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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가게무샤의 나가시노의 전투 옳은 묘사인가?(디코에서)

aafffffddd 2006.12.04 03:10:28
조회 540 추천 0 댓글 12


..안녕하십니까..^^..디펜스 코리아를 처음으로 가입하게 되어 우선 너무 기쁩니다..앞으로 많은(비록 하루 허용치 2개이지만) 활동과 더불어 회원님들과 좋은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고 싶습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은 희망도 있습니다만, 아직 확신이 안서서리..^^;;.. 준회원된 기쁨과 기념겸 해서 해서 영웅본색 1, 2탄과 더불어 저의 영화목록 1순위에 올라있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의 웅장한 대미를 장식하는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볼까 합니다...저의 허접한 관심분야가 일본 전국시대이기도 해서... 흔히들 나가시노 전투(1573년 5월 20일 -21일 이틀간, 사실상 4월부터 시작하여 5월 21일날을 클라이막스로 끝을 맺지요..전쟁의 전체적 전개과정은 생략..이 무렵 조선의 조정에서는 서울 동쪽에 사는 동인과 서쪽에 사는 서인이 상투잡이하며 공리공론으로 치고 박고 박터지게 지랄을 떨어대며 나라를 갉아먹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었습니다..생각하면 한숨밖에 안 나오는...)라 하면 두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첫째, 오다 노부나가가 고안한 "3단계 철포맨 (내 맘대로 붙여본 말입니다~)작전", 그래서 그 작전으로 정예군단 다케다 기마군의 개떼러쉬를 전멸시킨 것. 둘째, 무능한 다케다 가츠요리가 유능한 老臣의 말을 듣지 않아 다케다 군이 대패하게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 이미지 만으로는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자와의 "카게무샤"의 라스트 씬과 같다고 여기겠지요..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나가시노전투에 대한 여러 새로운 새로운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그것은 어떠한 점에서 기존의 역사연구와 차이가 있을까요? 우선 다케다군이 신켄 사후에, 부족할대로 부족해졌다는 군사적 규모의 축소상태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다 - 도쿠가와의 천군연합부대는 3만, 다케다군은 단지 1만 2천 뿐이었습니다.가장 최근에는 이것도 1만 2천의 3분의 2인 8천명뿐이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지요..이 점은 이 전투를 논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야전에서도 이 정도의 병력차가 있다면, 단 한번의 접전만으로 병력이 적은 쪽이 패배하기 쉽상입니다..그러나 노부나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신중하게 진행해 나갑니다..강 등의 천연의 장애물을 기반으로 하여 참호 대신 둥그스런 형태의 마방책을 설치합니다.. 요컨대 즉석에서 城을 결전장으로 만드는 것이지요..(이른바 야전축성책).이것은 3배의 병력을 지녔으면서도 노부나가가 야전에서 다케다군을 절대적으로 결딴낼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하지만 다케다군은 이 城에 3분의 1의 병력으로 돌파를 강행합니다. 어째서? 바로 그것은 결전 직전에 도쿠가와군의 사케이 등이 행했던 다케다 군에 대한 병참기지 야습작전에 의해서, 다케다군이 정면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격파 또는 철퇴시키지 않으면 철수조차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에 몰려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때까지 가츠요리는 연전연승으로 이 싸움을 치뤄왔습니다. 사실상 전쟁의 도발도 어찌보면 가츠요리가 먼저 했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는 시세의 흐름을 타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구나 가츠요리에게는 계속해서 싸워 지속적인 승리를 이뤄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만들었던 것은 다름아닌 가츠요리의 아버지, 바로 풍림화산 그 자체인 다케다 신겐이었지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신켄은 가츠요리를 자신의 후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신켄은 가츠요리의 적자 노부카츠가 성인이 될때까지 가츠요리에게 家政을 대행시킨 것에 불과했지요. 이것으로는 다케다가의 重臣들이 가츠요리에게 충성을 바칠 리는 만무했습니다. 신켄은 자신의 사후에 다케다가를 거느리지 않으면 안될 가츠요리에게 전권을 위임하지 않고 죽었던 것입니다. 명장 다케다신켄의 최대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케다군은 정면에서 공격을 반복했을까요? 그것은 다케다군이 강적과 싸웠던 과거의 전투방법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라우에와 싸웠던 우에다하라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아마도시라는 중신을 필두로한 그룹의 무장들이 죽기살기로 싸워 이 방법을 통해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또한 우에스키 겐신과 싸웠던 제4차 가와나카지마의 合戰에서는 동생이자(카게무샤에도 등장하여 형의 또다른 그림자무사로 삶을 살았던) 다케다군의 부장인 다케다 노부카도와 야마모토 등이 이러한 전투형태로 승리를 거둡니다. 요컨대 다케다군은 그 뿌리깊이 골수에 박혀 어찌해 볼 수 없는 전투사상이 전군을 지배했던 것은 아닌지? 즉, 일단 전투에 임하는 상황이 되면, 물불을 안가리고 맹렬하게 돌격하며 자신의 생사를 거는 돌파작전이 체질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명장 신켄이 지휘한 가와나카지마의 전투에서 병력손실율 80%(보통 이정도면 전멸이라고 해도 무방하죠)라고 하는 경악할만한 숫자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손실률이 많은 전투도 다케다의 샘솟는듯한 카리스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승리로 열세를 만회하는 그의 지략과 정치력, 오랜 전장에서의 경험의 활용 등으로 충분히 커버될 수 있었던 것이 다케다 생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이 방법은 바뀌지 않았고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그 전투법을 지휘할 명전략가 신켄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중신이 각각 독립된 지휘체계를 지닌 부대를 지휘했으며, 가츠요리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해 본진의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면돌파작전을 벌인 결과가 바로 대패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다케다군의 실정에 대해서 좀더 부연설명을 해보도록 합시다. 일반적으로 다케다군이라고 하면 다케다 기마부대를 떠올립니다. 이것이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누누이 설명한 구로자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떠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와 같은 모습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다케다가의 기마보유율을 보더라도 다른 전국 다이묘와 몇 프로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기마무사들도 각 가신들이 각각 소집에 응하여 "누구누구는 기마무사 몇기를 갖고, 누구는 창병 몇기를 갖고..."식으로 형편에 따라 모이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신들이 각각의 기마무사대를 동지로서 결합하여 집단전법으로 싸우는 일 등은 이 당시엔 불가능했었습니다. 그럼, 어째서 다케다군 = 기마부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을까요? 신켄은 청년무렵의 싸움 중에서 전격전을 사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적의 영내까지 10일만에 갈 수 있다면, 8일분의 일정을 20일간에 걸쳐서 진군합니다. 그리고 충분한 여유를 두고 적의 대열과 진형을 파악하여 헛점이 있는 요충지와 주단지를 정하고 기마무사를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여 남은 2일의 일정을 하루만에 진행하여 적을 급습하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이 전법은 당시 주변의 다이묘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으며, 결국 이 이미지가 후일까지 이어진 것은 아닐까하고 짐작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케다 측에서도 질풍노도의 다케다군대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크게 선전활동을 병행했었죠. 西國의 무사들에 비하여 東國의 무사들은 기마기술이 발군의 실력에 달해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서국의 병사들은 무척 놀랐고, 두려워했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가시노의 싸움에서는 다케다군은 그 기마를 사용한 전격적 돌격을 행했을까요? 역사적 기록에는 "나가시노 합전에서 다케다군의 각 부대의 대장과 부장, 7-8명의 부대장만이 말에 탔고, 다른 자는 기마를 뒤에 남겨두고, 도보로 창을 들고 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포르투칼의 선교사 루이스 플로이스는 "기마무사는 서양에서는 말에 탄채 싸웠지만, 일본에서는 기마에서 내려 싸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거의 모든 다케다 군의 장병은 말에서 내려 돌격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편을 조금이라도 살펴봅시다. 우선, 철포의 문제가 있습니다. 3단 사격을 착안하여 실행했던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최초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일까요? 실제로는 이 나가시노 전투가 일어나기 50년전에 오다 군은 3단사격전법을 자신들이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다군은 1570년 9월 12일 밤에 갑자기 혼노지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혼노지 측의 최전선부대로서 싸웠던 것은 雜賀孫日이 거느린 雜賀隊였지요.. 그리고 당시의 일본에서 가장 사격에 숙달되어 있던 雜賀軍이 취한 전법이 3단사격이었습니다. 이 전법에 의해 오다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구원하러 온 오다 노부나가 자신도 허벅지에 탄환을 맞아 부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철포에 의한 3단사격 뿐만 아니라, 화살, 투석기 등의 날아가는 전투도구의 연속사격방법은 옛날부터 실용화되어 있었고, 이것을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발명했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철포부대가 3천명이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현재로서는 1천명 정도였으리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철포부대의 수를 3천이라고 기록한 것은 에도시대에 쓰여진 약간 허구적 성격이 가미된 "信長記" 뿐입니다. 신뢰할 만한 사료들에서는 철포부대가 1천여명이라는 것이 대부분 기록상에 있습니다. 즉, 철포부대는 여러 國의 다이묘로부터 모병한 혼성부대였고. 교대로 사격하는 등의 전법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가시노 전투가 실제로는 8시간에 달하는 격전이었던 것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예를 들어, 8시간의 전투 중의 반인 4시간 사격을 하고 있었다면, 탄환의 수와 화약의 양은 어느정도였을까요? 1분에 1발을 발사했다고 해도 4시간이면 240발입니다. 화약의 양도 반 이상은 소모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탄환을 철포대의 병사(대부분 최하급 무사 足輕이었지요) 한사람 한사람이 지니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총신 그 자체도 당시 철포의 총신이 그 만큼의 장시간 사격에 견딜 수 있을만큼 튼튼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철포는 드문드문 사용되었을 뿐이고, 싸움 그 자체는 처참한 백병전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일본 사학계에서도 그러한 학설에 많은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나가시노 전투의 경위는 創兵이 마방책의 전면에서 다케다군과 일정한 싸움을 행하여 마방책 근처로 유인해 몰아넣은 다음, 철포부대가 사격을 행하여 다케다군을 퇴각시켰다는 것이 장장 8시간동안 반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극히 소모적인 전투를 반복했다면, 어찌되었든간에 병력의 많고 적음은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소모될 위기에 처한 다케다군은 점차 퇴각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다케다군이 나가시노 전투의 주전장인 設樂가하라에서 냈던 사상자 수는 놀랄 정도로 적었습니다. 그럼 다케다군은 어디에서 90% 가까운 손해를 입었을까요? 그것은 철수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추격전으로 방향을 바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의해 다수의 다케다 군사들이 집단적으로 사냥당하고 몰살당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츠요리의 철수가 완료된 후에는 다케다군의 宿老 그룹의 무장들이 지극히 자멸적인 무차별 돌격전을 연이어 감행합니다. 이것에 의해 山縣昌景, 馬場信房, 內藤昌豊, 眞田信綱, 眞田昌輝라고 하는 다케다 신켄의 청년기부터 그를 따라 전장의 신화를 남겼던 주역들 - 본인이 중국사의 이해를 위한 첫단계로 추천하는 삼국지로 따지자면, 손견 및 손권의 수하 정보, 태사자 등이 이와 같은 케이스- 이자 주요인재들이었던 이들이 여기에서 허무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이것에 의해 다케다 군은 나가사카 등의 간신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어 멸망의 길로 달려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한 나가시노 전투의 요점을 정리해 보도록 합시다.. 첫째, 다케다군은 손실이 많은, 무모한 돌격전을 반복했다. 다케다 신켄의 부재와 가츠요리의 정통성 결여로 인해 지휘계통이 지리멸렬되었기 때문에 기묘한 책략과 작전의 유연한 변경이 나오지 못하여 단순한 돌격전만이 감행되었다. 둘째,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3천명의 철포부대에 의한 3단사격만으로 다케다군을 철퇴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고, 야전성곽을 축성하고 공성전과 같은 전법을 행했다. 셋째, 다케다 군의 사상자의 대부분은 철수시기의 추격전에 의해 발생했다. (3단전법에 의해 다케다군을 멸망시켰다는 것은, 마치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이 수나라 113만(? - 짱깨들 과장법은 기네스북 감입니다...) 대군 - 을 대동강 살수가에서 둑을 터뜨려 몰살시켰다는 역사적 개구라와도 맥을 같이 합니다. 살수대첩도 사실 수공작전이 아니라, 고구려의 험난한 산세와 지형을 이용해 수나라 내부의 정세불안 및 평양성 공략실패로 사기가 무너질대로 무너져 퇴각하는 수나라의 패잔병을 게릴라 전법으로 격퇴시켰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그 숫자도 최대한 많게 잡아 20만 정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넷째, 오다군의 승리요인은 철포대에 의한 파상공세보다도 다케다군의 산악 보급지를 급습한 것에 의한 성동격서 작전 및 나가시노 축성부대의 분발에 의한 다케다군의 병력 분산, 오다-도쿠가와 군의 부장 사쿠마가 없다는 거짓정보에 의한 혼란 등에 있었다. 위와 카게무샤와 관련된 나가시노 전투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사적 넋두리를 풀어보았습니다..영화 카게무샤의 이해에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구먼요...유구언 무구언...(^.^) 끝으로 카게무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묘사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わたしのかみさま(나의 神! 신장!!)인 오다가 그 유명한 あつもり를 읊는 대목의 상황을, 본인 마음대로 이 명화의 잔상을 더듬어봄과 동시에 대본식으로 꾸며봅니다....! ^__^ - 예기치 못한 落馬로 影武者의 身元이 드러나고, 細作을 통해 기어이 오다의 진영에까지 소식이 알려지고야 만다... - 곧 이어지는 일본의 識者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 "人間 五十年" 장면!! (....노부나가..순간 기뻐하며 말한다..) "뭣이!! 山이 움직였다니?" (風林火山...疾如風徐如林侵, 掠如火不動如山 "나아가기는 바람과 같고 잔잔하기는 숲 그 자체로다, 쳐들어가기는 불과 같고 동요하지 않음이 산과 같으니..." ---> 神將 다케다 신켄.... (오다를 '혼노지의 변'까지 시종일관 모시며 죽음까지 함께 했던 시동 '란마루'가 정좌하고 앉아있다..잠깐, 이 대목에서 기억이 가물가물, 오다가 이제 무주공산이 된 다케다 가문을 '3단계 철포맨작전^^'으로 아작낼 각오를 다지며 말을타고 계속해서 마장을 도는 씬과 헷갈렸을 수도...) (하지만 우리의 오다, 금새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변화하며, 저기 한 곳 공간의 점을 응시한다....) "우리(다시 말해 천하의 오다 노부나가를..)를 3년 동안이나 속여왔었단 말인가..?".. (부채를 편 채 일어나 실내를 무대로 춤을 추며 읊는다) '人―間― 五十年―' '돌고 도는 無限에 比한다면' '덧없는 꿈(一場春夢)과 같으니' '한번 태어나 죽지 않는 이' '이 세상 그 뉘 있으리―' 결국 오다가 그 전투적 인생에 있어서의 죽음보다 더한 사투와 고비고비마다 즐겨 읊던(아무나 이런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법..) 이 우타처럼 그는 오십년을 다 채우지 못했으니, 노래가사가 가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속설처럼 그도 이미 귀신도 곡할 통절한 영웅의 최후를 예감했던 것은 아닌지.... 참고로 본인 추측으론 小說 은하영웅전설 속의 제국측의 오야붕 라인하르트 폰 로엠그람이란 설정 속엔 오다 노부나가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특성들과 매력, 전략들이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판단됩니다 첫째, 오다 노부나가가 고안한 "3단계 철포맨 (내 맘대로 붙여본 말입니다~)작전", 그래서 그 작전으로 정예군단 다케다 기마군의 개떼러쉬를 전멸시킨 것. 둘째, 무능한 다케다 가츠요리가 유능한 老臣의 말을 듣지 않아 다케다 군이 대패하게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 ------->가쓰요리가 무능하시다고 하셨는데 가쓰요리는 도쿠가와의 천연적인 요새인 다카텐진성을 자신의 능력으로 함락합니다. 그렇지만,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이 방법은 바뀌지 않았고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그 전투법을 지휘할 명전략가 신켄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중신이 각각 독립된 지휘체계를 지닌 부대를 지휘했으며, 가츠요리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해 본진의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면돌파작전을 벌인 결과가 바로 대패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케다 신겐 말고도 고사카 마사노부등 전술가가 있었습니다.다만 가쓰요리가 그들이 매일 딴지를 거는데에 불만을 품고 독단전술로 나간 것이죠. 오다군은 1570년 9월 12일 밤에 갑자기 혼노지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혼노지 측의 최전선부대로서 싸웠던 것은 雜賀孫日이 거느린 雜賀隊였지요.. 그리고 당시의 일본에서 가장 사격에 숙달되어 있던 雜賀軍이 취한 전법이 3단사격이었습니다. 이 전법에 의해 오다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구원하러 온 오다 노부나가 자신도 허벅지에 탄환을 맞아 부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철포에 의한 3단사격 뿐만 아니라, 화살, 투석기 등의 날아가는 전투도구의 연속사격방법은 옛날부터 실용화되어 있었고, 이것을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발명했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오타:죄송하지만 혼간지가 아닐련지? 이하는  제가 붙인 것 다케다 군의 기병비율은 ? 1만5천설에 의함    당시 일본의  군대는 천명 당 말 120필 ,짐말 100필  그에 의함 표준비율에 의함 기병은 1800정도 많이 잡는 견해는 3500정도로 본다오  그러니  다케다기병은 나가시노당시 2-3000사이구료 다케다 - 오다 도쿠가와 전사자 숫자? 노부나가의 편지 호소카와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만을 죽였다고 자랑 ( 다케다 총병력이 나가시노에서 8천 설도 있는데 엄청난 뻥이구료 )   지금은 반정도를 잃은 것으로 본다오 즉 다케다 4천-8천 사이 손실 오다 도쿠가와측은 ?   도쿠가와 측 인물의 (나가시노 일기)에는  6천 손실   즉 손실을 절대 숫자로 비교 시에는 비슷하나 병력비율과 불패 다케다 신화 의 붕괴니 미가타가하라에선 도쿠가와 전사 1400여 다케다 전사 최하 50 최대 150 이던 것이 불과 3년전이니 도쿠가와가 급히 도주하다 큰것을 실례한 일은 유명하오 사진은 구마모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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