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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21

ㅇㅇ(14.32) 2021.02.18 00:27:59
조회 468 추천 23 댓글 8


대왕 현퀘 해치우고 오느라 늦었다...ㅜ 담부턴 많이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얘기하거나 공지할게...


그래도 큰현퀘 끝내놔서 앞으론 7-10일마다 한 편씩 올릴 수 있을것같다!! 이대로 완결까지 열심히 달려야지ㅎㅎ



혹시 까먹었을까봐 지난 화 요약: 안나가 엘사한테 물림


처음은 안나 시점!


-----------------


레스토랑과 가까워지자, 엘사는 태엽이 풀린 인형마냥 느릿느릿 멈춰 섰다.


“여긴, 저번에......”


평소보다 더욱 낮은 채도의 목소리가 경종을 울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는 곳이에요?”
“그렇긴 한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어요?”
“그냥 좀, 같이 왔던 일행 생각에... 아니, 괜찮아요. 어서 들어가요.”


일행? 별안간 호기심이 솟구쳤다. 가족은 아니겠고, 그럼 친구? 아마, 나를 제외하면...... “올라프?” 내가 추측했다. 그러자 엘사는 흑역사라도 마주한 표정으로 나를 훑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친구가 더 있단 말야? 충격이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지? 아니, 잠깐 기다려 봐. 전제부터가 잘못된 건? 애초에 이런 곳에 함께 올 사람이라면...... 아아, 설마!


“애인?”


엘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진짜?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그런데 왜 나를 자꾸 힐끗거린담? 갑자기 심장이 팍 쪼그라들었다. 혹시, 찔려서? 아직도 사귀고 있는 거 아냐? ...이 배신자(?)!


“지금도 만나요?”
“지,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게다가, 애인이라고 말할 사이까지는......”
“‘까지는’?”
“그, 그러니까, 데이... 아뇨, 그냥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는 사람!”
“‘아는 사람’? 왜 단어가 조금씩 바뀌지?”
“그게, 허기져서 그런가, 말이 자꾸 헛도네요... 잠깐, 왜 제가 일일이 해명해야 하는 거죠?”


맞네, 이럼 꼭 내가 캐묻는 것 같잖아? 나는 웃음을 뿌리며 급히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하, 하하.


“해명이라뇨,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건데. 여튼 식당 문제는 아니란 거죠? 들어가도 괜찮겠어요?”
“네에......”


그래,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어디랑 누구서 하고 뭘 다녔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다소 쭈그러든 대답을 뒤로 하고, 레스토랑을 향해 발을 옮겼다. 잘 하는 짓이다. 언제부터인가 미간(왠지 모르게 주먹도)에 실린 힘을 풀며 내가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전까진, 아니, 생일 하루만이라도 좀 친구답게 굴면 안 되겠어?


그러나 곧바로 반박이 접수됐다. ‘여기까지 와서 내내 친구 노릇만 하다 간다고? 말이 돼?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셈이야? 이런 날 좋은 인상을 심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그런가? 하지만 부담스러워하면 어쩐담? ‘정 내키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만회한다고 생각해!’ 내 이미지가 어떤데?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예약하셨습니까?”


내면의 아우성과는 다른 목소리에 퍼뜩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연미복을 갖춰 입은 직원이 내게 묻고 있었다. “안나 차일드, 2명이요.” 그가 천천히 목록을 훑어 내렸다. “차일드... 차일드...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자리로 안내할 사람을 소개했다. 티아나였다. 너희 테이블은 오늘 내 담당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내게 윙크를 보냈다.


“오늘 굉장한데? 특히 드레스가.”
“고마워, 커튼이지만 말야.”


내가 볼멘 채 대꾸했다. 안나, 제가 오는 내내 사과했잖아요! 엘사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어쭈, 사과? 그 말을 듣자, 안전핀이 팅하고 튕겨나갔다.


“사과라구요? 설마 ‘농담은 아니고 진담’이라고 한 게?”
“하지만 색감도 재질도 똑같은 걸요.”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티아나, 네가 듣기에도 저게 사과니? 아니지? 확인사살 맞지?”
“실제로 보면 무슨 말인지 이 분도 이해하실 거예요.”

“끝까지, 정말!”


티아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아옹다옹하는 우리를 말없이 예약석으로 몰아넣었다. 벽난로 바로 옆자리였다. 이렇게라도 우리 분위기를 녹여보려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의 프로정신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배려가 무색히, 엘사는 자리에 앉아서도 끝끝내 조동...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제 말은 이상하단 게 아니라, 매력적이란 뜻이었어요. 뭐랄까, 데이트에 입고 나오면 좋을 것 같은......”


뭐? 설마 들켰나? 하지만, 이럴수록 침착하게 받아쳐내야지. 애써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아, 경험에 기반한 추측?”
“누구? 저요?”
“혹시 무심결에 겹쳐보신 게 아닌지? 저번에 데이트하러 왔었다며.”
“......저희 주문부터 하면 안 될까요? 메뉴 좀 보여주시겠어요?”
“지금 말 돌린 거예요?”
“여기 있습니다.”


티아나가 짐승싸움이라도 말리듯, 우리 둘의 시선이 부딪치는 가운데에다 메뉴판을 건넸다. 하지만 겨우 이런 걸로 내 흥분이 사그라질 것 같아? 길 잃은 감정이 사방팔방 스파크를 일으키다, 망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부정을 안 한 거 보니 내 말이 맞나 봐? (확신) → 기껏 데려왔더니 다른 사람 생각이나 하고! (분노) → 그럼 은연중에 나랑 비교했단 거잖아! (급발진) → 앞에 있는 사람이 나라서 아쉽단 거야, 뭐야! (걷잡을 수 없는 폭주 시작)


“저기, 안나......?”


그래, 가게 앞에서부터 수상했어! 간판만 봐도 아련해지나봐? 그럼 뭐해, 이미 헤어진 걸! 아직도 잊지 못한 건가? 이러다 오늘 밤에 다시 연락하는 거 아냐? ‘잘 지내?’부터 시작해서, ‘오늘 우리가 자주 갔던 어쩌구, 이제야 너를 이해할 수 있더라 저쩌구.’, ‘늦었지만 고맙고, 전부 미안했어.’, ‘너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 ‘혹시 한 번만 더 시간 내 줄 수’......


“안나!”


티아나와 엘사가 동시에 나를 불렀다.


“왜, 왜요?”


내가 뭘 했담? 혹시, 상상을 죄다 입으로 내뱉고 있었다던가?


“네가 우리 가게 메뉴판을 반으로 잡아 뜯으려고 해서요.”


티아나가 대신 답했다. 어떡해, 몰랐어! 나는 당장 메뉴판에서 손을 떼고, 미안한 마음에 연신 쓰다듬었다.


“그런다고 다시 가죽이 붙을 것 같진 않은데요.”
“안... 안 찢어졌어요!”
“식전 마술쇼라도 준비한 거야?”
“안 찢어졌다니까!”


안나...... 엘사가 또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엔 간절한 음성이었다.


“절대. 절대로 제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괜찮으면 오늘은 반씩 부담하는 건 어떨까요? 메뉴판을 찢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저도 가격에 살짝 놀라긴 했어요, 네. 아무래도 편하게 얻어먹기에는 약간......”
“뭐? 아니, 안 돼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우리 이러지 말고 어서 골라 봐요, 네? 이, 일단 한번 볼까? 전식은 어떤 게 좋아요? 크리스마스니까, 그라블락스? 광어가 들어간 타르타르도 괜찮겠다, 겨울이잖아요! 맞다, 여기 파테 맛있어요! 어떤 게 좋아요?”
“오늘은 마음만 받을게요, 응?”


나는 꿋꿋이 다음 장을 넘겼다.


“아하, 하, 다 맛있을 것 같아서 고르기가 어렵죠? 그럼 본식부터 생각해볼까요? 크리스마스 특별메뉴로...... 흠, 랍스터?”
“솔직히 권하진 않겠어, 제철도 아닌데 수요는 많아서 비싸기까지 하거든.”
“그래? 그럼 추천해줄 수 있어?”


티아나가 일러준 대로 나는 오리다리 콩피를, 엘사는 고집을 부리다 (테이블 밑에서 벌어진) 설득 끝에 화이트와인 크림소스를 곁들인 대구를 주문했다.


“알겠습니다. 마실 것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와인은 본식에 맞춰 페어링을 준비했습니다.”
“엘사, 와인 어때요?”
“잊으신 것 같은데 저는 금주 중이랍니다.”
“그래도 모처럼 생일이니만큼...... 아, 미안해요, 사정이 있다고 했었죠.”
“괜찮아요, 듣고 보니 구미가 당기긴 하는데......”


흐음, 엘사는 고민에 잠긴 듯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건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울이 기운 것 같았다.


“아뇨, 저는 미네랄워터로 할게요.”
“그래도 되겠어요?”
“차도 있으니까요.”


“그럼 제가 운전하는 건 어때요?”란 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안나운전이나 음주운전이나 위험도가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와인이야. 괜히 마셨다가 헛소리나 할 게 뻔하지.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로제와인은 포기하기로 했다.


“저도 같은 걸로.”


넵. 티아나는 주문을 받아 적자마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


그렇게 우린 침묵의 한복판에 버려졌다.


뭐지, 이 어색한 분위기는? 내가 먼저 말해볼까? 그러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내겐 긴장하면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특기가 있다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함부로 뽐냈다간 지뢰밭 맨몸돌파나 다를 바 없다는 건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난 두뇌 어딘가에 있을 대화 센서를 자동에서 수동조작으로 돌렸다.


좋아, 차근차근 대화거리를 추려보자. 처음은 무난하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으음, 좀 아니지, 매일 보는 사이면서! 그럼 이건? ‘평소에 쉴 땐 무엇을 하세요?’ 그래, 방금보단 낫네. 그런데 대답을 그지같이 하면 어떡하지? (간단 예상: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럼 주제를 확실하게 정하자. 음, 북클럽에 다닌댔지.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아냐, 이상해, 면접도 아니고! 그리고 막 생각난 건데, 하나같이 첫 만남에서나 꺼낼 법한 질문 아냐? 이럼 안 돼, 취소, 취소!


참담한 심경에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이 내가 할 말이 없다니! 항상 차고 넘쳐서 문제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흘끗 엘사 쪽을 살피자, 마찬가지로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젠 진짜로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어!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첫 데이트 질문? 아냐아냐아냐, 잠시만, 데이트라고? 그러고 보니 그 얘긴 어떻게 된 거지? 이걸 물어볼까? 솔직히 신경 쓰였단 말야! 아니, 이건 정말 별 뜻 없어. 물론 사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친구 입장에서 궁금할 수 있잖아! 그, 뭐야, 연애썰 같은? 아니야? 너무 나갔어?


아, 엄마 보고 싶다. 급기야 눈물이 맺히려는데, 엘사가 조심스레 구원의 밧줄을 내밀었다. “조금 전부터 표정이 계속 어두우신데......”


“혹시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일찍 일어날까요?”


아냐, 제발! 그러지 마! 엘사의 말에 내가 반사적으로 받아쳤다.


“아니에요, 절대! 불편한 게 아니고, 저는, 그냥.......”


어떡하지? 뭐라 한담? 이제와 새로운 변명을 쌓아올리기엔 시간초과였다. 진짜 아픈 척이라도 해야 하나? 아냐, 이렇게 된 이상 부딪칠 수밖에. 하지만 차마 눈을 맞대지 못한 채로 내가 (살짝 가공을 거친) 진심을 털어놓았다.


“실은...... 이미 와봤다니 신경이 쓰여서요.”
“......왜요?”
“말씀대로라면 전애인분과 추억의 장소로 제가 데려온 꼴이잖아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무슨 얘긴지 아시겠죠?”
“그-아니, 애인이 아니라니까, 그냥 밥 한 번 같이 먹었던 게 다에요!”
“그래요? 단지 그 뿐이라기엔 꽤나 사연 있어 보이길래.”


마침 식전빵과 음료를 가져온 티아나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부르르 떨더니 다시 사라졌다. 내가 방금 이를 악물고 말했었나? 아차 싶은 맘에 내가 서둘러 덧붙였다.


“아, 못 믿겠단 뜻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꼈다~ 이런 말이에요.(양심 1패) 설마 이런 걸로 제가 물고 늘어지겠어요?(양심 2패) 응? 나랑 하등 상관이 없는데?(양심 3패로 게임 아웃) ......그런데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죠?”
“글쎄, 사연도 있고 상관도 있죠.”


뭐라구? 갑자기 함정에 걸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더라? 목이 바짝 타 물을 머금은 찰나, 엘사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여기서 분위기 좋게 데이트 하던 중에 장소를 옮기려는데, 절 음해하는 초콜릿걸과 맞닥뜨리고서 파토가 났거든요.”


푸읍, 나는 도로 뱉을 뻔한 걸 겨우 참아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추태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냥 아픈 척이나 할 걸! 사레가 든 탓에 정신없이 켁켁거리는 와중, 추스를 틈도 주지 않고 엘사가 말을 이었다.


“말 나온 김에 묻는데, 대체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그, 그게......”


언젠가 이 순간을 마주할 줄은 알았지만, 하필 오늘이라니! 아직 이런 쪽(?)의 고백에 대해선 준비가 안 됐는데! 아아, 맨정신으론 도저히 못하겠어! 집까지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까 술을 시켰어야 했다. 반쯤 사색이 된 내가 어지간히 안쓰러웠는지,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사가 물었다.


“말하기 어려우면, 제 가설이라도 들어보실래요?”
“......가설이요?”


‘웃는 걸 보니 수상한데’와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 반반 섞인 어조로 내가 되물었다.


“전생에 제가 그 쪽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 죽어서도 원한이 잊히지 않아 다음 생을 기약하는데, 그 날 저를 본 뒤에 비로소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 아닌가요?”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이건요? 실은 당신이 저나 그 분의 후손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미래에서 특수 지령을 받고 타임 패트롤의 감시를 피해 타임머신을 타고와 그 날 저희가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한 거고요. 맞죠?”
“맞겠어요?”
“그럼 제가 도플갱어였다는 설은요? (내 미간이 깊은 빡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 판타지가 별로라면 현대 요소도 있어요. 알고 보니 우리가 어릴 적 둘도 없던 단짝이었던 거죠. 그런데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니 섭섭한 마음에 약간... 짓궂어지신 게 아닐까요?”
“.......제가 잘 이해를 못해서 그런데, 혹시 웃기려고 하는 말이에요?”
“이 중에 없다면 식사가 끝나고 가게 될 곳이 법률사무소일 수도 있어요.”


지금이라도 전생의 원수설을 지지할까 하는 유혹에 흔들렸지만, 더는 거짓말을 늘릴 배짱이 없어 진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나는 먼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서, 뒤늦은 자백을 시작했다.


“사실, 그 날은 말이죠......”


이후 절교 위기의 순간을 실토할 때마다 곁눈으로 엘사의 반응을 살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감고 있어 도무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날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려나? 엄마, 아빠, 못난 모습 보여드려 죄송해요. 저는 이제 전과자가 머지않은 것 같아요. 마침내 고해성사가 끝난 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이러했다.


“타임머신이길 바랐는데.”


어째 여전히 미련이 남은 투였다. 송구하옵니다. 도저히 면목이 없어 애꿎은 접시 위만 바라보며 뉘우쳤다. 엘사는 (드디어) 눈을 뜨고, 그 사이 올라온 본식을 게슴츠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얻어먹을 마음이 드네.”
“더-더 드시고픈 게 있다면 아무쪼록......”


하, 대답대신 기가 차다는 웃음이 돌아왔다. 마, 마음에 안 드세요?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내가 물었다. 그러나 엘사는 예상과 다른 서두를 꺼냈다.


“그냥, 재밌잖아요. ‘그 데이트’를 훼방 놓았던 사람과 설마 ‘그 데이트’ 장소에 마주 앉을 줄이야.”
“그, 그러게요......”
“이런 걸 뭐라 하죠? 등가교환?”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니, 맞죠. 등가교환, 그럼요.”


‘빨간줄’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면 자존심을 버리는 일 따윈 간단했다.


“뭐-뭐든 바로잡을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대신 상대 분께 해명한다거나......”
“나쁘지 않네요.”


그 전에 차단만 안 당했어도 말이죠. 엘사가 (아마 비)웃으며 말했지만, 난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아, 아니면 맞소문을 내는 건 어때요? 알고 보니 웬 미친 여자에게 잘못 걸렸다더라, 어라, 그냥 사실이네. ...어쨌든 귀에 들어가면 다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요?”
“됐어요, 벌써 한 달이나 지난 걸. 신경 안 써요.”
“그래도 오해는 풀어야죠! 그래야......”


......그 여자와 다시 잘 될 수 있으니까? 안 돼!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 입만 뻐끔거리는데, 한 쪽 눈썹을 치켜든 채 엘사가 집요히 물어왔다. “그래야?” 음...... 재빨리 머리를 굴려 대답을 짜냈다.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내 말을 듣고 엘사는 건조하게 웃었다.


“발상이 귀엽네요.”
“호, 혹시 아직 감정이 남아있어서 그런 건가요?”
“남는다는 단어를 쓰긴 사치스럽죠.”


중간에 끊긴 반쪽짜리 데이트에선 특히. 은근히 뒤끝이 실린 어투에 마음이 너덜너덜 하면서도, 내심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그래, 어쨌든 미련이 있는 건 아니라잖아. 아쉬울 틈도 없었다니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고민하던 중, 엘사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아쉽긴 하네요.”


뭐? 놀란 너구리 표정을 한 채로 굳은 내가 웃긴지, 엘사가 빙글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말을 이었다. “가려고 했던 칵테일 바 분위기가 괜찮다고 들어서 궁금했거든요.” ......아까는 신경 안 쓴다며! 게다가 데이트 일정 따윈 알고 싶지 않았다구! 욱한 마음에 순간 반성의 자세를 잊고, 내가 톡 쏘듯 응수했다.


“분위기라면 혼자서도 만끽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다른 곳에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결국은 귀찮은 일에 얽혀서요.”


어련하시겠니. 카운터, 테이블, 그 어디에 앉더라도 다가오는 추파에 쩔쩔맬 상황이 매우 쉽게 그려졌다.


“그럼 다른 사람을 데려가는 건 어때요?”
“있었는데 없어졌다니까요.”


그리고는 “누구 때문에”란 말을 빼먹지 않았다. 맞네, 그냥 가만히나 있을 걸. 말문이 막혀 그저 허공에 눈을 둘소니, 시선이 마주쳤다. 장난기가 번뜩이는 눈이었다. 좋지 않은 징조다. 심장이 (불안감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예 없진 않은 것 같네요.”
“......잘 됐네요.”
“바로 이 후에도 괜찮죠?”
“네?”
“먹고 싶은 게 있음 얘기하라며?”


뭐라고? 이 대목에서 저런 말이 나왔다는 건? 설마, 같이 가잔 소리? ...아니면 지갑만 던져주고 집에 가란 뜻? 쟤가 평소 하는 걸 봐선 왠지 후자일 것 같은데! 예기치 못한 상황에 상태 이상: 혼란을 겪는 나를 위해, 엘사가 결정적 힌트를 날렸다.


“그 때 못 끝낸 데이트 코스를 드디어 완주할 수 있겠네요.”
“엩.”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다리를 순간적으로 꾹 누른 덕에, 테이블을 엎는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갑자기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그거? 그건가? 맞지? 심지어 데이트란 단어까지 들렸는데! 설마 환청?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밥 먹는 중에 데이트 신청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어? 무슨 단어를 놓쳤을 거야, 하, 뻔하지! 어차피 신 포도일 게 분명해! 진짜, 내가 괘씸해서라도 안 간다, 안 가!


“제가 너무 급하게 말씀드렸나요? 힘드시면 다음에......”
“가요! 가야죠! 당장도 돼요!”
“......일단 음식부터 먹고.”


자괴감이 밀려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내게 엘사가 말했다. “저는 졸려서 이러고 있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드세요.” 손바닥을 뚫고 나온 탓에 내 목소리는 먹먹하게 들렸다.


“졸려요?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칠까요?”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제가 뭘요?”


손을 떼자, 씩 웃고 있는 엘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에휴, 됐다. 더 식기 전에 맛이나 봐야지. 그대로 요리를 향해 주의를 돌리려 했지만, 틈새마다 잡념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데이트가 맞대도!’ 괜한 기대말고 그냥 잘못 들은 셈 치자니깐! ‘술도 안 마셨는데 잘못 들을 게 뭐가 있어!’ 됐어, 이제 그만! 몰라! 나도 난리치느라 배고파! 밥 먹을 거야! 오리고기에 식기를 가져가며 내가 속으로 외쳤다.


.......그래도, 만약 ‘그런 뜻’으로 말한 거면 어떡하지?


‘이후 일정’에 대한 걱정은 사랑해 마지않는 초콜릿 에클레어를 먹는 순간마저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하지만 이 때의 내가 미처 알 리 없었다.



*



.......태어난 이래로 가장 무의미한 고민거리였단 사실을.


이어지는 2차에서 안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흑역사 청문회요, 달리 말하자면 뒤끝대방출 시간이었다. 이때 아니면 언제 이겨먹겠나, 작정하고 몰아치는 엘사의 수치심 공격을 도저히 맨정신으로 받아낼 재간이 없던 안나는 결국 알코올을 손에 쥐었으며, 그 결과는 충분히 예상한 바이다.


“일어나요, 여기서 자면 안 돼, 얼른!”


적당히 괴롭힐 걸 그랬나? 엘사는 이제와 음주를 막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테이블 주변은 사건현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에휴, 개중 시체 역을 맡은 인물을 바닥에서 주워 올리며 엘사가 텅 빈 질문을 던졌다.


“괜찮아요?”
“ㄴㄴ.”
“......물 좀 드릴까요?”
“ㅇㅇㅇ.”


의미불명 옹알이에 일단은 잔을 넘겼으나, 조준 기능에 문제가 생긴 모양인지라 대부분의 물이 입 구경도 해보지 못하고서 철철 흘러넘쳤다. 아주 샤워를 해라, 샤워를. 더 달라는 듯이 내미는 물잔을 무시하고서 엘사가 혀를 찼다.


“안 되겠다. 데려다 줄 테니까 어서 짐 챙겨요.”
“갱차나여, 태쉬 타거 가믄 대~”


안나는 찌그러진 오케이를 만든 다음 본인의 눈앞에 예쁘게도 가져다 댔다. 되긴 뭐가 돼? 엘사의 한숨소리가 옆 테이블의 이목까지 끌어 모으는 지경에 이르렀다.
 
“타는 건 좋은데, 주소나 똑바로 얘기할 수 있겠어요?”
“메모쟝에 써서 보여두리면 대지~”


증명이라도 할는지, 안나는 한참 씨름한 끝에 완성한 타자를 엘사에게 들이밀었다. 조금 전보다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분위기상 불합격임을 눈치 채고서 안나가 씩씩하게 재도전을 요청했다.


“구러명 음성인쉭으러 하면 대죠, 시뤼야, 엉니말 잘 드꼬 써바,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이개 왜 이로지? 너 나 무쉬해? 돼따, 그냥 타자로 쳐야게따!”


안나는 다시금 핸드폰을 붙잡고 뫼비우스의 술주정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엘사는 그저 울고 싶었다. 또야, 또. 이젠 반성할 줄 알았는데, 이 크레이지 초콜릿 걸...... 그 때,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드리웠다. 잠깐, 초콜릿? 그러고보니 비상용을 챙겨 다닌댔나? 아아, 주여, 용서하소서. 엘사는 작게 성호를 그은 뒤, 난생처음으로 아리랑치기에 나섰다.


“착하지, 안나. 초콜릿 먹고 싶지 않니?”


초콜릿! 달콤한 부름에 안나가 곧장 먹이반응을 보였다. 엘사는 가방에서 빼낸 린트 초콜릿을 흔들며 안나를 유혹했다. “차에 타면 줄게, 정말이야.” 엄마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는데...... 안나는 새삼 망설이다 ‘딸기마카롱 맛인데?’란 말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좋아, 잘 오고 있어. 그래, 조수석 문 열고, 그렇지, 그대로 앉아있어야 해요. 안 돼, 아직 못 줘, 안전벨트까지 매야죠. 옳지, 자, 여기 있다.”


성공리에 유인 작전을 마치고 엘사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막 시동을 켜려는 찰나, 안나가 할말이 있다는 듯이 엘사를 빤히 바라봤다.


“......왜, 또, 뭐.”
“더 없어요?”
“네? 그새 다 먹었어요?”
“없나 봐. 안녕히 계세요.”
“아니, 잠깐, 잠깐만요, 제발, 이거 하나만 봐주세요!”


엘사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해파리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동영상을 틀어 안나의 눈앞에 들이댔다. 뭐예요, 이게 웬 해... 파리야....... 20초도 안 되어 안나가 의식의 저편으로 떠났다. 엘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시동을 걸었다. 어쩐지 억울했다. 쟤는 겁도 없나? 아무리 초콜릿이 좋아도 그렇지, 술 취한 채로 남의 차에 쉽게 오르질 않나(※자기가 꼬드겼음), 맘 편히 잠들질 않나(※자기가 재웠음). 다 내가 편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영 못마땅한지 엘사는 검지로 운전대를 톡톡 두들겼다.


아니, 내가 왜 걱정 따윌 하고 있담, 부모도 아니면서. 그래, 부모님. 확 그냥 여사님 댁 담장 너머로 던져놓고 와 버려? (끔찍한 예감에 안나가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아냐,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러다 내일 둘이 일하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수 있고....... 엘사는 유혹을 떨쳐내고서 오늘 저녁 데이트(?)의 시작이자 끝의 장소에 차를 세웠다.


“공주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살짝 악문 듯한 목소리였다. “어, 엄마?” 안나는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퍼덕거렸다. 평소에 이렇게 깨우신단 말야? “꿈이구나......” 안나는 엘사의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이게... 일어나라니까! 약간의 감정을 담아 엘사가 안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아파, 아파. 안나는 칭얼대다 마지못한 듯이 몸을 일으켰다. 뺨에 가죽시트 자국이 남은 것을 보고서 엘사가 무심코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여전히 꿈속에 있는 목소리로 안나가 말했다. 엘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나 안 취했어.”


이얍,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차에서 뛰어내린 안나는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허나 호언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많이 본 핸드백이 주인이 떠난 자리를 충성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저 주정뱅이가, 진짜! 창문 너머로 불러 세우려는데, 잘만 걷던 안나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집에 들어간 건가? 그러기엔 너무도 잠깐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때, 크리스마스 장식인 줄 알았던 괴물체가 꿈틀거렸다. 다시 보니 관목위로 자빠진 안나였다. ......그냥 내일 주자. 엮이고 싶지 않아 도망치려던 엘사였으나, 불길한 예상 하나가 머릿속을 비췄다.


‘설마 잠들었나?’


차고도 넘치는 가능성에 엘사의 몸은 이미 가방을 든 채 움직이고 있었다.


“으음, 오늘따라 매트리스가 시원한데......”
“차에서 자는 걸 쫓아냈더니 이젠 길에서 자네.”


엘사? 목소리를 듣자마자 안나는 고개를 들고, 엘사의 (지친) 얼굴과 일으키려 뻗은 손을 번갈아 보았다. 아하! 사고뭉치가 눈을 빛내더니 그대로 엘사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불의의 기습에 엘사는 속절없이 눈밭을 뒹굴었다. 이게 뭐지? 신종 생일빵인가? 만신창이 모습으로 회한에 잠기려는데, 그녀 위로 잔뜩 신난 대형견 한 마리가 올라탔다.


“우리 눈사람 만들자!”
“......혼자 해!”
“우리! 눈사람! 만들자!”
“알았어, 알았으니까 비켜 봐요. 일어나야 만들든지 할 거 아냐.”


후. 엘사는 심호흡을 한 뒤, 차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질주했다. 그러나 이내 주정뱅이가 찰싹 달라붙었다. 오싹한 상상이 엘사의 머리를 스쳤다. 이러다 저번처럼 집에 못 가는 거 아냐? 안 돼! 이거 놔! 허리에 감긴 손을 하나하나 풀어내려하자, 안나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가지 마!”
“얘는 내일 출근 안할 건가봐.”
“가지 말고 나랑 더 놀아!”
“여태 놀았잖아!”
“부족해!”
“아니,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왜 그렇게까지 저랑 놀고 싶으신 건데요?”
“그야 좋아하니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안나의 뇌가 즉각 안전장치를 발동했다.


“......친구로서!”


순식간이었다. 그새 안나는 졸음도, 취기도, 그리고 얼굴의 핏기마저 싹 가셨다. 들었나? 당연히 들었겠지? 아냐, 분명 눈치 없어서 무슨 뜻인지 모를 거야! 제발 그러기를! 한 줄기 희망에 매달리며, 안나가 기계같은 말투로 안녕을 고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통금이 있는지라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자 살지 않나? 삐걱삐걱 도망치는 뒤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엘사는, 손에 들린 물건을 보자 생각났다는 듯 안나를 쫓았다. 따라오는 발소리에 안나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친구, 친구란 뜻에서 한 말이라니까요!”
“아니, 가방... 두고 갔다고......”
“아.”


엘사는 갈 곳 잃은 손에 핸드백을 살포시 끼워 넣었다. 저...... 엘사의 입이 열리자, 선수 치려는 양 안나가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그, 정말 죄송해요. 친구랑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들떴나 봐요. 아무리 친구사이여도 정신은 잡고 마셔야 했는데. 그렇죠? 여튼 친구로서 무척 아쉽네요, 데이... 원래 계획을 제대로 못 끝낸 것 같아서요. 괜찮으면 이 담에 이어서 노는 건 어때요?”
“다, 다음에요?”
“네. 참, 맞다. 다음하니 말인데, 칵테일 바 다음에 생각해 둔 곳도 있어요? 없으면 여기 이 친구가 알아볼까요? 우린 친구니까 친구를 위해 친구끼리 가기 좋은 친구 명소로 말이에요.”


칵테일 바 다음? 친구탈트 붕괴에 넋이라도 빠졌는지, 엘사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 때 그 분과 무슨 얘길 했었더라? 어쩌면, 분위기상......


“아마, 집에.......”
“집, 뭐요? 홈커밍? 홈파티? 홈트레이닝? 홈스쿨링?”


뭐? 저 모든 그림이 떠오르자마자, 겹쳐보던 과거의 잔상으로부터 번쩍 깨어났다. 쟤랑? 홈스쿨링을 한다고? 누가 학생인데? 아니, 홈스쿨링은 이제 잊고(하지만 여운이 대단했다: 설마 내가 학생?), 대체 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냈지? 앞서 하려던 말을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키고서, 엘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집에 들어가셔야죠, 이제.”
“저, 저 말이에요?”
“시간도 늦었고, 또 내일......”
“그, 그렇게 말하시니 어쩔 수 없이! 당장! 들어가야겠네요! 그렇죠?”


쥐구멍만 찾던 안나는 구실이 떨어지자마자 반색을 보였다. 그럼 안녕, 내일 봐요! 일방적인 작별 선언만을 남기고서 그녀는 그렇게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는 바로 침대로 뛰어 들어가 흑역사에 맞서느라, 한참 뒤에서야 시동소리가 들려왔단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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