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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이후 조선상황(5)

지랄 2006.12.07 22: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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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 후에 있었던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의무를 이행하 려고 일본으로 가는 수신사(修信使) 십오명의 경비에도 궁색한 조정에서는 체면불구하고 오천원밖에 되지 않는 여비조차 일본의 보조를 받고 일본 공 사가 귀국하는 일본기선 메이지마루(明治丸)의 신세를 지는 초라한 사절단 이었다. 이 때에 수행한 김옥균은 대담한 성격의 모사(謀士)로서 이 기회에 국제정 세를 연구하는 동시에 일본의  유형무형의 후원으로 국내에서의  개화운동 (開化運動)을 일으킬 준비를 하려는 정치적 포부가 있었다. 이들 사절단은 일본에 가서 독립국 사절단의 대우를 융숭히  받고, 제물포 조약 이행 조건의 완화에도 성공한 후 차관획득까지 하고 돌아와서 조정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감명 깊게 각성한  점은 조선도 일본처럼 개화혁신(開化革新)해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박영효 일파에서는 귀국하자마자 그런 정책으로 소장세력을 규합해서 개화 독립당(開化獨立黨)을 조직했다. 그전의 개국정책을 지지하는 일파도 속칭 개화당이라고도 했으나 정식으로 개화당의 명칭과 정책을 들고  나선 정당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개화당은 서양문명으로 혁신된 일본을 본받겠다는데서 일본색채가 농후 했다. 그런데 이때의 민씨 정권은 척족(戚族) 민씨를 비롯해서 친정(親情) 사대주의로 일변도(一邊倒)되어서 관제(官制)와 군제(軍制)까지  청국식으 로 개편한 수구파(守舊派)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또다시 신구 대립의 파쟁은 움트기 시작했다. 개화당파에서 민영익 만이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이라는 청국식 관명의 외무대신 격으로  임명 되었으나, 이것은 민씨의 소장 영수자격으로였고, 박영효는 한성판윤(漢城 判尹)을 시켜서 각료급에 참여하지 못했다. 친정(親情) 수구파(守舊派)의 민비 정권은 사절단보다 더 오래  일본을 시 찰하고 돌아 온 개화당의 참모장격인 김옥균을 포경사(捕鯨使)의 명칭으로 해외로 파견, 경원하는 인사 발령을 하고 당수  박영효마저 광주유수(廣州 留守)로 좌천해버렸다.   그와 동시에 박영효 일파가 개화정책의 출발을 만들어 관보를 겸한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을 만들어 발간했으나 창설한 개화당  인사에게는 실권을 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청국군의 행패를 비판하였다 해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는 정권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신흥세력의 개화당을  탄압하는 동시에 대원군 세력의 잔재를 뿌리째 뽑으려고 귀양 보냈던 정현덕(鄭顯德), 조채 하(趙采夏), 이재만(李載晩), 이원진(李遠進)을 비롯하여 조병창(趙秉昌), 조우윤(趙宇潤), 이회정(李會正), 임응준(任應準) 등 여덟명을 군란과  관 련시켜서 전부 사형에 처해 버렸다.   이래서 개화당과 대원군의 잔당은  정책이 다르면서도 민비정권  타도에는 감정적으로 동조(同調)하는 역효과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허욱(許煜)  등 일곱명이 군란 주동자로 능지처참당한 것은 일이라도 일으키다가  실패 당 한 결과이겠지만 위의 여덟명 참변은 기가 막힌 억울한 죽음이었다. "대원군의 잔당은 모조리 죽여버려라. 그놈들이 이 나라 땅 위에  살아 있 다는 것만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민비는 민태호에게 직접 명령했다. 고종도 그 자리에서  찬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민비의 감정적인 보복에 지나지 않았다. 조병창 부자가 함께 참살되었고 정현덕은 군란 당시에 귀양 가  있던 몸이 라 군란은 구경조차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재집권한 뒤에  불러다가 감투를 씨운 것이 대원군이 청국에 잡혀가기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런 정현덕까 지 군란에 관련했다는 억지 죄명으로 죽였던 것이다. 이 시절의 민비의 인간성과 정권의 보수주의에 대해서 외국 평론가 롱포드 는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국왕에 대한 왕비의 영향력은 전능의 그것이었다. 정적(政敵)  대원군이 중요한 존재였을 때는 그가 가진 보수적 편파성과 싸우기 위해서 개국정책 도 썼다. 그러나 왕비가 반대한 것은 대원군의 정책이  아니었고 대원군의 개인과 그의 세력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임오군란 때 피신했다가  요행히 권력을 잡자, 또다시 친정 민씨들로 조정의 모든 요직을 독점시켰는데, 민 비와 민씨 일파의 보수주의는 이미 전통적인 고질이었다.』 이러한 민비 정권의 사대주의와 보수주의는 청국의 힘만  믿고 일본에게는 푸대접했고, 심지어  지일파(知日派)로서 자주혁신(自主革新)을  주장하는 박영효, 김옥균의 개화당을  탄압했으므로 일본은 은인자중하면서  조선의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대국(老大國) 청국의 허울 좋은 위세를 코웃음치듯이, 신임 일본 공사 다께조에(竹添)는 실리적(實利的)인 성과를 과학기술면에서 착착  거 두고 있었다. 그 중요한 이권만으로도 부산과 나가사끼  간의 해저전신(海 底電信)의 부설, 한일통상조약, 이정조약(里程條約), 택지차용권(宅地借用 權), 각 항구의 관세업무(關稅業務)를 일본은행 지점이 취급할 것 등을 조 선 정부와 교섭해서 조인에 성공했던 것이다. 청국과 민비의 사대보수당은 허울 좋은 권력에만 취해 있는  사이에, 일본 은 과학과 경제의 힘으로 실리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처럼 신흥국 가로 일해 보겠다는 개화당의 젊은 혁명적 정열은 보수당의 부패와 독재를 비상수단으로 타도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 "민비 일당의 보수 세력을 몰아내야, 우리도 살고 나라도 구한다." 이런 개화당의 운동은 대원군 세력을 몰아내고 세도를  부리던 민비정권에 게 새로운 정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에 갔던 젊은 사절단이 개화당을 조직한 것은 일본의 새로운 문물제도 를 본따서 조선도 그와 같은  근대국가로 개화 발전시키려는 순수한  애국 정열에서였다. 그래서 정식 당명도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이었으나  보통 은 개화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과 서광범(徐光範)이 늦게 돌아온  것은 국제정세 연구와  일본에서 개화당의 정치자금을 구하려는 일 때문이었다. 일본의 조야에서는  김옥균 의 정치운동 취지에는 찬성하고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민씨 정권 에 반대하는 새로운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거부했 으므로 결국 실패하고 귀국했다. 김옥균이 귀국하자 먼저 귀국했던 사절단(개화당) 동지들은 조정에서 거세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와  고종은 김옥균의 외교수완만은  인정했다. 사절단 일행의 최대 선물인 이십만원  차관을 성공한 공이 주로  김옥균의 활동에 있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화당이라는 이유로 등용하 지 않고 푸대접했으므로 불평이었다. "꾹 참고 대사(大事)를 위해 끝까지 단결해서 실력을 기르며  시기를 기다 립시다." 하고 당수격인 박영효를 격려했다. 광주유수로 좌천된 박영효도 용기를 얻고 "나도 한성판윤에서 쫓겨났지만, 도리어 잘됐소. 남한산성에서 혁명세력을 기르겠습니다. 직속군대 육백명을 모집 육성할 자신이 생겼으니,  일단 거 사시엔 우리 개화당의 혁명군으로 쓸 수 있소." 그리고 당세 확충을 책략하던 중 김옥균에게는 또 다시 일본으로  갈 기회 가 왔다. 당시 재정 궁핍에 허덕이던 민비정권에서는 일본과  청국이 조선 에 대한 이권경쟁을 하자 일본에서 덕을 볼 수 있으면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다. 마침 사절단이 이십만원의 차관을 얻어 와서 갈증을 면한  조정에서는, 다 시 삼백만원의 대일차관을 하려고 서울주재 일본공사관과 교섭했으나 뜻대 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선주재 초대 미국공사 푸트가 부임하는 길에 그의 통역으로 따라 귀국한 윤치호(尹致昊)가 일본을 거쳐 올 때,  일본 외무대보(外務大 輔)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김옥균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전해 왔다. 『귀하가 국왕의 위임장만 갖고 정식 교섭을 오면 귀국에서 희망하는 삼백 만원 차관이 성공 될 가능성이 있소.』 민비도 삼백만원이라는 돈이 당장  생긴다는 기쁨으로 김옥균에게  국왕의 위임장을 내주며, 꼭 성공하라는 부탁을  했다. 김옥균은 큰 희망을  품고 동경으로 갔으나,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물론 편지까지 보낸 요시다 외무차 관까지 태도가 냉정했다. "각하의 편지만 믿고 국왕의 위임장까지 갖고 왔는데 안 된다는 것이 도대 체 무슨 까닭이오?" 하고 김옥균은 요시다를 추궁했다. "나로서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나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이 일본의 재정상태가 그런 거액을 외국에 빌려 줄 사정이 못된다  하니 어찌합니까?   미안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당신의 포부인 '신학문 연구'라고 하고 돌아 가시오. 학비 생활비는 염려 마시고..." 요시다는 이런 핑계를 했다. "삼백만원이 많으면 백만원이라도 차관을 해줘야 나의 체면도 서지 않겠습 니까?" "글세.. 다시 물어는 보겠지만..." 하고 요시다는 얼버무렸다. 그 후에 또 재촉해도 소용이 없었다. 김옥균은 액수를 자꾸 낮추어가며 애 원하다시피 했으나 일본 정부의 태도는 단돈 만원도 차관에 응하지 않겠다 는 태도였다. 김옥균이 나중에 알아보니 차관을 거절한 이유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개재해 있었다. 첫째가 김옥균 자신에 대한 인격모독 문제였다.  그것도 일본인이 아닌 동포와 청국인의 중상모략에 의한 모독과 방해공작이었다. 국내에서 외교문제로 일본공사와 공식 접촉을 하던 민영목(閔泳穆)은 그런 중대한 사명을 정적인 개화당  청년모사(靑年謀士)에게 맡긴 것에  질투를 느끼고 일본공사 다께조에에게 박영효와 김옥균은 경거망동하는 '위험도배 '라고 중상했다. 그리고 청장 목인덕(淸將 穆麟德)도 민영목과 같은 중상을 했을 뿐 아니라 김옥균은 국왕의 위임장을 위조해 가지고 가서 개화당의  정치자금으로 횡 령하려는 행동이라고까지 모략했다. 청국으로서는 일본이 막대한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발언권이 강화되 는 것을 꺼렸으므로 무슨 짓이든지 대일차관을 방해해야 할 입장이었기 때 문이다. 다께조에 공사는 이런 정보를 일본 외무성에 보냈고  겸해서 김옥 균 등의 개화당이 정계에서 무력하므로 무력한 야당의 간부를 조선의 대표 로 상대하는 것은 장래가 위험하다는 의견도 상신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일본정부로서도 청국이 갖고 있는 조선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지 배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만간 청국과의 실력 충돌을 각오하고 군비 확충을 암암리에 진행중이었으므로 그런 차관을 조선에 제공해서 청국을 자극시키 는 것이 불리하다는 점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한 관계로 김옥균이 대일차관에 실패하고 실망해서 갑신년(甲申年) 삼 월에 귀국하자 개화독립당 전체의 낙망이 더욱 커졌다. 그들의  낙망은 곧 수난(受難)이었다. 박영효도 광주유수조차 물러났으므로 그가  혁명군으로 이용하려던 양병계획(養兵計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화당의 운명이 이처럼 약화되어 갈 때에 동지였던 민영익이 미국과 구라 파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민비의 수단에 매수되어 동지들을 배반하고 역시 민씨 일족의 본색을 나타냈다.   개화당에서는 당내의 모든 정책과  비밀을 아는 민영익이 민비의  주구(走 狗)로 돌변해버렸기 때문에 타격이 큰데다가 민영익 자신이 정면에 나서서 박영효, 김옥균의 세력을 공격했다. 그리고 청장 목인덕은 김옥균이 청국의 간섭을 공격하고 일본의 힘으로 청 국 세력을 꺾으려는 책사이며, 당오전(當五錢)의 화폐 문제로 직접 면박당 한 것을 보복하려고 민비에게까지 그를 정계에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래서 김옥균은 굳은 각오를 하고 고종에게 『지금의 국내실정은 정령(政令)이 하나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분당반목 (分黨反目)만 심해지니, 어느때 뜻하지  않은 사변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신은 잠시 시골로 물러가 있겠습니다.』 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대문 밖의 별장에 은퇴하고 표면상의 정치활동을 멈 추어 버렸다. 이때 청국에 대한 정책에 중대 변혁이 생겨서 질식상태에 빠졌던 개화당에 게는 시운이 오는 듯했다. 조선에 파견된 청국 군대의 군권남용이 조선 백 성의 원망 대상이 되었고, 또 막대한 재정을 낭비했기 때문에 군란 수습과 대원군 납치로 위엄을 떨치던 마건충 장군을 탄핵하는 여론이 청국 조정에 서 일어났다. "조선 백성의 원망을 사고, 군사비를 남용하고, 일본에 반감만  사는 주둔 군을 곧 철수시켜라." 이런 청국 국내 여론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주둔군 장 군끼리의 반목(反目)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것은 오장경(吳長慶)과 원세개 (袁世凱)의 세력 투쟁에서 나온 여파이기도 했다. 그래서 갑신년(甲申年=서기 1,884년) 4월에는 청국 주둔군은 반감되고, 원 세개에게 밀린 오장경 등의 부대는 본국으로 철수해 가고  말았다. 이어서 청국에서는 안남(安南:베트남) 문제로 불란서와 정면 충돌이 났다고  들려 오고 대원군을 석방 귀국시킨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친정 보수당은 점점 그들의 정권유지에 불안감을 느꼈 다. 그와 동시에 일본에서도 이 기회에 청국의 조선 지배를 배제하자는 적 극론이 우세해졌다. 그 방법으로는 외교적으로 청국과 직접  담판하고, 그 것이 여의치 못하면 영국, 미국, 불란서, 독일 등과 협력해서 조선의 독립 권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서는 정부내에  개화독립당의 세력을 강화하도록 적극 지원하자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런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본 개화독립당은 다음 정권을 노릴 운동을 다시 활발히 추진시켰다. 그러나 친정보수당은 개화당과 타협하고 인물을  등용 하는데는 여전히 인색했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개화당이 유리하게 되는 미묘한 동향을  본 민비정권에 서는 큰 선심이나 쓰는 듯이 개화당 인물을 등용한 것이 겨우 신설 우정국 (郵政局) 총판(總辦)으로 홍영식(洪英植), 부승지(副承旨)로  서광범(徐光 範), 신설된 조련국(操鍊局)의 사관장(士官長)으로 서재필(徐載弼)을 임명 했을 뿐이었다. "민비정권엔 우리와 타협해서 국난을 타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인제는 청년층의 동지를 규합해서 비상수단으로  썩은 보수당을 타도하는  수밖에 길이 없다." 김옥균의 단호한 계략으로 당론이 결정되자 자기들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 보냈던 사관생도(士官生徒)를 불러들이는 등 암암리에 혁명 준비를 진행시 켰다. 청국이 불란서와 전쟁상태에 들어가자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본국의 훈령을 받고 돌아와서 전과는 천양지판으로 국왕과 조정에 대하여  태도가 강경해 졌다. 다께조에는 공사의 귀임을 인사차 방문한 외아문(外衙門)의  김홍집 (金弘集)과 김윤식(金允植)에게 청국과 친청(親淸) 조정에 대한 공격을 노 골적으로 했다. "귀국 외교관 중에는 청국의 종노릇하는  자가 수명 있다고 하니 나는  그 따위 사람들과는 외교문제를 이야기하기도 싫소." 그리고 김윤식에게도 직접 면박해서 개인적 모욕까지 했다. "당신은 학문에 능하고 청국과 내부(內付)할 의사가 있다 하니, 아주 청국 에 가서 벼슬하는 게 어울리지 않소?" 친청 보수당의 외교관이 이런 위협과  모욕을 당했다는 소문은 곧  정계를 긴장시켰다. 김옥균은 곧 일본공사를 단독 방문하고, 다께조에에게 기고만 장한 웅변을 토했다. "당신이 말한 그 청국 종들의 중상모략을 듣고 우리 개화당을 의심하고 과 소 평가했기 때문에 우리의 구국대계는 실패했소. 한일 양국의 공영(共榮) 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우리의 정책을 적극 후원해 주시오." 그리고는 다께조에 공사를 정면으로 비난까지 했다. "과거에 실례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오. 그러나 어느  나라든지 외교정책 은 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앞으로는  일본도 적극 적으로 당신들의 개혁운동에 협력하게 될 것이요." 다께조에는 과거를 사과하면서 앞으로의 개화독립당을 응원하겠다고  솔직 한 약속을 했다.   이런 약속을 받은 김옥균은 곧 박영효에게 보고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 공 사를 방문케 해서 더 자세한 개혁운동의 방침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도 록 급속한 활동을 전개했다. 9월 15일에 일본공사는 고종을  알현(謁見)하고 총 두 자루를  외무대신의 예물로 바치고 국왕을 통해서 개화독립당을 위한 거대한 정치 자금조의 선 물까지 바쳤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손해배상금(損害賠償金) 잔액(殘額) 사십만원을 귀 국 정부에 환납(還納)하옵니다. 그러나 그 금액은 전부 내정개혁 자금으로 만 전용(轉用)해 주십시오. 그리고 불란서가 완고한 보수주의(保守主義)인 청국과 전쟁 중이니, 앞으로 국제정세에 일대 변화가 예상됩니다. 이런 중 대시국에 임해서 귀국에서도 상하가 단호한 결심으로 일치  단결해서 내정 개혁을 실천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같은 중대 권고를 국왕에게 아뢴 것은 청국의 내정관섭을  공격하는 동 시에 일본이 개화당운동을 적극 후원한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었다. 일본공사가 고종과 알현하고 나온 다음날은 마침 양력 11월 31일로 명치천 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이었다. 그는 신축한 일본공사관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초대한 내외 빈객들 면전에서 청국공사 진수당(陳樹棠)에게  조롱 이상의 모욕을 했다. "진공사(陳公使)는 무골해삼(無骨海蔘)이오." 이것은 못난 병신이라는 욕이었다. 이 의미를 알아들은 사람은  그 자리에 서 놀랐다. 그리고 나중에 전해 들은 정계에서는 의논이 분분했다. "일본공사가 청국공사를 각국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모욕을  한 것은 일본이 불란서와 동맹하고 청국에 개전(開戰)할 징조다. 그렇지 않고 서야 외교관끼리 그런 실례가 있겠는가?" "민비당의 운도 다 갔군. 인제 개화당이 세월 만났다." "세도가 바뀌는 것은 좋지만 외국의 힘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꼴이 한심 스럽다." "세상은 바뀌고 또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이 벌어질까 걱정이다." 민심은 또다시 흉흉해졌다. 이후 갑신쿠데타.청일전쟁..동학혁명..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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