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부터 (82편)까지는 요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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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편)

나노래 무대에 벌써 세 번째 서고 있었지만 무지막지한 긴장감에서 그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대에 올라서는 순간 모든 소리와 움직임들이 일시에 정지해버리는 것 같았고, 오직 자신의 숨소리만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듀엣 파트너 김연우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푸우 푸우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고요 속에서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었고, 뒤이은 바이올린 선율이 허공을 맴돌아 그에게로 스며들었다. 그의 두 귀가 활짝 열렸다. 떨리는 숨결이 선율 속으로 감겨들어가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조용하고도 담담하게 연우가 첫 소절을 노래했고, 깨끗하면서도 간절한 음색으로 경호가 화답을 했다. 한동안 친구로 지내왔으나 때론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들의 관계를 이제 막 끝내려 한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이별의 아픈 예감으로 인해 가슴속에 슬픔이 가득했으나 이를 짐짓 감추려는 듯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듯이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이 화음으로 어우러지면서 감정도 서서히 고조되어 갔고, 마지막에는 감추고 절제되었던 마음이 결국 슬픔으로 북받쳐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절정 속에서 노래가 마무리 되었을 때 사위는 고요만이 남아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청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자, 봇물이 터져버리 듯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중의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은 무대를 떠났다.

일곱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나서 순위 발표가 이어졌다. 각자의 듀엣 파트너들은 이미 그 곳을 떠나고 남아있지 않았다. 청중들은 경호와 연우의 ‘사랑과 우정 사이’를 두 번째 순위로 선택해주었다. 만족할만한 순위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노래 파트너였던 연우에게 그들의 순위를 문자로 알려주자, 나노래에서 자신이 차지했던 최고 등수가 4등이었는데 친구 덕에 2등을 해본다며 재치 있는 답변을 보내왔다.

경연의 모든 절차를 마친 후, 가수와 매니저들, 프로그램 연출진들은 모두 모여서 뒤풀이 회식을 했다. 그동안 해왔던 관례대로 1등을 차지한 가수가 그날의 회식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경호는 그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경연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에게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이 도착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 온 전화였을까? 검토를 시작했다. 그중의 몇 개는 공칠공으로 이어지는 인터넷폰 번호였고, 대출 회사에서 들어온 문자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으음, 어제 미처 받아내지 못했던, ‘엉뚱소녀’로부터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의 폰에 저장된 엉뚱소녀라는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무슨 내용인지 얼른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있었다. 두세 번 눈을 깜박거리고 나니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1등 하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오늘 하루도 힘내시고 경연 잘 하세요❤’

내용보다는 앞뒤로 붙어있는 하트 표시가 그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얼마 전에 이별했던 연인에게서 다시 구애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 처음에는 마냥 기쁘고 떨리는 심정이었으나, 차츰차츰 오만함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런다고 내가 이해해줄 줄 알았나?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그럼 그렇지, 내가 전화를 하지 않으니 자기가 먼저 연락을 취해오는군, 후훔, 자신이 이긴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으니,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그의 마음이 토라져 있었던 것. 그러다가 흠칫, 사랑을 하면 유치해진다고 하더니,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경연에 출연한 가수 및 스텝진들과의 회식자리는 즐거운 것이었으나, 오늘은 왠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어서 빨리 자리를 파하고 그녀에게로 달려가고만 싶었다. 무대에서의 긴장감에서 벗어난 지금 온몸이 찌뿌등하니 피곤하여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으나,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그의 마음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에게 그는 어떠한 존재인가? 오전에 그는 흥신사 남자로부터 그녀가 거처를 옮겼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당연히 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흥신사 남자는 스쳐지나가는 어조로 무심하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어제 오전 이순정 선생의 집을 나와 그녀 자신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고. 정체불명의 사내로부터 더 이상의 공격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그 남자는 경호 자신을 공격해오지 않았던가, 정인이 굳이 순정 선생님의 숙소에 머물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경호 자신도 생각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먼저 상의를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어제 하루 종일 집에 콕, 박혀 있었던 자신이 그녀가 짐을 옮기는 것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런 상황이 끝나고 난 후에야 그는 기껏 그가 고용하고 있는 흥신소 남자로부터 그녀의 움직임을 전해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를 만나면 따져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림 : 깅갱호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