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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꼭두각시의 칼 15~16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2.02 02:43:49
조회 274 추천 11 댓글 5

1~14화





30.


"...새벽에 똥구덩이에서 구르기라도 한 거예요?"


"아...네."


"그리고 그걸 저보고 믿어달라고 하는 건지..."



침대에 누워있는 한나는 안나의 말을 믿지 않았고,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말을 믿었다.  지난 새벽, 미로같은 하수구를 지나 해변의 숲에서 약초를 캐왔다는 것은 안나가 다녀왔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였고, 자연스레 배어든 오물의 악취는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하지만 한나는 믿지 않았다. 체격과 체력의 차이가 존재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상처와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하수구를 배회했다는 것은 어느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안나를 치료한 크리스토프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천재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한나, 꼭 다쳤다고 누워있어야 하는 법은 없어요. 인대가 늘어나면, 붕대를 묶어 임시방편으로 응급처치를 할 수도 있죠. 그리고 난 고아원에서도 심심하면 벽을 타고 린든 곳곳을 돌아다녔죠. 그렇지?"


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크리스토프를 힐끔 쳐다봤다.


"린든의 지붕은 거즘 안나가 지배했었지. 암... 아주 그냥..."


"과장하지 말고."


과장이 아닌 사실이라고 생각해 언짢은 표정을 지은 크리스토프를 뒤로 하고, 안나는 한나의 손을 잡으며 왼쪽 손등을 확인했다. 새 약초로 만들어진 화상 크림은 아웃사이더의 표식도 감쪽같이 숨겨냈다. 주기적으로 발라야 효과가 있다는 단점이지만, 장갑이나 천으로 묶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어색하지 않았다.



"한나, 어제 있었던 일 기억해요? 제가 당신을 업고 지붕을 뛰어다녔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남들이 보기엔 '아, 저게 가능해?'라고 했던 일을, 저는 제 몸을 통해서 가능하게 했을 뿐이라구요."



한나는 자신의 손을 꼭 쥔 안나의 두 손을 물끄럼이 내려봤다. 한나의 창백하고 부드러운 손에 비해 안나의 손은 때가 묻어 어두웠고, 투박했다. 한나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주시자들이 물자를 보내는 장소와 약초가 있는 장소가 우연히 겹쳐졌을 뿐이리라. 모든 행동과 사건을 검증하려면 한나 자신부터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이었다. 한쪽은 반란과 폭동, 다른 한쪽은 혁명과 운동으로 기억될 사건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겁이 많은 주시자,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스키아보나 한 자루만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 주시자가 바로 한나 자신이었다. 린든에 있어 가히 이질적인 지위를 가진 자신에게 한 치의 의심을 가지지 않은 안나가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알...았어요. 믿어줄게요. 으...좀 씻고 와요."


한나가 부산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안나는 그제서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어깨와 팔을 코에 가져가며 큼큼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안나, 이 분 말이 맞아. 여기 욕실 열쇠야, 입을 옷은 내가 빌려줄 테니까 좀 씻고 와. 다른 건 이따가 얘기하자."


크리스토프가 가운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놋쇠 열쇠 하나를 안나에게 건네주었다. 열쇠를 손에 쥔 안나가 허리춤에서 스키아보나를 뽑아 한나의 침대 옆에 비스듬이 세워놓았다.


"그럼 신세 좀 질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나는 위층으로 우당탕 소리내며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전 언제쯤 나을 수 있을까요?"


안나가 사라진 계단을 보면서, 한나가 크리스토프에게 넌지시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안나가 약초를 가져다 줘서 여분의 진통제를 만들 수 있게 됐어요. 안나는 바로 퇴원해도 되지만... 당신은 하루 정도 더 차도를 지켜봐야 해요. 아,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선 치료부터, 숙식까지 모두 공짜니까."


"그렇게 해서 배가 부르겠어요?"


날이 섰지만 걱정의 범주에 속한 말이 한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크리스토프는 멋쩍이 웃으며 안나가 세워놓은 스키아보나를 들어 날을 확인했다. 거칠게 다룬 탓인지 손잡이부터 날까지 안 무뎌진 곳이 없었다. 한쪽 서랍에서 숫돌을 꺼낸 크리스토프는 조제대 앞 스툴에 앉아 칼을 갈기 시작했다.


"당연히 항상 배고프죠."


"지금 제국에는 의사 한명 한명이 중요한데.... 밖으로 나가볼 생각은 없죠?"


"글쎄요. 그런 마음이야 자주 들곤 했죠. 하지만...여기가 내 집이고, 내 터전이고, 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어서."


스르릉, 스르릉, 창밖의 햇살이 칼에 갈려 나오는 희미한 돌가루를 푸석한 공기에 섞어내며 의원 안을 밝게 비췄다.


"사실, 다른 게 필요하다면 제 뒤를 이어줄 의사가 전부예요. 이 의원을 운영하는 건 사실 봉사직에 가깝고, 아무도 하려고 들지 않거든요. 더군다나 지원은 매티어스 아저씨의 고아원이 전부고... 아, 때마침 저기 오네요. 잠시만요."


크리스토프가 숫돌과 스키아보나를 내려놓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한나는 크리스토프가 왜 행동을 멈추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를 따라하듯 먼지로 얼룩진 창밖을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크리스토프가 가운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의원의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아저씨!"



크리스토프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님을 반겼다. 한나는 그의 말을 토대로, 지금 의원 밖에 있는 사람이 린든에서 몇 안되는 불가침구역 중 하나인 고아원의 운영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 크리스토프. 그간 별일 없었지?"


크리스토프를 따라 들어온, 낡은 제국의 녹색 군복을 입고 들어온 흑인 노인은 청년인 크리스토프에 비견할 만큼 정정했다. 그리고 거뭇거뭇 입가에 피어난 수염은 그에게 인자함을 가중시켰다.


"별일이 없지는..,않았죠. 안나가 찾아왔고... 여기, 안나의 새 친구 되는 사람이예요. 시트라, 여긴 매티어스 아저씨예요. 이 의원을 후원해주는 은인이죠. 아저씨, 이쪽은 시트라예요."


"시트라라... 아렌델 출신이 아닌가 봅니다. 어디보자..."


매티어스가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문밖을 향해 손짓하자, 이내 앳된 사내와 소녀들이 저마다 상자를 하나씩 들어 의원 안에 들여놓았다.


"서코노스 출신인가?"


서코노스는 아렌델 군도의 옆에 위치한 또다른 섬이었다. 서늘한 기후가 주인 아렌델과는 다르게 햇살이 장렬하는 곳이었다. 한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심문하는게 아닐까?


"네, 정확히는 서코노스에서 아렌델로 향하던 배에서 태어났지만요..."


이중 국적이로세, 매티어스가 껄껄거리며 웃어넘겼다. 크리스토프도 덩달아 웃었다. 한나는 그들의 개그코드를 이해할 수 없어 멋쩍이 웃어보였다.


"그리고... 안나가 여기 있다고? 어디 다쳤니?"


"아뇨, 정확히는... 시트라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죠. 다만 약초 재고가 딸려서 심부름을 시켰어요. 지금은 씻고 있겠네요. 또... 벌린턱 갱단원이 찾아왔어요. 안나를 노리는 것 같은데..."


"그들이? 왜? 지금 어디에 있지?"


매티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린든에서 활동하는 갱단들이어도 건들지 않는 건물, 그리고 사람은 존재했다. 그런데도 건들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안나하고 제가 다 때려눕혔고, 잠시 귀 좀..."


크리스토프가 매티어스에게 귓속말을 했다. 한나는 왜 그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상자를 들고온 아이들이 가까운 문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묶어서 강에다 던져버렸다'라고, 한나가 들었던 말을 해주었을 것이었다. 한나는 그래도 아이들이 추측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제국의 썩은 고름이 뭉친 곳이 바로 린든이니까. 크리스토프의 귓속말을 들은 매티어스는 아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느긋하던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안나는 여기에 더 있기 힘들 것 같구나."


매티어스가 입을 뗐다. 린든의 수많은 갱단 중에서, 유독 크고 질긴 벌린턱이 안나를 노리고, 역병이 생과 사를 희석시키는 이 시국에선 이성이 논리를 지배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저씨 말이 맞아요. 어젠 거의 여길 부수려고 했다니까요."


크리스토프가 어제 교체하고 한쪽 구석에 세워둔 유리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전에는 밀수를 통해서 성인이 된 아이들을 린든 밖으로 보내곤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린든 밖을 나가는건 사실상 불가능해. 숲으로 간다 해도 가까운 항구도시인 던월까지만 해도 30km나 될 텐데, 우기의 달인 지금으로썬 강해지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는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지."


"어떻게든 안나를 숨겨야 벌린턱이 행동을 멈출 텐데요... 그런데 대체 왜이리 난리들일까요?"


크리스토프의 말에 매티어스는 자신도 모르겠다는듯 수염을 매만졌다. 매티어스가 한나에게 시선을 옮겼지만, 한나의 기억엔 괄목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안나 씨가  다른 사람들보다 싸움을 잘하고 기민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리고 음... 안나 씨하고 벌린턱 갱단하고 시비가 붙었던 거...같아요."



겨우 곱씹어낸 생각을 뱉어내자면, 안나의 체력과 운동신경이 체격, 그리고 다른 이들에 비해 유독 두드러졌다. 이것만 본다면 단순한 조직의 영입 제의일 테지만, 처음 안나를 만날 때 자신을 범하려한 그 자들이 벌린턱의 똘마니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 전에 해체장에서 싸움이 있었다고 했으니... 하나의 확증과 심증이 어우러져 한나의 말에 힘을 실었다.


"일단 안나에게 얘길 들어야겠구나."


"그 앨 혼내실 건가요? 좋은 생각이 아닌거 같은데요."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매티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 아이가 심부름을 하다 검술 대회가 적힌 포스터를 가져왔다더구나. 1위부터 3위까지 매긴다던데...  어쩌면 안나가 린든 밖에서 살 구실은 마련할 수 있을 터..."


매티어스는 입을 떼며 덩달아 현재는 귀족들의 가면사로 에버튼 가에서 살고있는 메가라를 떠올렸다. 메가라와 같이 살면 되겠다지만, 안나의 입장을 들어보는게 더 중요했다.


"그 애의 삶에 새로운 선택을 주자꾸나."


"근데 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하수구가 린든 밖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시트라 양,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언제쯤 린든에 들어온지 알 수 있을까?"


"3일 전쯤에 보트 하나를 타고 이곳으로 왔어요."


반쯤 맞는 말이었다. 배가 조금 더 크고, 대신 배를 몰아준 이름모를 주시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주시자임을 지금 털어놓는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린든 내엔 주시자들의 의식들로 인해 직간접전인 피해를 받은 조직이 여럿 있었고, 그 중 가장 큰 벌린턱이 자신을 효수할 게 분명했다. 아쉽지만 지금 얘기할 사항은 아니었다. 모두의 입이 무거울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그거 듣던 중 다행입니다. 혹시 우리 안나를 데려다 줄 수... 있겠지요?"


한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안나가 나간다면 정식으로 고위 주시자의 상징이 새겨진 보석을 통해 나갈 것이고, 안나에게 얕은 거짓말로 얼버무리면 그만이었다.


"그럼 더 만날 이유가 없어지겠구나.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마. 크리스토프, 혹여나 벌린턱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얘기하렴. 내가 손을 써볼 테니."


"아, 저기... 매티어스 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매티어스를 한나가 불렀다. 매티어스는 다시금 인자한 웃음으로 한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목검을 만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안나 씨가 최근에 목검을 부러뜨린 모양이예요."


매티어스는 그제서야 한나의 침대에 비스듬히 세워진 이빨빠진 스키아보나를 바라봤다.


"그 전에 잠깐, 저건 어디서 난 건지 이 노인네에게 말해 줄 수 있겠나?"


한나는 속으로 아뿔싸! 비명을 외쳤다. 전직 군 장교였던 그로썬 주시자들이 쓰는 칼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저 칼은 절 낙인찍으려고 했던 주시자 거였어요...."


한층 어깨를 움츠려들었고, 목소리를 줄여가며 한나는 말했다. 연기에 재능이 있진 않았지만, 주어진 임무의 무게는 한나를 린든이라는 소설 속 조연처럼 자연스레 연기를 불어넣었다.


"아, 낙인... 정말 잔인한 제도죠. 안심해요, 낙인이 있든 없든, 여긴 주시자의 영향이 미치지 않으니까, 지젤, 토미? 검을 여기에 두렴."


다행이게도 매티어스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은듯 했다. 이단으로 지목된 자에게 찍혀지는 낙인은 살아도 산 게 아닌, 바깥에 나뒹구는 우는 자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편도 티켓이었다. 낙인이 찍혀진 자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며, 이단자를 돕는 것 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이단자의 낙인이 어떤지 잘 알고, 이해하는 그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 중 두 명이 차고 있던 목검을 조제대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 안나가 싸웠던가? 보았다면... 어땠나. 충분히 나갈 수 있을 테지?"


문을 열려던 매티어스가 지금 막 떠올린 듯, 한나에게 물었다.


"최고였어요."


한나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이 담긴 대답을 확신에 차 말했다.









31.



"매티어스 씨께서 오고가셨다니, 별일이구나."

"목검도 선물해 주시기까지 하셨어요."


안나는 벨의 흥신소 1층에서 벨과 마주앉아 있었다. 방관자에 대한 것들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를 나눈 안나는 벨이 왠지 모르게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고있다 생각했다. 벨의 옷자락은 희미하게 먼지로 변색되어 있었다. 먼지판에서 구르기라도 하셨을까? 안나는 한나의 말을 인용해 생각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나간다니, 아줌마는 슬프구나. 대회도 나갈 거라니..."


"지금 여기선 우리 엄마를 아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고, 있다 하여도 거즘 돌아가셨을 것도 같아요. 엄마가 남긴 건 목걸이가 전부인데..."


안나는 벨의 눈치를 살폈다. 벨은 퍽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만약 역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안나는 사무소의 에이스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병이 언제까지 인재를 잡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매티어스 아저씨도 모르신 것 같으니까, 발을 넖혀야죠. 그리고 돈도 좀 벌고..."


어머니를 죽인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것을 넘어, 안나는 자신의 인생 계획을 좀 더 명확히 하기로 했다. 정보가 모이지 않는 린든을 벗어나 검술대회에 참가해 순위권에 드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순위권부터는 상금이 주어지므로 상금을 얻음과 동시에 귀족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대중들에게 안나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수행원이 되어도 좋겠지.'


"안나, 그래도 많이 변했구나."


문득 벨이 말했다. 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방관자의 낙인이 자신도 모르게 장난을 친 것일까? 여지껏 생각해 보지 않았던 복수 이후의 삶을 드러내는 텅 빈 화폭에 미약하게나마 스케치가 덧입혀졌다.


"엄마가 제 복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계획없이 사는 건 싫어하실 거예요."


"맞아. 내가 그렇게 떳떳한 부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안나 네가 걱정된단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안나가 린든을 나갈 생각을 해주니까."


"섭섭하지 않으세요?"


"당연히 섭섭하지 않겠니? 이 역병만 아니었으면 좋았을 걸... 하지만 네 의지인데 어떡하겠어. 짐은 언제 쌀 예정이니?"


"챙길 짐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이예요. 크리스토프 오빠가 가방을 하나 빌려 줬어요. 보세요, 여기에 제 짐이 다 들어갈 거예요."


안나는 발밑 언저리에 자루처럼 놓여진 낡은 갈색 배낭을 들어보였다. 고아원에선 물건을 고루 공유해서 썼으므로, 고아원을 나온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안나에게는 아직까지 재물의 사유화라는 개념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욕망을 느끼지 못했다. 탐욕이 아닌 생존욕에 가까웠다.


"한나 씨는 어떻게 할까?"


"음... 당분간 제 방에서 지내게 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따 저녁에 한 번 지붕에 올라가서 전갈이 왔나 확인해 봐야 그 사람이 방세를 지불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가름할 수 있을 거예요."


이윽고 정적이 찾아왔다. 집안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안나가 반사적으로 목검을 쥐었다.


"아냐, 안나. 잠깐 환기 좀 시키려고 창을 열어 놨단다. 저기 보이니?"


벨에 가리키지 않아도, 안나의 시선은 부엌 찬장 옆에 나있는 열려진 창문에 가 있었다. 이제 좀 닫으셔야죠. 안나가 부엌으로 가 창문을 닫았다.


"주시자들의 포교 활동으로 이곳이 얼마나 달라질지 궁금하네요."


안나가 원색적인 질문을 허공에 던졌다. 제국 전역에 걸쳐 있는 '주시자'란 단체는 종교 단체였지만, 그 앞에는 한 가지 문구가 더 들어 있었다. '무장'. 그들은 모종의 경로로 부모를 여읜 아이들을 수도 외곽의 건물로 데려가 수개월에 걸친 혹독한 학습을 통해 주시자가 된다고 들었다. 그들의 계명에는 절제가 들어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절제되지 않은 잠재된 폭력이 드러나는 것 같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시간에, 예산 낭비지. 하지만 아무렴 어떠니. 우리에게 역병을 버틸 물자를 지원하겠다는데."


"그 지원이라는 것도 좀 두루뭉실해요. 설마 돈으로 주진 않겠죠? 화폐가치가 떨어졌는데..."



안나가 번개처럼 갈라진 테이블의 한쪽 모퉁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역병은 이곳에서만 있는 게 아니란다. 안나,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만, 병은 차별하지 않아."


"그것도 맞는 말이고요... 음, 이제 한 번 올라가 볼게요. 물품이 왔다면 하수구를 좀 들락거려야겠는데... 물자를 옮기고, 씻고, 그 다음에 짐을 쌀게요."




벨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하수구를 통해 들어간다 해도 벨은 불안하지 않았다.  복수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내지 못할 일들을 이뤄내는 기름과도 같았고, 린든의 하수구 경로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안나가 들어갈 하수구는 암살자들이 들어온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기에, 나름의 여유를 유지할 수 있었다.







32.


"구구...착하지."


지붕에서 거의 불이 다 꺼진 빈사 상태의 린든, 그에 비해 불빛이 넘쳐 바다로 흐르는, 이틀 뒤면 검술 대회가 벌어질 커보울 가의 건물들은 심히 대조적이었다. 도시의 불빛에 비쳐진 다닐라의 눈은 채 저물지 못한 노을의 여명에 섞여 오묘한 색을 지녔다. 구국 구국, 다닐라가 안나의 한쪽 손에 들어있는 땅콩 부스러기를 부리나케 쪼아대었고, 안나는 이상하리만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예의 그 전서구의 발목에 묶여진 쪽지를 꺼내 노을에 비춰 읽었다.




오늘 자정, 해변가의 숲에서 물자를 실은 주시자의 보트가 정박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안나는 숙지한 다음, 부스러기를 다 먹은 다닐라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뒤 하늘로 날려보냈다. 다음에 다닐라를 반길 이는 원래 주인인 한나일 것이다. 고작 며칠이겠지만, 안나는 린든을 벗어나 있을 것이었다. 안나는 엎어지듯 지붕에서 떨어져 난간에 한번 걸터앉고는 다락방에 들어와 사다리식 계단을 타고 내려와 방에 들어왔다.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좋게 쳐줘서 검소한 안나의 방이었다. 안나는 배낭을 열고 가장먼저 꽁꽁 숨겨둔 룬을 찾아 넣기로 했지만, 문득 방관자의 발언을 떠올렸다. 룬과 교감이 통하면 초인적인 힘을 준다고 하였고, 그로인해 얻은 능력은 방관자가 직접 준 점멸이 아닌 빙의 능력이었다.


'차라리 지금 교감시키는게 낫겠지...'



묘사하자면, 룬은 희미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리듬이 적절히 배어진, 그러나 매혹적인 작은 노래였다. 검술 대회에서 물건 검사를 할 수도 있고, 룬을 걸린다면 이단자의 낙인이 찍혀 평생을 비참하게 보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남겨두기엔 벨에게 들켜 똑같은 결과를 마주할 것이고, 은근슬쩍 버리자니 방관자의 존재가 행동의 발목을 잡았다. 안나는 어떻게 룬과 교감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언제 또 방관자를 만나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나마 가장 방관자에 가까운 사람인 넝마 할멈을 찾아가야 할 판이었다.


"...내일 물어보자. 내일."


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룬을 배낭 가장 밑부분에 쑥 밀어넣었다. 여러 짐들을 배낭에 욱여넣은 뒤 마지막으로 안나는 목걸이를 배낭의 한쪽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곧 있을 검술 대회는 가장 자연스러운 몸의 상태에서 치루고 싶었다. 유품의 지위가 있지만, 린든의 담장 밖으로 나가려는 안나에게는 미지수의 장애물이었다. 목걸이가 들어있음을 표면의 가죽을 더듬어 확인한 안나는, 이내 자신이 머물렀던 방을 한바퀴 둘러봤다. 한나의 주시자 제복을 제외하자면, 안나의 흔적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아줌마아!"


안나는 방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갈게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안나는 이 건물 어디선가 벨이 안나의 작별 인사를 들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낭을 매고, 안나는 힘껏 난간을 딛고 건너편 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33.



크리스토프의 의원에 도착해  숨을 돌리기도 전에, 안나는 곧바로 하수구로 내려갔다. 방관자의 능력을 쓰면 한결 쉬울 테지만, 주시자의 물자 보급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변가의 숲일 것이었고, 미로같은 하수구에 한나가 알아볼 법한 표식을 남기고 우는 자들을 처리해야 했다. 크리스토프가 다시 날이 선 스키아보나를 권했지만, 안나는 부러진 목검과 새 목검을 가져왔다. 방관자의 '암흑 시야'를 통해 우는자들의 분포를 파악한 다음, 조심스럽게 뒤로 접근해 멀쩡한 목검으로 우는 자의 목을 내리쳤고, 그마저도 빗나가면 부러진 목검으로 숨을 끊고 하수구 저 깊은 곳으로 던져버렸다. 역병 초기,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정신은 오락가락하는 우는 자들을 두고 린든은 동정심 반 적대심 반으로 대부분을 하수구로 밀어넣었다. 개중에는 우는 자들을 돌보기 위해 스스로 하수구로 들어간 가족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감염되어 죽은 자보다 굶어 죽은 자들이 더 많아요.]


심장이 어렴풋이 안나에게 속삭였다. 정답이었다. 느끼지 않으려 해도, 돌멩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들은 조각난 뼛조각들이었다. 안나는 우는 자들에 관해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았다. 아직 자신과 친한 이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명백히 선을 그었다.  어디선가 우는 자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안나는 한나를 위해 야광 분필로 표식을 남긴 다음, 건너편에 있는 우는 자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34.


해변가의 숲은 바람을 제외한 모든게 죽어있는 것처럼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해변에 작은 보트 한 척이 정박되어 있었고, 주시자로 보이는 남색 제복 차림을 한 두 사람이 보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주시자?"


안나가 그들에게 물었다.


"다닐라의 친구인가?"


한나는 급하게 나가려는 안나를 붙잡고, 주시자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군임을 확인할 때 상대방의 전서구 이름과 색을  질문한다고 말했다.


"네, 맞는데..."


"무슨 색이었지?"



"갈색 !"


주시자들은 가면을 쓰고 있어 딱딱한 기계같은 인상을 주었다. 안나는 그들이 안나를 훑어보며 같은 주시자인 한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거라 판단했다.


"한나랑 닮은 구석이 존재하는군. 부모님은 어디 태생이시지?"


"모두 안 계셔서 잘 모르겠는데요..."


본의 아니게 좋지 않은 질문과 답을 주고받은 주시자와 안나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주시자가 주시자의 어깨를 툭 치고 보트로 돌아갔다.


"혹시 혼자서 짐을 가지려고 온 건가? 한 사람 분량이 아니야. 몇 번 왕복을 할 수도 있어. 아니면 장소를 바꿔야 할 텐데..."


"여기로도 충분해요. 이 이상 가까이 오면 당신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안나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고, 주시자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다닐라를 통해 안나가 한나의 조력자임을 확인했지만, 린든은 공권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미지의 동굴이었다. 린든의 지도는 현재 남아있지 않았고, 수백 년 전의 어느 고문서에 희미하게 남은 그림 속 삽화로 묘사되고 있었다. 지금의 린든은 옛날과 분명 다른 게 많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린든 외부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수구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치워 놓았어요."


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주시자가 안나에게 큰 상자를 하나 들려주었고, 이내 자신들도 상자들을 하나씩 들었다.


"이런 말 하기엔 늦었지만, 혹시 감염이 되거나 그러진 않았겠지?"


"아마 제가 린든에서 제일 건강할 걸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벌린턱 갱단원과 싸우다 전치 며칠 정도의 부상을 입은 안나는 방관자와의 대면 이후로 모든 부상이 회복되었다. 역병의 매개체인 쥐나 우는 자들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접촉을 했음에도 멀쩡했다.


"그럼 어서 가자고. 난 한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불안하면서, 불쾌함을 가진 목소리가 주시자의 가면에서 흘러나왔다. 안나도 마음 속으로 동의했다.  아무리 청소를 하였더라도, 더러운 건 변하지 않았다.








35.



"린든 바깥은 어때요?"


안나의 말대로, 하수구는 세 사람에게 위협을 가할 요소는 없었다. 이따금 지나는 몇 마리의 쥐들이 신경쓰였지만,  등불을 비추면 재빠르게 도망을 가 접촉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들고 있는 상자 때문에 일행의 걸음 속도는 더욱 느려졌고, 졸졸졸 힘없이 흐르는 하수들의 소리에 불안함은 조금 누그러졌다.


"여기보다 낫지만, 역병은 존재하지. 왕실 주치의 소콜로프가  역병을 이겨낼 영약을 만들어 냈다지만, 그게 정말로 존재하는진 아무도 모르고 있어.  피에로 죠플린이란 정신나간 작자가 자신이 치료제를 만들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더군."


더블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시자가 말했다. 그는 군도의 남쪽에 위치한 서코노스의 카르나카 태생이었다. 열대지방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의 억양은 절제를 유지해야 하는 주시자임에도 시원시원했다.



"피에로? 얼마 전에 학술원에서 쫓겨난 그 괴짜가? 농담이 지나치네.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 마당에..."


카담이라 소개한 그리스톨 출신  주시자가 말했다. 두 사람이 말한 두 문장에서 안나가 알게 된  것은, 린든 바깥에서도 영약의 소재는 모호하며, 벌린턱이 단단히 잘못 짚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갱단이 해체장을 습격한 이유가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또... 검술 대회가 커보울 대로에서 열린다더군. 사실 여기니까 말하는 거지만, 아그나르 황제가 미친 게 아닐까 싶어. 시민들의 원성을 지우려고 대회를 개최한다? 아니지, 근본부터 잘못되었어."


"자네는 참가할 수 없겠지?"


황제를 부정하는 더블린, 그리고 카담이 안나에게 말했다.


"지금 린든과 커보울을 잇는 비드랑 대로는 빛의 벽과 아크 방사탑으로 봉쇄되었어. 잘못 얼씬거리다 도시 경비대의 사격 표적이 되거나, 빛의 벽과 방사탑에 걸려 잿더미가 되거나.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운이 좋군 그래. 때마침 주시자의 조력자가 되어서 이렇게 물자 지원도 받는 게 아닌가?"


그들의 말에 수긍하면서, 한편으로 안나는  한나가 줄 주시자의 보석이 과연 유효할지 의문을 가졌다. 비드랑 대로를 지키는 경비대들은 린든의 시장이 밀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고, 주시자의 보석도 밀수품이라고 판단해 돌려보낼 것 같았다. 안나는 차라리 하수구와 해변가에 흔히 돌아다니는 이빨장어에 빙의해 린든을 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카산드라 고위 주시자님의 말도 이해가 안 가. 어떻게 린든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야? 아니, 자네를 두고 한 말이 아니야."
목구멍에 물꼬가 트인 듯 말을 떠벌리는 더블린이 안나에게 이해를 구하며 말했다.


"여긴 안전한 곳이 두 곳밖에 없다면서? 하나는 고아원, 하나는 우리의 목적지인 의원, 맞지?"


흔들리는 등불의 불빛 속에서 안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갱단이 의원을 습격한 이변 속에서 더 이상 안전한 곳은 고아원밖에 남아있지 않겠으나, 차라리 원래 배급 활동을 하던 의원에서 비슷하게 포교활동을 하면 나름의 보호 작용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다. 사무소와의 거리가 존재하지만, 크리스토프를 동행시키면 한나의 신변은 보장될 것이었다.



의원이 무너진대도, 유일한 의사인 크리스토프를 해치면 그날 부로 벌린턱은 린든에서 발을 디딜 곳이 없어지게 될 테니까. 안나는 구태여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면 주시자들은 운반을 그만둘 것이며, 해변가의 보트에 남아있을 상자의 수만큼 안나가 하수구를 왕복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는 후에 짐을 나를 한나에게도 상냥한 진실은 아니었다.



그들은 두 시간 동안 총 다섯 번 하수구를 왕복하며 상자를 날랐다. 의원 근처 하수구에서 주시자들을 배웅한 안나는 곧바로 씻지도 않은 채로 의원 1층의 침대에 몸을 던졌고, 순식간에 곯아 떨어졌다. 조제대에서 안나를 위해 화상 크림을 만들며 레시피를 적던 크리스토프는 깊이 잠에 빠진 안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시트라의 연줄로 새로운 밀수품이 들어왔으니, 매티어스의 고아원이 짊어질 부담이 줄어들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안나는 방관자를 만나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36.



"거의 도망치듯이...떠나게 되는구나."


잠깐의 토막잠은 그 어느 쾌락보다도 달콤할 것이라 안나는 생각하며 의원의 앞에서 크리스토프, 그리고 부목과 목발을 한 한나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한... 아니, 시트라. 봉사활동 열심히 해요. 오빠, 이 사람 좀 부탁할게."


안나는 목검의 자루 끝을 매만졌다. 검술 대회가 어떻게 진행될 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주시자의 사브레를 가져가 관중의 오해를 사는 것보다 나았다. 만일 진검을 다룬다면 주최측에서 칼 한자루 정도는 내어줄 것이었다.


"그래, 그래. 여기서 시트라 씨와 같이 배급활동을 하고 매일 벨 아주머니에게 바래다 주고... 그게 다지?"


"응, 지금으로썬 그게 전부야."


"안나, 여기 이거..."



한나가 주머니에서 안나에게 손톱만한 보석 하나를 내밀었다. 사전에 말한 고위 주시자를 상징하며, 주시자의 보증 효력이있는 보석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내밀어진 손을 다시 밀었다.


"아마 필요없을 거 같네요. 지금 비드랑 대로가 완전히 봉쇄되서 뭘 하든 못 지나갈 거예요. 빛의 벽, 아크 방사탑에 대해서 알고 있죠?"


안나가 넌지시 물었다. 한나는 크리스토프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고개를 미세하게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소콜로프가 새로 만든 보안 장치들인데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근처에 머물거나 지나가면, 장치에서 발사된 전기가 그 무엇이든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네요. 감시가 강화됐다고 봐야 해서...좀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요.



"그 다른 방법이라면 하수구?"





"하수구이긴 한데, 이번에는 경로를 좀 바꿔서 나갈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해변가 숲으로 가는 길목은 모두 표식을 맞췄으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왕복하기 쉬울 거고."




안나는 한나의 목발을 짚은 한나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린든 바깥으로 나가도 여길 잊지마. 나중에 조금이라도 여길 생각 해줬으면 좋겠다."



"만약 밖에 자리를 잡는다면 내부로 물자를 들이게 사람을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하수구 루트를 새로 알려줄게."


안나는 배낭을 열어 크리스토프가 준 여분의 화상 크림통과 단단히 밀봉된 제조 레시피가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더 주냐 마냐의 문제로 겨우 합의를 본 것은 한 달 분량의 크림 통이었다. 이후에는 안나가 직접 레시피를 통해 크림을 만들어 발라야 했다.



"벨 아주머니가 좀 깐깐하시긴 하지만 뭐... 나하고도 잘 지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안나는 괜스레 풀이 죽은 한나를 안심시켰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이지만, 린든에서 비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어. 오전 중으론 커보울에 가야 하니까."


안나는 근처에 있던 맨홀 뚜껑을 낑낑대며 열었다. 주변에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안나는, 사다리를 줄을 타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몸 조심해요!]


한나의 힘없는 목소리는 하수구의 배관에 증폭되어 안나의 고막을 두들겼다. 안나는 탕탕, 사다리를 주먹으로 두 번 두드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37.



배관을 더듬던 안나는 이내 비드랑 대로 바로 밑으로 향하는 하수구의 해치를 발견했다. 야광 분필로 동그라미를 친 안나는 크랭크 손잡이를 돌려 해치를 열었다. 끼기긱... 배관의 처절한 비명 속에서 열려진 해치로 비릿하고 짠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안나는 해치 안으로 들어간 다음 약간의 고래기름을 해치에 발랐다. 일종의 윤활유의 역할을 맡긴 셈이었다. 내부의 스위치를 누르자 해치는 상당히 조용하게 닫혔고, 안나는 성인 한명 크기와 너비로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배관의 끝을 바라보았다. 방관자의 표식을 이용해 암흑 시야를 발동한 안나는 우는 자와 쥐 떼 같은 위험요소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이도 말라 비틀어진 시체 몇 구를 제외하곤 생물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한 때 제국에서 제일 가는 도시였었죠. 수해 지구 처럼요.]


가방 한켠에 넣어 둔 심장이 말했다. 수해지구, 안나는 그곳의 정확한 명칭을 모르고 있었다. 한 때 제국에서 알아주는 금융 중심지였다는 것만 빼면은. 안나는 무심코 가방에서 심장을 꺼내 배관 앞을 뻗었다. 방관자는 태엽으로 채워진 이 심장이 자신의 룬과 뼈 부적으로 안내할 거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갑자기 심장의 안이 밝게 빛나고, 살아있는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안나는 조급한 걸음으로 나침반을 보듯 심장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렸고, 머지않아 이미 숨이 끊어진 유압 펌프 사이에서 룬 하나와 쥐의 뼈로 만든 부적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 넝마 할멈!"


안나는 그제서야, 넝마 할멈에게 룬의 교감을 물어보기로 했음을 기억했다. 하지만 너무 멀리 돌아온 지금, 다시 돌아가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불확실하지만, 안나는 비드랑 대로 밑을 흐르는 하천에 서식하는 이빨장어에 빙의해 대로를 건너 커보울에 숨어들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회 신청은 오늘 오전까지 받으며, 오후부터 진정한 시합이 시작된다. 능력 중 하나인 점멸을 쓰면 된다지만, 발동 후 찾아오는 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씨발...일단 대회가 중요하니까."


드물게, 안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안나는 신경질적으로 룬과 부적을 가방에 쑤셔넣고, 다시 배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방관자를 떠올렸지만, 덜렁거리는 자신의 성격 또한 유희거리로 생각할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한 안나였다.







38.



"공주님? 게르다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네, 네, 네. 네?"



마치 석고로 만든 듯한 뻣뻣한 청색 장갑을 끼던 엘사는, 문 밖에서 들려온 친근한 목소리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게르다가 들어와도 상관없을 정도로, 엘사는 3일 동안 잠을 줄여가며 사람들이 저주라고 수군대는 얼음을 가까스로 다루는 데 성공...


'성공한 게 맞을까?'


엘사는 방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생각했다. 부자연스럽게 튀어 나온 이불과 담요 더미들 속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눈과 얼음들이 남아 있었다. 난로를 피웠음에도 엘사가 만들어낸 얼음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하지만 3일 전보다 훨씬, 손에서 능력이 튀어나오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아뇨!"


하지만 엘사는 자신의 영역에 게르다를 들이지 못했다. 한심하기도 하지, 엘사는 자책하며 장갑에 얼굴을 묻었다. 장갑의 답답함은 입고 있는 청색 드레스의 안감만큼 두꺼웠다.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무서운 그녀로써 턱밑까지 옷을 여미는 게 최선이었다. 제국의 공주가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서코노스와 그리스톨의 영주와 공작들의 비웃음을 살 게 뻔했다. 그리고 오빠인 한스와 아버지인 아그나르가 그녀의 정신을 빼 놓을 만큼의 호통을 칠 것이란 것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가족의 호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속이 울렁거렸다.


"거의, 거의 다 준비했어요. 게르다, 마차를 준비해 주시겠어요?"


아무것도 먹지 않아 속이 비어있음에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입을 들어막으며 엘사는 참아내었고, 가까스로 게르다에게 말했다.


"네, 공주님. 경호원을 대령할까요?"


문을 사이에 두고 제국의 공주와 얘기하는 시종 게르다의 입에는 안쓰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왕가의 사람들은 엘사를 거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왕실 사람다운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따금 카이가 왕가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고, 엘사 공주가 '왕족'이라는 지위를 겨우 유지시키게 도와주는 사람은 게르다와 시종 몇 명, 그리고 성과 영지를 보호하는 하급 경비원 수 명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경호원을 맡아줄 실력과 매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아뇨, 괜찮아요. 제 몸은 제가 지킵니다. 어서 마차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여느 때처럼 종을 울려주세요."


게르다는 엘사가 보지 않음에도 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나선형 돌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왕족이기에 마차가 있는 게 당연하지만, 온갖 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마차가 아니란 것을 처음 엘사의 성에서 일을 시작한 게르다는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공주님의 수호경을 뽑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소문 때문에..."


엘사를 둘러 싼 무섭고 기괴한 소문들은 사실 허상에 불과했다. 성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게르다는 이따금 엘사 공주와 마주쳤지만, 그녀의 성격이 냉철하다거나, 손으로 얼음을 부릴 줄 안다는 것들은 모두 거짓에 불과했다. 게르다 눈에 비친 엘사 공주는, 울상을 짓고 있는 아름다운 꼭두각시 같았다. 왕가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고, 귀족들의 멸시를 받는 공주. 게르다는 누구라도 좋으니, 엘사 공주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의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39.




'느낌이... 영...'



물 속을 헤엄치는 안나는 자신의 물건들이 빙의 능력에 맞춰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빙의된 생물인 이빨장어 특유의 끈적거림에 불편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빙의를 풀고 수영을 했다간 대로 위의 경비대에게 들켜 벌집이 되거나,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시자들에게 잡혀 이단자의 낙인이 찍혀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나는 조금 뒤, 비드랑 대로에서 한참 떨어진 바위산에 다다를 수 있었다.



빙의를 풀고 옷과 가방이 젖지 않았음을 확인한 안나는 암흑 시야를 발동시킨 채로 근처에 걸려진 사슬을 타고 다람쥐처럼 올라갔다. 검술 대회를 관람하기 위한 것일까, 눈앞에 펼쳐진 거리는 온갖 잡초와 이끼, 녹이 슨 린든보다 훨씬 더 간결하고 깨끗했으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올라온 난간의 근처에도 경비대는 보이지 않았다.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쉰 안나는 곧바로 가방을 고쳐매고 일어섰다. 그리고 대회 개최지인 아름드리 광장을 찾기 위해, 커보울이라는 새로운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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