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경희]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2006년 미국 영화연구소가 뽑은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됐다. 샤론 역의 그레이스 박이 출연한 장면들.사춘기에는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한다. 하지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어른으로 훌쩍 성장한다. 반면 태생적 이유 때문에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혈연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혼혈인부터 외국으로 이민 가 고군분투하는 교포들까지…. 주변인, 혹은 경계인으로 불리는 이들은 주류 사회에 속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한국계 배우 그레이스 박(33)도 그런 경우다. 미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지만 외모는 아시안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살면서도 ‘미드(미국 드라마)’에 출연해 주 활동 무대는 미국이기도 하다. 미국 SF전문 채널 ‘Sci-Fi(사이파이)’의 대표작 ‘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로 스타덤에 오른 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국내에선 시즌 3이 케이블 FOX 채널에서 매일 자정 방송되고 있다.

드라마에서 인류는 자신이 창조한 ‘사일런’(인간과 생김새가 똑같다)의 공격을 피해 낡은 우주전함 갤럭티카호를 타고 정착할 곳을 찾아 나선다. 우주 전쟁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 사랑과 정치 등을 그려낸 SF 수작이다. 2003년 ‘시즌 0’으로 시작해 내년 방송될 ‘시즌 4’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국내에선 애칭 ‘배갈’로 불린다.

그레이스 박은 주연급인 갤럭티카호의 전투기 조종사 샤론(콜 사인 ‘부머’) 역을 맡았다. 뒤늦게 자신이 사일런임을 알아채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샤론. 그레이스 박의 실제 모습을 닮은 듯하다.

“저는 캐나다인이자 한국인이에요. 그러나 캐나다인에 가깝죠. 다만 외모가 이들 같지 않지만…. 미국에서도 단지 외국인일 뿐이죠.”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한국계로서의 정체성을 버릴 수도 없었다.

“부모님은 늘 한인 사회의 평판을 신경 쓰셨죠.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저를 한국인으로 여기는 점 때문에 좀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가 한국에 가면 한국인이 아니란 게 금방 티 나지 않나요?”

복잡한 정체성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장벽을 느껴본 적은 없을까.

“장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 벽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물론 연기 초년병 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이나 중국인 역할을 맡아 고생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젠 제가 원하는 캐릭터를 고를 수 있죠. 오히려 도전할 기회가 많아요.”

그는 22일 국내 개봉 예정인 재미동포 2세 마이클 강 감독의 ‘웨스트 32번가\'에 주인공의 누나 라일라 역으로 출연한다. 교포들의 정체성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놀라웠어요. 그렇게 많은 한국계 미국인과 일해 본 게 난생 처음이에요. 서로 얼마나 빨리 유대감을 갖는지 놀라울 정도였죠. 같이 저녁 먹고 노래방 가고, 꼭 특별한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웨스트 32번가’는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그레이스도 박도 레드 카펫을 밟았다. 그는 “생애 가장 긴 레드 카펫을 밟으며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가슴이 따뜻해졌다”고 회상했다. 부산을 더 진하게 느낀 건 행사장 밖에서였다.

“아시아 매니저들은 파티장에서도 일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파티가 지루해서 일행들이랑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겨 낙지와 소주를 시켰어요. 낙지가 살아 꿈틀대는 바람에 다들 소리 지르고, 도망치고…. 정말 재미있었어요.”

낙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박찬욱 감독에 대해서도 물어봤다(‘올드 보이’에서 최민식이 산 낙지를 먹는 장면이 미국 언론에서 논란거리가 됐었다).

“‘올드 보이’나 ‘친절한 금자씨’ 같은 작품을 무척 좋아해요. 독창적이고 혁신적이죠. 함께 작업하자는 제의를 받았는데, 새 드라마에 캐스팅 돼 다음달부터 LA로 촬영을 가요. 그래서 박 감독과 조만간 함께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한국에서도 스타가 되고 싶느냐고 묻자 “한국에서 일하고 싶지만 스타가 되길 원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그저 일을 즐기는 것뿐이란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할리우드 스타가 아닌가.

“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스타가 되면 피곤하잖아요? 매일 화장해야 하고, 사람들의 머릿 속에 있는 이미지에 부합하도록 살아야 하고…. 너무 부담스럽잖아요.”

그렇다면 연기자로서 그가 중요시하는 건 뭘까.

“캐릭터를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그게 안 되면 프로가 되지 못하거든요. 연기력은 기본이고요.”

그런 프로 정신이 주변인이던 그를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킨 건 아닐까.

인터뷰가 끝나자 그레이스 박은 유창한 한국어 발음으로 “한국말 너무 못해요”라며 미안해했다(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엔 그가 한국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잘못된 정보예요. 몇 년 전 연세어학당에서 5주짜리 단기 코스를 수료했을 뿐이에요. 이름이 같은 골퍼 그레이스 박(박지은)이랑 같은 날에 태어난 걸로 오해 받기도 했어요. 인터넷엔 제 생일만 네 개라니까요.”

미드 한국계 배우 새 시즌에만 6명 활약

뜨는 ‘미드(미국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한국계 배우다.

‘로스트’에서 김윤진과 함께 활약한 대니얼 대 킴이 한국계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이외에도 현재 미국 현지에서 방송 중인 미드 새 시즌에만 6명의 한국계 배우가 등장한다. 샌드라 오(사진<左>·그레이 아나토미), 문 블러드굿(저니맨), 윌 윤 리(바이오닉 우먼)와 조이 오스만스키(그레이 아나토미), 찰리 리(척), 제임스 기선 리(사진<右>·히어로즈) 등이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샌드라 오는 이미 국내에서도 유명한 한국계 배우다. 같은 드라마의 시즌 4부터 인턴 ‘루시’ 역으로 등장하는 조이 오스만스키는 한인 입양아 출신이다.

‘저니맨’에서 주인공의 옛 약혼녀로 비중 있게 출연하는 문 블러드 굿은 ‘에이트 빌로우’와 ‘패스파인더’로 얼굴을 알린 혼혈 배우다. ‘소머즈’의 리메이크 버전인 ‘바이오닉 우먼’에는 한인 2세 윌 윤 리(한국명 이상욱)가 바이오닉 우먼들을 훈련시키는 트레이너로 등장한다. 코미디 액션 드라마 ‘척’에 출연하는 찰리 리는 주인공의 라이벌 역으로 등장한다.

제임스 기선 리는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방영 중인 ‘히어로즈’에 일본인 안도 마사하시 역으로 등장한다. 미국 주간지 ‘아시안 위크’는 지난달 ‘할리우드가 아시아 남자들을 더 좋아하게 될까?’란 제목의 기사에서 윌 윤 리, 대니얼 대 킴 등의 한국계 배우를 주목하기도 했다.

동양인으로서의 매력과 연기력은 갖추되 언어와 문화 장벽은 없는 한국계 배우군단이 미드 열풍의 한복판에 서 있는 모양새다.

이경희 기자<DUNGL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