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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37)「예상대로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다가온다」

ㅁㄴㅇ(1.229) 2014.04.09 04:18:31
조회 37408 추천 186 댓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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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링크





<예상대로 유키노시타 유키노는 다가온다>



 오전 9시. 평소였다면 한창 세탁과 청소를 하고 있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유키노와 둘이서 뒤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맛은 어떠니?"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는 유키노가 내게 물었다. 조금 전부터 자기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계속 내 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어, 맛있네. 나도 요리에는 꽤 자신이 있다만 역시 너한테는 못 당하겠군."


 솔직히 내가 만드는 요리보다 맛있다.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쪽은 전업주부다 보니 졌다는 사실에 다소 분한 기분이 든다. 

 뭐, 집안일을 해온 건 유키노도 마찬가지였고, 원래 나보다 훨씬 잘하는 녀석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래."


유키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놓칠 내가 아니다.


 "그러저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네가 요리를 다 해주는 거냐?"


대충 짐작이 안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물어본다.


 "어머, 무슨 날이 아니면 만들어주면 안 되는 거니?"


 유키노가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그야 안되는 건 아니지만 나 일단은 너희 집 가정부다만. 신세 지고 있는 마당에 집안일까지 안 해버리면 단순한 식객이 돼버리잖아.


 "그건 아니지만 아침밥 상치고는 너무 호화로워서 말이지. 오늘이 무슨 날도 아닐 텐데."


 오늘은 공휴일도 기념일도 아닌 평일이다. 무엇 하나 특별할 거라고는 없는 날이다. 굳이 무슨 날이라고 하자면 유키노의 휴가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원래 아침은 왕처럼 먹어야 하는 법이야."

"뭐, 그건 그렇다만……"


 메뉴의 호화로움보다는 선정기준이 신경 쓰인다. 명백하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샐러드에도 내가 싫어하는 오이와 토마토는 쏙 빠져있고. 


 "하치만군이 좋아하는 요리, 예전에 코마치가 가르쳐줬었거든."


 물어본 것도 아닌데 유키노가 내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런 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던 거냐. 기억력도 좋구나."

 "집에서 몇 번이나 연습했었으니까…… 늦었지만 이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


 나 참…… 마누라보다 더 갸륵하구먼. 시즈카는 가끔 대신 밥을 차려줘도 질리지도 않고 돼지고기 생강구이만 만들어 주는데 말이지……  


 "근데 너 언제까지 그렇게 나만 쳐다보고 있을 거냐? 좀 부담스러운데."


 나 같은 아싸 태생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하니까 말이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밥 먹고 있는데 흐뭇한 얼굴로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부담스럽다. 


 "미안해. 하치만군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질리지가 않았거든."


 질리지가 않는다니 대체 무슨 의미냐. 아니, 사실 알고 있지만…… 

 그러저나 정말 많이 변했구나. 예전의 유키노였다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날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고, 설령 쳐다봤다고 해도 지금처럼 내게 지적당하면 시치미를 떼며 역으로 날 매도했을 거다. 그런 유키노가 지금은 숨길 생각도 없이 긍정하고 있으니…… 


 "뭐냐 그게. 내가 무슨 먹이를 받아먹는 길고양이라도 되는 거냐."


 내가 못 알아들은 척 시치미를 떼며 말하자, 유키노가 잠시 생각하는 기색으로 손가락을 턱에 괴었다. 그리고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네…… 고양이처럼 사랑스럽긴 해."

 "콜록콜록!"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나머지 그만 사레가 들려버렸다. 다행히 순간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음식에 이물질을 튀기는 사태는 면했지만, 막 삼키려 했던 밥이 잘못 넘어가 찔끔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갑자기 더럽게 무슨 짓이니?"


 유키노가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런 거잖아!"


 너야말로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갑자기 데레를 폭발시키지 마라. 숨넘어갈 뻔했잖아. 

 물을 마시는 도중이 아니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물을 마시고 있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눈앞에 있는 유키노의 얼굴에 성대하게 뿜고 말았을 거다.


 "우선 물이라도 마시렴."

 "어, 어어…… 고맙다."


 유키노가 건네주는 컵을 받아 반쯤 담겨있는 물을 조심스럽게 삼킨다. 목에 걸려있던 이물감이 물과 함께 흘러내려 간다. 후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 마신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생각해보니까 유키노와 간접키스를 한샘이지만 이 나이 먹고 간접키스 정도로 두근두근해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마시고 있는 음료를 한입 맛보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는데…… 유키노의 마음을 알고 나니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후후, 하치만군과 같이 식사하고 있다니, 이상하네."

 "같이 산지가 벌써 석 달은 됐는데 뭘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러냐."


 습관을 바꾸는데는 66일이 걸린다는 얘기가 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이 생활도 이제는 익숙해져, 지금은 넷이 함께 사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둘만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아침은 보통 넷이서 함께 먹지만, 저녁은 셋 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보니 따로따로 차릴 때가 많다. 시즈카나 유이와는 둘이서 먼저 저녁 식사를 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 가장 늦게 들어오는 유키노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혼자서 밥 먹기 적적하다는 유키노 마님의 명에 따라 저녁 식사를 시중든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거실에 시즈카와 유이가 있었으니, 이렇게 둘이서 식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확히는 둘만 있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이 집에서 이렇게 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으니까 꼭 부부라도 된 기분이야." 

 "……"


 원래는 임자가 있는 유부남으로서 그냥 넘겨선 안 되는 말이지만, 안도와 행복에 차있는 유키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뭐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함께 식사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구나. 이 즐거움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


 유키노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유이가 봉사부에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 그랬던 것처럼, 유키노는 계속 혼자 밥을 먹었던 걸까? 

 아니, 혼자서 먹는 건 나쁘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혼자서 먹는다고 하여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함께 먹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나와 유키노는 그런 인간이다. 유키노가 함께 식사하는 즐거움을 잊은 것은 혼자서 먹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함께 먹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서만이라면 몰라도, 좋아하지도 않는…… 아니, 싫어하는 전 남편과 함께 식사는 분명 괴로운 일이었겠지……


 "뭐, 혼자 먹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가족·친구와 함께 먹는 편이 더 즐겁긴 하지."

 "그러네……"


 유키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깃들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하치만군이, 유이가, 시즈카 언니가 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함께일 테니까……"


마치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         ×


 식사를 끝마친 후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식후의 홍차를 마셨다. 

 유키노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홍차를 마신다. 정말 홍차를 좋아하는 녀석이다.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아마 내 MAX 커피 사랑에도 뒤처지지 않을 거다. 나와 시즈카는 둘 다 홍차는 그다지 취향이 아니다 보니 거의 마시지 않았었지만, 유키노가 타주는 홍차는 맛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네가 타주는 홍차는 맛있네."


 이 집에 오게 된 이후로 매일 같이 유키노에게 홍차를 타줬고, 타는 김에 곧잘 같이 마셨지만, 역시 내가 타는 홍차는 유키노가 타는 홍차에 비해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같은 재료를 쓰는데도 이리 맛이 차이 나는 걸 느끼고 나니, 로젠 메이든의 신쿠가 준에게 늘어놓았던 잔소리들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작중에 맛있는 홍차를 타는 비결이 나왔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주전자와 컵을 미리 데워둔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에 한번 조사해보자.


 "하치만군이 타주는 홍차도 맛있어."


 그러냐? 말은 고맙지만, 솔직히 천진반과 야무치 정도의 격차를 느낀다만. 아니, 이 비유는 좀 아닌가. 유키노의 홍차가 꼭 안습한 것 같잖아.


 "네가 타는 거에 비하면 영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무슨 비결이라도 있냐?"


 내 말에 유키노가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네…… 굳이 말하자면 애정일까?"

 "……"


 유이라면 모를까, 유키노가 이런 닭살 돋는 말을 하니까 솔직히 좀 깬다. 


 "뭐라고 말 좀 했으면 좋겠는데……"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했는지 유키노의 뺨이 살짝 발그스름해졌다. 야야, 그럴 거면 애초부터 말하질 말라고.


 "상식적으로 애정이 맛을 좌우할 리가 없잖아. 그럼 내 홍차는 애정이 부족해서 맛이 떨어지는 거냐?"

 "어? 그런 거니?"

 "아니, 그걸 나한테 되물어도 말이지……"


 그런 논리대로면 고등학교 2학년 때 유이가 만들었던 포이즌 쿠키는 나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아 만들기라도 한 거냐고.


 "그러네. 실언이었어. 애정이 맛을 좌우한다면 하치만군이 내게 타주는 홍차는 극상의 맛이 났을 테니까."

 "……"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은 걸까. 태클을 걸면 되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애정보다 네 애정이 더 크거든!? 하고 태클을 걸면 되는 거냐?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 유키노가 지금보다 더 끈적 달콤한 소리를 늘어놓기라도 한다면 난 분명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토가 나올 정도로 다니까. MAX 커피에 연유를 넣은 것처럼 다니까. 

 어째서 이렇게 돼버린 거냐…… 신혼 때의 시즈카도 이렇게 달지는 않았다고……


 "야, 너 캐릭터가 너무 변한 거 아니냐? 예전의 새침데기 유키노는 대체 어디로 간 건데?"


 이래선 데레 정도가 아니라 메가데레잖아…… 네가 무슨 포켓몬이냐? 메가진화를 하게.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자, 유키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머, 날 이렇게 만든 건 하치만군 너잖니."

 "아…… 그래, 내가 잘못했다."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던 걸 가까스로 멈췄다. 지금의 유키노를 만든 게 나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잊어서는 안 된다.

 입안에 맴돌고 있는 부정의 말을 마지막 한 모금의 홍차와 함께 삼켰다. 달곰했을 터인 홍차의 마지막 한 모금은 유난히도 떫게 느껴졌다.

 다 마신 티컵을 소파 앞 탁자에 달칵 내려놓았다. 뒤따르듯 유키노도 그 옆에 다 마신 티컵을 내려놓았다.


 "홍차 잘 마셨어. 맛있었어."

 "그래."

 "그럼 난 설거지하고 올게."


 다 마신 티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유키노가 손으로 제지하면서 말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하치만군은 그냥 푹 쉬어."

 "야야, 그래선 가정부를 두는 의미가 없잖아."

 "겨우 하루 정도인데 뭘. 가정부라도 쉬는 날은 있어야지."


 단순한 주말이었다면 나도 얼싸 좋구나 하고 맡겼겠지만, 오늘은 유키노가 모처럼 낸 휴가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아니, 그래도 오늘은 너 휴가일이니까. 너야말로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쉬어라."

 "아냐, 정말 괜찮아.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걸."


 아무래도 유키노도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정 그러면 대신 내가 설거지를 끝내고 오면 하치만군은 내 어깨를 주물러줘."

 "어깨? 그래, 알았다. 원래는 하치만표 안마권이 없으면 안 해주지만 넌 특별히 주물러 주마."


 덧붙여서 안마권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발행 안 해주고 있다. VIP 회원인 코마치와 시즈카는 안마권이 없어도 특별히 해주고 있지만. 

 아, VVIP 회원인 토츠카도 물론 예외다. 뭣하면 어깨 정도가 아니라 전신마사지를 해줄 수도 있는 레벨. 


 "후훗, 난 특별하단 거구나."

 

 아니, 딱히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한 말은 아니었다만…… 뭐, 상관없나.

 유키노가 설거지를 다 끝마칠 때까지 난 소파에 누워 책을 읽기로 했다. 평소처럼 빨래나 청소를 해버리면 설거지를 끝마치고 온 유키노가 또 자기가 하겠다고 나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루 정도 안 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 오늘 하루 정도는 게으름피워도 괜찮겠지.

 그런데 푹신푹신 소파에 누워있었더니 이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키노와 유이와 시즈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로 요즘은 밤에 통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그런데도 시즈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예전보다 잦은 횟수로 잠자리를 가졌더니 아무래도 피로가 쌓여버린 모양이다. 뭐,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그녀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지만.

 ……안 되겠다. 너무 졸려서 도저히 책이 눈에 안 들어온다. 식기의 양을 생각하면 유키노가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대충 10분 정도 걸릴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하자……


×         ×         ×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냥한 얼굴이 보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 하얗고 투명한 피부, 아늑한 큰 눈, 꼬리가 올라간 예쁜 핑크빛 입술……


 "……엥?"


 어째선지 나는 유키노에게 무릎베개를 받고 있었다. 유키노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길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어머, 일어났니 백설공주군. 아니면 오로라 공주라고 해야 하려나?"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니 유키노가 조금 전까지 내가 배고 있던 허벅지를 아쉽다는 듯이 쓰다듬는다.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좀 더 자도 괜찮은데."

 

 피곤하긴 했지만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것도 아니고 네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냐.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열 시 반을 가리키기 직전이었다.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아무래도 40분 가까이 자 버린 모양이다.


 "이런, 깨우지 그랬냐?"

 "곤히 잠들어 있었으니까. 급한 일도 없는데 깨울 필요가 뭐 있겠니."


 하기야 그것도 그렇긴 하다. 모시는 부모나 자식이 없는 전업주부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히키코모리 소리까지 듣던 이 내가 너무 한가하고 답답한 나머지 운동을 시작했을 정도다. 


 "걔다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제법 사랑스러웠으니까. 변함없이 눈만 감으면 멋있구나."


 유키노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스럽다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도 말이죠…… 뭐냐고 이 사랑스러운 아줌마는…… 몇 년 후면 아라포가 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그런데 내 눈은 그렇게나 글러 먹은 거냐? 그래도 예전이랑 비교하면 꽤 나아진 건데 말이지.

 크게 스트레스받는 일 없이 시즈카와 둘이서 오손도손 살아온 덕분인지 고등학생 시절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태클 받던 이 눈도 이제는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나아진 모양이다. 시즈카가 한 말이니까 콩깍지 필터를 걸쳤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예전보다 나아진 것만은 틀림없을 거다. 

 나는 후아아암 하고 하품을 한 후 습관처럼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어쩐지 입가가 좀 축축한 게 아무래도 자면서 침을 흘린 모양이다. 이거 유키노에게 추한 꼴을 보였구먼.


 "아, 맞다. 어깨 주물러 주기로 했었지? 바로 주물러 줄까?"

 "그래, 부탁할게."


 나는 유키노와 함께 거실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유키노는 어깨를 주무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긴 머리를 뒤로 모아 묶기까지 했다. 포니테일이다.

 생각해보니 가족 외의 여자 어깨를 주물러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유키노의 어깨에 손을 대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아무리 친해도 이성이다 보니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왔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유키노의 목덜미를 보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그녀의 외모에 감탄하게 된다. 목이란 게 화장으로 숨길 수 있는 얼굴과는 달리 나이를 속이기 힘든 부위인데도, 유키노의 가느다란 목에는 37살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잔주름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러는 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점점 목이 늘어지기 시작하는 시즈카와 비교하게 된다. 나이 차가 나이 차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흐읏…… 하, 하치만군, 조금만 약하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 어어 미안하다."

 

 시즈카의 어깨를 주물러줄 때와 비슷한 정도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유키노에겐 좀 셌던 모양이다.


 "그래, 지금 정도면 딱 괜찮은 것 같아."


 유키노의 어깨는 많이 뭉쳐있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탓이겠지. 이렇게나 굳어있으면 세게 주무르지 않아도 아픈 소리를 낼만하다.


 "유키노, 너 어깨가 장난 아니게 뭉쳐있는데. 피로가 많이 쌓인 거 아니냐?"

 "그렇구나…… 얼마 전에 누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나가겠느니 뭐니하는 소리를 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


 우연이구나. 나도 최근에 일을 그만두겠다는 나를 붙잡고 못 가게 하는 고용주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회사에 관해 이야기한 건데 왜 불똥이 내 쪽으로 튀는 건지.

 

 "어때? 좀 시원하냐?"

 "그래, 시원해. 생각했던 것보다 능숙하네."

 "나야 뭐 시즈카 어깨를 곧잘 주물러줬으니까 말이지."


 처음에는 귀찮아서 싫었지만, 피로에 절어서 돌아온 아내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뭣해서 계속 주물러줬더니 이제는 당연한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지금도 나흘에 한 번씩은 주물러주고 있고. 물론 주물러주기만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주물러준 후에는 시즈카도 내 어깨를 주물러준다.


 "자상한 남편이구나…… 시즈카 언니는 참 행복했겠네."

 "야야, 겨우 어깨 주물러주는 거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너도 전 남편한테 받아본 적 있을 거 아냐?"

 "……그 사람에게 안마 같은 걸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어. 뭐, 해주려고 했어도 곤란했겠지만."

 "그, 그러냐……"


 가슴은 주물러줬지만, 어깨는 주물러준 적 없다는 건가. 그것참…… 

 유키노의 전 남편은 결혼식 때 한번 본 게 전부고, 암묵적 금기처럼 화제로 삼는 걸 피해왔기 때문에 그다지 아는 게 없지만, 분명 상냥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10년을 넘게 같이 살았으면서 어깨 한 번 주물러준 적 없는 남편이 상냥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깨를 주물러준 적 없는 건 분명 유키노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유키노시타 부부가 파탄 나버린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를 묻는다면 분명 유키노의 잘못이 더 무겁겠지. 유키노는 분명 남편을 사랑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는 사람에겐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지는 유키노니 그가 겪었을 고통도 대충 짐작이 간다.

 유키노의 전 남편은 데릴사위라는 조건을 받아들였을 정도니 처음에는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유키노에게 질려, 그 또한 아내를 싫어하게 됐겠지. 

 그래도 아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참고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사람 사이에 끝내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우리 부부처럼 어느 한쪽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유키노가 철저하게 피임했기 때문일 거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부부관계조차 제대로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파탄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유키노시타 유키노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고 해도, 내게는 가족처럼 소중한 좋은 친구……다. 그러니까 남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어깨 정도는 내가 몇 번이라도 주물러주마.


 "이제 뭉친 것도 제법 풀린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됐냐?"


 스포츠 마사지를 해줄 때 드는 노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깨를 주무르는 것도 은근히 힘이 든단 말이지. 대충하는 거라면 모를까 제대로 주무르면 5분 이상은 힘들다.


 "어, 고마워. 이제 충분해."


 유키노가 뒤돌아 앉으며 말했다. 그 몸동작에 유키노의 묶은 머리가 출렁인다. 유키노의 포니테일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보니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 뭐냐, 또 안마받고 싶어지거든 언제든지 말해라. 하루 5분 정도라면 해줄 테니까."

 "고마워 하치만군. 그럼 앞으로도 부탁해도 될까?"

 "뭐, 공짜는 아니지만 말이지. 이번엔 특별히 그냥 해줬지만, 원래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인지상정 아니겠냐?"


 나는 유키노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안마받는 건 좋아하거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흐음, 그러네……"

 

 유키노가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으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뻗어 거실 바닥을 짚고 있는 내 왼손을 감싸 짚으며 내게로 바짝 다가왔다. 뭔가 위험하다……


 "야 잠깐, 너 대체 뭘……"


 채 다 말하기도 전에, 유키노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유키노가 갑작스럽게 휴가를 냈을 때부터 반쯤 각오하고 있던 일이지만, 막상 이렇게 되어버리니 역시 동요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이른 시간에, 이런 상황에서 키스해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

 "……"


 유키노가 입술을 뗐다.

 그리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될까?"

 "……"

 "아무래도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네. 그럼……"

 "……나는 내 어깨도 주물러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만."


 또다시 내게 키스하려 드는 유키노를 손으로 제지하면서 말했다.


 "어머, 미안해. 착각했어."


 의기양양하게 유키노시타가 대꾸했다.

 일부로 그런 거겠지…… 절대로 일부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저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면 화도 낼 수 없다. 

 아니, 귀여운 얼굴이 아니더라도 화 같은 건 낼 수 없지만……


 "일단 물어는 보마.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친구 사이에 이건 아니잖아. 설마 친애의 뜻으로 한 거라곤 하지 않겠지?"


 친애의 뜻으로 뺨에 입을 맞추는 나라도 있지만, 그런 나라에서도 친구 사이에 입술을 맞대지는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잖니." 

 "……그래, 알고 있지."


 그럼에도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라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치만군. 실은 오랫동안 너에게 거짓말을 해왔어."


유키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역시 너와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러냐……"

 "그래. 친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까."


 알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너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친구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져 왔다.


 "유키노, 난 유부남이라고. 너도 알고 있잖아?"

 "알고 있어."

 "난 시즈카를 사랑하고 있어. 헤어질 생각 따윈 없다고."

 "그것도 알고 있어."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거실 창문으로 새어드는 햇살을 받으며 유키노는 내 얼굴을 향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치만군, 나는 시즈카 언니와 헤어져 달라고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한 달 전 유이와 주고받았던 대화의 재탕처럼 느껴졌다. 


 "그저 그 사랑을 내게도 조금만…… 조금만 나눠줬으면 하는 거야."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날 사랑해라던 유이.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그 사랑을 나눠달라는 유키노.

 표현의 차이일 뿐, 두 사람이 내게 바라는 건 결국 같다.

 그리고 유이를 거절하지 못한 이상, 유키노를 거절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치만군, 널 사랑하고 있어."


 유키노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를 볼 수 있는 건 분명 세상에서 나 하나뿐이겠지. 삐뚤어졌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조차도 이 미소를 봐버리면 유키노 루트 일직선을 달리고 말았을 것이다.

 착각의 여지조차 없는, 얼어붙은 마음도 녹게 하는 따뜻한 미소. 

 그러나 이 미소가 내 한마디만으로 거짓말처럼 절망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지난 15년간 쌓아온 응어리를, 숨겨왔던 어두운 단면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


 그날, 이 집에서 나가겠다는 내 말에 유키노는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가지 말라며 눈물로 내게 매달렸다. 

 유키노의 눈물을 본 건 그 날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비통한 모습은, 비참한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대성통곡하는 유키노와 덩달아 눈물을 훌쩍이기 시작하는 유이. 그러나 그녀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제대로 끝맺음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유키노와 유이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으면서 몰랐던 것처럼, 우리 사이엔 줄곧 우정만이 존재했던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녀들의 마음이 아직 작은 묘목이었을 때 잘라냈더라면, 그녀들도 분명 나를 잊고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들도 분명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결과가 이거다. 

 다가오는 남자를 모두 거절하고 노처녀가 되어 버린 유이,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강제로 결혼해,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유키노. 이제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을 만큼 자라나 버린 나무들…… 내가 없으면 시들어 죽고 말 나무들……



 "……그래, 나도 사랑한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또 시즈카를 배신하고 만다.

 시즈카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또 그녀를 상처입히는 선택을 하고 만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달리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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