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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채 2

소리 2007.01.09 03: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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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뇌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리에 이끌리는 듯한 그런 느낌으로 홍채의 병실을 찾았다. 다행히 간호사는 어제와는 달리 병실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그다지 제지하지 않았다. 「……벌써 깨어난 모양이지요?」 나는 다소 심드렁하게 문 앞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말을 건넸다. 「네, 아마도.」 저 '아마도'라는 말의 무신경함. 나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나를 보더니 간호사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걸까. 나는 순간 약간 경직됨과 동시에 조금 어색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곤두서있는 신경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간호사에게 한 마디 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쩌면 어제 그 아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스럼없이 약을 과다하게 사용해서라도 저 아이를 잠자게 만들려는 간호사나 부장에게 화가 난 것인지도……. 「깨어났으면 깨어난 거지 '아마도'는 대체 뭡니까?」 나는 다소 격앙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간호사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언제는 저 아이가 깨어있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요, 뭐……. 그렇게 물으시는 게 도리어 어색해서요.」 그러고는 도리어 나를 보고 싱긋 웃어 보이는 것이다. 난 다소 기분이 상하는 걸 느끼면서 문을 열었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등을 돌려서 복도에 또각또각 발소리를 남기면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들어가려다 말고 그런 간호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속으로는 저 사람은 홍채에 비해 사람 마음을 반의 반도 못 읽는 것이 틀림없어, 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는 아까 혹시 간호사가 나의 생각을 읽어낸 것이 아닐까 혼자서 움찔했던 기억을 지금 되살려 보니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홍채는 눈을 반쯤 내려 감고는 물끄러미 흰 시트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약간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나는 순간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몰라서 약간 멈칫했다. 다행히도 그 아이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내 존재감을 먼저 알아채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오셨네요.」 홍채는 여전히 종이 인형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 사이 더 말라보인 거 같은 아이의 모습에 나는 순간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어떤 약도 투여하지 말고 저 아이가 자던지 말던지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그러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잘 지냈니?」 홍채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 역시 그 질문이 속으로는 어이없는 질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조금 머쓱해져서는 괜시리 약간 웃어 보였다. 약에 취해서 정신을 잃고 있던 아이를 - 그리고 나는 그 아이의 주치의가 아니던가 - 보고는 잘 지냈냐고 묻다니.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바보 같은 질문임에는 틀림없었다. 「웃는 모습이 더 좋아 보여요.」 「뭐?」 「하하……. 선생님, 웃는 얼굴이 더 보기 좋다고요.」 순간 그 말에 다시 내 얼굴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굳어진 얼굴로 다시 홍채를 보다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침대에 다가가서 앉았다. 「어? 칭찬이 마음에 안 드세요? 정말 환한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까지 지어가면서 나한테 웃는 얼굴을 기대하는 듯한 모습에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라도 웃어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도리어 그런 시도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것 같았다. 나는 내 안면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을 받으면서도 웃어보려고 무척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마치 이 아이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웃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홍채는 그렇게 애써 웃음 지으려는 내 얼굴을 보더니 종국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선생님, 그렇다고 억지로 웃진 않아도 돼요. 거울이 있다면 보여드리고 싶네…….」 그러면서 주변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소음을 싫어하는 이 아이의 곁에 떨어져서 깨지면 지독한 파열음을 내는 거울이 있을 리 없었다. 홍채는 순간 시무룩해지더니 베개 위로 풀썩 누워 버렸다. 「몰랐는데, 여긴 거울도 없네.」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투덜대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난 진정한 '아이'의 모습을 본 것 같아 왜인지 모르게 조금은 반가워졌다. 하지만 이윽고 홍채는 그런 내 생각을 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뭔가가 필요할 때는 꼭 곁에 없어요. 그런데 실은 내 곁에 있는데 내가 못 발견할 때가 많죠. 때로는 찾지 않을 때 그게 사라져 버리기도 해요. 그런데, 찾기 전에는 몰라요.」 「그래, 그럴 때가 많지…….」 나는 아이의 생각에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홍채는 다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도 그래.」 들릴락 말락한 조그마한 소리로 웅얼거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들었다. 그 순간만은 모든 신경을 홍채의 말에 쏟아 붓고 있어서인지 모두 다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는 돌아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아이의 등과 그의 하반신을 덮고 있는 하얀 시트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마치 풍경화를 감상하는 듯한 눈으로 한참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한참동안 이 이해 못할 아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지금까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곱씹어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오죽했으면 저 내노라 하는 부장이 나에게 이 작은 아이를 맡겼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면서. 그리고 이 아이가 어째서 아동 심리학을 아는 사람을 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심리학, 심리학을 아냐고 물었을 때 이 아이는 아버지가 생전에 공부했던 책들을 틈틈이 봤다고 대답했다. 생전에? 그러면 아버지는 돌아가셨나? 홍채의 아버지는 심리학이라도 전공했던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이 아이. 이 아이의 앞에서는 어떠한 이론도 무기력했다. 아니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도리어 우스운 일일까. 이론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통계적인 것에 불과하다. 특히 심리학에 있어서는……. 이러한 상황이 주어지면 대다수의 사람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이지 모두가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기에 하나의 이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이 나에게 있어서 심리학의 매력이었다. 이론이 있으면서도 명백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 것. 하지만 심리학을 전공한 덕택인지 사람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범주화하는 습관이 생겨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당황하고 있는 것은,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떠한 범주 중에도 이 아이가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해 놓은 가정이 맞아 들어간다고 생각될 때마다 이 아이는 항상 그와는 반대로 행동했다. 결론적으로는 이 아이에게 맞는 그 어떠한 이론조차도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면에서 항상 일종의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아이가 숨기고 싶어하는 건. 아니, 그것보다도 왜 잠을 자지 않으려 할까.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쩌면 최대한의 난제에 부딪힌 것일지도 몰랐다. 난 계속 그렇게 나의 생각 속에 깊이 잠겨 들어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지요?」 어느 사이 고개를 돌린 홍채가 내 얼굴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홍채에게 가 있었지만 그 아이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의 말에 깨어난 나는 그제서야 홍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아이의 진심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는 급히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홍채가 소리치는 덕택에 내 말은 입 밖까지 나오려다 말고 중단되어 버렸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어느 사이 아이의 하얀 얼굴이 바알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순간 아이가 크게 소리쳤다는 걸 믿지 못했다. 언제나 조용조용하게 말을 하던 아이였다. 비록 종종 발작을 일으키곤 했지만 애써 혼자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려고 노력하던 아이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아이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도, 나의 어떤 면이 이 아이를 그렇게나 화가 나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후후……. 아주 재밌으신가 보지요?」 나는 순간 그 아이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뭐냐니요? 매우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생겼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아이가 꿰뚫을 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연구거리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선생님의 생각을 맞춰 볼까요?」 내가 멀뚱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홍채는 나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실험을 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눈 앞에는 모르모트라고 불리는 하얀 것들이 득시글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어요. 백? 아니, 오백일지도 몰라요. 아니 그 보다 더 많을지도……. 천? 아니 아마 그 보다 더욱 많겠지요. 선생님은 하나하나 그 모르모트들에게 주사를 놓아요. 왜냐구요? 선생님이 알고 있는 이론을 실험해 보아야 하니까.」 나는 감히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홍채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모르모트들은 하나하나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반응을 보이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그 안에 선생님의 이론에 위배되는 한 녀석이 있어요. 단 한 녀석.」 「…….」 「녀석은 수면제를 과다복용 했는데도 잠을 안 자요. 바륨? 그것도 치사량에 가깝게 맞아놓고도 죽기는커녕 눈도 감지 않지요. 항상 그 충혈된 듯한 새빨간 눈으로 당신을 노려보고만 있어요. 그리고 더 화나는 건, 이 녀석은 선생님이 기대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가도 전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버린다는 거지요.」 나는 그제서야 아까 홍채가 말한 '흥미로운 연구거리'가 자신을 향한 자조적 말투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모트, 흔히 실험용 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기니피그. 그것들의 새빨간 눈은 홍채의 충혈된 눈과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 녀석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훑어보지요. 뭐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온갖 이론을 다 적용해봐요. 이 녀석이 찍찍거리는 소리를 분석해 보기도 하고, 몸에 이상은 없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 모든 것이 선생님의 관심거리지요. 그저 '관심거리'일 뿐이예요.」 홍채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호흡이 가빠져 오는 듯 숨을 색색거리며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저 '관심거리'일 뿐이란 말이예요…….」 마치 멱살을 잡고 협박할 때에나 나올 법한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아이의 그런 목소리에 오싹함을 느낌과 동시에 아이의 말들이 하나하나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다. 아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더니 이윽고 평소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후후……. 기분이 나쁘세요?」 아이는 나를 향해서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순간, 이 순간조차도 냉정함을 되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흥분해서는 안 돼. 이 아이는 단지 약간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뿐이야. 의사인 내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돼. 그렇게 무의식중에 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경을 건드렸다면 미안하다. 나는 그저…….」 홍채의 얼굴이 다시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향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 게 싫다는 거예요!」 나는 어이없다는 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내 마음을 다 읽어낸 것도 모자라 이젠 더, 뭘 더 요구하고 있는 건가. 나는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올라옴을 느꼈다. 「왜 선생님에 비해 나잇살을 반도 먹지 않은 녀석이 선생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죠? 제가 마치 명령하는 듯 그에 따라 행동하는 선생님 자신이 우습지 않아요? 왜 그렇다고 솔직히 얘기 못하죠? 선생님은 감정도 자존심도 없는 바보인가요?」 홍채는 이제는 비웃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홍채의 말에 비위가 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이건 홍채와 나의 싸움이 아니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어느 순간에도 의사라는 나의 본분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눈 앞의 이 맹랑한 녀석에 대한 화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우스워 죽겠어요. 하하하…….」 홍채는 눈물이라도 흘릴 듯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그게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코미디 프로를 보고 뒤집어질 듯이 웃어대는 것만 같아서 난 점점 내 자신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졌다. 나의 그 어떤 면이 그렇게나 이 녀석에게는 웃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하아……. 하하하, 하하…….」 홍채는 순간 숨을 가누는 듯 하더니 다시금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맑은 웃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면 울려 퍼질수록 나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아무리 내 자신에게 소리를 질러 보아야 견디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홍채를 쏘아보았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그런 내 자신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웃어대고 있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만한 상황이라면 홍채는 나의 심정을 짐작하지 못할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열심히 생각해보려 했지만 점차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지켜왔던 이성의 영역을 감성의 영역이 점차 잠식해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홍채는 여전히 그런 나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비록 그 웃음소리는 작아졌지만 낮게 깔리는 그 웃음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퉁겨대고 있었다. 순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언가 탁 소리를 내면서 끊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 몇 초간에 일어난 일은 내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철썩! 홍채의 왼쪽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는 한쪽 손으로 그 뺨을 감싸쥐고는 놀란 듯한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모호해서 나로서는 한 번에 해독해내기 어려운 그 무엇을 가득 담고서. 나는 내가 해 놓고 내가 해 놓은 일에 멍청하게 내 자신이 더 놀라고 있었다. 내가, 이 내가 아이의 뺨을 때리다니……. 나는 아직도 아이의 얼굴 앞에서 멈추어 있는 손을 화닥닥 내렸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하며 순간 아이를 때리기 위해 일으켰던 몸을 털썩 의자 위로 떨어뜨렸다. 홍채는 그런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순간 얼마나 세게 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뺨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곳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에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돌아서서 화난 척 하고 나가야 할까, 아니면 앉아서 이 아이에게 사과의 말을 남겨야 할까. 나는 순간 격렬하게 마음 속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홍채의 말이 제 삼의 해결책을 만들어 주었다. 「선생님한테는 희망을 걸 수 있겠네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솔직히 나는 그 순간 나라는 인간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홍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하, 오랜만에 나도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것 같은데요?」 그 '만만치 않은 상대'란 나를 말함인가. 나는 아까의 허탈함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로 홍채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홍채는 좀 전에 발작적인 웃음을 지었던 것이 바로 이 아이인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난 항상 그게 역겨웠어요. 나를 환자 취급하는 거, 물론 나도 내가 정상은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난 애써서 내가 정상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나를 환자로 취급하는 것, 그게 정말 싫었어요.」 홍채는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정면의 분홍빛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하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나를 선생님과 같은 인간으로 봐 주지 않죠? 왜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날 내려다 보려고 애쓰는 거냔 말이에요. 난 그걸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요.」 홍채는 시선을 떨어뜨리고는 시트를 손으로 꽉 쥐었다. 시트가 구깃구깃 구겨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그 뒤에 이어지는 홍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마찬가지였어요. 그들 나름대로 저라는 아이가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내가 무슨 말을 하건 그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아요. 혼자서 다들 공고하게 자기 자신을 의사라는 테두리 안에서 무장시키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가다가 내가 발작을 일으킬 것 같으면 득달같이 약품이 들어있는 주사를 가져와서 내게 놓아주죠.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병실을 나서요. 아마 나를 본 의사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서 말하겠죠. '그 녀석은 무서운 녀석이다. 내 속을 마치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 라고, 그렇죠?」 나는 순간 부장의 말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순간 홍채의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의 눈 안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픈 빛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말이에요.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어요. 아주 간단한 건데, 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요. 정말로, 정말로 간단한 건데…….」 나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에게도 이해를 못할 것이 있었을까? 순간 나는 홍채에 대해서 내가 무의식중에 과대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아이는 신이 아닌데, 사람의 마음을 좀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의 그 가식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난 선생님들을 솔직히 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의사들은 의사라는 직업적인 본분,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래서인지 화도 내지 않죠.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은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장난감 같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왜냐구요? 혼자 자신을 의사라는 굴레 안에 속박시켜 놓고 날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으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건 오냐오냐 받아주는 종노릇 밖에 할 수 없는 거지요. 그 가식 속에서 숨어서 날 훔쳐보고만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아주 다루기 쉬워요.」 홍채는 순간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서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나로서도 차마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말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알고 싶죠? 힌트를 드릴게요.」 나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너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네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순수한 내 마음이 담긴 행동이었다. 「이건 인간 대 인간으로 나를 대해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에요.」 홍채는 나를 바라보면서 밝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 한 켠에 남아있는 손자국을 나는 그 순간에도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홍채를 향해서는 다시 한 번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를 선생님과 같은 인간의 범주 안에 두세요. 훨씬 쉬울 거예요.」 그리고는 홍채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아이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참 동안이나 홍채가 말을 걸어오지 않자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내 등 뒤로 희미하게 홍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바보 같은 짓을 한 걸까……? 아니, 아니야.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줄곧 홍채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근무에 방해가 될 정도로 그 아이에 대한 생각은 강하게 나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얼빠진 사람 같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이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여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나?」 닥터 최였다. 나는 그를 보고는 슬쩍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하, 또 그 새로 맡은 아이 녀석 생각을 하는 게로군, 맞나?」 「하하, 그렇다네.」 최는 그런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내 등을 세게 한 번 후려쳤다. 「자,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건 알지만 힘 좀 내라고. 자네가 맡은 환자가 그 녀석 하나뿐만은 아니지 않아? 그렇게 매일 뭐가 빠진 유령처럼 병원 안을 배회해보아야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순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홍채는 나한테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했다. 대체 무엇이? 최가 나를 보고 그 녀석에 대한 생각을 한 구석으로 밀어버리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도 홍채에 관한 생각에 빠져있는 내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하하, 그게 잘 안 되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그 이상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거야 원, 그럼 오늘이라도 술 한 잔 하면서 그 애에 대한 생각을 잊어보는 건 어떤가?」 「자넨 또 술인가, 어제도 취해서 쓰러져 자지 않았나. 명색이 의사라는 사람이 술을 그렇게 좋아해서야…….」 「하하하……. 그래서 닥터 리는 이성적인 의사시라 술을 안 마신다……?」 나는 닥터 최의 말에 순간 웃었다. 이성적인 의사, 그만큼 나한테 안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환자의 뺨이나 때리는 의사라니……. 「그 말은 내겐 어울리지 않네.」 나는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서 다소 침울하게 대답했다. 홍채는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약간의 마음의 문을 연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돌발적인 행동은 내 자신으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은 대답을 조금 미루고 싶었다. 「근무 끝난 후에 자네 방으로 찾아가서 얘기하기로 하겠네. 괜찮을까 모르겠군.」 그리고는 난 최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최는 어제 내 앞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던 기억을 상기한 탓인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흐음, 글쎄……. 뭐, 자네는 술친구로는 좀 멋대가리는 없지만 난 또 그런 청을 거절할 만큼 모질지는 못하거든.」 그러고는 최는 웃어 보이고는 손을 흔들면서 돌아서 가버렸다. 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도는 최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무심결에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빈 복도가 죽 내 눈앞으로 곧게 펼쳐져 있었다. 윤기나게 닦여진 대리석 바닥. 그 바닥을 보고 있노라니 액체 표면이 빛을 반사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술…….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가 끝나고 나서 닥터 최의 방을 찾아갔을 때는 그리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고 그는 어제와는 달리 활기차다 할 만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여어, 일찍 왔군 그래.」 난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방에 발을 들여놓으며 조금은 어색한 듯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그가 어디에선가 의자 하나를 가져와서는 내게 권했다. 나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괜찮은 건가?」 난 바쁘게 테이블 위에 좀 전에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안주거리와 소주 세 병을 꺼내놓으면서 짐짓 무심한 듯 물었다. 마음 속은 그렇지 않았지만 자칫 그의 감정을 거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무신경한 듯 말을 붙여본 것이었다. 「뭐가 말인가? 그건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인데.」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자 나는 조금은 당황했다. 그 말을 내 입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조금은 버거웠다. 「어제, 그 노인, 말일세…….」 「아, 천천히 잊어 가는 중이지.」 최는 내가 벌여놓은 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망각이란 좋은 거야. 그건 말이야, 수학적인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야. 뇌의 용량이야 거의 무한대에 가깝지 않은가 말이지. 내가 보기에 망각의 가치는 공간 절약에 있는 것이 아닐세. 망각으로 인해서 사람은 기억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지.」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최의 시선이 나란히 서 있는 소주 세 병에 가서 멈추었다. 「이것들이 다 뭔가?」 「술이지, 이게 뭐냐니. 자네 술병만 보고 벌써 취했나?」 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보충설명이라도 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내 주량이 소주 한 병 밖에 안 된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아. 나머지 두 병이 대체 뭐냔 말일세, 내 말은.」 「내 몫이지.」 「자네 몫?」 그가 의아한 듯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이는 걸 나는 감정 없는 시선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가 테이블을 탁탁 치더니 고개를 들어서 다시 나를 보았다. 마치 내가 잠시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확인하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자네가 술을 마시겠다고? 그것도 소주 두 병씩이나? 어허, 이거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겠군.」 「언제까지나 멋대가리 하나 없는 술친구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으며 최가 가져온 술잔에 술을 따랐다. 쪼르륵하고 잔을 타고 흐르는 술의 소리가 왠지 모르게 경쾌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최가 막 한 잔을 다 마시려는 찰나에 내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이름이 뭔가?」 「나? 최은호일세. 그건 왜 묻나. 아니아니, 이런 사람하고는!」 나는 잔을 비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술기운이 올라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매양 가운 위에 달고 다니는 게 뭔가. 명찰 아닌가.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다니 아주 실망이군, 그래. 자네 이름은 태훈 아닌가?」 「맞네. 하하, 이거야 미안한걸. 항상 닥터 최라고 부르니 이름을 알아도 까맣게 잊어버릴 수밖에…….」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나?」 최, 아니 은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그랬었거든,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 달라고. 자네나 나도 병원에 근무하는 동료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하하, 그래서 오늘 나랑 술을 같이 하자고 한 건가?」 「그럴지도, 아닐지도…….」 난 내가 생각해도 수수께끼 같은 말로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내 잔이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병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는데 어느 사이 최의 손이 내 잔에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그 홍채라는 아이가 자네한테까지 정신 이상을 옮긴 건 아닌가 몰라. 흐음……. 내가 알기로 그런 병은 전염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정신병이 다른 이에게 옮을 리가 없었다. 최는 다른 전염병에 비유해서 그 정신병도 옮은 것인가 하고 물은 것이다. 그리고는 우습다는 듯 장난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병을 옮긴 것이야 아니겠지만 확실히 뭔가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지.」 그리고는 나는 오늘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최에게 말해주었다. 최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도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존재가 있다니 놀랍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도 알지? 자네 별명이 관심법 아닌가. 사람 의중을 짚어내고는 한술 더 떠서 한 발 앞서서 그 사람의 일에 대처하는 것이 자네의 주특기이자 장기 아니었나 말일세. 난 그게 자네가 심리학을 공부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에게도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존재가 있었군, 그래.」 「하하, 심리학은 독심술이 아닐세. 내가 다른 사람의 속을 파악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 대다수가 행동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홍채라는 아이는, 무언가 특이해서 전혀 이론에 맞지 않는다?」 「그렇지…….」 나는 최의 말을 듣고는 자못 심란해져서 술 한 잔을 급히 비워 버렸다. 의외로 소주병에 든 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기껏해야 몇 잔 안 기울인 것 같았는데도 소주 한 병이 거의 바닥나가고 있었다. 난감한 것은 아직 내 자신이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열이 올라오지도 않았고 그저 아무 느낌도 없었다. 내 앞의 벌겋게 달아오른 최의 얼굴을 보며 나는 수심에 잠겼다. 나는 최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취한 것 같아 보이나?」 「전혀.」 그리고는 최는 내가 가진 병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이 반쯤 힘없이 풀려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한 병을 다 비워 가는데 전혀 취한 것 같지가 않군. 자네 말이야.」 「그런가, 선천적으로 취할 수 없는 체질인가 보지.」 난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도대체 이 안에 든 것이 술인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빌어먹을. 왜 나는 전혀 취하지 않는 거지? 「나도 그런 망할 체질 좀 가졌으면 좋겠네.」 실상 최는 술을 그리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동료들끼리 술자리를 같이 해도 항상 초기에 나가 떨어지는 스타일인데다가 곧 필름이 끊기기 마련이어서, 술자리에서 약간 떨어져 앉아 관조적인 자세로 사람들이 취하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는 나와는 전혀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뭐랄까, 취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꽉 붙잡고 있는 것 같아. 취하고 싶어서 아무리 마셔도 취할 수 없더군. 예전에도 그랬었네.」 「흐음……. 취하고 싶지 않은 강박관념이라…….」 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를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이죽거리고 웃었다. 「그래서 닥터 리가 술을 꺼린다, 이거로군.」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최가 힘없이 떨어지려는 고개를 갑자기 들더니 내게 도전적인 말투로 물어왔다. 「자네,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기가 두려운 건가?」 「글쎄, 비슷한 이유일지도…….」 최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곧 말을 이었다. 「음, 내 생각을 말해볼까?」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의 풀려가는 눈을 응시했다. 「하하,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자네만큼 말을 잘 할 수는 없지만 말일세. 때로는 취하는 걸 즐긴다네. 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술에 취해서 나도 모르는 행동을 스스로 하게 될 때 말이야.」 나는 순간 아까 낮에 내가 홍채의 뺨을 때렸던 것을 상기해냈다. 그 때 나도 분명히 그랬었지. 「그런 나를 보는 게 재미있어.」 마치 제 삼자가 구경거리를 보면서 웃으면서 박수치며 말하는 듯한 최의 말투에 나는 웃으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하, 그런 것이 재미있다고?」 「암, 재미있고 말고. 내 안의 감옥에 가두어 놓은 내 자신이 감옥 문을 부수고 나오는 때니까. 재미있지 않나? 내 안에 이런 녀석이 자라고 있었군. 그걸 깨닫는 순간이니까 말일세. 그건 때론 지독한 악일 수도 있고 선일 수도 있지. 아니면 사회의 금제로 인해서 이제까지 내 표면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던가.」 「…….」 최가 잠시 말을 끊더니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나는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실상 술에 흥미가 없어져 버린지라 아직도 내 잔의 술은 그대로였다. 갑자기 최가 내 눈 앞에 얼굴을 들이대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 생각이네만, 혹시 그 아이……. 이런 것이 아닐까? 자네, 그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잠을 자지 않는 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렇다네. 아무리 수면제를 많이 투여해도, 바륨을 치사량에 가깝게 투여해도 정신적으로는 절대 잠을 자지 않아.」 나는 순간 해쓱한 홍채의 얼굴을 떠올렸다.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근육의 손실. 그건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이론도 그 녀석에게는 들어맞지를 않았다. 내 뇌는 술을 마시는 이 순간에 있어서도 홍채에 관한 생각으로 부지런히 기름칠한 듯 돌아가고 있었다. 최는 생각에 잠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이건 아주 개인적인 그 아이에 대한 내 의견이자 생각이네만, 홍채라는 애도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무슨?」 나는 순간 생각에 빠져 있어서 최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최는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마치 부연설명하듯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예를 들면, 그 애 자신은 자기 내부를 아주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그 자신에 아주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그 아이의 제 이의 성격이 나타났다던가……. 그런 사실을 그 아이는 견딜 수 없는 거지. 왜냐하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게 두렵기 때문이야.」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또 다른 내 자신…….」 「그래, 바로 그것일세. 그 또 다른 자신과 마주보게 된다는 그 사실이 아이에게 있어서는 용납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인 거야.」 「음…….」 일견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홍채는 자신의 과거를 부장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홍채를 보고 그 과거를 찾아나가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어째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 그것도 나의 뇌리를 지배하는 의문 중 하나였다. 「하하핫, 이렇게 생각하니 그 아이 재미있는데? 시간이 되면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네. 이거야 나랑 완전히 정 반대로군. 나는 그 또 다른 내 자신이 선과 악의 기로를 달린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재미있는데 말이야. 난 그 또 다른 나에게도 점차 정을 붙여가고 있다네. 지극히 악해도, 지극히 선해도 그게 다 위선이 아니거든. 그저 솔직한 내 자신일 뿐이야.」 「아, 잠재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말하는 건가?」 「글쎄, 뭐 나야 심리학 전공이 아니니 그런 용어야 모르지만, 난 그저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더 솔직한 녀석이지. 아주 재미있어. 때로는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내 자신을 놀라게 하기도 해. 그런데, 잠재……. 뭐라고?」 「잠재의식.」 「허어, 참. 그 단어 한번 딱딱하군 그래. 그러니 자네도 자네 안에 살고 있는 그 또 다른 녀석과 담을 쌓게 되는 거라고. 그게 뭔가. 의식이라니……. 그저 또 다른 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내가 모르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지.」 최는 진심으로 그 또 다른 그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솔직히 최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최의 가설이 맞다면, 또 다른 나를 꺼리는 홍채에게 차라리 한 표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는 잠시동안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긴 듯 싶더니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하하……. 이제야 좀 알 것 같네. 자네가 그 아이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쏟아 붓는 줄 아나?」 「내가?」 「그러게 말일세. 나는 자네가 그 아이에게 유독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네.」 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무슨, 이유인데?」 「그건, 자네와 그 아이가, 알게 모르게 닮아있기 때문일세.」 「내가, 그 아이와……?」 「……뭐, 적어도 내가 보긴 그렇다는 거지.」 나와 그 아이가 닮았다. 나는 순간 최의 말에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 좀 전에도 나는 홍채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지 않았었던가. 최는 계속해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홍채를 보면서 거울을 보고 있는 셈이군. 나는 다소 딱딱하게 최의 말을 되받아쳤다. 「재미있고 유익한 가설이네.」 「아니,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 가설이 아닌 사실이지. 인정할 건 인정하라구. 그렇다고 내가 자네보고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최는 상기된 얼굴로 웃더니만 급기야는 소파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아마도 그의 주량을 넘어간 모양이었다. 내 눈 앞에 완전히 비어버린 소주병 하나가 놓여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를 바로 눕히고는 그의 방을 나왔다. 내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자 방 안을 지배하고 있던 어둠이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최의 방에서 먹다 남은 술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털어 넣어 보았지만 여전히 내 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취하고 싶은데 취할 수가 없었다.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가슴 속에 푹 파묻고는 애써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여러 가지 영상이 눈 앞에서 맴돌고 있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귓전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마음에서 번져 나오는 영상이었고, 마음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기에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만사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버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저번에 이은 소설 홍채 두번째 이야기... 홍채는 저번에도 말했듯 우리 근석이고.. ^^ 오밤 중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몰라. 잠도 안자고. 요즘 완전 생활리듬이 바뀌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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