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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번외편 《 네 사람의 크리스마스가 끝난 후 》

ㅁㄴㅇ(1.229) 2014.09.04 23:55:47
조회 36020 추천 147 댓글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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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아침 공기에 부르르 몸이 떨린다. 전날 과음한 탓인지 머리도 지끈거린다.

 추위와 숙취에 반쯤 깨어버렸지만,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은 아직도 수면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거역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오늘은 주말이고, 달리 예정도 없으니까.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세 시간 정도 더 잔들 문제는 없을 것이다. 좋아, 더 자자.

 그렇게 결정했으니 남은 건 이불이다. 아무리 난방이 되어있어도 이런 추운 겨울날에 이불을 안 덮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워서 잠을 잘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잠이 들었다고 해도 감기에 걸릴 게 분명하다. 

 나는 잠결에 걷어찬 모양인 이불을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 최악에는 몸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지만, 다행히 이불은 더듬거릴 필요도 없이 손을 뻗자마자 찾아낼 수 있었다. 감촉으로 판단하건대 내 옆에서 자는 사람이 잠결에 자기 쪽으로 다 끌어가 버린 모양이다. 

 뭐 이런 괘씸한 잠버릇이 다 있나 생각하며 내 쪽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 따듯하다…… 옆 사람의 체온으로 데워졌기 때문인지 이불은 감미로울 정도로 따뜻했다. 이 온기라면 금방이라도 다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대체 누구랑 같이 자고 있는 거냐…….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거짓말처럼 잠기운이 사라지고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어젯밤까지 나는 유키노시타의 맨션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있었을 터이다.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 그리고 히라츠카 선생님까지 넷이서.

 원래는 봉사부 출신 셋이서 조촐하게 성스러운 밤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예정에 없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낀 탓일까, 밤이 깊어짐에 따라 상스러운 술 파티가 되어버렸고, 술에 취해 우리에게 음주를 강요하는 히라츠카 선생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주량 이상으로 술을 마셨던 것까진 기억한다.  

 그때가 밤 11시 정도였던가…… 그 이후로는 필름이 끊긴 모양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술에 취해서 그대로 유키노시타의 맨션에서 잠이 든 걸 거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그렇다 쳐도 나와 유이가하마는 도저히 혼자서 집으로 들어갈 만한 생태가 아니었을 테니까 유키노시타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아무리 취했다 한들 그 유키노시타가 남자인 나와 다른 여자를 한이불에 재울 리가 없을뿐더러, 이 방의 풍경으로 보건대 유키노시타의 맨션이 아닌 건 명백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깨달은 거지만…… 나는 지금 전라 상태인 거다.

 

 "뭐……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술에 취해 실수를 저지른 적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지금처럼 간담이 써늘한 적은 없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아니, 기억에 없는 걸 떠올리려고 해봐야 무의미하다. 우선은 옆에 있는 게 누군 지부터 확인해보자. 고민과 후회는 그 후에 해도 충분하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나와 한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전라(추정)의 히라츠카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귀여운 여자아이라고 생각했나? 유감! 시즈카였습니다!


 "……."


 일단 정리해보자. 어제는 유키노시타의 맨션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그리고 히라츠카 선생님의 반강요로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셨다. 여기까진 문제없다. 

 문제는 오늘 일어나보니 히라츠카 선생님과 선생님의 방으로 추정되는 낯선 방에서 전라 상태로 한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는 건데…… 이거 역시 한 거겠지? 이 일련의 흐름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다.

 엑? 나 히라츠카 선생님으로 동정 탈출한 거야? 그야 22살이 되도록 성경험은 고사하고 연애경험도 제대로 없다 보니 슬슬 이러다가 동정 마법사가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본래라면 자축해야 할만한 일이겠지만 탈 통정(아마도)을 자축하는 마음이 들기는커녕, 불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어쩌자고 나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건드린 거냐…… 설마 강간 같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거다. 맨정신일 때도 이길 자신이 없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만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로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만취해 제정신이 아닌 히라츠카 선생님이 기쁘게 받아들일 가능성도 0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잊도록 하자. 

 잠깐, 설마 한 번만 해달라고 조르거나 한 건 아니겠지? 이따금 욕구불만으로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비틀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아닐 거로 믿고 싶다. 만에 하나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그런 추태를 부린 거라면 이불을 차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이젠 정말 수치심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양자합의 하에 했다고 믿고 싶다.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만……


 "후우……."


 왜 하필 나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건드리고 만거냐……

 딱히 히라츠카 선생님이 싫은 건 아니다. 유이가하마나 유키노시타라면 괜찮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히라츠카 선생님과 자는 것은 유이가하마나 유키노시타와 자는 것과는 그 무게가 다르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곤 하나 끝없는 혼활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실패해 정신이 벼랑 끝으로 몰린 30대 중반의 노처녀를 건드리다니 농담으로는 끝나지 않을 일이다. 이젠 정말 책임지고 결혼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뭐, 무리겠지만. 현실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책임지라고 하는 꼴밖에 안 된다. 진지하게 얘기해서 모아둔 돈도, 번듯한 직업도 없는 나로서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결혼 상대로서 역부족인 거다. 무엇보다도 띠동갑보다도 더 나이 차가 나를 히라츠카 선생님이 이성으로 느낄 리가 없다. 맨정신이라면 말이다.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할 수 없는 사랑과 분노와 슬픔에 샤이닝 핑거 소드를 쓸 수 있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히라츠카 선생님이다.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가 되어 이곳저곳 커플들로 북적이는 크리스마스는 고통 이외에 달리 무엇도 아니었을 거다. 그리고 그 고통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술에 잔뜩 취한 상황에서는 나 같은 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설령 합의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도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설령 그것이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하룻밤의 위안이 되었다 한들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침이 오면 그 위안보다 몇 배나 큰 괴로움을 안겨주고 말 테니까. 

 죄책감이 가슴을 꾹꾹 조여온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역시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할까? 

 아니, 사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마음은 없었다고, 실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과의 말이야말로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더 큰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무슨 말을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젯밤은 좋았어요♡'하고 농담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르쳐줘. 우페이, 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제로는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대체 어쩌면 좋은 거냐고―!!


 "아~ 시끄러워!!!"


 망했다. 나도 모르게 그만 입 밖으로 내버린 모양이다……. 

 잠에서 깬 히라츠카 선생님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취와 졸음으로 컨디션이 엉망인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다. 

 자면서 눌리고 뻗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남자다운 나머지 색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것도 함께 밤을 보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풀어진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니, 지금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될 되긴 했지만, 히라츠카 선생님도 일어나셨으니 이제는 각오를 다지자.


 "히키가야,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좀 조용히 해라……."

 "어? 아, 네."


 어라? 뭐지…… 

 히라츠카 선생님은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으신 건가? 나만 같이 자고 있던 걸 신경 쓰는 거야? 술에 취한 나는 그렇게까지 히라츠카 선생님이랑 진도를 나가버린 거야? 엑?


 "……응?"


 너무나도 태연한 히라츠카 선생님의 반응에 속으로 당황하고 있는데, 이불을 목까지 덮어 올린 채 눈을 감고 있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돌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회동그래진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어…… 히키가야…… 왜 네가 내 방에 있는 거냐?"

 "……글쎄요. 저도 제가 왜 여기 있는 건지 묻고 싶네요."

 "어…? 어라……?"


 아하,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라 잠결에 정신을 못 차렸던 것뿐이구먼. 순간 이것이 어른의 여유인가 하고 감탄할 뻔했잖아.

 그건 그렇고 전라로 한이불을 덮고 있는 상황이 심히 부담스럽기 때문에 슬슬 나가고 싶은데, 이불에서 나가면 내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보여주게 되기 나갈 수가 없다. 

 하다못해 옷이라도 가까이 있다면 좋겠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의 속옷은 보이는데 내 옷은 대체 어디다 던져놓은 건지 안 보인단 말이지. 아까 깨어났을 때 미리 옷부터 찾아 입어둘 걸 그랬다.


 "……."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지만, 필름이 끊긴 후의 기억이 전혀 없다보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역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야겠지? 같이 잠까지 자놓고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다니 이런 실례가 어딨나 싶지만, 정말로 기억이 안 나니 어쩔 수 없다.


 "아…… 저기…… 히라츠카 선생님? 죄송한데……"

 "크하아아아아아아아앗―!! 나는 대체 무슨 짓을―!!"


 갑자기 벌떡 일어난 히라츠카 선생님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깜짝 놀라 히라츠카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당황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


 아아, 그런 건가…… 역시 나 같은 놈이랑 같이 잔 건 흑역사밖에 안 되는 건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까지 당황하고 질겁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쓰라리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같이 잔 걸 사과하는 건 실례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의 이 반응을 봐서는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히라츠카 선생님, 어제는 정말 죄송……"

 "미안하다 히키가야…… 널 덮쳐버린 것 같다……."

 "…………네?"


 엥? 내가 지금 잘못들은 건가? 지금 히라츠카 선생님이 날 덮쳤다고 들린 것 같은데……


 "히라츠카 선생님……?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그…… 술에 취한 널…… 내가…… 더, 덮쳐버렸다……."


 뭐……라고……? 

 합의도 아니고, 덮친 것도 아니고, 덮쳐진 거라고……? 강간을 당했다 그런 말인가……?


 "……제가 히라츠카 선생님을 덮친 게 아니라 히라츠카 선생님이 절 덮쳤다고요?"

 "그, 그런 거다……."

 "어, 그러니까…… 지금 절 강간하셨다 그런 말인가요?" 

 "저, 전문용어로는 그렇게도 말하지……."


 뭐야,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나~ 괜한 걱정을 했군.

 내가 가해자일 거라고만 생각해서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데 사실은 피해자였다니 정말 다행이다. 아아, 안심했다.


 ……라고 안심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날 강간했다니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히라츠카 선생님에 대한 죄책감은 사라졌지만, 이젠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 같은 놈을 덮칠 정도로 히라츠카 선생님은 남자에 굶주리셨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빨리 누가 좀 데려가 달라고…… 제발 누구든 구제해 달라고 말했잖아……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젠 진짜로 어쩌면 좋은 거냐고…… 


 "……일단 확인하는 건데요. 왜 저를 덮치신 거죠?"

 "수, 술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술에 취해서인가요. 가해자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큭…… 뭐라 할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며 히라츠카 선생님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두손을 공손하게 땅바닥에 짚고는 땅바닥을 향해 바짝 머리를 숙였다. 요컨대 도게자를 한 것이다.


 "에엑!?"

 "히키가야, 정말로 미안하다. 이런 걸로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용서해다오……." 

 "……."


 히라츠카 선생님이 저지른 짓은 말할 것도 없이 아웃이다. 만취하여 심신상실 상태에 빠진 것을 이용하여 간음한 거니까. 

 만약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한다면 교직에서 잘리는 건 물론이고, 적지 않은 위자료와 함께 빨간 줄까지 긋게 되겠지. 성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평생을 부끄럽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정도로 무거운 중죄다.

 하지만 창백해진 얼굴로 엎드려 사과하고 있는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띠동갑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옛 제자에게 반강제로 술을 먹인 끝에 강간을 하다니, 그것이 교사로서 할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기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정말로…… 크흑…… 미안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화를 내진 않았을 거다. 이렇게 눈물로 사죄하지 않더라도 나는 분명 히라츠카 선생님을 용서했을 거다. 그녀라면 용서할 수 있다.

 요컨대 그거다. 네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는 거다.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누군가의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나와 친밀한 이웃의 죄는 용서해줄 수 있는 거다.

 자존심도 버리고 나체로 땅바닥에 이마를 조아린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죄하고 있는데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겠는가.

 나는 흘러내리는 이불을 추스리며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라츠카 선생님. 그만 고개를 드세요."

 "정말로 미안하다……."

 "사과 같은 거 하시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만 고개 드세요."

 "히, 히키가야……!"


 그 목소리에 조금은 안심을 한 것인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안심시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눈물이 글썽이는 선생님의 눈은 마치 '나를 용서해주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상냥하게 말했다.


 "사과하는 걸로 용서된다면 경찰은 필요 없잖아요?"

 "크헉―!?"


 히라츠카 선생님이 명치라도 맞은 것처럼 신음을 내지르더니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는 한참을 몸을 비틀다 옆으로 쓰러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텅 빈 히라츠카 선생님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렇구나…… 사과하는 걸로 끝날 일은 아니구나……"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니까 그런 죽은 눈은 그만두시죠. 무서운데요……."


 그 오버액션은 뭡니까? 강간은 제가 당했는데 왜 선생님이 죽은 눈을 하는 거냐고요. 예? 그보다 진짜로 자살이라도 하실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만……. 

 

 "후후…… 30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은 커녕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보다 끝내는 옛제자를 강간…… 나란 인간은 정말 막장이구나……  후후…… 이제는 책임지고 할복하는 수밖에 없겠군……."

 "아니아니, 진짜로 농담으로 한 말이니까! 멋대로 죽어버리는 쪽이 훨씬 더 민폐니까!"

 "……그렇구나. 멋대로 죽어버려도 곤란하겠구나. 걱정마라 히키가야. 죽더라도 위자료는 제대로 지불하고나서 죽을 테니까……."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일단은 강간 피해자인데 단번에 괜찮다고 웃어넘기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짓궂게 농담 한번 한 건데 이리 심각하게 반응하니 난감할 따름이다. 

 하기야 조금 전에 새파랗게 질렸던 걸 생각해보면 가해자인 히라츠카 선생님 본인으로서도 작지 않은 충격이었을 거다. 만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곤 해도 교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중범죄를 저지른 거니까. 맨정신이었다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아, 히라츠카 선생님?"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노처녀가 되도록 시집도 못 간 못난 딸이 어린 제자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들으면 엄마는 분명 졸도해버리겠지…… 후후……." 

 "히라츠카 선생님? 듣고 계시나요? 여보세요?"


 주의를 끌 생각에 히라츠카 선생님의 눈앞에서 수차례 손을 흔들어봤으나 대답이 없다. 그냥 시체인 것 같다. 


 "역시 죽는 수밖에 없겠군…… 아니지, 죽더라도 감옥에서 죗값을 치른 후에 죽는 게 최소한의 도리인가……."


 죽는 건 확정인 건가…….

 이거 안 되겠군.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점점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정신 차리게 할 생각으로 가볍게 그녀의 뺨을 때렸다. 짝! 하고 건조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후극―!?"

 "엑……?"


 망했다. 너무 세게 때려버렸다…… 

 다른 사람의 뺨을 때리는 건 처음인지라 살짝 때린다고 때렸는데, 긴장한 탓인지 생각보다 힘이 들어가버린 모양이다. 뺨 말고 박치기를 할 걸 그랬어…! 

 뺨을 맞은 아픔에 정신이 들었는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손으로 뺨을 감싸며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때려놓고 멍을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태연한 척 말했다.


 "히라츠카 선생님. 화낼 생각도 없고, 신고할 생각도 없으니까 일단 좀 진정하시죠."

 "어, 어?"

 "그야 얘기 듣고 놀라긴 했지만, 전혀 기억도 안 나는 일이고, 딱히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 말에 히라츠카 선생님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훗, 히키가야는 상냥하구나……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히라츠카 선생님은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아뇨, 괜찮으니까. 진짜로 화 안 났으니까."

 "너에게만은…… 흑…… 좋은 선생님으로 남고 싶었는데…… 크흣…… 이렇게 돼버려서…… 미안하다……."

 "지금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나요? 진짜로 괜찮으니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면 강간이 아니니까! 화간이니까!"  

 "술 같은 걸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하다 히키가야…… 정말로…… 미안하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히라츠카 선생님은 눈물을 훌쩍이며 고장 난 라디오처럼 미안하다는 말만을 계속했다.

 하아…… 어쩔 수가 없구먼. 이건 위로해주는 수밖에 없겠구먼. 아는 여자애가 울고 있으면 꼭 위로해주라고 코마치가 말했으니까. 30대 중반인 히라츠카 선생님도 여자애의 범위에 들어가는지는 의문이지만 6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다. 뒤숭숭한 소리를 하면서 훌쩍이고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간당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해야 한다니 뭐 이런 불합리한 일이 다 있나 싶지만 어쩌겠는가. 남녀 간의 일은 원래 불합리한 법이다. 여학생이 같은 반 남학생의 엉덩이를 두들기는 건 장난이지만, 남학생이 같은 반 여학생의 엉덩이를 두들기면 성추행이 되는 법이다. 잘못은 여자친구가 했는데 최종적으로는 남자친구가 사과해야 하는 것처럼 불합리한 일투성이다. 그러니 피해자인 내가 히라츠카 선생님을 위로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는 최대한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히라츠카 선생님을 끌어안았다.


 "어, 어……?"

 "히라츠카 선생님,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만 우세요. 눈물 때문에 얼굴이 엉망이라고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것인지 히라츠카 선생님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뿌리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오래전, 아직 어렸던 코마치가 울 때면 이런 식으로 달래주곤 했었다. 몇 년 후면 아라포가 되는 어엿한 성인인 히라츠카 선생님을 어린애 달래듯 대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자경험이 없다 보니 달리 어떻게 진정시켜야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물 같은 걸 끼얹나…?

 한동안 나는 말없이 히라츠카 선생님의 등을 토닥여줬다. 

 무심코 끌어안아 버렸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그냥 어깨나 토닥여줘도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오버해버린 건가……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크흑…… 히키가야……!"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서 토닥이는 걸 멈추고 떨어지려던 찰나, 돌연 히라츠카 선생님이 방바닥을 짚고 있던 두 손을 뻗어 날 꼭 끌어안았다. 

 되도록 몸에 닿지 않으려고 어색하게 안고 있던 나와는 달리 한껏 힘을 주며 바짝 밀착해온다. 


 "오… 오오……."


 다이렉트로 느껴지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풍만한 가슴의 감촉에 아찔한 기분이 든다.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묘한 여자 향기에 피가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요컨대 뭐라 할까…… 그…… 상스럽지만…… 후후…… 발기…… 해버린 거다.

 더한 일도 당해놓고서 이 정도로 동요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동정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 같이 잤다고는 해도 그렇게 들은 것뿐, 나로서는 기억에도 없고, 실감도 안 나는 일이고.

 부끄럽게도 대학교 졸업을 앞둔 이 나이 먹도록 여자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미인 여교사와 나체로 부둥켜안는다는 초유의 사태에 냉정하게 대처할 수 없는 거다. 

 여자와 안아본 경험 자체는 몇 번 있었지만, 유이가하마와 유키노시타를 안았던 건 일종의 사고 같은 거였으니까. 이렇게 나체 상태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나는 내심 엄청나게 동요했었다. 나도 모르게 팔을 감을 뻔할 정도로. 그러니 지금 내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 AT 필드는 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육탄공격에는 약하단 말이지…….

 

 "저기, 히라츠카 선생님? 죄송하지만 진정하셨으면 이제 그만 떨어져 주시지 않을래요?"

 "아, 미, 미안하다. 또 너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구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 이상은 못 버틸 것 같아서요. 그 뭐냐…… 둘 다 벗은 상태고……." 

 "어? 아, 그, 그렇구나……."


 히라츠카 선생님이 새빨개진 얼굴로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불로 몸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이답지 않은, 남자를 덮쳤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순진한 반응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나와 키가 같을 정도로 장신인 히라츠카 선생님이, 나보다 한참 어른인 히라츠카 선생님이 지금은 한없이 작고 연약하게 느껴진다. 나ㅊ…… 약한 모습을 본 직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젠 어쩌면 좋은 거냐……. 

 이번 일은 서로 없었던 일로 하자고 쿨하게 말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울먹이면서 책임지라고 하면 되는 건가? 그런 소리를 했다간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살면서 강간당하는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뭘 해야 좋을지는 알고 있다.


 "히라츠카 선생님, 일단은 옷부터 입죠."


× × ×


 부엌 겸 거실에 있는 작은 식탁 의자에 앉아 히라츠카 선생님이 요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요리라고 해봐야 인스턴트 라면이지만, 가족이 아닌 여성이 나를 위해 요리하는 모습이란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인스턴트라는 이름답게 라면은 금방 완성되었다. 히라츠카 선생님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 두 개를 식탁 위에 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해장에는 역시 라면만 한 것이 없지. 모자라면 더 끓여줄 테니까 많이 먹어라."

 "초를 치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라면 같이 맵고 짠 음식은 오히려 숙취에 나쁘다고 하던데……."

 "그, 그랬던 건가…… 미안하다. 근데 지금 집에 라면 말고는 달리 내줄 음식이 없어서……."


 집에 인스턴트 라면 말고 달리 내줄 음식이 없다니 이거 괜찮은 거냐…… 요리실력도 변변치 않고, 흥미도 없으신 분이니까 집에서도 대충 때울 거라곤 생각했었지만, 설마 요리를 만들 재료도 없을 줄이야…….

 라면은 나도 좋아하는지라 딱히 불만은 없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의 불균형한 영양섭취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이제는 나이도 있으니까 영양을 신경 쓰셔야 할 텐데 말이지. 점심도 편의점 도시락으로 대충 때우시는 것 같던데…….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사실은 숙취로 속이 쓰려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이런 때야말로 억지로라도 먹어줘야 숙취가 빨리 해소된다고 히라츠카 선생님이 말했으니까. 히라츠카 선생님이 반강제로 술을 먹이지 않았더라면 숙취로 고생할 일 자체가 없었겠지만, 지나간 일을 후회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다.

 숙취로 속이 영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먹다 보니 라면은 의외로 술술 넘어갔다. 속이 안 좋은 것과는 별개로 시간이 벌써 점심시간이다 보니 공복감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맛이 어떠냐, 히키가야."

 "흐음, 맛있네요."


 생각보다 맛있다. 먹다 보니까 어느새 속이 안 좋은 것도 잊고 먹게 된다. 

 나의 아첨 없는 소박한 감상을 들은 히라츠카 선생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후훗, 그런가. 내가 끓인 라면은 맛있는 건가."

 "네, 국물이 끝내주네요. 이거 어디 라면이죠? 맛있네요."

 "제품 말고 나를 칭찬해라……."

 

 히라츠카 선생님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아니, 누가 끓이던 평균적인 맛은 보장해주는 인스턴트 라면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셔도 말이죠…….


 "그보다 히라츠카 선생님.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 건가요?"

 "음? 식사는 하루 세끼 전부 챙겨 먹고 있다만……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거냐?"

 "아뇨, 그냥 좀 전에 집에 있는 음식이 인스턴트 라면밖에 없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요. 설마 집에서 라면만 드시는 건 아니죠?" 


 아무리 생각해도 인스턴트 요리를 해먹거나, 편의점 도시락을 사먹거나, 주문배달을 해서 먹는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홀애비도 아니고…….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라면으로 때울 때가 많긴 하지. 혼자 살아서 그런지 손이 많이 가는 요리는 거의 안 만들게 되더구나."


 하기야 주말이라면 모를까, 고등학교 교사인 히라츠카 선생님으로서는 매일 같이 아침, 저녁을 차려 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쫓기고, 피로에 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이 덜 가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인스턴트 요리로 때우게 됐겠지. 요리할 의욕도 안 났을 테고.


 "아, 그것도 그렇네요. 혼자 차려 먹다 보면 요리할 의욕이 안 나긴 하죠."

 "뭐, 그런 거다."

 "그래도 귀찮다고 너무 인스턴트 요리만 드시진 마세요. 이젠 나이도 있으신데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예전이었다면 여기서 가벼운 폭력제재가 들어갔겠지.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달리 히라츠카 선생님은 그저 힘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훗…… 건강 챙겨서 혼자 오래 살아봐야 뭐하겠냐……."

 "어?" 

 "아, 미,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또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버렸군. 네 말따라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우울해질 때가 많아서 말이다."

 "……."


 이제는 체념했다고 말하는 듯한 외로운 얼굴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지독히도 아프게 한다.


 "하하하~ 곤란하군~ 애완동물이라도 하나 키우는 게 좋으려나~ 하하하!"

 "히라츠카 선생님……."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지금 건 개그라고! 웃어라!"

 "하.하.하."


 뒤늦게 얼버무리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말에 나는 교과서를 읽을 때처럼 감정이 담기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도 웃을 기분은 들지 않았다. 웃음은커녕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자폭 개그를 가장하고 있지만, 조금 전 히라츠카 선생님이 내뱉은 자조 섞인 말은 거짓 없는 진심일 거다. 그 정도로 히라츠카 선생님은 정신적으로 몰려버린 거다.


 "그나저나 그 의자를 드디어 써먹는구나."

 "네?"

 "아, 네가 지금 앉고 있는 그 의자 말이다. 이 식탁을 사면서 혹시 몰라서 의자를 두 개 사긴 했는데 지금까지는 한 번도 쓸 일이 없었거든."

 "그런가요……."


 두 개의 식탁 의자. 평범하게 생각하면 집에 손님이 왔을 때를 대비하여 산 거겠지만, 어쩌면 이건 결혼하고 싶다는,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고 싶다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바람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게 아닐까?

 나는 혼자서 마음 편히 먹는 걸 좋아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코마치나 유이가하마, 유키노시타와 함께 하는 식사는 오히려 혼자서 먹을 때보다 즐겁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시간이 있기에 혼자서 먹는 시간이 외롭지 않은 거다. 아싸의 프로였던 나조차도 이런 데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줄곧 바라온 히라츠카 선생님은 어떨까?

 미인에, 직업도 안정적이고, 성격도 좋으신 분인데 왜 결혼을 못 하시는 걸까……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깝다.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멋대로 동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라면 국물과 함께 억지로 삼켜버렸다. 

 면을 다 먹고 국물까지 전부 삼켰을 때, 히라츠카 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못했던 얘기를 마저 해야겠지……."

 "네, 그래야죠."


 아까는 서로 너무 당황했던 나머지 미처 나누지 못했던 말들. 

 어젯밤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나를 덮친 것인가, 이제부터는 어쩔 것인가. 

 

 "히키가야, 넌 어제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지?"

 "실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대충 밤 11시 정도까지만 기억나네요."

 "그런가…… 그러면 처음부터 설명해야겠구나."


 히라츠카 선생님이 다 먹은 라면 그릇을 겹쳐 식탁 한구석으로 치우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던가. 밤도 늦었겠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진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던 유키노시타에게 그만 가보겠다고 했다. 유키노시타는 자고 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서 자는 건 영 편치 않아서 말이지."


 어딘가의 가게에서 받은 걸로 보이는 싸구려 라이터로 담배에 붙을 붙인 히라츠카 선생님이 폐 깊숙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한숨처럼 내뿜는다.


 "그렇게 혼자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선지 당시의 나는 너를 집으로 데려다 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인 유이가하마는 괜찮지만, 남자인 너를 유키노시타의 집에서 재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달리 할 말이 없어 그렇게 맞장구치자 히라츠카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웃기는 얘기지만 술에 취해서 너희가 어엿한 성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거지. 그래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너를 데리고 유키노시타네 집에서 나온 거다."

 "아뇨, 뭐…… 필름이 끊기지 않았다면 저도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거에요."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건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했던 거다. 나잇값도 못하고 주책 맞게 너희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방해하지 말았어야 했다."

"……."


 확실히 원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히라츠카 선생님을 부를 생각은 없었다. 올해는 코마치도, 토츠카도, 자이모쿠자도 부르지 않고 우리 셋이서 조촐하게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니 끼어들었다는 표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을 저지른 건 히라츠카 선생님이 아니다.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싫어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독단으로 히라츠카 선생님을 초대한 내 잘못이다. 

 히라츠카 선생님은 나쁘지 않다. 결과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한 것 자체가 잘못인 것은 아니다.


 "변명 밖에 안되겠지만, 처음부터 너를 덮칠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택시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너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너와 나란히 택시 뒷자석에 앉아 크리스마스의 밤거리를 달리는 사이 점점 해서는 안될 생각에 빠져들었다." 

 "……."

 "술에 취해 내 어깨에 기댄채 잠든 너를 보며, 그 모습을 본 운전기사가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에, 그 유혹은 점점 강해져 갔다. 그리고 결국 유혹에 넘어가버린 나는 행선지를 바꿔서 너를 우리집으로 데려온 거다. 그 다음 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네……."


 사건의 전말은 생각했던 것보다 별것 없는 이야기였다. 술에 취해 잠든 나를 히라츠카 선생님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 덮쳤다. 그뿐인 이야기다. 

 둘 사이에 오간 이야기도 없고, 쌓아올린 애정도 없다. 깊은 후회만이 남았을 뿐이다.


 "뭐, 나도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그런 건 변명 밖에 안 되겠지……."

 "……."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된 건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어떻게'가 아니라 '왜' 히라츠카 선생님이 나를 덮쳤는지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다.

 

 "히라츠카 선생님, 왜 저를 덮치신 거죠? 가까이에 있는 남자가 저밖에 없었기 때문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다."


 타들어 간 담뱃재를 재떨이에 톡톡 털어놓은 히라츠카 선생님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직 반도 피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서 버렸다.

 한참을 입을 열듯 말듯 망설이던 히라츠카 선생님이 눈을 감으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히키가야는 외로움에 잠들지 못한 적은 있나?"

 "네, 뭐…… 한두 번 정도는……."


 외로움이라기보다는 욕구불만이었지만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말이다. 곧잘 그런 일을 겪고 있다. 심할 때는 일주일에 몇 번을 그러기도 하지."

 "……."

 "뭐, 외로운 것만이라면 아직 참을 수 있다. 한 시간 정도 베개를 적시다 보면 진정되니까. 하지만 욕구불만까지 겹칠 때는 정말로 미칠 지경이지. 어쩌지를 못하고 몇 시간을 몸 비틀게 되거든."

 "어, 아, 네……."

 

 외로움과 욕구불만이 동시에 찾아오는 고통은 모르겠지만, 욕구불만의 괴로움은 나도 알고 있다. 잠을 자고 싶은데도 달아오른 몸 때문에 잠이 들 수 없는 고통.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자기 위안을 한 후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는 고통. 그 고통을 히라츠카 선생님이 겪었을 거로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피가 한쪽으로 쏠릴 것 같다.

 

 "후후, 친구들은 진작에 다 결혼해서 이제는 애가 초등학생인 애들도 적지 않은데,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커녕 남자경험도 없었지."

 "네…… 엑? 잠깐, 남자 경험이 없었다고요? 그 말은 즉……."

 "그래, 비참하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처녀였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노처녀였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군. 설마하니 30대 중반의 히라츠카 선생님이 처녀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히라츠카 선생님의 그 적극적인 혼인활동에도 불구하고 잠자리를 가지는 사이까지 발전한 남자가 전혀 없었단 말인가. 딱히 혼전순결주의자도 아니었을 텐데, 이런 미인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단 말인가. 정말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처녀면서 역강간이라니, 어느 의미론 감탄스럽다. 같은 처녀라도 앞에 '노'자가 붙으면 격이 다르다는 건가. 1, 2, 3를 넘어서 최종적으론 노처녀 갓이 되는 건가.


 "어…… 아뇨, 뭐…… 저도 동정이었는걸요."

 "훗, 동정 따윈 가치 없다고들 말하지만 나 같은 노처녀의 처녀보다는 젊은 네 동정 쪽이 더 값어치 있겠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부정해봐야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더는 처녀도 아니니까.


 "뭐, 그럴 마음만 먹으면 버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거다. 만남 사이트라도 들어가서 적당히 아무나 만나면 됐겠지. 하지만 가치 없는 노처녀의 순결이라곤 해도 아무에게나 줘도 상관없는 건 아니었던 거다. 처음 정도는 이 사람이라면 괜찮다 싶은 사람과 하고 싶었던 거다." 


 그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해석하기에 따라선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는 말. 


 "……어, 제가 그렇게 부담 없이 쉬운 남자인가요? 그야 뭐, 저는 어느 정도 외모도 되고,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초식남이겠지만……." 

 "그렇게 삐딱한 소리를 하는 건 변하질 않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나?"

 "……."


 비딱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부정하고 일부러 아닐 것 같은 선택지를 고른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나를 덮친 게 아니라니, 이 정도라면 괜찮다는 자기타협으로 나를 덮친 게 아니라니, 그래서야 마치…… 마치……


 "……마치 히라츠카 선생님이 절 좋아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히라츠카 선생님이 어떤 대답을 돌려주든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실망할 이유는 없다. 처음부터 버리고 있던 가능성이니까.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에 했던 자기보호와는 다르다. 그럴 가능성은 없노라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 히라츠카 선생님이 내가 바라는 그런 대답을 돌려준다면…… 나는…….


 "뭐, 뭐…… 덮치기까지 하고서 부정해봐야 의미는 없겠지…… 으, 으음…… 그래, 나는 제자로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서도 어느 정도 널…… 조,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게 더듬더듬 말씀하시니까 꼭 진짜 같네요. 설마 이제 와서 농담이라고 하시진 않겠죠?"

 "그, 그런 걸로 농담 할 리가 있겠냐! 이 새빨개진 얼굴을 봐라! 이게 어딜 봐서 농담하는 사람의 얼굴이냐."


 하긴 그것도 그렇다. 저런 새빨개진 얼굴로 농담이었다고 해봐야 그거야말로 부끄러운 걸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란 생각 밖에 안 들 거다. 

 여기까지 들어버리면 착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히라츠카 시즈카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다. 제자로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서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다.

 그 사실이, 강간당했다는 사실 같은 건 잊어버릴 정도로, 참을 수 없이 기쁘다.


 “저도 좋아해요."

 "……."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버릴 정도로 참을 수 없이 기쁜 것이다.


 "아, 그, 스승으로서 말이지? 아하, 아하하……."

 "국어교사 맞으세요? 이 타이밍에 그런 의미일 리가 없잖아요."

 "엑? 아, 아니…… 하지만…… 하지만……!"


 히라츠카 선생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심정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느꼈던 감정이니까.

 

 "솔직히 저 같은 건 남자로 생각도 안 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야말로 띠동갑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나 같은 건 여자로도 생각 안 할거라고 생각했다."


 뭐야, 그랬던 건가……. 

 결국, 우리는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나는 자신을 이성으로서 좋아해 줄 리 없다고 멋대로 선을 긋고 포기하고 있었던 거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강간 같은 강압적인 형태가 아니라, 언제까지고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형태로 맺어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괜찮다. 탄식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아름다운 추억 같은 건 분명 이제부터도 얼마든지 쌓아올릴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어느 정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건 또 뭔데요? 애인은 무리지만 섹프는 가능하다 뭐 그런 건가요?"

 "세, 섹프라니, 그럴 리가 있겠냐! 13살이나 어린 제자와 결혼하는 건 현실성 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진짜로 반해버리지 않게 자제했던 것뿐이다. 뭐, 결국 사고치고 말았지만…… 그건 그렇고 히키가야 네가 섹드립을 치다니 별일이구나."

 "더한 것도 한 사이인데 가릴 필요 없잖아요? 안 했던 것뿐이지 할 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저도 어엿한 성인이고."

 "하긴, 속은 그렇다 쳐도 겉모습은 제법 어른스러워졌으니까. 덕분에 종종 두근거릴 때가 있어서 곤란했다."


 아뇨, 속도 제대로 어른스러워졌거든요? 요즘은 리얼충들을 질투하거나 흉보지도 않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리스트도 안 쓴단 말입니다! 얼마나 어른스러워졌는지 동네 꼬마한테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거든요? 젠장, 어른 따윈 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히라츠카 선생님이 절 덮치신 이유는 잘 알았습니다. 요컨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제가 좋다는 거군요. 아주 잘~ 알았습니다."

 "뭐, 뭣!? 큭…… 끄응…… 부정은 하지 않으마……."


 부끄럽고 분하다는 듯이 새빨개진 얼굴을 찌푸리는 히라츠카 선생님의 모습은 나이 차이 같은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나 13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니다. 코난이라는 말에 내가 명탐정을 떠올릴 때, 히라츠카 선생님은 미래 소년을 떠올릴 정도의 세대 차다. 내가 아직 20대일 때 히라츠카 선생님은 벌써 40대가 되어버린다. 그 정도의 차이다. 

 만약 앞으로 히라츠카 선생님과 사귀게 되고, 결혼하게 된다면, 나이 차이 때문에 겪게 될 괴로운 일들이 잔뜩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나는 지금 이 히라츠카 시즈카라는 안쓰럽고 사랑스러운 여자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말했다. 빨리 누가 좀 데려가 달라고, 안 그러면 내가 데려가 버릴 것 같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그랬는데도 아무도 안 데려갔으니 이젠 내가 데려가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제 와서 데려가고 싶다고 해도 시즈카는 주지 않을 거니까.


 "아, 그건 그렇고 그 뭐냐…… 아까는 용서해준다고 했었지만, 생각해보니까 강간 정도 되는 일을 맨입으로 용서해주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네요."

 "어…? 아, 그, 그렇구나…… 신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네가 바란다면 가능한 한 위자료를 주마. 그렇긴 한데…… 너도 알다시피 교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월급이 많지는 않은지라…… 그…… 너무 높은 금액은 참아줬으면 좋겠다만……." 


 히라츠카 선생님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소 기운을 차렸던 조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순간에 풀이 죽어선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피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어쩐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뜰 것 같다.


 "뭐,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죠. 라면 정도로 참아드리겠습니다."

 "어? 라면? 겨우 그 정도로 괜찮은 거냐?"

 "네, 충분해요."

 "그, 그래, 알았다! 라면 정도는 내가 몇 그릇이라도 사주마!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새로 발견한 가게가 있었는데……."

 "아뇨, 가게에서 파는 라면 말고 히라츠카 선생님이 끓여주신 라면이 먹고 싶은 건데요."


 사실은 딱히 라면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다. 라면 같은 건 어차피 구실에 불과하니까. 


 "뭐? 나야 별로 상관없다만……."

 "그러면 그런 걸로 아시고, 히라츠카 선생님이 편하신 날에 맞춰서 올 테니까, 이따가 메일 주세요. 저는 슬슬 집에 가야 할 것 같네요." 

 "그렇구나. 이따가 메일 보내마."


 의자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걸쳐 입는다. 라면도 다 먹었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이제는 그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자정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해가 중천이니, 시간 초과도 이런 시간 초과가 없다. 이 이상 코마치를 걱정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에 들어가면 분명 한소리 듣게 되겠지.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음에 올 때는 술은 참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당분간 술은 자제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니 다행이다. 숙취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한동안 술은 입에 대기도 싫은 기분이니까.

 히라츠카 선생님과 함께 술을 마시는 일이 싫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당분간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경험 정도는 제대로 기억해두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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