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토요일

어젯밤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하. 하나씨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왔는데..

또 손만 잡고 집까지 바래다 주다니.
아. 정말 구서진.

어쩌면 이 진전을 겁내고 있는 것은 서진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서진에게 하나는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웠던 연인이자 아내였기 때문에,
어떻게 이 관계를 정의하고 발전시켜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다.
오늘  마무리하기로 한 퍼레이드 기획안 작업을 집에 와서 하기로 한 것이다. 집에 작업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파일들이 있으니 밖에서 작업하는 것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괜히 평소보다 공들여 씻고 나온 서진은 들뜬 마음으로 하나를 태우러 나갔다. 돌어오는 길에는 함께 장도 봤다.

"오랜만에 스테이크 맛 보겠네요?"
"걱정마요. 깜짝 놀라게 해 줄테니까."

"상무님, 이건 어때요? 여기에 장식하는 건."
오늘도 하나는 열심이다. 막바지에 이른 작업을 마치려고 분주하다. 하지만 서진은 아까부터 전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단 둘이서만 이 집안에 있다. 게다가 오늘은 또 하나가 어찌나 예쁜지. 둘이 머리를 마주대고 있자니 자꾸만 하나에게서 풍겨오는 장미향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상무님, 제 얘기 듣고 계세요?"
"응. 듣고 있어요."
하나가 노려본다.
"아닌데, 아까부터 딴 생각하고 있는데.."
"잘 듣고 있는데?"
"그럼 제가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
"자꾸 왜 딴 생각해요? 무슨 걱정거리 있어요?"
"그건.. 아니에요.  아까, 무슨 말 하려다 말았죠?"
"피날레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구요. 적당한 캐릭터를 못 고르겠어요. "

"제가 해결해줄까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정말요? "
서진의 눈은 장난스럽게 빛난다.
"하지만 댓가가 필요해요. 그냥은 안되지."
"에이, 치사하다. 댓가가 뭔데요?"
"내 소원 3개 들어주기."
"3개씩이나? 그건 너무 심하다.."
"그럼 협상 결렬."
"알았어요, 알았어.그럼 한 번 힌트나 줘 봐요."
"선불로 소원  하나.
나머지 두  개는 후불. "
하나는 어이가 없다.
"일도 안 하고 딴청만 피우더니 무슨.. 좋아요 말해봐요."

서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야기를 꺼낸다.
"왜 밖에서도 집에서도 상무님이에요?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아. 쉽네~ 이 정도 소원은 들어줄만 하네요.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대팔이 어때요, 대팔이? 일 안하고 말 안듣고 딴 생각만 할 땐 그게 딱인데."
"뭐? 대팔이? 그게 뭔데요?"
"있어요, 이대팔이라고..  무지 말 안 듣는 사람.."
"설마 난 아니죠? 이대팔이라니.."
"하하하 그럼 뭐요?"
별 것도 아닌 일로 옥신각신. 편하게 장난치기도 하는. 웃고 떠드는 이 시간. 두 사람다 가슴이 뻐근하게 행복하다.

"그럼, 서진씨 어때요, 서진씨?"
"음, 마음에 썩 들진 않지만 상무님보단 낫네."
"좋아요, 그럼 서진씨로 결정. 그럼 나도 바꿔야지."
"뭘요?"
"어젯밤에 이걸로 고민했거든요."
하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구서진 상무님, 이라 써 있는 글자를 지우고 서진씨, 라고 입력한다.
"상무님,  아니 서진씨도 바꿔봐요. 장하나, 라고 써 있죠?"
"아닌데?"
"어디 봐요..장난하는 거죠?"
"자.자 봐요."
서진은 자랑스럽게 화면을 내민다. 장씨.
"아,뭐에요  진짜, 빨리 바꿔봐요. 하나씨, 이렇게."
서진은 재빨리 핸드폰을 쥐고 터치한다.
"잠깐만요, 하나씨. 자.. 짠"

눈부신 하나.
"헤헤 감동이다. 고마워요. 정말 좋아요."
하나의 눈이 동그랗게 구부러진다.

"아직 감동하긴 일러요. 하나씨, 이쪽으로 와 봐요."
서진은 하나의 손목을 끌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자, 이걸 봐 줘요, 하나씨.  내가 하나씨 생각하면서 그린 작품이에요. 하나씨가 첫 번째 독자에요. 하나씨가 마음에 들어하면, 다시 연재를 시작해보고 싶어요. 난 좀 쑥스러우니까, 밖에서 작업하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