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방은 보현 보살, Samantabhadra. 선정과 실천을 관장하는 보살, 대승에서 조난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살 중 한명이얌>
<사랑의 블랙홀-니체의 초인사상과 대승불교의 관점으로 영화 읽기 >
1. 유마경을 아시나요?
불경중에 웬만한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경이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믿으실랑가? 그런데 정말로 그런
불경이 있다. 그 불경의 이름은 <유마경 Vimalakrti-nirdea-stra.>다. 이 불경의 주인공이 유마, 혹은
유마힐이라고하는 석가모니의 속가제자다. 그런데 이 양반의 도력과 사상의 정묘함과 깨달음의
경지가 석가의 수제자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고 말빨 또한 석가와 쌍벽을 이룰 정도의 거물인 것이다.
유마경 2장을 보면 이 인물을 소개하며 대충 다음과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과거세에 걸쳐 승리자이신 부처님을 존경하여 선근을 쌓았으며, 많은 부처님을 예배하고
만물은 원래 불생(不生)이라는 앎을 얻었으며, 말솜씨가 뛰어났고 마음대로 신통력을 부렸으며,
다라니를 얻었으며, 두려움을 여의었으며, 마(魔)와 절대자들을 떨쳐낸 자였다.
그는 심오한 법의 본질에 정통했으며, 반야바라밀다를 완성했고 교묘한 방편을 잘 이해하고 위대한
서원을 품었으며, 중생이 원하는 바를 잘 헤아렸으며, 중생의 근기가 뛰어난지 처지는지 속속들이 알고
그에 알맞은 법을 설하였으며, 대승의 이치를 힘써 닦았으며, 바르게 살피어 행동하였으며, 부처님의
위의를 본받았으며, 바다같이 넓고 깊은 탁월한 지혜에 도달하여 모든 부처님의 칭송을 들었으며,
제석천과 범천 같은 세상을 수호하는 신들로부터 크게 존경받았다.] - 민족사에서 편 유마경에서 발췌,
소개와 칭찬이 길기도 하다. 그런데 저 칭찬은 전체 소개의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무튼 유마는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유마경은 이 걸출한 경지의 유마가 갑자기 병이 나는 것으로 본격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아니, 실상은 아픈 것이 아니고 꾀병을 부린 것이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는 대승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유마는 갑자기 몸져눕는다. 그리고는 ‘속으로’
한탄을 한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세존(부처님의 존칭 중 하나)께서는 사람 하나 보내서 병세를 묻지도
않으신다는 말인가. 아, 섭섭해라. 내가 불쌍하지도 않다는 말인가. 섭섭해라.....내가 보시를 얼마나
했는데...궁시렁 궁시렁
석가모니는 이 생각을 읽고는 씩 웃으며 이제 병문안을 보낼 제자를 뽑는다. 그런데 유마가 무서워서
제자들이 몽땅 거절을 하는 것이다. 가서 말 빨로 깨질 것이 두렵단다. 부처의 십대제자들이 몽땅 도망
가고 결국 유마와 같은 대승의 경지에 도달한 문수보살이 자원한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이 두 걸출한
경지의 보살이 벌이는 말쌈을 구경하겠다고 우르르 따라 나선다. 자고로 쌈구경보다 재밌는 것은 없나니.
더구나 유마와 문수의 대결이라면 미르코와 효도르의 대결을 넘어서는 빅매치 아닌가.
유마경은 이 문수보살과 유마의 토론과 그 과정에서 다른 부처의 제자들을 욕보이는 것을 뼈대로 이루
어져 있다. 도대체 왜 유마경은 사리풋다나 목갈라나같은 석가모니부처의 엄청난 제자들을 욕보이는 걸까?
그건 유마경이 대승의 보살행을 지지하고 소위 소승불교(hinayana 대승불교가 당시까지의 부파불교
를 비판하기 위하여 칭하는 명칭이지 결코 부파불교가 자신들을 소승이라 칭하는 법은 없다)를 비판하기
위해 소승의 최고 경지 아라한(arhat) 이르런 석가모니부처의 제자들을 능멸하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보살행이 뭐길래 그토록 소승의 경지를 폄하하고 비판하는 걸까.
보살(bodhisattva)이란 대승불교에서 불교신자들의 이상으로 삼는 경지 혹은 그 경지를 깨달은
불교도를 지칭한다. 대승불교는 부파불교가 이상으로 삼는 아라한이나 독각불을 무시한다. 이들은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해탈과 깨달음에 도달하여 혼자만의 지복을 누리는 이기적인 존재다.
보살은 이들과 달리 충분히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깨달음을
연기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끝없는 윤회의 굴레에 기꺼이 자신을 던진다. 모든 중생이 깨닫기
전까지 자신도 생로병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것이 보살의 서원이다. 영원한 윤회를 거듭하며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이 보살사상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유사하다. 니체는 불교과 조로아스터교 같은 동양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틀림없이 보살사상을 참조했을 것이다.
2.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 니체의 초인(superman)=불교의 보살≠헐리웃의 슈퍼맨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영겁회귀, 초인사상등을 역설한다.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 겁쟁이의 종교다. 초인은 이런 노예의 종교, 피상적인 도덕을 초극하여 진정한 선을 행하는 자다.
벌이 두려워서, 지옥이 겁나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넘쳐흘러 기꺼이 타인에게 선을
행한다. 착한 짓해서 하나님의 어여쁨을 받아 천국에서 지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이 무한한
우주라는 것은 무한하게 되풀이 되는 것이지 결코 단선적으로 끝나는 세계가 아니다. 초인은 그 무한한
되풀이를 기꺼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며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 영원한 회귀 속에서 영원한 초극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가치를 창출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존재, 그가 초인이다.
자, 천국의 지복을 아라한의 지복으로, 영겁회귀를 윤회로, 그리고 생의 에너지를 깨달음의 경지라고
바꾸어 기술한다면 니체의 초인은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이 된다. 물론 대승의 보살처럼 자비의 이미지를
조금 덜 가지지만 보살은 때로는 엄하고 무서운 방편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고려하자.
나찌는 이 초인이라는 것이 열등한 인간을 절멸시키고 우세한 인간을 번식시켜야 탄생하는 우월한
존재라 여겨 온갖 더러운 오물을 니체의 초인에 덧칠한다. 어쩌겠는가. 모자라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모자라는 관점에서만 사물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을. 모자라는 인간의 특기중 하나가 철학적인 테제를
형이하학적인 테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초인은 힘세고 잘 뛰는 인간이고, 근대화는 공장 짓고 도로 까는
것이고, 피상적 도덕의 초극은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눈 깜작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며, 사회의
진보는 열등한 인간의 박멸이다. 조갑제나 이인화가 보기에는 박정희가 초인이고 히틀러가 초인이고
히로히토가 초인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들 초인이 행하는 짓이 사회의 진보 아니겠는가. 어쩌겠는가.
개 눈에는 똥만 보이는 법인데.
이들이 생각한 초인은 나중에 헐리웃이 훌륭하게 형상화한다. 하늘을 날며 악당을 퇴치하는 백인의 영웅.
만화 속에 튀어 나온 스타킹 위에 팬티입은 우리들의 근육맨.
파시스트의 세계관을 보면 대체로 철학과 신화와 현실과 만화를 구분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헐리우드에
가서 할 짓을 국회에서 벌이고 이현세의 작품에 쓸만한 내용을 신문기사나 사설로 내보내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그런데 예전 헐리우드 영화 중에서 니체의 초인이나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을 정말 제대로 형상화한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뚜둥, 바로 사랑의 블랙홀이다.
3. 사랑의 블랙홀, 의미를 찾은 시지푸스
공중파를 통해 몇 번이나 방영된 빌 머레이 주연의 영화다. 원제는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 1992)다. 우리나라말로 직역하면 성촉절이라고 하는데 뜻에 맞게 의역하면 경칩절쯤 될 것 같다.
그라운드호그라는 땅두더지가 봄이 올 것을 예언한다는 미국의 풍습을 소재인데 그 두더지가 사는
펑쑤토니에 일기예보관인 빌 머레이가 취재가서 벌어지는 괴상망칙한 사건이 영화의 뼈대다.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삐뚤어진 일기예보관 빌 머레이는 펑쑤토니에 성촉절 취재를 가서
하기싫은 두더쥐 취재를 억지로 한다. 그리고 한시라도 있기 싫은 깡촌 펑쑤토니를 떠나기 고속도로
달리지만 갑작스러운 폭설로 고속도로는 폐쇄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호텔로 돌아오는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다. 그 다음 날도 성촉절, 그 다음 다음 날도 성촉절, 그리고 또 성촉절, 같은
날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성질 급한 이 양반 미칠 지경이다. 정신과에 가보니 내일 다시 큰 병원에 가보잔다. 내일이 오지 않는데
어떻게 큰 병원에 간단 말이야.
빌 머레이는 이제 상황을 즐기기 시작한다. 까짓 거 어차피 내일은 오지 않는 거라면 오늘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게는 아무 일도 없는 거네.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면 내일에 올 처벌도, 숙취도, 빚도
죄의식도 없는 거네. 여자를 유혹하고 돈을 훔치고 진탕 먹고 마시고........ 그러나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그 다음은 자살 행진이다. 투신자살도 감행하고 전기에 감전사도 해보고, 그까이거 자살,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죽는 방법도 다양해진다. 그러나 시계가 오전 6시만 되면 어김없이 성촉절이
시작되고 빌머레이는 같은 침대에서 잠을 깬다.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매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는 것이다. 빌 머레이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닫는다. 반복
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이지만 자신의 의식은 그 시공간을 경험하는 주체로서 매 순간 마다
변화한다는 것을(이 사실은 이전에도 넌지시 암시된다 빌 머레이가 앤디 맥도웰을 꼬시기 위하여
매일 정보를 얻고 같은 수작을 걸어보지만 이상하게 결과는 조금씩 다르다 연기하는 자신의 의식이
변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반응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같은 시간에 피아노를 배우고 매일 책을 읽고 매일 읽은 책을 토대로 가장 멋진 멘트로
취재를 마무리하고 시간 맞추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한다. 매일 매일 같은 행동을 하지만
그 행위의 주체는 매일 매일 조금씩 다른 의미를 느껴본다. 반복되는 삶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빌 머레이가 선행을 하는 것은 그 오로지 선 그 자체를 위해서다. 천국을 위해서도 아니고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넘쳐나는 삶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 그는 기꺼이 매일의 삶에서 선행을
한다. 오늘 하루만을 사는 그에게 매일의 선행은 매일의 의미 만들기이다. 천국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지옥이 없다고 상상 해보자, 오로지 현재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보자. 존 레논이 생각한 삶
을 빌 머레이가 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영원한 반복을 기꺼이 자신의 의지로서 선택한다. 그리고 가장 완벽하게 그 하루의 의미를 완성한
날 영원할 것 같던 하루는 끝나고 그는 윤회, 혹은 영겁회귀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는 외친다.
내일이 왔어. 내일이 왔다구.
선을 위한 선, 주체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행하는 선, 빌 머레이가 행하는 선은 천국에 가기
위한 티켓을 사기위해 저축하는 거래행위가 아니다.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내미는 보호비도
아니다. 미래의 쾌락을 얻기 위한 욕망의 행위도 아니고 미래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두려움의 행위도
아닌, 자신의 ‘현 존재’가 ‘실존’을 찾기 위한 행위가 그의 선행인 것이다.
이제 그는 피상적인 도덕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 니체의 초인이 되었다. 동시에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참된 보시-보살이 행하여야 하는 육바라밀 중 제일 덕목-을 행하는 대승의 보살이기도 하다.
그는 결국 반복되는 하루를 벗어났다. 그러나 우리 삶 전체를 살펴보자. 우리는 실상 매일 매일을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혹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해도 그 변화라는 것이 은행구좌에
늘어나는 잔고, 넓어지는 아파트 평수, 혹은 직장에서의 직위와 같은 피상적인 변화 아닐까? 시간의
축적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이러한 변화가 나 자신의 존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일상은
빌머레이가 반복해서 산 그라운드호그데이를 몇십년 단위로 늘인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만일 이 생애가 끝난 후 다시 이러한 삶이 반복된다는 불교의 윤회나 니체의 영겁회귀가 맞다면 우리는
영원히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닐까? 지극히 비본래적인 것에 우리 전 존재를 마모시켜가며
우리 삶의 비본래성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과 불안을 숨기는 것 아닐까?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과연 ‘내일’이 있는 걸까? 아니, 우리에게 다가오는 내일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삶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언제나 내일은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내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이가 반복되는 하루만을 산다.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타인이, 사회가 부과한 피상적인
삶을 반복한다. 마치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물리적인 내일이 없는 것 보다 더 슬픈 것은 존재의 내일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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