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어디 나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없어 쓸 게 없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말했다시피 영화를 끊어서 이제 집에서나 간혹 본다.
그래도 지푸라기 어쩌고랑 기생충 흑백판은 보고 싶은데... 극장 갈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나이브스 아웃 봤는데
내가 기대하던 것도 아니고, 나라면 이렇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 같다.
어릴 때 보고 기억에 남은 그 영화가 살인 무도회(clue, 1985)가 맞는지 다른 고전 미스터리도 섞여 기억나는 건지 모르겠다.
막 얼굴 바뀌고 그랬는데... 지금 그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고 무지하게 재밌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나처럼 나이브스 아웃 보고 실망한 녀석들은 이 영화나 다시 보자.
하여튼 이런 저택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는 정치적 도덕극으로 보였고 따분했다.
봉준호 기생충도 그렇고, 대개는 창작자의 암수가 관객인 우리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길 기대하지 않나?
거짓말을 하면 토한다는 설정이 나올 때부터 나는 이게 트릭이길 기대했다.
아니 그 전에, 아나 디 아르마스가 전형적인 프렌치 메이드 복장을 한 하녀 캐릭터로 나올 것을 기대했다.
포르노 사이트에서나 볼 수 있을 페티시 복장을 한 섹시 하녀 캐릭터와 100% 신뢰할 수 있는 솔직한 캐릭터, 둘 중에 어느 쪽이 미스터리 장르에 득이 되는 캐릭터일까.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이런 장르에서 섹시 프렌치 메이드는 주의를 끌어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적격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리얼리티도 어지럽힐 수 있다.
그런데도 후자를 선택한 것은 이 영화가 도덕적 교훈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를 순진하고 무고하며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박제하는 것이다.
가진 거 없는 이민자라고 윤리적으로 언제나 정당하겠나?
이건 기생충에서 김 씨네가 전적으로 선하게 묘사되는 것에 비할 수 있는 안이한 설정이다.
라이언 존슨은 봉준호한테 큰절 좀 몇 번 더 해야 된다.
당연히 아무도 못 믿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관객은 누군가에게 이입하고 나름대로 그 캐릭터와 자신의 거리를 형성한다.
처음부터 믿을 수 있는 인물을 설정하는 것은 이 거리 조절의 긴장감을 없앤 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마르타가 별나게 섹시하든 아니든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건 똑같지만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재미가 떨어진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들을 기워서 진실을 밝혀내는 형식인데, 애초에 마르타가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플래시백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경우엔 플래시백을 아무리 돌려봐야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만들어진 영화의 경우에 관객은 가만히 앉아서 단서들을 받는다.
화면에 드러난 것들, 연기나 세부적인 소품들 따위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다.
인물은 평범해지고 저택은 재미없는 허당이 된다.
그럼에도 영화가 이렇게 기획된 배경에는 할리우드에 부는 정치적 올바름의 바람이 작용한 것 같다.
디씨놈들의 무지막지한 안티 PC에 동조할 생각은 없다.
고정적인 역할을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 번 반복된 고정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더 좁게 해석될 훨씬 평범하고 재미없는 캐릭터로 고정되면 애초에 벗어난 것이 무슨 소용인가.
마르타가 굳이 섹시 하녀일 필요 없다.
그냥 현실에 있을 법한 복잡한 캐릭터만 돼도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졌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평 중에 이런 식의 구조 비판이 있다.
여성이 여성과 싸우는 구도를 만드는 것은 남성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남성이 남성과 싸우는 것은 여성의 시각이었나.
*비밀은 없다 스포일러 경고*
이경미의 비밀은 없다에서도 마지막에 선생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
결과적으로 자기 딸에 대한 책임이 남편에 있고,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이기 때문에 더욱 밉다고는 해도 악의를 가지고 눈먼 남편이 쥔 칼을 자기 딸에게 향하게 한 건 선생이다.
왜 선생을 벌하지 않나?
혹시 여성이 남성을 벌하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인가?
*스포일러 끝*
억지로 여성이 남성을 벌하는 구도를 만들면 여성 캐릭터는 그만큼 정치적 거대 명분에 흡수되고 캐릭터의 입체성이 깎여 나간다.
그래서 손희정 평론가가 여성의 미래 따위 거창한 것을 역설할 수 있게 해준다.
내 제안은 이렇다.
여성을 영화 전면에 등장시키고 싶다면, 프로타고니스트도 안타고니스트도, 착한놈 악당 여성이 다 해먹어라.
남성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여성이 여러 가지 역할 다 맡으면 된다.
착하고 정당한 역만 맡는 건 여성 캐릭터를 반대편에서 또 죽이는 셈이다.
나는 리부트된 미녀 삼총사를 아직 안 봤는데, (개봉하긴 했나?) 혹시 이 영화도 전작이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비판받았던 지점을 단순하게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시리즈의 제목은 원래 Charlie's Angels고, 여기에는 어떤 중년 남자의 지령대로 무엇이든 하는 섹시한 꼭두각시들이라는 성적인 뉘앙스가 곁들여져 있다.
프렌치 메이드와 마찬가지로 이런 설정은 다른 입체적 캐릭터로 대체할 것이 아니라면 쉽게 버려선 안 되는 재밌 요소다.
미녀 삼총사에서 성적인 뉘앙스는 남자들을 두들겨 패는 여자들이라는 캐릭터를 근본적으로 상쇄해 이 캐릭터들을 이상하게 만든다.
액션과 벌레스크가 뒤섞인듯한 미녀 삼총사의 몇 장면들은 그런 이중성에서 재미가 있는 것이다.
섹시함은 지양될 이유가 없다.
대개의 경우 섹시하기까지 하면 더 좋다.
결정적으로, 섹시함이 만들어내는 거리감은 인물의 리얼리티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가령, 살인 무도회에 나오는 이베트 같은 하녀가 그저 멀리서 몸매만 찍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방에 들어가 하이힐을 벗고 아픈 발을 주무르는 장면이 찍힌다든가, 거의 못생겨 보일 정도까지 접근한 카메라가 파운데이션이 칠해진 얼굴을 들여다보면 관객과 캐릭터의 거리는 들쭉날쭉 변하게 될 것이다.
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가 성실한 간병인인 동시에 마음 한켠에는 이 대저택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고 가족들 중 누군가, 누군가들과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나이브스 아웃은 이런 인물 사이의 가능성이 하나도 없어 밋밋하고 단선적이다.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그 인물들끼리 얽히고 설킨 게 아니라 할란과 하나의 줄기로 연결돼 있을 뿐이다.
애초 설정이 이렇게 편편한데 탐정이 비범한 척한들 영화가 재밌어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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