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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픽]Arens Of Sheffield 07~08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1.22 21: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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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1.

"당신의 주장에 마땅한 근거가 있다면, 저를 납득시켜야 할 거예요."


메가라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아공 내전으로도 충분히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또 다른 내전이 가까이에서 터진다면, 기존의 추출 작전의 규모를 더욱 키워야 했다. 게다가 샐리맨더, 블루라운드의 EML을 넘어서서 보츠와나의 자국민까지 보호시키기 위한 PMC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또한 백악관에도 진지하게 보고해야할 정도로, 라울의 발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톤과의 불법적인 연대로 인해 탄핵을 맞이한 전 정부를 이은 새로운 공화당 정부였고, 그 중 하나가 국군 철수였다. 라울의 말이 사실이 된다면 정치적 실책으로 적용될 수도 있었다.


"이틀 전, 저희 분석국 APLAA 현지 요원이 몰로폴롤레(보츠와나-남아공 국경의 가로보네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모종의 장비 거래가 있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장비? 구체적인 카탈로그는?"


라울은 잠시 손을 들어 기다려 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이내 키보드를 두드렸다. 몇 번의 마우스의 클릭 소리가 들린 뒤에야, 회의실 안에 있는 두 명의 분석관, 그리고 메가라의 랩톱에 메일 하나가 수신되었다. 메가라가 턱짓을 하자, 두 분석관이 메일을 열었고, 이내 메가라도 행동을 같이했다. 첨부된 텍스트 파일 속에는 단순한 무기 뿐만이 아닌 방탄복 같은 부가적인 장비들도 들어있었다.


"MRR15.7M과 MRR11.6S는 보츠와나군 제식총기인데, 이건 흔히 말하는 군납비리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야 하지 않을까요?"


메가라는 콜트 캐나다 C8의 파생형에 대해 많은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군용 무기가 민간에 풀리는 일은 총기가 허용되는 나라에선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물며 불법적인 무기 거래는 미국 내 할렘가 뿐만 아니라 국경, 그리고 빅 애플같은 대도시 내에서도 증가하는 추세였다. ICE내 국토안보수사국에 지인을 둔 메가라는 그 지인의 경험을 토대로 단순한 군납비리에 대한 무기거래에 무게를 두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나라인 만큼 군부의 정치인들이 노후를 위해 거래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보츠와나 군대에서 유출된 물자가 아니더군요. 밑을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울의 말에, 메가라는 스크롤을 내렸다. 그곳엔 발신인의 사인, 그리고 모자이크 처리된 발신처와 정체불명의 암호로 타이핑 된 글 몇 줄이 나타나 있었다. 휘갈겨진 사인은 누군지 가늠할 순 없게 했지만, 밑으로 내려가면서 보게 된, 적지 않은 수의 서구권 장비 뿐 만이 아닌 동구권 장비들을 보면서 메가라는 라울의 주장도 고려했다. 단순한 갱단 간의 항쟁, 그리고 노후자금을 위한 거래라고 판단하기엔, 장비의 수량, 그리고 화력이 매우 컸다.


"세미예르, 세미예르의 사인과 일치합니다."


메가라의 왼쪽에 앉아 있던 여성 분석관이 자신의 랩톱을 메가라에게 돌려 보여주었다. 화면에 띄워진 필체 대조 프로그램에는 거래 카탈로그의 필체, 그리고 며칠 전 전향한 세미예르의 최측근이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등록을 조건으로 내건 세미예르의 필체가 적힌 문서들의 필체가 분석되어 일치율 98%라는 확률을 새로이 띄워주고 있었다.


"딥러닝으로 분석한 결과 모자이크 발신지는 앙골라라고 적혀있습니다. 나미비아 국경을 최단거리로 건너기 위해 오카방고 강을 건너 육로를 통해 보츠와나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보고 이전에 조치를 취했나요?"


메가라가 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묻히는 라울에게 물었다. 현재 미국의 킬리스트에 올라간 테러리스트가 무기를 공급했다면, 그것은 내전이 아닐지라도, 테러리즘의 명목에 포함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테러를 예고하고 잠적한 테러리스트인 만큼, 해당 거래로 인한 유혈사태가 벌어진다면 사살 명분은 완벽하게 충족되는 것이었다. 메가라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라울은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대충 훔쳐 닦았다. 그의 얼굴은 EML의 난민 구호 일과 CIA의 첩보 임무를 동시에 하느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요원, 그러니까 코드명 '에뜨랑제'가 어제 1700시에 자신의 분견대와 함께 몰로폴롤레에서 무기 파괴 및 거래자 납치를 위해 출동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소식도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메가라는 가장 최악의 수를 생각했다. 전멸 혹은 괴멸. 그런 즉 세미예르가 보낸 무기를 거래한 자 또한 적지 않은 세력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메가라의 고민이 깊어졌다. 무기의 발신지를 알아야 테러를 예고하고 잠적한 세미예르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고, 상황은 더욱 안정화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앙골라라고 적힌 발신처로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앙골라도 단순히 무기들이 거쳐간 중개지가 될 수도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막일지도 모른다. 보츠와나의 거래자가 누가 되었든, 내전이 터진다면 남아공과 보츠와나 사이에 있는 EML과 샐리맨더, 그리고 메가라 휘하의 구출팀에게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남아공의 난민들을 보츠와나 루트로 피신시켜야 하지만, 또 다른 내전은 또 다른 난민을 부르고, 그에 따른 통제를 벗어나 범죄율이 더욱 상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선 국경을 통과하기 위한 브로커들이 등장할 것이고, 정확한 난민 입국 심사가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만일 테러리스트들이 브로커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된다면, 런던 지하철 테러 내지 샤를리 앱도 테러같은 끔찍한 일은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안나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겠죠?"


메가라가 나지막이 물었다.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와 에뜨랑제가 생각한 '기정사실'일 뿐입니다. 그리고 외신 언론들의 취재를 최대한 막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새어나간다면... 이곳에서 내전이 터지지 않겠지만 또 다른 곳에서 비슷한 테러리즘이 활성화 되겠지요. 다시금 분쟁의 씨앗이 심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국장님, 잠시만..."


메가라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 분석관이 메일 하나를 보냈다. 라울이 보낸 문서의 한쪽 구석에 메세지로 추정되는 암호화 목록을 해독하였는지, 눈짓으로 확인 표시를 보낸 그의 눈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메가라는 무얼 해석했나 싶어 그의 메일을 열었다. 그곳에는 미군 군복, 그리고 러시아군 군복, 또한 중국의 군복을 포함해 글로벌호크, 블랙 호넷, 프레데터 등의 군용 드론, DJI사의 민간용 드론, 그리고 폭탄의 재료에 쓰이는 질산나트륨과 풀민산수은 10t이 적혀 있었다. 메가라는 IED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폭약을 장착한 드론은 기존의 IED만큼 분간이 되지 않을 뿐더러, 특정 사람을 암살할 수도, 아니면 무차별적인 폭탄 테러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IED를 차치하고서라도 구성품들의 규모는 쉽사리 무시하기 힘들었다. 내전의 시작은 단순히 자국민의 싸움으로 시작되겠으나, 군복의 국적에 따라 국제적인 여론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라울, 잠시만. 지금 우리 분석관이 암호를 해독했는데... 좋아요. 내전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어요. 그리고 곧 당신이 지휘하게 될 팀과 지원을 보낼 테니, 끝까지 쫓아가 물품들을 회수하고, 거래 상대방을 납치해 정보를 수집하세요. 그리고 지속적인 지원을 할 터이니, 어떻게든 그곳에서 나오는 내전과 밀입국자 유입을 막아주도록 해요."


[에뜨랑제 팀을 수습할 팀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헌터킬러 팀을 보내주세요. 이 건은 대표님에게 보내지 않고, 저희 측에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해요."


곧바로 연락이 끊겼고, 메가라는 의자에 등을 기대어 묵혀왔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국장님, 이건 단순히 미봉책입니다. 조만간 안나 대표도 이 사실을 알 텐데, 그 시기를 늦추기 위해선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민간인이 된 울프독이니 기관의 비밀을 터 놓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여성 분석관이 메가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 당장 테러가 벌어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EML에 위장 취업을 한 라울이 어떻게든 EML의 국경 팀을 지휘하고 있다지만, EML의 실질적인  권한은 안나에게 있었다. 같은 물에 몸을 담가 본 사람은 언젠가는 알아챌 것이다. 다만 메가라는 그녀의 친구로써, 양지로 올라간 사람인 만큼 더럽고 축축한 일에 연관되지 않길 바랬다.


"이게 메세지일 수도 있습니다. 방향을 보건대 북쪽을 향하고 있으니... 어쩌면 유럽 테러에 대한 경고를 재확인 시켜주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레드셀(9.11 이후 미국을 공격할 안보 위협을 미리 예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CIA 내 부서)에게 라울의 보고를 전해 평가를 맡기고 ISA(Intelligence Support Activity, 정보지원행동대-미 국방부 소속 보안사령부 INSCOM 산하 정보부대)에 협력을 요청하겠습니다."




남성 분석관이 뒤이어 말했다. 그의 말도 맞았다. 일단 상대적으로 국력이 부족한 곳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 다음, 도화선의 끝인 다이너마이트가 유럽일 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황에선 유럽 또한 도화선의 일부이고, 다이너마이트는 미국과 캐나다가 될 수도 있었다.


"안나와 세미예르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으면서, 유럽 내의 보안을 강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두 사람은 그렇게 보고 있네요. 맞아요, 그게 낫겠어요. 그럼 적어도 며칠 간은 안나 가족의 눈을 돌려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떠오르자마자, 해결책이 떠올랐다. 회의 전까지 안나가 메가라에게 재고해달라고 말한 그것.



며칠 동안 만이라도 캠핑을 보내는 동안, MI5와 CTFSO와의 협력 하에 런던의 보안을 더욱 강화시키면 되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메가라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MI5의 펜튼 국장부터 설득시키기로 하며 핫라인 번호를 입력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던 도중, 메가라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해독한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PS는 CIA에도 사람을 심었습니다.]








12.


제인은 약 10분 뒤, 주문한 음식들이 모두 나오기 직전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짙은 선글라스에 트렌치 코트를 입고 나타난 제인은 사선을 구르다 은퇴한 안나의 눈에 보기엔 무기 브로커 같았다. 약 1년 전 혼수상태에 있었던 안나를 랩터와 대동한 에리얼도 비슷한 복장이었던 걸 기억한 안나는, 복장과 다르게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제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제인언니!"


멜리사의 스파이키 컷이 고개를 돌리자, 덩달아 하늘하늘 흔들거렸다. 제인이 안나 옆에 안자, 엘리사는 수줍은 듯 "안녕하세요오...'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음, 좀 많이 굶으셨다길래 유기농 죽을 시켜놨어요. 뭐 더 먹고 싶으면 말해요. 제가 계산할 거거든요."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테이블 한 쪽에 놓여진 계산서를 보며 제인이 만류했지만, 안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엄마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에게 계산서를 맡기는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아, 저기 온다. 자, 다들 기다렸지?"


가까운 곳에서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이 실려진 커다란 카트를 밀고 아렌의 테이블 앞에 멈춰섰다. 약 30초 뒤, 저마다의 앞에 주문한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멜리사는 접시를 보자마자 포크로 버섯을 골라내 접시 한 켠에 쌓아두었다. 엘리사는 포크와 칼로 스테이크를 잘라보려 했지만, 오히려 고기가 뭉개질 것 같았다. 약간 울상을 지으며 칼질을 하려는 엘리사를 보다 못한 안나는 자신의 팬 케이크와 토스트를 조금 뒤에 먹기로 했다.


"엘리사, 언니가 도와줄게."


안나가 엘리사의 손에서 포크와 칼을 빼냈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한 조각 잘랐다. 그리고 포크로 찍어 엘리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한번 먹어 보렴. 엄청 맛있을 거야."


엘리사는 큼큼 스테이크의 냄새를 맡더니, 이내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몇 초 동안 말없이 우물거리던 엘리사는 포크에 남은 스테이크도 쏙 뽑아 먹었다.


"맛있어요. 아주 많이. 매일매일 먹었으면 좋겠어요."


간단하면서도, 거짓이라곤 없는 순수한 평가였다. 안나는 나중에 집에서 스테이크를 한 번 구워 볼까도 생각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어른들도 비슷한 평가를 내려줄 것이다. 안나는 문득 집에 남아있는 어른들의 식사 여부가 궁금해졌다.



나오기 전, 한나에게 그라탕의 재료와 조리법을 알려주고 나왔지만, 걱정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두나는 차를 우릴 줄 알지만,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엘사는 이제 막 눈을 뜬지 1주일이 지난 데다가, 새해 직후 안나가 만들려는 아주 간단한 스모어 쿠키를 대신 만들려 했다가 마시멜로우를 모조리 태워버린 전적이 있기에, 맡기기엔 무리라고 안나의 직감이 설명했다. 한나? 사실상 이제 한 살이 된 성인 막내는 여전히 세상을 눈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요리를 맡긴 이유는, 평소 안나가 요리를 할 때 곁에서 가장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 언니가 휴대폰 줄 테니까, 언니가 고기 다 썰 때까지 한나한테 점심 먹었냐고 전화 좀 넣어 줄래?"



"네? 네... 읏차."



포크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엘리사에게 내밀자, 엘리사가 몸과 팔을 쭉 빼 안나의 휴대폰을 집어갔다. 익숙하지 못한 손동작으로 휴대폰을 두드리던 엘리사는, 곧이어 귀에 스크린을 가져갔다.



"제인 언니, 왜 선글라스 쓰고 있어?"


멜리사가 천천히 죽을 수저로 떠먹는 제인에게 물었다. 아톤에 있었을 적에도 제인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았고, 다시 만난 크리스마스 때에도 쓰고 있지 않았다. 혹시 누구한테 멍이라도 든 걸까? 멜리사는 보이지 않는 제인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그런 걱정을 했다.


"아침에 하품을 많이 했더니, 눈물 때문에 눈이 부어서 그래."


제인은 대충, 멜리사가 납득하는 정도에서 거짓말을 했다. 조금의 진실을 섞어 말한다면, 더 깊게 파고들어 물을 것이고, 그것은 제인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흠, 못 믿겠어. 그리고... 겨우 죽 한 그릇으로 배가 차진 않을 거 같은데."


멜리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선글라스 속 제인의 눈을 보려 했지만, 제인은 고개를 조금 돌려 노출을 최소화했다.


"맞아요. 제인, 혹시 화장 안하고 나왔어요?"


안나는 멜리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말했다. 눈화장을 안해서 대충 선글라스로 가리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제인의 식사 건은 멜리사의 말을 근거로 자신의 프렌치 토스트를 양보하고 새로 주문하면 되는, 일상 속의 사소한 선택 중 하나였다.


"정말로 하품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예요. 저기, 안나 씨. 이거 먹어도 될까요?"


제인이 생각을 읽어낸 듯 안나의 앞에 놓인 프렌치 토스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나는 아직 엘리사의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는 안나를 향해 고맙다고 고개를 살짝 숙인 제인은 곧바로 토스트를 들어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그 모습을 본 멜리사는 제인의 몫이었던 유기농 죽이 어느 새 바닥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굶었나 보네, 바보다 바보."


제인은 대꾸하지 않았고, 대신 멜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이이잉... 부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를 멜리사가 수저질을 멈추고 머리에 손을 가져가 다시 세워 놓았다.


"요 며칠 설사병이 심해져서, 제대로 못 먹었어요.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아요."


제인은 안나를 힐끔 쳐다보며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다. 이것이라면 별 다른 의심을 사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는 사이, 엘리사는 안나의 휴대폰에서 나오는 통화음을 듣다, 이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오..."


[어, 언... 아니, 엘리사? 무슨 일이야? 왜 언니 휴대폰을 네가...]


"아, 지금 언니가 스타크를 썰고 있어서, 저한테 대신 점심 먹었냐고 전해달래서요... 거긴 어때요?"


엘리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이 울지 않았더라면, 서로 떨어져서 점심을 먹지는 않았을 예정이었다. 비록 일주일이었지만, 엘리사와 멜리사는 안나 언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의 요리 실력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안나의 부재는 곧 좋지 않은 음식이라는 예상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 그라탕 잘 만들어서 먹었어. 그리고 스타크가 아니라 스테이크 아닐까? 엘리사, 제인 씨는 거기 잘 있지?]


엘리사는 제인을 흘끔 흘려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옆에 앉아있는 멜리사보다 활기차게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네, 근데요. 엄청 커다란 검은 안경 쓰고 있으세요..."


엘리사가 속삭이듯 한나에게 말했다. 곧이어 한나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게 신경쓰지 마. 자기 패션이가 보지. 엘리사, 기왕 전화 한 김에 부탁할 게 있어. 이따가 올 때 초코우유 좀 사다주겠니? 아까 내가 마지막 남은 초코우유를 몽땅 마셔버렸거든.]


"초코우유요? 네...."


어느새 엘리사의 앞으로 한입 크기로 잘려진 스테이크 접시가 놓여있었다. 안나가 엘리사에게 먹어보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곧바로 안나도 팬케이크를 나이프로 잘라 입에 넣어 음미했다. 입이 저릴 정도의 달콤함이 느껴졌고, 이는 자극적으로 먹는 안나의 식성 코드에 잘 부합했다. 통화를 마친 엘리사가 휴대폰을 안나에게 돌려 주었고, 그제서야 엘리사는 제대로 되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나가 뭐라고 했니?"


수제 칩을 포크로 조심스레 찍어 와작와작 부숴먹는 엘리사에게 안나가 물었다.


"이따 집에 올 때 초코우유 사달라고 했어요."


"간단하네. 너희들 먹을 간식도 보면서 같이 사면 되겠다."


말을 마친 안나는 사이다를 꼴깍꼴깍 마시는 멜리사를 보며, 부지런히 팬케이크를 먹어댔다. 으으으... 사이다의 탄산이 입에 퍼지는 것을 느낀 멜리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입맛에 맞지 않을까 싶은 안나는 그것이 곧 기우였음을 알았다. 몸을 떨면서도 조금씩 사이다를 마시며 접시 위의 계란을 한입에 덥썩 먹어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어느새 토스트도 다 먹어치운 제인이 있었다.


"아직도 배고프면 여기 메뉴판에서 더 주문해요."


안나가 창가에 놓여진 메뉴판을 들어 제인에게 건넸다. 제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근처를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퀸즈 스크램블(절인 할라페뇨와 숙성된 체다 치즈, 파, 부추, 버섯, 그리고 토스트 두 조각을 스크램블한 음식.)을 주문했다. 한 층 허기가 가시자, 제인은 그제서야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들었다.


"캠핑을 못 가게 되서 유감이예요."


제인은 이두나가 부탁한 위로를 스크램블이 오기 전까지 하기로 했다.


"맞아, 가고 싶었는데, 우리 때문에 못 간 댔어...."


멜리사가 기죽은 듯 블랙푸딩을 수저로 잘라내 먹으며 말했다. 하지만 블랙푸딩이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는지, 멜리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입에 든 푸딩 조각을 삼키고 나서 남은 블랙 푸딩들을 버섯처럼 골라내었다.


"이제 컨트롤도 할 수 있는데... 너무해."


"멜리사, 내가 볼 땐, 너무한 건 아니라고 봐."


손가락 끝에 남은 토스트의 기름을 핥던 제인이 멜리사의 투정을 단번에 부정했다. 멜리사는 제인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을 본 안나의 눈에는 마치 러시안 블루 한 마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제인을 바라보는 듯했다.


"메가라 씨는 언제나, 아마 언제나겠지. 너희들과 다른 개체들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아마 지금 너희들이 밖에서 자유롭게 놀기엔... 세상은 아직 너희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인정하기 싫지만 안나는 제인의 말에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만약 아이들의 능력이 단 한 번이라도 들킨다면, 분명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메가라와 영국의 기관들은 아렌가의 사람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에 탐탁치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너희들은 캠핑을 갈 수 있을 거야. 너희들을 보호해 주는 사람들이 너희들을 싫어해서 붙잡아 두는 게 아니니까.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판단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제인은 한결 편안해진 듯 턱을 괴며 고개를 엘리사에게 향했다. 엘리사는 안나가 썰어준 스테이크를 조금씩 베어물면서 제인의 선글라스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까, 메가라 씨가 한 달 전쯤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안나 씨에게 얘기를 해줬나 몰라요."


"무슨 얘긴데요?"


제인이 새로운 대화의 떡밥을 던졌고, 안나는 당연한 듯 물었다. 메가라가 자신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무언가 숨기는 게 있지 않을까 싶은 음모가 피어오르기 때문이었다.


"음... 오두막 이야기를 했어요."


서로 합의를 본 것이 아닌데도, 안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일제히 제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꿈을 자각했을 때, 무의식의 존재들이 뚫어져라 보는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제인은 말을 잇기 위해 다시 입술을 떼었다.


"아,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오두막이 있는 들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또 알고 있는 선에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메가라 씨가 뭔가 떠올린 모양이예요.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가상현실, 치매 예방, 그리고 AI. 이 세 단어는 확실히 들었어요."


안나는 제인이 언급한 말을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분해해 정리했다. 능력을 가진 사람, 그리고 능력의 매개체를 투여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자각몽은 안나가 은연중에 걱정하는 개체의 무기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일종의 샌드박스 형식이었던 [들판의 오두막]은 발현 조건은 위험하지만, 이두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 직접 겪었기에 확실했다. 가상현실로 간다면 엄청난 잠재력이 깃들어 있는 개념이었고, 안나는 영화 써로게이트와 비슷한 시스템을 구상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치매 예방은 오두막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잘 활용하면 일종의 예방 교육을 겸할 수 있었다. 하지만 AI는 추측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오두막을 거쳐간 사람 중에서 스스로 행동을 하는 무언가는 만들어낸 적이 없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니면 제인이 듣지 못한, 개체들을 활용한 AI프로젝트일 수도 있었다. 안나는 눈 앞의 두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약간 까칠한 내면을 가진 한나는 예외일 것 같았고, 엘사와 두 아이들이 이상적인 AI의 모습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동시에 안나는 자신은 AI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일 안나를 토대로 만들었다간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아니면 AM(할란 엘리슨의 '나는 입이 없다, 하지만 비명을 질러야 한다'에 나오는 잔혹한 행동을 일삼는 인공지능)이 되지 않을까 싶은, 약간 우스운 상상을 했다.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오히려 더 좋은 키워든데?"


"진짜? 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멜리사가 잔뜩 뭉개진 계란을 숟가락으로 찹찹 떠먹으며 말했다. 엘리사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가상현실이 뭐냐면..."


그 때, 주머니에 넣어둔 안나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안나가 잠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휴대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메가라였다. 안나는 의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마음이 바뀌었어?"


안나는 메가라에게 물으면서도 입모양으로 아이들에게 '메.가.라!'라며 조용히 알려주었다. 캠핑 계획을 거부한 사람의 소식에, 아이들의 달그락거리는 접시와 식기가 조용해졌고, 일제히 안나의 휴대폰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제인은 정말로 귀가 살짝 움직여진 눈앞의 두 아이를 보면서 내심 토끼를 떠올리게 하는 귀여운 개인기라고 생각했고, 덩달아 분위기에 편승해 안나의 전화에 귀를 기울였다. 안나는 행여 아이들이 듣지 못 할까봐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주일 동안이야. 딱 1주일.]


잭팟! 안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잠시 시선을 올리자 희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손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고 있었다. 다만 바깥인 만큼, 튀어나오려는 환호성을 최대한 죽이며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근데 무슨 일이야, 허락한 이유가?"


안나는 기뻐하면서도 메가라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다. 갑자기 입장을 바꾸는 것이 이상했다.


[별 거 없어, 개체들... 아니, 네 동생과 언니들을 언제까지 통제만 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너희들이 무슨 사냥개도 아니고... 그렇지, 리트리버?]


"그 말을 여기서 왜 끄내는근데..."


안나는 이를 악 다물면서 메가라의 농담에 가볍게 답했다. 이제 안나 일행이 해야 할 일은 식사를 빠르게 해치운 다음, 도심을 거닐며 캠핑을 하면서 먹을 음식들과 물건들을 사는 것 뿐이었다. 물론 집에 있을 세 가족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야 했다.


[참, 두 가지 더. 좀 번거롭겠지만 나한테 자주 보고해야 해. 무슨 이상이 생기면 바로 손을 쓸 테니까, 그리고 동행인을 붙여줄 거야. 네가 잘 알고, 너희들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안심해도 돼.]


"누군데 그래? 고스트 팀?"


안나 일행을 감시한다면 그만큼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란 뜻이었다. 안나가 아는 베테랑은 안나를 쫓던 헌터킬러와 고스트 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해가 풀린 데다가, 일부 인원은 블루라운드로 이직한 만큼 믿음직한 사람들이지만, 캠핑에 관련해서는 무언가 딱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딱딱한 모습이 지금은 말랑말랑해진 안나였기에, 일반인과 요원 간에 느껴지는 미묘한 이질감은 지우기 힘들었다.


[벨.]


메가라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은 안나에게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벨 씨가 싸움을 잘했던가? 아닌 것 같은데. 안나는 벨의 이미지랑 권총, 그리고 군용 나이프을 연관지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벨은 권총보다는 물총, 군용 나이프보단 과도나 주사기, 혹은 흰색 가운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혹시 벨 씨 과거가 막 화려했어? 레드셀? 대테러 센터? 아니면 프리랜서 용병이었나?"


[그건 아닌데,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보디가드를 붙여준다고 생각했던 거니?]


안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어, 방금 전까지 그 생각 했어. 지방으로 나갈 거라서 경호원을 붙여줄 줄 알았지."


[경호는 지역 관할 경찰들이 맡아서 해 줄 거야. 일단 네 존재 자체가 누군가 섣불리 건들 수 있는 스펙이 아니고, 한나도 너한테 교육을 받았으니까... 일단 준 특수부대 대원 두 명에다, 능력까지 써서 제압하면 별 일 없을걸?]


"그렇긴 하지. 다만 장비를 구하기가 좀 번거로울 것 같아. 회사 장비를 빼서 가져가면 안 되잖아. 기껏해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건 권총들이 전부라고."


안나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바지춤에 끼워 놓은 PPK를 의식했다. 위력이 다른 권총에 비해 낮긴 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죽이기엔 무리가 없었고, 은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캠핑을 갈 로몬드 강 근처의 숲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고, 권총 몇 자루로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대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안나는 메가라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RAL8000도료가 칠해진 MP5와 AS VAL을 생각했다.


[저녁에 너희 집 앞으로 기어(무기와 장비를 뜻하는 은어)를 실은 밴을 한 대 보낼 테니까 잘 가져가 둬. 경찰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너랑 한나, 그리고 이두나 사장님
이 무장해야 하니까. 어디로 갈 생각이야?]


"네가 기각하기 전까진 로몬드 강변에서 지낼까 생각했어. 별 얘기가 안 나온다면 로몬드로 갈 거 같아."


안나는 메가라의 말을 듣고는 소음기도 같이 챙겨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몬드 강의 숲에서 간이 표적을 두고 가족끼리 사격 내기를 해볼 수도 있어서 였다. 마침 6명의 가족에 3명이 사격 경험이 있으니 각자 한 사람씩 맡아 팀을 짜면 되는 일이었다. 안나는 엘사와 같이 팀을 해보고 싶었다. 같이 잘 때마다 안나는 엘사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지만, 엘사는 안나를 CIA 출신의 킬러보단 든든하면서 사랑스러운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엘사의 태도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써 그 능력을 어느 정도 감탄해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안나의 마음 위로 글레이징을 하듯 발라져 있었다.


"소음기도 챙겨줄래? 가서 좀 가지고 놀게."


[1주일은 거뜬히 쏴도 충분할 정도로 챙겨주라고 MI5 국장에게 일러 뒀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아, 네가 싫어하는 글록은 빼 뒀다?]


안나는 세세한 것까지 챙겨주는 메가라의 배려에 내심 고마워했다. 나중에 시간을 비워 미국으로 날아가 무어라도 사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안나였다.


"고마워. 벨 씨는 지금 여기로 오고 있으시겠네?"


[시간을 보니까... 이제 막 비행기 떴나 보다. 못해도 저녁 쯤엔 도착할 것 같으니까, 만나면 잘 대해주고. 따님의 병세가 악화된 모양이야.]


안나는 문득 처음 벨을 만났을 때, 그녀와 친해진 계기를 떠올렸다. 당시에 죽어있던 아이들을 인큐베이터로 데려가면서, 침울해 있는 안나에게 자신의 비밀 상자를 열어 주었고, 투병 중인 딸이 한 명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안나는 엘리사와 멜리사를 보면서 생각했다. 두 아이들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눈과 얼음은 다친 몸, 더 나아가 정신까지 치유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에 벨의 딸에게 투여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미 수도 없이 능력을 투여받은 이두나와 안나의 사례가 있었기에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의견을 일전에 들은 메가라와 스카, 그리고 심바는 난색을 표했다.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아이들의 혈청으로 만들어진 신약은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럼 따님 곁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아니, 같이 가는 게 싫다는 건 아냐. 그냥...남은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스스로 자원한 거야. 점점 지쳐가나 봐. 대신 스카와 심바에게 따님에게 캠핑 기간 동안만 딸에게 머물러 있으라고 미리 구두를 전했으니까...]


"그냥 딱 한번만 신약을 투여시키면 안 될까? 아니면...내 동생들이 있잖아."


안나는 말을 마치고 아이들을 흘끔 바라보았다. 모든 상황을 듣고 있는 아이들은 안나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의 눈가는 조금 붉어졌고, 멜리사는 코를 훌쩍였다. 수 번의 시련을 겪고 난 아이들은  옛날보다 조금 성숙해졌지만, 조금 더 감수성이 풍부해졌음을 맞은편에 앉은 제인과 안나는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아이들에게 투여하기엔 아직 위험한 것 같아. 개체들은 면역력이 아주 강해서 신약을 맞아도 부작용이 없다는 확증은 엘리사와 멜리사의 사례로 입증되었지만... 아픈 사람들은? 개체가 아닌 아이들은? 오히려 약이 체내의 암세포나 각종 바이러스, 병균을 활성화시킬수도 있어. 얼마 전에 쥐를 통한 임상실험에서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왔고... 지금은 위험해.]


메가라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 나오는 신약은 아직 위험했다. 안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벨이 캠핑에 자원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벨은 아이들의 눈과 얼음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는 것 자체가 죽느냐 사느냐를 다루는 문제가 될 것이고, 오두막으로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또한 안나처럼 곧바로 살아 돌아온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도착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해줘. 그 편이 더 나을 거야. 벨도 이번 캠핑에서 마음을 정리할 것 같으니까 아무도 우는 사람 없이 잘 갔다 왔으면 좋겠어.]





안나는 메가라의 말에 섣불리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캠핑을 가기 전부터 이미 눈앞의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흘리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다.







13.



"전 못 갈 거 같은데..."


피커딜리 서커스에 위치한 카나리아 카페의 사장인 오로라는 캠핑 의사를 알기 위해 찾아온 4명의 아렌 일행에게 멋쩍이 웃으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엄청 바빠서요... 지금 이 시기가 피크라..."


오로라는 일행이 시키지 않았음에도 엘리사와 멜리사를 위한 초콜릿과 메론 아이스크림, 그리고 두 명의 성인 여성을 위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내왔다. 오로라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른 테이블과 다르게 말수가 적어진 아렌 일행의 테이블은 오로라가 아는 평소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얘들아, 어서 먹어봐. 오늘 새벽에 눈 비비면서 만든 거라 맛있을 거야. ...잠깐만, 너희들 울었니?"


오로라는 이내 아이들의 눈이 조금 부어있는 걸 보았다. 설마 안나 씨가 애들을 혼낸 건가 싶은 상상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울었는지 오로라의 상상력은 구체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다. 거짓말로 돈을 훔친 걸까? 오로라는 자신이 1년 전 러시아에서 안나를 도운 것에 대한 보상의 원인을 기억했다.


"좀 슬픈 이야기를 들어서 그래요. 벨 씨의 따님에 대한 얘기를 메가라와 나눴거든요."


안나가 침울함의 이유를 간단히 말해주자, 오로라는 이해했다는 눈치를 보였다. 벨의 사연은 오로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였다.


"요 꼬맹이들이 있으면 낫지 않을까요?"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로라는 구태여 추가적인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이미 자신 이전에 한 번 메가라와 이 얘기를 했으리라 추측할 만큼, 개체들은아렌과 관계된 사람들에 있어서는 상식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상식이 부정되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이건 우리가 직접 관여해선 안 되는 거라... 마냥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죠. 특히 저나 한나, 엄마처럼 남을 대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침울해진 아이들을 보자, 마찬가지로 우울해져 있을 엘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다른 가족들은 그러진 못하겠죠. 여기 오기 전에 집과 통화했는데, 엘사 언니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어요."


"엘사 씨가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커피를 후 후 불던 제인이 물었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자신을 격려해 주었던 사람이 자신처럼 우울해졌다는 사실은 관심이 쏠릴 법했다.


"음... 이따가 케이크 포장해 드릴게요. 엘사 씨 기분이 풀어졌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요 꼬맹이들아... 언니가 아주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볼래?"


오로라는 엘사가 좋아할 법한 케이크의 종류를 생각하면서, 문득 상황의 해결책은 아니어도 나쁘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생각해 내었다. 오로라의 말이 통한 것일까, 깨작깨작 케이크와 돈두르마를 먹던 아이들의 귀가 활기를 되찾았다. 오로라는 아이들의 쫑긋 하고 움직인 귀에 신기해 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멜리사의 귀 끝을 살짝 만져보았다.


"만지지마아....세요."


얼굴을 찡그리며 멜리사가 어설픈 존대를 하자, 오로라는 곧바로 손을 떼었다.


"능력 자체를 체내에 일정량을 집어 넣는다기 보다는, 일종의 디퓨저... 그러니까 음... 방향제나 향수처럼 간접적으로, 그것도 아주 적은 양을 통해 접촉하게 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오로라는 말을 끊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과 벽 사이마다 하나씩 달려있는, 가까운 찬장에서 작고 하얀 무언가를 꺼내 아이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느낌이 어떠니? 향기롭지 않아?"


오로라가 준 물건은 석고 형태의 방향제였다. 아이들은 잠시 먹던 것을 멈추고 오로라의 신기한 물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돌 냄새가 아니야. 엄청 향긋해."


"어디서 냄새가 나오는 거죠...?"


멜리사의 평가는 간단명료했으며, 엘리사의 평가는 의문투성이였다. 안나는 방향제를 통해 오로라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아이들의 능력, 아니면 신약을 석고에 섞어서 간접적인 치료를 노려보자?"


능력과 약물을 향기처럼 퍼지게 하여 호흡을 통해 몸에 투여하는 방법을 오로라는 말하고자 했다.


"거의 비슷한데요? 사실 석고까지는 생각 안했고, 아이들이 만든 눈과 얼음이면 실온에서도 녹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혹시 너희들, 만들어 놓고 놔둔 적은 없었니?"


멜리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마치 발표를 하겠다는 듯 팔을 살짝 들었다.


"옛날에... 몇 번 있었어요. 그러니까...다오...언니, 그거 이름을 모르겠어요..."


"디오라마를 몇 번 엘리사가 만들어 줬어요, 시간을 두고 봐도 녹았다는 느낌은 잘 안 들었는데... 이거 잘 하면..."


직접 투여하는 방식이 몸에 부담을 준다면, 간접적으로 능력에 접촉시켜  능력과 신약을 몸이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도 상당히 좋을 것 같았다.


"시도는 해볼 수 있겠죠?"


"벨 씨의 판단 하에, 가능할 것 같다면 해봐야겠죠? 그렇지, 얘들아?"


안나가 넌지시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안나의 예상대로 "그래야지!' "언니 말이 맞아요..."라며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직 그 가설이 위험하긴 한데..."


유사 과학 아니예요?


반면 제인은 조금 우려했다. 메가라가 말한 쥐 실험이 마음에 걸렸다. 상태가 좋지 않은 딸을 생각하는 벨이 과연 과학적 근거에 맞춰서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진 의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딸을 위해선 뭐든지 시도해봐야 한다는 벨의 관점을 이해한 나머지, 제인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여전히 위험하고, 도박인 건 맞아요,  하지만...어떻게든 그 아이가 능력과 신약에 익숙해지면, 더 나아가 엄마와 저처럼 제 2의 인생을 맞이할지도 모르잖아요?"


안나는 일단 오로라의 생각에 긍정했다. 생명 윤리를 넘고, 경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를 만큼의 부상을 입었던 이두나와 자신이라는 선례가 있었던 만큼 벨의 딸이 엘리사와 멜리사의 능력에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적응된다면 오히려 상황은 밝아질 수도 있었다. 그저 아이들의 능력이 변덕을 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개체들이 자연사 한다면, 정신은 오두막으로 갈까, 아니면 어디로 갈까?
능력을 가진 개체, 그리고 능력과 신약을 투여 받은 사람에게 죽음이란 개념은 모호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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