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류키치/ 福澤諭吉
자유. 독립. 개인의 지덕향상. 민권사상 보급. 언론에 의한 개혁. 실학 추진. 경제부흥.
서양의 발달된 문명의 근원에는 회의의 정신과 자유로운 탐구가 있다는 것을 간파,
봉건적 제도와 기존사상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으면 문명권에 접어들 수 없다고 역설.
.......이 정도는 좋은 생각같다.
1873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일본 최대의 군인정치인‘사이고 다까모리’와의 진심어린
교류와 우정, 이또 이로부미(이등방문). 이노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등과도 깊은 교류.
........약간 의심스러 보이고,
1884년 시사신보/時事新報 “이제 15년이 지나면, 중국은 서구열강과 일본에의해 분할될 것
이다. 일본은 마땅히 복건일부와 대만전체를 가져야한다.“
1885년 3월 16일, 시사신보에 실린 ‘탈아론(脫亞論)’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악우(惡友)들과 친할 경우,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중국,조선)들을 사절해야 한다.
[민간계도를 목적으로 한 ‘시사신보(時事新報)’까지 발간, 언론까지 영역을 넓혔으나 점차
민권론자에서 국익을 좇는 국권론자로 변신하면서 훗날 지지신보는 제국주의 논리를
가다듬고 이를 집권층에 주입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
1886년, “일본은 아시아의 동부에 위치하지만, 국민정신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를
지향한다,,,,,,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더 이상 이웃나라의 개화를
기다릴수 없다, 차리리 그들과 결별하여,,,,더이상 중국과 조선에 친절할필요가 없다.
서양인을 모방하여 그들처럼 대하여야한다.”
..........이쯤되면 “망상적 정치선동가”가 분명하고.
1901년 사망전〈자서전〉에서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으로 모든 봉건적 특권들을 폐지하고,
1894~95년의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제압한 것,,이로써 일본이 세계열강 대열에 끼는 계기가 되었다“다고
단언.
...........결국, “정신병자 사무라이”임을 자인한다....... 자폭,폭소/自爆,爆笑....(^0^)//
그가 설립한 게이오 대학 학생이 남긴 유서.
긴 학생시절을 얻은 신념으로 보자면 자유의 승리는 명백하고 권력주의 국가는
일시적으로 흥했다가도 결국에는 망합니다. 파시즘의 이탈리아와 나치즘의 독일이
패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특공대 파일럿은 그거 조종간을 잡은 기계일 뿐 인격도 없고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으며, 그저 적의 항공모합을 향해 돌진하는 마치 자석 속의 철 분자와 같습니다.
이는 이성을 가진 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로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정신의 나라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정신상태로는 죽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내일은 출격입니다.
내일 자유주의자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 우에하라 료지 유서 (일부) 게이오 대학 경제 학부생,
1945년 5월 특공부원으로 오키나와에서 전사 22세
.
.
.
후쿠자와 류키치;
계몽가이며, 蘭학자
이 인간은 두가지의 사상을 주장하는데,
내수용 주장은 "인민 평등론"을 주장하고
(天不生,人上之人. 地不生,人下之人)
대외적으론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 하자"는 탈아입구론을 주장한다.
위 두가지 주장은 논리가 참 한심하다.
두가지 주장을 믹스하면, "인민은 평등하나,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 지배해야한다" 가 된다.
이는 “자국 지상주의나, 아세아내 한정 우월주의,식민 지배주의”이다.
결국, 후쿠자와 류키치는, “열도를 핵실험장으로 만든, 싸이코 정치선동가”일 뿐이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