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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유혈/고어]꼭두각시의 칼 45~46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7.13 22: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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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20.


"미라보, 방금 전 자네 앞으로 아버지 빅토르 리게티의 서한이 도착했다네, 읽어 볼 텐가?"

"그러지요, 의장님."


미라보는 태연하게 의장이 내미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받아들여 묶여있던 끈을 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미라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한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버지가 미라보와의 절연을 선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미라보는 잠시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아버지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는 서한을 고이 접으려다, 이내 천천히 찢어냈다. 속옷처럼 부드득, 소리내어 찢어진 양피지 조각들을 의장에게 돌려주고, 그는 다시금 허리를 꼿꼿이 선 채로 의석과 방청석을 연달아 바라보았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더군요."


"무슨 내용인지 말해 봐. 방탕 귀족아!"


누군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미라보에게 소리쳤다. 미라보는 익명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요. 이제부터 저는 저의 아버지와 절연을 선언하겠습니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당신 말대로 저는 방탕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빚을 지기도 했고, 그 빚을 탕감하고자 매문가가 되어 자질구레한 소설과 글들을 써내려갔죠. 이런 추태 때문에 아버지란 사람에게 금사령을 받아 몇몇 감옥에 투옥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부터 내 삶은 달라졌어.'


미라보는 마르세유의 이프 섬에 투옥되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 때는 그에게 있어 절망과 이상이 교차하는 순간이나 다를 바 없는 시기였다. 투옥되어 절대로 섬 밖 마르세유로 발을 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에게, 평소 그의 글을 즐겨보던 암살단원이 그에게 암살단의 이상을 가르쳐 주었고, 미라보는 새로이 눈을 뜰 수 있었다. 이후 그를 구출하러 온 암살단원들의 도움으로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곧바로 암살단에 입단하였고, 사자같은 포효와도 같은 대중을 휘어잡는 언변으로 먼저 입단한 암살단원보다 승승장구하며 조직 내 지위를 승격시켰다. 이윽고 아렌델 지부의 그랜드 마스터 중 한 명이 되고 나서야, 그는 암살단의 이상을 나라 전체로 옮겨보자는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지방삼부회를 열 것인가를 논하는 지방 의회의 회의에서 연설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랍니까? 방탕한 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매춘부의 속옷을 끄집어 내는 손놀림이 깃펜을 잡는 손놀림보다도 더..."


"미라보, 한 번만 더 입을 놀려보게나."


"더 훌륭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땅, 땅, 땅! 의장이 그에게 정숙하라는 뜻으로 나무망치를 책상에 두드렸다.


"더 이상은 못 참겠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의제를 제의하고자 합니다. 그건 바로 여기 이, 미라보 백작의 의사록을 오늘 회의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의제로 하고자 합니다. 찬성하고자 하는 분은 조용히 손을 들어주시고, 반대하시는 분은 그대로 자세를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장이 씩씩거리며 의회에 선언했다. 그러자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듯, 거의 대부분의 의석에서 미늘이 달린 창처럼 손들이 천장을 향해 뻗기 시작했다.


"이로써 오늘 회의에서 미라보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


"이건 불공평하다!"


"맞아, 그는 방탕할지라도 틀린 말은 하지 않았어. 우릴 대변할 사람은 우리에게서 나와야 해! 미라보야말로 그에 맞는 영웅이고!"


그러자 이번에 발광하는 쪽은 방청석이었다. 미라보는 방청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검은 후드를 쓴 멜리사가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멜리사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의석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방청석은 정숙하세요! 계속 그러시면 강제 퇴거를 명할 겁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라지!"


어디선가 퉤 하는 소리와 함께 침 한 방울이 의석 중 한 곳에 튀었다. 씨발! 이름 모를 의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상스러운 욕이 의회의 야유를 뚫고 선명히 미라보의 귀에 파고들었다.


"당신이 그러실 줄 알고 저도 미리 준비한 게 있습니다."


미라보는 오히려 당당하게 의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홍당무가 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의장에게 미라보는 옷의 안쪽 주머니에서 종이 묶음을 꺼내 그에게 올려 바쳤다. 뺏어가듯 미라보의 종이 묶음을 가져간 의장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짐과 동시에, 겨우 침묵으로 되돌아온 방청석과 의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커다란 가방을 든 두 사람이 각각 방청석과 의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종이 팸플릿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목은 '프로방스 주민들에게 고함'입니다. 오늘 제가 한 연설의 대부분이 적혀 있지요. 그리고 바깥에선 이미 제 말이 담긴 글이 알게 모르게 퍼져있을 겁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이고, 말이 퍼지고 퍼져 여론을 형성하겠지요. 제3신분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말 말입니다."


미라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말했다. 그 헛기침마저 우레와도 같아서 순간 모두가 그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한다면 제3신분의 지지를 업을 수 있겠어.'


방청석에서 팸플릿을 받아든 멜리사는 천천히 미라보의 연설문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연극을 통해서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지지를 얻는 것도 중요해."


멜리사는 침을 맞은 의원이 가발을 다시 정돈하는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가씨, 이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혹시 아시우? 혹시 읽을 수 있다면, 내게 좀 들려주겠수?"


그녀의 옆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노파가 멜리사에게 팸플릿을 내밀며 읽어달라 부탁했고, 멜리사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미라보의 연설문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121.



쥐베르는 미라보의 친구이자 변호사였다. 그와 친해진 계기를 묻는다면, 재판을 변호하는 과정에서였다. 무명 작가의 글을 미라보가 표절을 했고, 그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서로 같은 프로방스 출신이라는 것까지 공유할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쥐베르는 현재 그의 팸플릿을 보며 감탄을 토해냄과 동시에, 미라보의 근처에서 서성이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여자를 신경쓰고 있었다.


"저, 백작님."


"왜 그런가, 쥐베르."


"오늘 연설은 훌륭했고, 이렇게 팸플릿을 배포하는 전략 또한 훌륭했습니다. 근데... 아까부터 백작님을 향해 어떤여자가 계속 따라오고 있는 듯한..."


"내 경호원일세, 멜리사라고 하네. 같은 뜻을 두고 있는 동지이기도 하고."


"그, 그렇습니까?"


미라보가 짧게 설명하자,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쥐베르가 있었다. 쥐베르는 그녀가 미라보를 아니꼽게 보아 고용한 고래잡이 암살자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멜리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쥐베르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멜리사는 흔쾌히 쥐베르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말없이 미라보의 왼쪽에서 걷기 시작했다. 쥐베르는 오른쪽에서 걷고 있었다.


"멜리사, 연극 준비는 잘 되가고 있나?"


"이미 마르세유에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전갈이 백작님의 연설 도중에 도착했습니다."


"무, 무슨 연극 말이십니까?"


쥐베르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의사록에서 연설이 삭제되고, 지방삼부회의 의원 자격을 상실했다. 아버지인 빅토르 리케티 미라보 후작에게는 적자로서의 권리를 부정당했다. 그런 와중에 옆의 멜리사란 동지와 함께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는, 구세대의 상식인인 쥐베르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게 있다네.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그, 그렇습니까, 백작님. 하지만 전 오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습니다."


"무언가, 쥐베르?"


"전국삼부회에 출마하고 싶으시다는 건 알지만, 백작님께선 오늘 의원직을 상실당하셨습니다. 귀족 대표로 나서기에는..."


그러자 미라보가 방탕한 여자의 육체를 바라보듯 호탕하게 웃었다. 옆에서 걷고 있던 멜리사가 잠시 주춤할만큼 포효와도 같은 웃음이었다.


"제 말이 어디 틀린 데라도 있습니까?"


쥐베르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럼, 당연히 틀리고말고, 난 평민 대표로 출마할 생각이니까."


"네?"


도리어 놀란 쪽은 멜리사였다.


"그랜..아니, 백작님, 평민 대표로 나서기엔..."


"왜, 자격이 부족한가? 난 이미 평민들을 위한 글을 써서 배포했다네,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팸플릿 작전을 말이야."


팸플릿 작전, 그것은 단순히 말해 일종의 삐라와 같은 방식이었다. 최대한 많이, 그리고 간결한 문구로 최대한의 많은 사람들이 읽어 나가게 하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귀족 대표들로 나섰다간 내가 나설 길이 더욱 없어지지. 설령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아렌델에서의 내 입지는 아주 좁을 거야. 반면 제3신분의 의원이 되면 평민의 입장에서,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상부상조하는 좋은 길로 나갈 수 있을 걸세."


쥐베르는 멜리사가 아마 자신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는 절조의 어긋남이 미라보에게는 얼굴에 남겨진 추한 상처만큼이나 뚝뚝 묻어 있었다.


"저기 우리의 연극 단원의 시작을 알리는 자가 서 있군 그래."


세 사람의 눈앞에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있었지만,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후드를 쓰고 복면을 썼으며, 퀼로트는 입지 않은 상퀼로트 차림의 사내였다.


"마스터."


육중한 목소리가 복면 속에서 튀어나왔고, 미라보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연극을 시작하게. 아주 성대하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사내는 이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더니, 골목의 인파를 뚫고 나타난 갈색 말의 안장에 올라타 박차를 가했다. 이내 사내와 말의 모습이 인파에 가려 사라지자, 미라보는 그제서야 연설의 여파로 힘을 다 써서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마르세유에서 소식이 올 때까지, 어디 카페라도 가서 요기라도 하세. 멜리사, 그래도 괜찮겠지? 쥐베르?"


"전 상관없습니다만..."


"저도..."


쥐베르와 멜리사가 긍정의 의사를 밝히자 미라보는 흔쾌히 근처의 카페로 앞장섰고, 멜리사와 쥐베르는 서로의 눈을 맞추며 미라보가 특이한 사내라는 것에 무언의 공감대를 나누었다.










122.


승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밧줄의 관성을 이용해 해적선으로 넘어간 안나는 무릎으로 해적선의 선원의 머리를 가격했고, 그는 안나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멀리 나가 떨어졌다. 화약의 안개가 지속됨을 틈타 안나는 허리춤에서 허버트의 산탄 권총을 꺼내 양쪽으로 뻗어 외교선에 사격을 가하는 두 명의 선원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산탄으로 점점이 새겨진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볼 새도 없이 권총을 홀스터에 넣은 안나는 꿈틀대며 칼을 쥐고 일어나려는 첫 번째 희생양을 향해 엘사에게 주고 남은 한 자루의 단검을 던졌다.



머리에 정확히 향한 단도는 오른쪽 눈에 박혀 안구를 터뜨렸고,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달려가 단검을 뽑아 체스트 홀더에 넣은 안나는 양쪽 허리 홀더에 꽂아둔 두 자루의 커틀러스를 각각 한 손에 쥔 다음 외교선의 전투원들이 승선할 수 있도록 해적선의 마스트에 달려있는 리프트를 향해 달려갔다. 외교선에서 저격수가 있음을 알리는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달려가면서 그녀를 두 명의 해적이 막아 서며 그녀의 것과 비슷한 커틀러스를 휘둘렀지만, 양손잡이인 안나에게 있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막지 않고 한 칼로 흘려보낸 다음, 남은 한 칼로 사정 없이 한 명의 복부를 베어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고, 등 뒤로 내리쳐지는 칼을 간신히 쳐낸 후 박치기로 그로기 상태에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동작으로 반격한 적에게 두 커틀러스로 가슴을 깊게 찔러 쓰러뜨렸다. 숨이 멎은 선원의 상처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안나의 얼굴을 적셨지만, 닦을 새도 없이 안나는 몸을 일으켜 해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리프트로 뛰어가 밧줄을 잡은 다음, 반대쪽 밧줄을 향해 커틀러스를 내리쳤다. 두어 번 더 내리 친 끝에야 밧줄은 끊어졌고, 동시에 안나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위쪽 관측대로 올라온 안나는 저격에 시선을 팔고 있는 두 명의 저격수를 볼 수 있었고, 한 명의 등에 커틀러스를 깊숙히 찔렀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고, 희생양의 입에서 울컥 토해진 피가 안나의 손을 적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어나온 비명에 남은 한 명이 눈치를 채고 총구를 안나에게 향하자, 안나는 칼에 찔린 저격수의 몸에 자신을 숨겼다.


탕 하는 격발음과 함께 잠깐의 충격이 있었지만, 총알은 커틀러스에 찔린 저격수의 몸을 뚫지 못했다. 안나는 그 기세를 잃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여 남은 저격수를 시체와 함께 밀어 넘어뜨려 관측대 밑으로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빠가각, 어딘가 부러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안나에게는 긍정적인 소리였다. 안나는 밑을 향해 서서히 사라지는 화약의 안개들을 살펴보았다. 적지만, 소수의 선원들이 안나의 기습을 틈타 승선해 해적들과 칼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안나는 그 중 가장 육중하고 거대한 도끼를 든 해적 선원이 외교선의 전투원들을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돛대 사이사이를 건너가 곧바로 그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거리를 가늠한 안나는 다시금 커틀러스 두 자루를 역수로 쥔 다음, 돛대에서 몸을 뛰어내렸다. 내장이 들리는 듯한 고양감과 함께 안나의 커틀러스는 바람을 가르고, 이내 도끼를 든 사내의 양쪽 어깨에 단단히 박혔다. 그것이 안나에겐 쿠션의 역할이 되어 주어, 발이 살짝 아픈 것만 빼면 괜찮을 정도였다.


"까, 깜짝 놀랐잖습니까."


도끼를 든 사내와 분투하던 외교선의 전투원들이 안나를 알아보고 말했다. 그럴만도 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외교관의 경호원이 불쑥 하늘에서 나타나 자신들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까. 안나는 그제서야 얼굴에 흠뻑 적셔진 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내었다.


"지금 노닥거릴 때가 아니예요. 어서 남은 개자식들을 모조리 해치워 버리자구요."


"아뇨, 이제 몇 명만 제압하면 저절로 남은 자들은 항복할 겁니다. 다섯 명 정도면 충분할 것 같..."


그 때, 권총의 소리가 들리면서 갑판 위로 수많은 해적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안나와 말을 나누던 선원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열 명 정도는 족쳐야겠는데... 우리로썬 수적으로 불리합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안나는 자신의 왼손에 새겨진, 그리고 화상 크림으로 가려진 방관자의 표식을 내려다봤다. 아직 암흑 시야가 사라지지 않은 안나에겐 적들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능력을 두어 번 정도는 더 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빙의를 해야겠어.'


"다들 다시 배로 돌아가요, 빨리!"


"하지만 당신 혼자서는..."


"혼자서 해볼 테니까, 시간이 없어요. 얼른!"


안나는 강제로 떠밀며 전투원들을 다시 배로 돌려보낸 다음, 커틀러스를 홀더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조타륜 쪽에 머물러 있는 열댓명의 해적들을 향해 손을 뻗고 방관자의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시야가 일그러지더니, 이질스러운 감각과 함께 안나는 해적선원 중 한명으로 빙의할 수 있었다.

'선장을 잡아서 죽이면 기가 저절로 꺾일거야.'

안나는 해적선원의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조타륜 쪽 계단으로 몸을 옮겼다. 그의 동료들은 다행이도 그의 걸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안나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에 버거워 죽을 지경이었다. 마치 꼭두각시 하나를 조종하는 듯한 몸짓으로, 안나는 조타륜을 잡고 있는 자가 선장이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지금이었다. 안나는 빙의를 풀었고, 해적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들의 눈에선 자신의 동료가 피를 흘리며 죽고, 그 핏덩어리 속에서 칼과 총으로 무장한 여성이 식물이 자라듯 피어올라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안나는 그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단도를 쥔 그녀는 선장의 목을 잡은 뒤, 그대로 그어버렸다.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채 선장이 쓰러졌고, 안나는 조타륜을 힘껏 돌려 외교선과의 거리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안나의 등 뒤로 칼날이 날아왔고, 몸을 구르며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구르는 반동으로 일어난 안나는 두 자루의 장전된 산탄 권총으로 다섯 명의 선원의 얼굴과 목에 산탄을 직격시켰고, 산탄은 살점과 뼈 일부를 찢어버리고 그들을 쓰러뜨렸다.


"미, 미친..."


"지금이예요! 자, 너희 선장은 죽었어! 이래도 저항할 거야?"


안나가 외교선에 머물러있는 전투원들에게 외친 다음, 커틀러스를 뽑아들며 남은 해적들에게 말했다.


"흐, 흑마..."


방관자의 표식을 알아챘는지, 입을 열려는 선원의 목을 안나는 커틀러스를 휘둘러 목을 베어 죽였다.


"입 닥치고, 다들 무기 내려놔. 아니면 모조리 죽여버릴 거니까."


온 몸에 피칠갑을 한 붉은 머리의 소녀가, 핏발이 선 눈으로 양손에 커틀러스를 쥔 채 해적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123.



"슬슬 기별이 올 때가 되었는데."


미라보는 발을 떨고 있었다. 멜리사는 아까 전부터 이어진 그의 묵직한 발소리에 신경질이 나려 하고 있었다. 회중시계와 시내를 번갈아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미라보를 보며, 쥐베르는 침묵을 유지하는 멜리사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다. 그저 악수 이후로 서로 간에 없었던 대화라도 나눠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함이었다.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나는 백작님과 마찬가지로 프로방스 주 엑스 관구 출신이네."


"전... 사군토 출신입니다. 그것만 말해두겠습니다."


"사군토! 제국에서 제일가는 제빵의 지역이지. 혹시 빵 좋아하나?"


"빵... 예, 좋아합니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요?"


"아니, 식사도 했지만 그건 점심이지. 지금부턴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수프 대신 빵을 주문하려고 할까 싶어서 말일세."


"빵 값, 그리고 밀 값도 많이 오르지 않았나요?"


멜리사의 말에는 뼈대가 있었다. 실제로 밀 값이 급격히 상승한 이후, 빵 값은 밀보다도 더한 가격 상승세를 보였다. 아무리 쥐베르가 돈을 잘 버는 변호사라도 빵 값을 내는 건 적지 않은 지출의 출혈이 있을 것이라고 멜리사는 나이에 비해 더 늙어보이는 사내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주문하지, 여기, 납작빵과 잼을 주시오. 값은 선불로 지불하겠소. 커피는 서비스겠지?"


미라보가 잠시 회중시계의 덮개를 덮으며 그들에게 말한 다음, 카페의 주인에게 외쳤다. 커피가 서비스임을 확인한 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쥐베르를 바라보았다.


"관심이 있나?"


"아,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요. 초면에 아무말도 안하고 있으니 뻘쭘해서 그런 겁니다. 전 백작님처럼 호탕한 놈이 아니라서요."


쥐베르가 손사레를 치며 미라보가 말한 '관심'을 격하게 부정했다. 저래 보여도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럴 테지. 자네는 애처가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것 또한 새롭군. 멜리사 자네가 빵을 좋아한다는 것 말일세."


"말을 꺼낼 비슷한 주제가 암ㅅ.... 조직 내에서 나와야 말을 하든가 하죠."


멜리사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그들의 탁자 위로 놓여진 납작빵과 포도잼, 그리고 세 잔의 커피를 응시했다. 그리고 가장 큰 납작빵을 집어 두 손으로 조금씩 베어물었다. 검은 후드에 검은 머리, 그리고 검은 눈. 미라보와 쥐베르는 머릿속으로 먹이를 놓치지 않는 검은 고양이 내지 퓨마를 의인화한게 멜리사가 아닐까 하는 공통의 생각을 가지고, 각자 빵을 들고 잼과 커피에 적셔 먹었다. 절반 정도 먹을 때 쯔음, 미라보의 팸플릿을 돌리던 호외 소년이 다급하게 카페로 들어와 미라보에게 뛰어왔다.


"에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만, 짐짓 모른척을 하면서 미라보는 에렌이라는 소년에게 말했다.


"브, 브레몽-쥘리앙 씨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브레몽? 그 자가 왜?"


"지금 마르세유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백작님께서 수습을 원하신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어서 마르세유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자, 다들 일어나세. 위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야."


미라보가 한껏 걱정된다는 투로 빵을 먹던 멜리사와 쥐베르에게 말했다. 쥐베르는 미라보의 새로운 전단인 '마르세유 주민들이여 미라보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든 서류가방을 들었고, 멜리사는 남은 빵 조각에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근대는 미라보의 앞에 때마침 도착해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약 8리외(약 32km) 떨어진 마르세유로 이어진 진흙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24.


"단신으로 해적들의 항복을 받아내다니, 정말 대단...아니, 피부터 닦게나."


해적선에 승선한 쿡 선장은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해적선원들을 보며 감탄한 채로 안나를 바라보다, 그녀의 온 몸이 피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선원을 시켜 물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물수건 더미를 내밀자, 안나는 그 중 하나를 집어 펴 얼굴에 부비적거렸다. 이내 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갑자기 물 속으로 뛰어든 그녀였다.


"갑자기 무슨....아!"


물수건으로 옷을 닦을 바에야 바닷물로 옷에 묻어있는 피를 씻겨내겠다는 뜻이었다. 쿡은 이번에는 선원을 시켜 안나의 몸에 맞을 법한 옷을 준비해 오라고 명했다. 다시 해적선의 겉면을 기어 올라온 안나는 헉헉대며 쿡 앞에 주저앉았다.


"힘들어...죽는 줄 알았어요."


"그 말,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네. 자넨 쉴 자격이 있어. 그런데...이 해적들을 어떻게 처분한다?"


안나에게 수통을 건네며 쿡은 남은 해적들을 바라봤다. 해적을 아예 만나지 못한 뱃사람은 아닌 그였지만, 이 커다란 배의 선장이 죽어버린 경우는 달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처분은 쿡의 선택이 아닌, 상황을 이렇게 만든 안나에게 달려 있었다.


"안나!"


그 때, 가쁜 숨을 내쉬며 갑판 위로 엘사가 승선해 안나에게 뛰어왔다. 안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엘사를 올려다봤고, 엘사는 그런 안나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다친데는, 다친데는 없니? 몸은 왜이렇게 젖었..."


안나는 아무말도 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엘사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 모습을 보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겁니다. 다친 데는 없어보였는데, 옷에 핏기를 빼겠답시고 바다에 한번 뛰어들었거든요."


이내 헤실거리며 곯아 떨어진 안나를 바라보는 엘사에게 쿡이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마치 지옥에서 튀어나온...아니...방관자의 현신이라고 해야할지..."


"마, 맞아, 저 사람, 마법을 썼다고!"


그 때, 손이 뒤로 묶인 해적 중 한 명이 그렇게 외쳤다. 엘사는 순간 자신을 말한 줄 알고 덜컥 겁을 먹었지만, 이내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 말은 안나를 향한 것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네. 이봐, 저 사람이 어떻게 마법을 써? 물론 전투 중에 착각할 수도 있지, 안 그런가?"


쿡이 다른 해적을 발로 쿡쿡 밀며 말했다. 그 해적은 그의 말에 말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야, 저 사람, 분명히 마법을..."


"그만!"


소리를 외친 사람은 쿡이 아닌, 엘사였다. 엘사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그 해적을 노려보았다.


"마법을 쓴다 해서, 당신들이 착해지나요? 아니면 돈이 생기나요? 당신들은 이 싸움에서 졌어요. 지는 자는 거짓을 말하기 쉽죠, 변명을 해서 승자를 분열시키려는 수작도 부릴 테고요. 안 그런가요?"


엘사는 자신이 이렇게 말을 생각하지도 않고 차분히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나가 지쳐 잠이 들자, 이렇게 만든 해적들을 향해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죽이고 싶어.'


그 때였다. 손끝에서부터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엘사는 당황을 분노로 감추며 고개를 홱 돌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장갑 끝에서 아주 천천히 눈송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손끝에는 안나의 젖은 볼이 닿아 있었고, 고로롱 잠든 안나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채워졌다. 오히려 엘사의 손에 맞닿아진 시원함을 좋아하는 것처럼, 안나는 오히려 엘사의 손에 볼을 비볐다.


'안나도 있는데, 여기서 들킬 수 없어.'


잘못하면 자신이 마녀로 몰려 마녀재판, 마녀사냥을 받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사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최대한 심호흡을 하며 불안정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다행이도 그 간절한 바램이 통했는지, 엘사의 손끝에 맴돌던 냉기가 사라졌다.


"괜찮습니까?"


쿡이 엘사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엘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쿡에게 돌려준 뒤, 다시금 해적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이 무엇을 보았던 간에, 그 결과가 중요한 법이지, 자, 마법을 썼다고 한 사람이 누구지? 그 놈의 목부터 따야 제정신으로 돌아올 건가?"


"쿡 선장님, 잠시만요. 제가 얘기할게요."


엘사가 안나를 조심스럽게 눕힌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해적들을 한 명 한 명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엘사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해적들도 있었고,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낀 그녀였지만, 안나와 나눴던 얘기를 상기시키며 입을 열기로 했다.


"너희들은 현 시간부로 아렌델의 외교선의 호위를 맡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화물창에 가둔 뒤, 아렌델 본국으로 송환한 뒤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필시 사형을 판결받게 되겠지. 너희들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눈으로 보아둔 사실과 거짓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우리의 호위를 맡을지, 아니면 목이 날아갈 미래를 기다릴지."


"저기,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 해적이 그나마 얌전한 어조로 엘사에게 말을 걸었다. 엘사는 그가 최근에 해적단에 입단한 해적이라 추측했다.


"호위를 한 다음에는...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습니까?"


항해의 전날 밤, 안나와 함께 나눴던 대화에서 엘사는 안나에게서 역병을 방지하고자 하는 '초소' 아이디어를 상기시켰다. 과연 어디까지 엘사의 말을 들을지 궁금했고, 후에 엘사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눈앞의 인력들이라면 초소의 경비 인력으로 키워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검을 잘 다루는 안나가 있으니, 그녀가 잘 가르친다면 전직 해적들이 우는 자들을 제압하는데 무리가 없을 듯 싶었다.


"제 2의 삶이 너흴 기다릴 것이다. 너희들은 항해가 마치는 순간부터 한스 왕자의 영지의 초소 병력으로 투입될 것이다. 우는 자들을 막는 역할을 맡게 되겠지."


"한스 왕자라면....아, 하지만 그 분이 우릴 좋게 봐주실까요?"


엘사는 그 점에 대해서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명목상으론 한스지만, 실질적으론 엘사가 다스리는 영지이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분이라면 너희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줄 테니. 우는 자들을 막는 역할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있겠다."


"우는 자들? 그까짓 거 한데 모여서 제압하면 그만이지."


맞아, 맞아. 흉터투성이의 선원이 자신있게 말하자, 그의 말에 동조하는 선원들이 있었다.


"자네가 이 배의 갑판수였나?"


"그렇수다. 폴이라 부르쇼. 왜, 불만이라도 있나봅네?"


"아니, 자네가 항해를 하면서 계속 갑판수를 맡아주었으면 해서 말인데. 그럴 수 있나?"


"그럴 수 있다만, 우리 선장이 저 여자한테 죽어서 사실상 선장 자리는 공석인데 어떻게 생각하쇼?"


폴이 그렇게 묻자, 쿡은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자신이 이 해적선의 조타륜을 잡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자신은 외교선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저에게 생각이 있어요. 잠시 귀 좀 빌려 주시겠어요?"


엘사가 쿡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다음, 그의 귀에 무어라고 속닥거렸다. 이내 쿡은 영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지만, "외교관님의 혜안이라면 그렇게 합시다."라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폴을 포함한 모든 해적선원들은, 쿡의 입에서 나온 선언을 듣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125.


얼마 전, 그가 잠시 마르세유에 들렀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맞이하러 거리 밖으로 뛰쳐나와 그에게 키스를 보내고, 꽃을 던지며 환호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마르세유에 다다랐고, 서둘러 내린 그들의 눈앞에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었다. 그들은 환호가 아닌 분노에 가득 찼으며, 곳곳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휘유, 연극의 시작 치고는 꽤 뜨겁군."


"이게 연극이라고 보십니까? 저건 폭동입니다."


연극이라고 말하는 미라보의 말을 쥐베르가 걸고 넘어졌다. 쥐베르의 눈에는 그저 굶주린 자들이 빵과 밀가루를 얻기 위해 가엾은 난동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이건 연극이야. 사실 우리 측에서 먼저 물밑작업을 해 두었지. 빵과 밀가루의 값이 또 오를 거라는 소문을 퍼뜨렸거든. 가뜩이나 가격으로 골치를 아파하는 시민들의 입장이 되 보게, 쥐베르. 그들은 참고, 또 참았어. 난 그저 쇠지렛대로 솥뚜껑의 손잡이를 살짝 밀어낸 것 뿐이라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유혈 진압으로 밖에 이어지지 않습니다. 방위사령관이 가만히 있지..."


"그 방위사령관이란 놈은 현재 엑스에 머물고 있다네. 결국은, 방위 기지는 아무런 행동도 내리지 못할 것이란 말일세, 적어도 수 시간 정도는 말이지. 멜리사? 이제 자네의 역할을 하고 오게나."


미라보가 멜리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멜리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괴성과 불꽃으로 가득 채워진 거리의 인파를 뚫고 모습을 감추었다.


"저 멜리사 양은 무슨 역할입니까? 또 다른 선동을 하기 위함입니까?"


쥐베르는 기가 질렸다는 듯 미라보에게 말했다. 어차피 그가 무엇을 호소하여 말한들, 미라보의 '연극'은 이미 화끈한 초반부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섹스를 할 때와 비슷한 자극적인 속삭임이라고 생각해 보면 편해. 불륜을 저지르는 섹스를 할 때, 이미 흥분한 상대를 더욱 흥분시키려면 자극적인 속삭임이 필요하지. 멜리사는 지금 그 '자극적인 속삭임'을 시민들에게 퍼뜨리려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


"그렇다면, 그 속삭임엔 무슨 뜻이 담겨 있습니까?"


"간단해. 근처 방위 기지에서 위병들이 나와 폭동을 유혈진압할 거라는 메세지를 심어줄 걸세."


완벽한 진실이라고 시민들은 생각할 것이었다. 그들의 두려움에는 죽음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굶주림은 겨우 체감할 만큼의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다. 그럼 시민들의 반응은 둘로 나뉠 것이다. 더욱 폭동에 열기를 가하느냐, 아니면 서둘러 거리에서 모습을 감추느냐였다.


"제가 백작님을 오래 알았다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봅니다."


"이제부터 알면 되네. 어, 자넨가?"


때마침, 마차 근처에서 서성이던 한 소년이 미라보에게 울먹이며 다가왔다. 미라보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짐짓 아는 척을 하며 말을 걸었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쥐베르는 그의 옷차림을 보고 귀족, 아니면 부르주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도련님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약탈이 행해지는 곳은 주로 빵집과 제분소였지만, 부가적인 상가들의 피해는 극심했다. 그리고 그 폭동의 칼날은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게 귀족들로 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귀족들은 제3신분을 경계하고 있었고, 한 번 들고 일어서면 꼼짝없이 그들의 부가 불태워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희 저택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뭐라고? 저런, 혹시 가족들은 괜찮은가?"


"겨우 피신했지만, 폭동이 다른 귀족분들에게 향할 것 같습니다. 피해가 커지려 하고 있어요."


그 때, 주변을 방황하던, 사내와 비슷한 처지의 소년소녀들이 미라보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들 또한 첫 번째 소년이 말했던 것과 비슷한 처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모두들 무기를 들게,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들과 무슨 다른 점이 있습니까?"


"무기를 들되, 휘두르거나 겨누지 말고, 총이 있다면 쏘지 말게. 그저 가지고만 있게나. 저들이 싸운다고 우리까지 싸운다면 피아식별도 안될 뿐더러, 진압할 위병들이 오히려 자네들까지 진압할 수도 있어."


미라보의 말은 간단했다. 그저 무기를 들고 자신들의 소유물 근처를 배회해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의 호수에 빠져 있었지만, '우리'라고 단결하는 미라보의 말을 곱씹으며 가슴 속의 열정 비슷한 마음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라보를 감싸던 인파가 서서히 흩어지자, 이번에는 그 인파의 안개 속을 뚫고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미라보가 익히 알던 사내였다. 소년을 시켜 마르세유 폭동 소식은 전한 사람, 브래몽-쥘리앙이었다.


"미라보,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사람은 자네 뿐이야."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일단 근처에 인쇄소가 있다면, 여기 쥐베르가 가지고 있는 전단을 최대한 인쇄시켜 마르세유 전역에 뿌리도록 하게."


쥐베르가 급히 초면인 브래몽에게 악수 인사를 건낸 후, 서류가방에서 팸플릿 다발을 꺼내 브래몽에게 쥐어주었다.


"이걸로 사람들이 진정이 될까요?"


"내 말이면 모두 진정하거나, 열광하며 폭동을 멈출 걸세. 자, 이제 자네는 인쇄소로 가면서 시민들에게 외치게, 미라보 백작이 친히 나섰다고 말이야."


"하지만 이 전단이 없으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실 겁니까?"


미라보는 브래몽의 말에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미 엑스에서 마르세유로 오는 동안, 팸플릿을 보면서 모든 연설 내용을 외워 두었단 뜻이었다. 브래몽이 미라보의 손짓을 이해했다는 듯,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거리를 향해 몸을 돌려 어딘가에 있을 인쇄소로 향해 달려갔다.


"미라보 백작이 왔다! 미라보 백작님께서 이야기를 들어주시러 오셨다....!"


잊지 않고 시민들에게 말을 퍼뜨리며 골목 귀퉁이로 모습을 감춘 브래몽을 보며 미라보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뻔 했다.


'아직 연극이 끝나지 않았어. 이제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뿐이지. 침착하자.'


잠시 후, 쥐베르가 10분이 지났다고 말했을 때, 미라보가 서 있는 제방의 앞에는 이전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제각기 다양한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낫, 갈퀴같은 농기구는 물론이요, 밀가루 포대와 몇 조각의 빵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에 빠진 분노가 어려 있었다.


"미라보, 미라보!"


"백작님!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미라보 백작님!"


저 멀리서 들려오는 폭동의 잔재는 여전했다. 하지만 아까보다 기세는 주춤한 상태였고, 그를 향한 애원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미라보는 시민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친 다음, 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마르세유 시민들이여, 나 미라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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