서 오히려 영혼에 때가 껴가고 있는 상태라고 본 변호인은 생각합니다. 얼마 전 변호인이 구치소로 찾아갔을 때 그가 ‘처음에는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두달 동안 절도 전과가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니 점점 죄의식이 없어져요’하고 걱정하는 말을 한 게 단적이 예입니다. 아들의 잘못으로 인해 환갑에 이르기까지 피고인의 아버지는 등뼈처럼 주체성처럼 지니고 있던 예술 혼마저 꺾이고 말았습니다. 피고인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기의 그림을 화랑에 가지고 가서 어음을 받고 다시 그것을 처음으로 사채업자에게 가지고 가서 할인한 돈으로 피해자와 합의 했습니다.  본 변호인은 피고인에 대하여 다가오는 겨울을 감옥에서 지내게 하기 보다는 그의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아직 어린 피고인에게 어떤 형태이든 간에 재판장님의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기를 본 변호인은 간절히 희망합니다.” 

  피고인 김순호는 수갑을 눈까지 올려 눈물을 닦으며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숙연해진 방청석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의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자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빠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변호사를 선임했을까에 대한 재판부의 의문에 대답을 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잠깐 재판장님!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본 변호인도 피고인의 아버지로부터 변호료로 귀한 그림 한 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좀 미안하지만 받을 겁니다.”

  엄숙해 있던 법대위의 배삭판사 한 사람이 그 순간 ‘킥’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재판장의 얼굴에서도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변호인, 가만히 들어보니까 변론을 다 하셨는데요. 제가 변론하시라는 말도 안 했는데 마지막까지 다 하시면 재판장인 저는 뭐합니까?”

  재판장이 빙긋이 웃으면서 나의 실수를 지적했다.


  “아, 미안합니다. 지난번에 변호인 없이 다 했다는 재판을 다시 하는거라 변호인 역할만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재판장은 검사 쪽으로 얼굴을 돌려 말했다.


  “검찰 측은 지난번에 구형을 하셨는데 그 형량을 그대로 유지하시는 거지요?”

  “아, 아닙니다. 구형량을 저도 반을 깎겠습니다.”


  검사는 벌떡 일어서며 흔쾌히 대답했다.


  “피고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

  재판장이 최후 진술의 기회를 다시 주었다.


  “어엉엉.. 어엉엉..”

  그는 지나간 세월이 다시 생각되는지 정신없이 눈물을 쏟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 결심하도록 하고, 선고 기일도 2주일인 보통인데 1주일 후로 당겨 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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