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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상플] 우리 사랑의 조각들 2

편린(125.184) 2019.12.10 08:45:50
조회 1489 추천 2 댓글 1

관사에만 주로 생활하던 시경에게 집은 낯선 공간이었다. 항상 군에서 생활하던 터라 집은 삭막하기 그지없는데 그곳에 재신이 들어온다고 생각하자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을 숨기면서 시경은 재신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건넸다.



“저희 집은 사층입니다. 빌라인지라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시경은 말끝을 흐리며 재신의 다리를 보았다. 시경이 기억하는 재신은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였지만 마지막에는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와도 같았다. 재신은 시경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어.... 나 다리 튼튼해서 사층도 무리 없어요. 걱정하는 거예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어떻게 해줄 건데요?”



도와줄 것처럼 말하는 시경에게 재신은 장난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그 기세에 시경이 살짝 뒤로 물러난 채 답했다.



“공주님이 불편하시지 않은 형태로요.”

“업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필요하시다면요.”



시경은 슬그머니 땀이 베어 나오는 손을 바지에 닦았다. 재신은 일부러 그것을 모른척하며 계단에 발을 디뎠다. 씩씩하게 올라가는 재신의 뒤를 따르면서 시경은 이상하게 목덜미가 빳빳해지는 것을 느꼈다. 재신이 빠르게 올라간 뒤를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갔지만 사층에 도착해서는 시경의 집을 몰라 멈춰선 재신의 등에 머리를 쿡 박기도 했었다.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는 시경의 팔을 잡으며 재신이 말했다.



"은시경씨. 왜이렇게 긴장해요?"



재신은 시경에게 장난기 넘치는 미소로 물었다.



"혹시 내가 같이 가서 긴장했어요? 은시경씨 보기보다 순진하네요. 나이도 있어 보이는데."



재신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시경은 예의 딱딱한 모습으로 번호키를 누르고 먼저 들어가서 재신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시경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어라나 바보 같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들인 적 없는 공간으로 다름 아닌 재신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시경은 등 쪽으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지금의 재신은 시경이와의 추억도 없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반짝이는 별처럼 아름답고 발목 잡는 것조차 없는 나비처럼 자유로운 재신이 사랑스럽지만, 시경은 무서웠다. 다리를 잃었던 재신이 다리를 찾았을 때 시경을 괴롭혔던 마음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시경은 숨을 들이마시고 재신을 집안으로 이끌었다.


재신은 텅 빈 시경의 집이 낯설었다. 집이라는 곳은 자고로 잠도 자고 생활하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삭막했다. 최소한의 가구와 티비조차 없는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의 집인지라 제집처럼 둘러볼 수도 없던 재신은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았다.


"공주님 물이라도 드실래요?"

"근데, 은시경씨."

"네?"


재신의 답을 듣기도 전에 시경은 평소 먹을 것도 없는 자신의 습관을 자책하며 생수병을 따고 있었다. 재신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재신을 바라보니 재신이 소파에 앉아 시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 공주님과 닮았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공주님이라고 자꾸 불러요? 이름으로 불러줘요."

"이름이요?"


한 번도 내뱉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도 재신은 시경에게 공주님이었고 그때 했던 입맞춤의 감촉마저 잊을 만큼 먼 존재였다. 사랑하고 닿고 싶지만 그렇기엔 너무나도 먼 재신이었다. 시경은 뭐라 말도 못한 채 굳어졌다.



"있잖아요. 난. 내 이름도 모르고 다 엉망이지만. 그래도 여기 좀 있으면 기억도 나고 하면...."

"네..."

"만약에 그때 내가 은시경씨가 말한 공주님이 아니라면.... 난 좀 슬플 것같은데."

"그렇습니까. 하지만 한 번도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습니다...."



재신은 시경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익숙하게 재신을 대하는 태도와 언행이 모두 재신이 공주님이 아니라는 가정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행해지고 있었다. 저렇게 의심조차 없이 믿는 시경이 신기했지만, 재신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있잖아요. 내가 기억이 돌아와도 말이에요."



재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시경이 물을 따르다 말고 재신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재신은 자신의 불안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없었다. 재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있으니 불안할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경찰에 가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경이 보여준 사진 속의 공주와 너무나도 같은 모습에 재신은 시경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궁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차를 타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머릿속은 어지러울 뿐이었다.



"은시경씨는 내가 공주님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은데...."

"네?"

"내가 그 공주가 아니라면요?"



재신의 말에 시경은 재신이 무언가라도 기억하는 것인지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재신의 차림은 안면도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모습과 똑같았다. 언론에도 보도된 적이 없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온 재신을 다른 이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안면도라니. 다른 이가 들어올 수 없는 곳. 


시경은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가 사랑하고 있는 공주님이었다. 하지만 재신에게 이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죽은 것이 분명한데 살아 돌아왔다고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무슨 기억이라도 돌아왔습니까?"

"아니요. 그냥 내가 기억이 돌아왔을 때.... 만약에 그럴까 봐 무서워요. 난. "


 재신의 불안을 시경은 진정시켜줘야 했다. 시경은 어디서부터 운을 띄워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다 알려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기억을 찾든 찾지않든 제겐 공주님이 분명합니다."


시경의 말에 재신은 반박하기 시작했다. 공주님이라고 믿는다지만... 재신은 아니었다.


"그럼, 말이예요. 내가 궁으로 가는 게 맞잖아요. 여기가 아니라...."


시경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재신이 시경의 옆에 있는 것보다 궁에 있는 것이 더 안전했다. 하지만 재신은 죽었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렇게 숨 쉬고 생생한 재신이지만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거품처럼 재신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궁에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모르겠어요. 나도. 너무 혼란스러워요. 은시경씨가 나를 너무 당연하게 공주님으로 생각하는 것도. 나는 기억이 없는 것도."


재신이 혼란스러운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에라도 감정이 북받쳐 오를 것만 같아 보여 시경은 재신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공주님이랑 똑같으세요. 그리고, 눈을 뜨신 그곳은 왕실 전용 별장입니다. 민간인은 들어갈 수가 없고요."

"그리고요?"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제가 궁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시경은 말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돌려준다니? 재신을 궁으로 돌려주고 싶지 않은 이는 시경이었다. 재신과 떨어지고 싶지않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었던 감정을 고해바치고 싶었다. 사랑하고 사랑했다고. 그리워하고 미웠고 안타까웠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감정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힘이 들었다. 간신히 평범한 삶을 살게  된 시경에게 다시 나타난 재신은 허상과도 같아서 닿지 않으면 불안했다.


"궁으로 가고 싶은 건 아니예요. 그냥. 나는 불안해서... 내가 공주님이 아니라면...."


시경의 눈빛이 어떻게 바뀔까. 오늘 처음 마주한 시경이었지만 너무나도 먹먹하고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재신은 시경의 눈물이 자꾸만 밟혔다. 재신은 크게 숨을 내쉬고 애써 밝게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나도 너무 피곤하고 은시경씨도 피곤해 보여요."

"불안하면 이야기하세요. 저는 더 불안합니다."


재신의 손을 꽉 쥐며 시경이 말했다. 시경의 온기를 느끼며 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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